[창민건수] 감기 by. 감자박
웹툰 끝까지 간다 창민건수 합작 소설
<감기> 창민건수 / 끝까지 간다 합작
01.
“푸엣취!”
재채기 소리에 동료들의 시선이 모인다. 갑작스럽게 모인 시선에 건수가 당황했다.
“어. 뭐야. 왜들 이래.”
“고 경사님! 재채기할 때는 가리는 게 예의라고요!"
막내 녀석이 고슴도치처럼 털을 바짝 곤두세웠다. 급기야는 책상 서랍을 뒤적여 주섬주섬 급하게 마스크를 꺼내 썼다. 얼씨구.
“코로나 아니에요?”
이 새끼 봐라.
“야. 아니거든. 그냥 재채기거든. 우리 사무실이 오죽 먼지가 많냐.”
마스크 위로 눈만 드러낸 도희철이 가늘게 눈을 흘겼다.
“요즘에 신종 코로나가 유행이잖아요. 아니면 독감일 수도 있고. 이번 독감 엄청 세대요.”
“그냥 재채기라니까. 왜 이래. 나 코로나도 한 번 안 걸렸거든.”
애초에 자신은 감기에 잘 안 걸리는 편이었다.
“고 형사.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서 진단받아라. 독감 예방주사 안 맞았지?”
다가온 반장도 어느 새인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 오늘 왜 이래.
“아니. 반장님까지 왜 그러십니까. 굳이 뭐 하러요.”
“나는 진작에 맞았어. 우리 집에는 수험생이 계시거든. 걸려서 옮기면 사달 난다.”
고삼 수험생을 데리고 있는 반장이 앓는 소리를 했다. 그야 건수도 민아는 진작에 예방주사를 맞혔다. 제 건강은 안 챙겨도 민아는 챙겨야지. 그러고 보니 집에서 저만 유일하게 안 맞았다. 아침에 희영이 잔소리를 했던 것 같다. 아침 식사 자리를 떠올리며 건수가 이마를 찌푸렸다.
“너 아픈 거 싫어하잖냐. 그래서 주사도 안 맞는 거 아냐?”
반장이 확신을 가득 담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반장님은 무슨 제가 초등학생인 줄 아십니까?”
아픈 걸 싫어해서 치과도 잘 안 가는 건수지만, 이런 오해는 억울했다.
“…….”
“…….”
이 사람들이 진짜!
“아이씨! 거기서 입을 다물면 제가 뭐가 됩니까! 야 도희철!”
건수는 도희철의 멱살을 잡았다. 달려들어 마스크를 벗기려고 하니 애가 기겁을 했다.
“악! 미친! 왜 저한테만 이러세요!”
“미친놈아! 그럼 내가 반장님께 달려들겠냐?!”
도희철은 건수의 손에 탈탈 흔들리면서도 마스크만은 필사적으로 지켜냈다. 이 새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유난이야.
“아 진짜!”
왁왁하며 시달리던 도희철이 꽥 진실을 토했다.
“저 주말에 소개팅 있단 말입니다!”
아이고. 그러시구나. 너는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단다.
“아 그래. 우리 희철이~”
건수가 음흉하게 웃으며 도희철에게 다가섰다.
“소개팅에 못 나가는 사유는 감기만 있는 게 아닐 텐데.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지-”
악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도희철아 우리 포옹 좀 하자~
악 반장님! 반장님!
탁. 탁.
도희철과 건수의 머리 위로 사이좋게 파일철이 내려왔다.
“잘들 논다. 도희철 넌 자리로 가고. 고건수 너는 사건보고서나 다 썼냐?”
“…….”
고건수가 입을 다물고 얌전히 뒷짐을 졌다. 도희철은 풀죽은 고슴도치 마냥 옆에서 우는 시늉을 했다. 저 새끼가 진짜. 노려보니까 찔끔한 표정을 짓는다. 와중에도 마스크는 죽어도 안 벗는 걸 보니까 배알이 더 꼴렸다. 흡사 부모에게 일러바치는 동생 모양새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얄밉게 굴지.
어지간히 소개팅에 가고 싶은가 보지.
“쯧. 가끔 내가 초등학생 애새끼들을 둔 학부모인지 강력반 반장인지 모르겠다니까.”
“…….”
건수가 도희철의 옆구리를 꼬집으려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리고 고건수 너는 인마, 제 몸 과신하지 말고 병원 꼭 들르고. 감기 아니라고 하면 예방주사나 맞고. 어른 말씀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옛말 모르냐.”
어른들 말을 하나같이 개무시하며 살아온 건수에게는 별 효과 없는 조언이었다.
“아니 근데 저 진짜 감기 안 걸리는 체질이란 말입니다. 제가 진짜로 근 몇 년간 감기 안 걸리고 살았는데-”
“너 임마. 곧 마흔인데 가만 보면 아직도 이십 대인 줄 안다니까. 미리미리 챙겨서 손해를 볼 거 없어.”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니까’”
건수가 도희철을 돌아봤다.
“-라고 최상호 형사님이 계셨으면 말했을 거라-고, 요….”
점점 말소리가 작아졌다. 최상호 이야기가 나오자 건수는 별수 없이 조용해졌다. 그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희철이 꿍얼꿍얼 말을 이었다.
“애초에 고건수 형사님처럼 하고 다니는데 코로나 안 걸렸을 리가 없다니까요…. 걸렸는데 모르고 지나간 거겠죠.”
이제는 최상호 이름도 강력반에서 아무렇지 않게 언급되고는 했다. 그때마다 건수는 아직도 매번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그걸 동료들이 이상하게 보질 않아서 망정이었다.
“고건수 형사님. 형사님이 감기에 안 걸린 이유도 사실-”
“도희철.”
반장이 제지하자 도희철이 말을 하다가 말았다. 뭐야?
“너 오늘따라 말본새가 아름답다. 왜 말을 하다 말?”
도희철은 조용히 눈만 깔았다.
“자자. 그만들 해.”
“다른 팀도 독감 한 차례 돌아서 남은 인원들끼리 고생하는 거 니들도 봤잖냐. 그러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력이 소중하다고. 컨디션 관리도 직장인의 덕목이다.”
“맞다! 반장님 인력 충원 좀 빨리해주세요. 저희 너무 힘들어요~.”
두 사람이 어째 말을 돌린 것 같은데. 뭐야 찜찜하게.
“내가 계속 위에 요청하고 있으니까 좀 기다려 봐라.”
“그게 벌써 몇 번째-”
최상호가 <순직>하고 수개월째, 인력 충원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강력 1팀은 적은 인원으로 어떻게든 꾸려가고 있었다. 이 ‘어떻게든’이 상부에는 인원이 적어도 잘 굴러간다고 비춰진 걸까.
“상부도 고민이 많겠지. 내외부로 시끄러운 시기니까. 지금은 다 같이 고생하며 버티는 수밖에. 있는 인원도 현장 쪽으로 빠지는 실정인데……. 쯧. 범죄를 예방하는 것도 중요하지 물론. 그렇지만 수사를 통해 범인을 색출하는 것도 중요하건만.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들.”
경찰 조직 개편에 따라 내부 인력들이 현장 쪽으로 많이 차출되었고, 경찰 측이 요청한 수사 인력 증가는 인력 충원보다 내부 인력 재배치 등으로 이뤄졌다. 이래서는 수사업무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이는 사건처리의 지연과 수사 인력 한 사람 한 사람의 업무 부담으로 이어진다. 실무 현장에 대해 이해가 없는 윗대가리 아니, 높으신 분들이 혁신이다 뭐다 정책을 바꿀 때마다 죽어 나가는 건 우리 같은 조직 말단들이지. 이런저런 이유로 경찰청 내부에서는 앓는 소리가 속출했고, 강력 1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연달아 철야를 하니까 몸이 좀 뻐근한 것도 같다.
기분 탓인가?
“푸엣취!”
“고건수.”
“고 형사님!”
두 명의 남자-소개팅을 앞둔 청년과 수험생 부모-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냥 재채기라니까.
최상호 형사님이 있어야 이럴 때 강제로 끌고 가는 건데,
도희철의 덧붙인 꿍얼거림은 주먹으로 돌려주었다.
그래. 뭐. 건수는 이번엔 두 남자의 충고를 받아들여 중간에 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확인만 하면 되겠지. 이참에 억울한 오해(?)도 풀 겸. 어쨌든 아픈 걸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주사를 안 맞지는 않는다고!
*
×발. 말이 씨가 된다더니.
보고서를 쓰고 병원에 가려니까 이미 문을 닫은 상태였다. 건수는 뭐 별일이야 있겠냐 싶어서 평소처럼 넘어갔다.
밤부터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더니, 이 상태였다.
건수는 밤새 기침과 오한을 견디다 아침이 되자마자 병원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집 근처 작은 병원이었다. 코로나일지 독감일지 모르는 상황이라, 복도에서 대기해야 했다. 마스크를 쓰고 코를 훌쩍이면서. 간호사가 제 코를 쑤셨고,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중무장한 의사가 와서 검진 결과를 이야기해 주었다. 코로나나 독감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증상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의사는 일단 감기약을 처방해주었다.
간호사는 올해 독감은 진짜 지독하다며 왜 사람들이 미리미리 독감 주사를 안 맞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했다. 건수는 합죽이 된 채로 얌전히 간호사의 타박을 들었다.
건수는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이불 속에 몸을 묻은 건수가 핸드폰을 찾았다. 강력 1팀 단톡방에 사정을 설명했다. 숫자는 금방 사라졌다. 남현진과 반장은 의례적인 짧은 걱정의 말을 한마디씩 남겼다. 도희철은.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덧붙인 이모티콘도 얄미웠다.
너 이 새끼 나으면 두고 보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아는 희영네 부부와 영철의 가족 행사에 함께 간 참이었다.
“언니 예방주사 맞으라니까! 민아한테 옮기려고?”
“안 걸려. 안 걸린다니까. 내가 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감기 같은 거 안 걸렸다고.”
“그렇게 확신하다가 꼭 걸린다니까.”
“네. 네. 나 오늘 늦는다~.”
“언니! 하여간 더럽게 말 안 들어.”
“저러다 호되게 앓아야 정신 차리지!”
“…….”
호되게 앓고 있는 건수가 아침 일을 회상했다. 감기 걸린 거 알면 희영이 고것이 의기양양해야 할 것이 눈에 선했다.
빌어먹을. 추운데 덥고 머리 무겁고. 죽겠네.
메신저 앱에서 희영을 찾았다. 안 읽은 메시지가 여럿 쌓여 있었다. 화난 이모티콘 폭탄과 함께.
「내가 엄마 병시중을 몇 년을 했는데 이제 시부모 병시중도 해야 해?」
「시누이들한테는 아쉬운 소리 못하면서 내가 제일 만만하지」
“…….”
아무래도 가족 모임이 좋게 끝나지는 않을 모양이다. 직업적인 이유를 핑계로 희영이에게 대부분의 병시중을 떠맡긴 건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미친 거 아냐.」
「넌 그딴 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는 거 아니지?」
감기에 걸린 걸 하소연하려던 마음은 뒤로 미루고 동생의 시댁 하소연 맞장구를 쳐 줬다. 희영이 사돈어른은 그래도 잘 대접해주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메시지를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이 서방은 뭐하고?」
메시지를 쓰면서도 건수는 이 서방에게는 별 기대가 없었다. 그런 치였다.
가족이 아프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가라앉기 시작한다. 가족의 긴 투병은 주변 가족들의 마음도 병들게 한다. 희영이가 고생할 길이 훤해서 벌써 머리가 아팠다. 하기야 세상에 좋은 시가라는 건 환상이지.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서방은 사람이 좋아서 허허실실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했고, 배우자로서는 보통 단점이었다. 그걸 겪은 산증인이 자신이었다.
“건수야. 싫은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젠장. 건수가 이마를 찡그렸다. 아파서 그런지 싫은 기억이 기어 나온다.
…아무래도 희영은 희영대로 바쁜 모양이다. 건수는 1이 사라지지는 않는 대화방을 한참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껐다. 따라간 민아가 괜히 눈치 볼 것도 신경 쓰였다. 그리고 새로 듣게 된 사실 하나도.
거기다가.
건수가 휴대폰 문자창을 열어 낯선 번호를 눈에 담는다.
<감찰팀장 최선영>
「내 번호 저장해 둬요.」
「난 빈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럼 그때 봅시다.」
“…….”
먹은 것도 없는데 벌써 체한 것 같다.
또 빠뜨린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건수는 머릿속을 잠시 뒤적이다 포기했다. 사돈어른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희영에 대한 걱정도, 자신 때문에 고생할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도, 민아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 미뤘다.
머리가 무겁다. 아프니까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호되게 감기를 앓는 게 몇 년 만이지.
이래서 아픈 게 싫다니까.
02.
언제 처음 감기에 걸렸더라?
건수의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아주 어렸을 적으로, 교복을 입기도 전으로.
그때도 유행병처럼 독감이 세게 도는 해였던 것 같다. 결석하는 친구들 덕분에 교실은 자리가 듬성듬성했다.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들은 감기에 걸리는 비법을 어른들 몰래 알음알음 서로에게 전수해주었다. 건수 역시 그런 작당 모의하던 아이 중 하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감기에 잘 걸리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독감에 심하게 걸릴 수 있었다. 학교를 나가지 않는 것은 좋았지만 생각보다 엄청 아팠다. 건수는 조금 후회했다. 부모는 어린 민아가 옮지 않게 방 출입을 금했다. 원래 같은 방을 썼던 자매는 그때 처음으로 방을 나눠 자게 됐다.
민아는 가끔 엄마 몰래 밤중에 찾아와 언니 죽지 마, 하고 우는소리를 했다. 방문을 살짝 열고 그 열린 틈 사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나이 때 어린아이에게는 독감은 큰 병처럼 느껴졌다. 희영과 건수는 한창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었고, 어린이 문학 전집은 거기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물론 건수는 희영과 달리 문학소녀와는 거리가 먼 아이였으나 학교 숙제로 필수 전집은 반강제로 읽었다-. 희영은 아픈 언니를 보살피는 여동생 역할에 취해 있었고, 옆에서 동생이 부추기자 건수도 점점 -답지 않게-불치병에 걸린 비련의 시한부 주인공 역할에 몰입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하고 우스운 일화였다.
어쨌든 어렸던 건수에게는 그만큼 아프게 느껴졌다.
“언니야. 아프지 마.”
“희영아. 언니 죽으면 언니가 쓰던 **몬 신발 가져. 너 그거 갖고 싶어 했잖아.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하면서 건수는 유언을 남기듯 평소 희영이가 탐냈던 자기의 물건을 열거했다.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앞으로는 동생도 덜 때리고요, 착하게 살게요. 건수는 제가 아는 모든 신을 찾았다.
“그런 소리 마.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얼른 나아…….”
아닌 밤중에 건수의 방에서 숨죽인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당연하게도 건수의 유언이 실행되는 일은 없었다.
건수는 언니라는 제 역할에 크게 불만을 느낀 적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마음에 조금은 섭섭한 마음도 있던 것 같다. 어린 동생보다 자기에게 관심과 걱정이 쏠리는 순간을 조금 즐겼다. 엄마에게 맘껏 칭얼대며 먹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고. 낫기만 해라 다 사주겠다고 엄마는 평소 본인답지 않게 제 응석을 받아주었다(낫고 나서 사주지는 않았다). 열이 크게 올랐던 한밤중에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을 가기도 했었다. 밤중에 병원 대기실에서 저를 안고 얼렀던 품과 걱정하던 물기 어린 눈가와 까슬하고 큰 손가락의 감촉.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들이었다.
건수는 일주일 넘게 심하게 앓더니 곧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전처럼 천방지축으로 동네를 쑤시고 다녔다. 엄마는 감기 걸렸을 때는 애가 얌전하더니 하여간 중간이 없다고 한숨을 지었고, 아버지는 그냥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웃었다. 건강한 게 제일이지, 시한부 딸내미보다는 말썽꾸러기 딸내미가 낫지 않냐고 말하며 눈을 찡긋했다. 엄마는 어리둥절했고 건수는 뒤늦게 조금 창피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첫 번째 감기였다.
*
잠든 건수 옆에서 핸드폰이 웅웅 울린다.
- 부재중 전화 개새끼.
- 희영 「언니. 전화 받아.」
- 희영 「감기 걸렸다며!」
- 희영 「언니」
03.
아픈 건 싫다.
가족이 아프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가라앉게 된다. 가족의 긴 투병은 주변 가족들의 마음도 병들게 한다.
“넌 이런 거 하나도 못 하니.”
부친이 돌아가시고, 건수는 자연스럽게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모친과는 어느 순간 소원해졌다. 건수는 워낙 제멋대로 사는 인간이었으나 그런 자신도 모친과 제대로 된 모녀 관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시절이 있기는 했다. 물론 그건 일방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네 아빠가 있어야 했는데.”
건수가 가장으로서, 딸로서 노력할 때마다 모친은 그런 말을 해서 건수를 힘 빠지게 했다. 희영의 헌신적인 보살핌도, 자신의 가장 노릇도 모친에게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곁에서 당신을 돌보는 것은 살아있는 우리인데 당신은 당신 곁에 없는 죽은 사람만 찾고 있다.
“설마 희영이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니지. 걔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예민한 바늘처럼 날이 서는 날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슴에도 입안에도 가시가 돋치는 날.
아픈 사람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하건만, 간혹 제 삶에 지친 날이면 건수도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모친의 병은 호전될 기미가 없었고, 현상 유지만 하는 실정이었다. 물론 그 현상 유지에만도 병원비는 꼬박꼬박 나가서 나날이 건수의 지갑을 헐겁게 했다. 제가 안 하던 짓에 손을 댄 데에는 모친의 기나긴 투병 생활도 한몫했다.
“엄마가 양심이 있으면 걔한테 그러면 안 되지.”
엄마. 엄마 딸이 뭐 하고 다니는지 알아? 엄마 딸내미 인생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심은 있어?
“나는 뭐 말도 못 하니.”
관심도 없으시겠지.
이어진 철야에 건수는 지쳐 있었다. 민아가 다치는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서 갔고,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와야만 했다. 거기다 모친의 상태가 나쁘다는 연락까지 받아 급하게 달려온 참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 곁을 지켰더니 깨고 난 당신은 딸내미에게 이런 말이나 하고.
나는 그걸 또 듣고 있고.
“희영이 같은 애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천벌 받아.”
모친은 침대 병실에 누워 말없이 저를 올려다봤다. 마른 팔. 부은 다리. 살이 내린 뺨. 자신과 닮은 얼굴과 팔에 주렁주렁 연결된 선들.
저 선들이 엄마를 살게 한다.
‘그리고 저 연결된 선들이 다 내 돈이지.’
건수가 급하게 고개를 털었다. 피로로 삐딱해져 가는 제 사고를 가까스로 붙든다.
“넌 엄마한테 말을 무슨 그런 식으로 하니.”
엄마는 왜 나한테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데.
“난 희영이 걱정은 안 한다. 이 서방이 있으니까. 네가 걱정이지.”
아. 젠장. 싫다. 또 이 주제가 튀어나오는구나. 건수의 이혼을 모친은 끝까지 반대했다. 하지만 건수는 애당초 남의 말을 듣는 위인은 아니었고 결국 이혼을 밀어붙였다. 모친과는 이 건으로 여러 번 싸웠다.
“네가 좀 잘하지 그랬니. 김 서방 같은 사람 또 없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엄마. 나 지금 너무 피곤해.”
“그러니까 김 서방이 있었으면 나았을 거 아냐. 너는 애가-”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거야.
결국, 모로 가도 자신에 대한 타박으로 이어진다. 내가 더 잘해야 했다고.
자신도 안다. 헌신적이고 다정했던 그 사람을 메마르게 한 것이 누구인지.
귀로 약한 이명이 울린다. 건수가 마른세수했다.
정신도, 몸도 파업 직전이었다.
“…….”
희영이가 있었다면 좀 더 매끄럽게 대처했을까. 어쨌든 나이 먹고 아픈 노인네에게는 곰살맞게 굴어야 하는데. 건수는 예나 지금이나 소질 없는 분야였다.
“어쨌든 사람은 누가 옆에 있어야 해.”
그러니까 그게 우리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인지.
“내가 왜 혼자야. 민아도 있고 희영이도 있는데.”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당신 곁을 지킨 우리로는 채울 수 없었던 것인지.
“그런 이야기가 아닌 거 알잖니.”
모친의 시선이 자신을 떠나 허공으로 옮겨간다. 아마 오래전에 지나쳐온 시간 속, 자신은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못 박힌 채.
“희영이는 제 남편이 있고, 민아는 이제 크면 독립해서 제 갈 길 갈 텐데.”
“그때 너는 어쩔 거니?”
“너도 나이 들어 보면 알 거다. 내 나이 되어보면.”
고건수가 혀를 찼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 딸을 모르네.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그 세월 동안 대체 무얼 본 것인지.
아니. 어쩌면 사람은 본인이 살아온 방식대로만 타인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건가.
어쩌면 당신의 시간은 그날에 묶여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당신 곁에서 우리 역시-.
“…….”
너무 다른 길을 걸어 온 모녀는 각자의 생각에 잠긴다. 건수는 저와 닮은 완고한 옆모습을 말없이 지켜본다. 고집이 세다는 점에서는 꼭 닮은 모녀였다. 건수는 저에게 돌아오지 않는 시선을 쫓아 마찬가지로 어딘가의 허공을 응시한다.
건수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담배가 당겼다.
*
바쁘고 피곤한 날들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건수는 그날의 대화를 머리 한쪽으로 치웠다. 바쁘단 걸 핑계 삼아 병실 방문 횟수를 줄였다.
나날이 말라가는 엄마. 호흡기를 끼는 엄마.
대화도 할 수 없는 무생물에 가까워지는 엄마.
더는 소통도 할 수 없는데, 여전히 살아있다. 이걸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까? 어차피 살아있을 때도 <소통>을 하는 모녀는 아니었다. 서로 일방의 말만 내뱉는 것도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모친과는 마지막까지 평행선이었다.
날이 갈수록 무감각해졌다. 건수는 관성적으로 병원비를 지출했다. 제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말도 충격적이지 않았다.
*
“언니. 언니. 엄마, 엄마가….”
건수는 현장을 뛰다가 임종의 순간을 놓쳤다. 제가 길바닥을 구르며 전과 2범을 쫓던 순간에, 모친의 숨이 다했다.
자정이 지난 늦은 새벽, 서울 뒷골목 어딘가에서 주저앉은 채 건수는 희영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는 그 순간에 건수는 그저 멍했다. 결국, 이날이 오고 말았구나.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것들에 무감해질 만큼 아주 긴 시간.
“건수야 내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야.”
희영과 친척 어른들은 반대했지만, 건수는 단호하게 상주 자리를 고집했다.
“건수가 엄마랑 희영이를 지키는 거야.”
“우리 건수, 잘 할 수 있지?”
이건 자신의 역할이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사진 속 엄마는 웃고 있었다. 아주 인자한 어른처럼. 행복한 사람처럼.
내세란 게 정말 있다면.
그래도 당신이 좋은 곳에 가길 바랐다.
*
- 부재중 전화 2분 전 개새끼.
- 도희철 2개의 알림.
- 부재중 전화 1분 전 희영이.
- 개새끼 「야」
「고건수.」
「전화 받아」
「불나기줒ㅅ」
*
어머니의 상을 치르고 희영이에게 말할 수 없는 많은 일이 지나가고,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희영이 말했다.
우리 이제 둘밖에 없어.
알아? 언니 우리 둘이 이제 고아라고.
*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새벽에 문득 옆구리가 서늘하고, 유난히 밤이 길게 느껴져 뜬 눈으로 아침을 기다려야만 하는 그런 날.
건수도 외로움을 안다. 비명 지르고 싶은 밤이 있다. 그것은 어느 날 발작적으로 밀려온다. 그러나 그런 건 다음 날 출근하면 사라진다. 아니면 술을 마시거나. 마치 지금 감기처럼 한번 앓고 마는 것. 그냥 견디는 것이다.
이 파도가 지나가기를.
그렇게 견디기 어려웠을까. 사람이 아프게 되면 자신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는 걸까.
나도 언젠가는 민아의 뒷모습만 쫓으며 외로움에 몸서리치게 될까.
당신처럼.
그럼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에 허덕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나날들을 그리워만 하면서.
04.
“너 아까 무슨 소리야.”
“뭐. 뭐가요. 아! 가까이 오지 마세요!”
이 새끼가 진짜. 건수는 저놈의 마스크를 확 벗기고 재채기를 마구 해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그냥. 별거 아닌데요…….”
“…….”
“지인짜, 그냥….”
“…….”
노려보며 다가서자 도희철이 항복했다는 듯이 손을 벌리고 입을 열었다.
“그게요.”
*
×발. 젠장.
더는 사과할 수도, 고맙다고 말할 수도 없는데. 돌아보니 온통 미안한 일, 잘못한 일, 후회되는 일투성이다.
*
저희 잠복근무할 때 말이에요, 교대하러 가면 최상호 형사님이 뜬 눈으로 계시고 고건수 형사님은 옆에서 자고 계실 때가 많았단 말이에요. 뭐 실제로 어떻게 서로 교대하셨는지야 저희야 잘 모르지만요. 게다가 고 형사님은 숙직실도 아닌데 뻑하면 아무 데서나 픽픽 대충 누워 자기도 잘하시잖아요. 그럼 최상호 형사님이 담요 가져다 덮어주시는데. 잘 모르셨죠? 최상호 형사님, 반장님한테도 한 소리도 자주 들었잖아요. 건강관리 못 한다고. 최상호 형사님은 겨울마다 한 번씩 호되게 앓아서 남은 팀원들끼리 고생했는데, 기억 안 나요? 두 분 어차피 나이도 엇비슷하신데, 그렇잖아요.
왜겠어요.
*
미안해. 미안해.
상호야.
*
건수는 지금 자신이 마치 어린 날 병상에 누워 시한부 역할에 심취했던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때처럼 어린애도 아닌데. 죽을병도 아닌데.
지나간 사람들만 떠올리고 있다. 지나간 시간이 자꾸만 자신을 과거로 끌어당긴다. 후회를 상기시킨다.
05.
“푸엣취!”
“고건수 씨. 안녕하세요.”
거하게 재채기를 하던 건수는 복도에서 감찰팀장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이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건수는 속이 편치 않았다. 팀장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타 부서에 감기가 돌았다는 게-
“아, 이거.”
제 시선을 느꼈는지 팀장이 마스크를 톡톡 쳤다.
“저희 팀 지금 비상이거든요. 저만 몇 안 되는 생존자예요. 한창 바쁠 때 ×됐죠.”
하하, 하고 팀장이 웃었다.
“…안 그래도 들었습니다. 덕분에 저보고도 병원 가라네요.”
“아프면 재깍재깍 병원 가야죠. 우리 나이에.”
반장이랑 똑같은 소리였다.
“최상호도 연례행사처럼 이맘때 한 번씩 꼭 사달이 나서는. 올해는 대신인지 저희 팀에 감기가 도네요.”
“…….”
“아. 혹시 고건수 씨 없는 사이 또 서랍 딸까 봐?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당분간은 강력 1팀 덮칠 일 없으니까.”
이 사람이 원래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농담을 하는 타입이었나. 아니, 농담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진짠데. 안 믿으시나 보네.”
“아하하….”
팀장이 하하,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건수는 도저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입꼬리만 애써 끌어올렸다.
“그건 그렇고, 어버이날에 최상호 집에 갔었다면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끌려 나와 건수는 움찔했다.
“고마워요. 어르신이 요새 다리도 성치 않으셔서 거동을 영 못하시는데. 사람이 오면 되게 반가워하시거든.”
이게 그쪽이 감사해 할 일인가. 건수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걸까. 이 사람은 마치 여전히 최상호가 살아있는 것처럼 말한다.
“근데 재밌는 얘기를 하시지 뭡니까. 고건수 형사가 어떤 젊은 경찰 양반이랑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다고.”
“제 일처럼 기뻐하시지 뭐야.”
“…….”
“그 얘기 저도 자세히 듣고 싶은데, 어때요.”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 술도 좋고.”
“…….”
안경 너머의 눈이 저를 샅샅이 살핀다. 이 사람의 시선은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면이 있었다. 지은 죄가 많은 건수는 뱀 앞의 쥐처럼 움츠렸다.
“그렇게 경계하지 말고.”
“안 잡아먹으니까.”
감찰팀장이 한발 다가선다. 건수는 한 발을 뒤로 물렸다.
“내가 잡고 싶은 사람은 고 형사님이 아니라,”
“고 형사 뒤에 있는 거거든.”
건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은 심증뿐이지만요. 저는 형사는 아니지만, 형사들처럼 우리 감찰반도 감이랄까, 촉이 있답니다.”
감찰팀장이 본인의 머리를 톡톡 쳤다. 최상호가 할 법한 말이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말을 들으면요,”
감찰팀장이 한 걸음 더 저와 거리를 좁힌다. 자신도 여자치곤 키가 제법 큰 편인데. 저와 별 차이가 없는 키였다. 게다가 이 위압감이라니.
이건 그저 제가 지은 죄가 커서일까?
“제가 좀 헷갈리거든요.”
다가서는 동작에 건수는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니까 확인이 좀 필요하다고.”
“무슨 말인지.”
복도로 다른 부서 팀원들이 지나간다. 점심 먹을 시간이라 그런지 제법 많은 인원이었다. 지나가는 인파를 피해 팀장과 건수는 복도 가장자리에 물러났다.
“아직은 간 보는 단계에요. 말하자면 고건수 씨는 미끼인 거죠.”
…그걸 보통 대놓고 말하나.
표정이 불퉁해졌다. 최 팀장이 뭐가 웃긴 지 낄낄댔다.
밥을 먹자는 것도 그럼 그 <미끼>에게 하는 수작질의 일환인가.
“얼마 없는 여자 동료들끼리 친목 도모라도 해 보자고.”
팀장의 손이 제 재킷의 깃을 살짝 세워주고는 먼지를 툭툭 털었다.
“우리 서로 아주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아닌가?”
“…….”
감찰팀장의 손은 옷깃에서 내려와 제 출입증을 만졌다. 자못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졌다. 제 이름 석 자가 가려졌다가 드러난다.
“고건수 경사님.”
“……최 팀장은,”
어디까지 알고 말하는 겁니까. 이름만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 대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당신.”
건수는 존댓말을 때려치웠다. 칼을 들이미는 상대에게 사근사근 말하는 취미 따위 없었다.
“원하는 게 뭐야.”
우문이었다. 최상호를 잃은 절친한 친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저 역시 최상호를 잃은 사람 중 하나였으나 서로 처지가 달랐다.
“내가 원하는 거.”
“간단해요. <진실>.”
머리카락이 조금 뻗쳤네요.
감찰팀장, 아니 최선영은 제 옆 머리카락을 다듬어 귀 너머로 넘겨주었다. 마치 친근한 사이에 하는 표현처럼 다감했다.
뱉는 말의 내용과 다르게.
“그리고 <적법한 처벌>.”
“걱정하지 말아요. 나도 친구가 아꼈던 사람에 대해서는 가능한 예의를 차리고 싶으니까.”
팀장이 제 어깨를 꾸욱 눌렀다. 마스크 너머로도 목소리는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리고 난, 백 퍼센트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거든.”
“그럼, 나중에 봐요.”
잊지 말고 병원도 꼭 가고요.
폭풍이 지난 자리에 건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반강제로 떠맡긴 연락처와 식사 약속과 함께.
*
전화가 반복해서 울린다.
- 부재중 전화 개새끼 2분 전.
- 반장 1개의 알림
- 민아 2개의 알림
- 도희철 「고 형사님.」
- 도희철 「제가 말한 건, 그냥 제 생각이에요.」
- 도희철 「괜히 말한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 도희철 「그냥 잊으세요.」
핸드폰이 잠시 멈췄다 연달아 울린다.
- 도희철 「괜찮으세요?」
- 도희철 「박 경위님이 지금.」
「지금 댁에 가신대요.」
*
목 말라…….
엄마…….
*
의식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
…선배…….
06.
“38도.”
“…….”
“38도에요. 고건수 형사님. 자. 얌전히 누워있읍시다.”
어렸을 때 호되게 아픈 뒤로 건수는 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본가를 떠나 자취를 시작하고 건수는 처음으로 나 홀로 감기를 앓았다. 마치 물갈이를 하듯이. 혼자 병원에서 약을 타와 쿰쿰한 이불 속에서 자취방 천장을 올려다보며, 건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플 때 혼자인 게 서럽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남은 날들도 이렇게 혼자서 해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건수는 눈을 들어 제 곁에 앉은 사람을 본다. 눈에는 걱정이 한가득하고, 눈썹은 찌푸리고 있다. 화가 난 것처럼.
“선배. …화났어?”
“글쎄요.”
선배는 종종 자신을 굳이 형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는 했다. 그럴 땐 둘 중 하나였다. 대게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 거나,
“속이 좀 상하기는 하네요.”
아니면 자신에게 화가 났을 때였다.
“건수 너도 서른 넘었잖아. 몸 좀 제발 아껴 써.”
감기를 내가 걸리고 싶어서 걸렸나. 범인을 날씨 가려가며 잡는 것도 아니고. 건수도 거기에는 할 말이 좀 있었다. 17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었다. 수개월 넘게 이어진 끈질긴 추적 끝에 범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목 사이사이를 쫓는 추격전 끝에 건수는 범인을 잡았다. 문제는 지금이 겨울이었고, 그날은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다는 거다.
건수는 약간의 타박상과 얼굴 상처, 그리고 몸살감기를 훈장처럼 얻고 말았다.
“입술 비죽이지 마.”
내가 언제?
“내가, 언제.”
“제 버릇도 모르고.”
하여간, 하고 선배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웃었다. 휜 눈가로 살짝 주름이 졌다. 건수는 그게 보기 좋다고 생각한다.
“…민아는,”
“민아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어. 엄마 보고 싶다는 거 겨우 달래 재웠으니 걱정하지 마.”
“밥,”
“밥도 잘 먹었고, 양치도 꼬박꼬박하고 샤워도 야무지게 하고 잘 자고 있어.”
누구와 달리.
그 말은 굳이 왜 덧붙이나. 건수는 또 뚱해졌다. 선배가 또 웃었다. 입술 비죽이지 말라니까.
“넌 빨리 감기 나을 생각만 해. 민아는 걱정하지 말고.”
“…….”
선배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정리해준다. 아,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구나. 건수는 새삼 제 몸 상태를 의식했다. 이렇게 아픈 게 얼마 만이지.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건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건수 네가 임신했을 때 감기 걸렸잖아. 둘 다 어쩔 줄 몰라 했는데 말이야. 약도 못 먹고.”
정말 최악이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려서 약은 먹지도 못하고. 열 떨어지게 하려고 발만 동동 굴렸다. 평소에는 잘 걸리지도 않는 감기가 딱 임신 중에 걸리는 걸리다니 고건수는 습관적으로 제 불운을 탓했다. 아파서 질질 짜면서 이 새끼 너 때문에 하면서 머리카락을 조금 뜯었던 것도 같다. 선배가 본인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는다. 음, 그건 좀 잊어주지.
“우리 고건수 형사님이 고생을 좀 많이 했지. 그 좋아하는 술도 담배도 못 하고.”
…뭐 아주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선배 눈을 피해서 아주 살짝.
그래도 모든 일에서 운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취방에서 혼자 감기를 앓던 그 날과 달리, 제 곁에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딸 걱정뿐이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도 제 옆에 있다.
“본인 걱정도 좀 해.”
“…하는데.”
내 생각밖에 안 한다. 아픈 것도 싫고 배고픈 것도 싫고 가난한 것도 싫고 비참하게 사는 것도 싫었다. 싫은 걸 하기 싫어서 쫓은 길이 지금 여기였다. 평생 이기적으로 산다, 제멋대로 산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선배가 날 너무 좋게만 생각하는 거지.
“그래.”
흡사 마지못해 동의한단 말투였다. 입술이 대번에 불퉁해졌다. 선배가 또 웃는다.
“네 몸 너무 과신하지 마. 함부로 하지도 말고.”
건수는 눈만 깜빡였다. 다정한 손길과 눈길이 제 얼굴 곳곳에 닿는다. 시선이 닿는 곳이 간지럽다. 열 오른 몸에 더 열이 오를 것만 같다.
“선배. 저번에 어머니랑-”
“지난번에 어머니랑 식사했을 때 말이야.”
말이 겹쳤다. 말의 행간을 읽으려는 듯 잠시 건수를 보다가 선배가 말을 이어 붙였다.
“건수야. 싫은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그 이후에 당신께서 전화해서 이차로 한마디 더 하신 건 말하지 않은 걸까. 됐다.
“됐어. …어차피 매번 같은 소리인데.”
새삼스러웠다.
어차피 자신은 시모가 원하는 그런 며느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원하는 자식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건수는 그런 말들은 대체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건수는 시어머니를 앞에 두고 말이 통하지 않는 민원인을 둔 것처럼 상상하곤 했다. 예예, 그러시고요. 그렇지요. 아유 그러십니까. 시어머니에게 하기에는 다소 불손한 상상이었다. 그래도 자신 딴에는 제법 웃으면서 대화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성에 차시지 않는 모양이다. 가끔 시부모와 식사 자리를 가지면, 평소 쓰지 않던 입 근육을 잔뜩 써야 했다. 끝나고도 한참은 덜덜 떨릴 정도로.
본인 배로 낳은 어미조차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데 뭐. 자신은 어머니들이랑은 영 어쩔 수가 없을 팔자인가 보다.
“미안해. 내가 한번 제대로 말씀드려 볼게.”
선배가 제 표정을 살피다가 돌연 심각해졌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길래.
“됐다니까. 선배.”
무용한 일에 애쓰지 말았으면. 그러나 무용한 일에 기어이 마음을 쓰고 마는 것이 이 사람의 성품이다. 이런 점이 자신과 너무 달랐다. 그리고 자신은 아마 이 사람의 이런 점을-….
…….
그래서일까.
“선배.”
건수의 입이 무심코 열렸다.
“응?”
“왜 나랑 결혼했어?”
만지던 손길이 뚝 멈췄다.
“응?”
둘 사이로 침묵이 떨어졌다. 선배의 눈이 커졌다. 건수도 놀랐다. 제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온 탓이다.
“인제 와서 갑자기? 심문이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고 형사님.”
“…그냥.”
선배의 어조에는 짓궂음이 배어있다. 놀림에 건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닭살 돋는 질문인지. 답지 않았다.
“…못 들은 거로, 해.”
아파서 일 것이다. 평소답지 않게 이런 말이 나온 까닭은. 몸이 아프다고 마음도 덩달아 약해져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어리광을 피우는 모양새였다. 그런 시절은 지나온 지 오래인데.
며칠 전 시모와의 통화를 무던하게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어떤 말들은 흘려 넘긴다고 해도 도통 흘려넘기지 못하여 기어이 가슴에 남고 마는 걸까. 건수는 뱉고서야 그 질문이 제 안에서 오래 맴돌던 물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이 열에 취해 떠밀려 나오고 만 것이다.
“혹시 이거 무슨 테스트야?”
입가에는 웃음기를 걸치고 선배는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 표정이 제법 진지해서 건수도 덩달아 진지해진다. 그 입에서 나올 말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거야 당연히 건수 네가 좋아서지.”
이 사람의 이런 말에 건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진다.
아직도. 여전히.
“그거 알아? 우리 교양수업 때 처음 본 거 아니야.”
건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처음 들어.”
건수는 교양수업 때 자신과 한 조가 되었던 다른 과 학생을 기억한다. 머뭇머뭇 말을 걸었던 숫기 없는 목소리. 늦은 밤 도서관. 몸 위에 걸쳐진 외투. 종이컵 냄새가 밴 싸구려 커피. 자판기의 희미한 불빛.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밤, 가로등 불빛 아래 계단 참에서 이 사람의 얼굴은 빛을 받아 말갛게 빛났다. 건수야, 건네지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조금 떨고 있던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야 너는 기억 못 하겠지.”
“그래서 내가 말 안 한 거야.” 그럴 줄 알았다고 선배가 웃었다.
건수는 조금 억울했다. 알았으면, 난 분명 기억했을 텐데.
너는 학교의 유명인사였지만 자신은 너를 선망했던 많은 사람 중의 하나였노라고. 덧붙여진 말에 건수는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
학교를 졸업한 지가 오래라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체육대회?”
건수는 떠오르는 대로 가능성 있을 만한 이벤트들을 주워섬겼다. 선배는 답은 말해주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글쎄. 짱구를 좀 더 열심히 굴려봐요. 고건수 형사님.”
그냥 지금 말해주면 안 되나.
“나중에. 좀 더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나중에, 콜록. 언제.”
“건수 네가 경찰청장 되면,”
“선, 콜록. 배!”
차라리 죽을 때라고 해라. 물론 건수는 죽어도 제 자리를 끝까지 지키다 정년퇴직할 생각이었지만 언감생심 제 깜냥을 알기는 알았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난 네가 경찰청장 되는 것도 보고 싶은걸.”
“…아주 할머니 되면, 말해준다고 하시지.”
“그럴까.”
건수가 대번에 인상을 썼다.
“하하. 좀만 더 나중에. 좀만 더.”
좀 더, 나 혼자 비밀로 간직할래. 말하는 목소리는 비밀을 품고 수줍어진다.
“공소시효는 없으니까. 천천히… 천천히 열심히 알아내 봐요. 고건수 형사님.”
그때까지 계속 곁에 있을 테니까.
마지막 말은 아주 작았다.
*
생각해보면 지뢰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아래에서부터 균열이 가고 있었는데도 눈을 가린 채 아무 일도 없는 척 괜찮은 척, 서로만 있으면 이대로 충분한 것처럼 굴었다.
현실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
“건수야.”
제 손 위에 손이 포개진다. 제게 익숙한 손.
“나는 그냥 네가…”
긴 손가락이 제 손가락에 감긴다.
“네가 좋아 보였어.”
거칠고 굳은살이 박인 제 손가락과 달리 매끈하고 섬세한 손가락. 그 차이가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이다지도 다른 두 손에는 똑같은 반지가 감겨 있다. 두 손가락이 온전히 닿기 전에 반지의 존재가 먼저 느껴진다. 그 반지의 감촉. 그것이 새삼스레 눈앞의 사람과 저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멍한 정신 속에서도 그게 제법 만족스럽다. 건수가 손에 힘을 주자, 맞닿은 손도 힘 있게 마주 잡아 온다.
“너는 내가 살면서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거야. 너 같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
“…….”
애정을 이해하기에는 삶이 너무 벅찼다. 저와는 너무 거리가 먼 단어였다. 이 사람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것도 결국 제가 안정적인 삶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당신이 때마침 그 순간에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을 것 같다.
“……하고 싶어.”
이 사람 주변에서만 희미한 빛이 떠돌아, 그 곁에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선배. 지금 하고 싶어….”
언제라도 자신은 괜찮을 것 같다.
“선배. 지금 ××해서 ××하고 ×××하고 싶어.”
시시각각 선배의 얼굴이 붉어졌다.
“××한 다음에 ××에 ××××해서-”
반지를 감았던 손이 제 입을 막았다.
“그만.”
“건수야. 그만해.”
소리조차 시뻘겠다. 제 얼굴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건수 너 진짜…”
열이 자꾸 더 오른다. 제 마음도 어딘가 열이 올라 들떠 있다.
“……유부녀가 다 됐네.”
그럼 제가 유부녀지, 뭔가? 그러는 그쪽은 유부남이고. 선배야말로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더니.
“선배 너는 처음 할 때, 진짜 웃겼던 것, 알아. 벌벌 떨면서, 콜록. 뭐만 하다가 건수야 괜찮아, 건수야 괜찮-”
선배가 손 하나를 더해 제 입을 봉인했다. 건수의 한쪽 눈썹이 까닥였다.
이제는 오래전 일이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선배는 건수야 아프니, 여기는 괜찮으니 물었던 것. 그런 걸 왜 물어, 그냥 해라고 하자 선배의 표정이 이상해졌던 것도.
분명 처음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식으로 저를 만진 사람이 처음이어서.
그 모든 것들이 생소했다.
저도, 선배도 서툴렀던 시절. 상대를 몰랐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물론 그 이후 두 사람은 숱한 경험을 쌓았다.
“…너랑 처음 하는 거니까. 네가 기분 좋았으면 해서 그랬지.”
건수가 제 손을 덮은 손가락 하나를 살짝 깨물었다. 혀로 살짝 핥는다.
“…처음 할 때 별로면, 네가 하기 싫어, 질 것 같아…서.”
“…….”
건수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을 맞췄다.
선배의 시선이 살짝 짙어진다.
“…….”
손을 떼어내는 느릿한 동작에는 제법 아쉬움이 느껴졌다.
뭐 선배니까. 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오늘은 안돼. …다 나으면 하자.”
이불을 다시 올려 덮어준다. 고개를 돌리는 귓바퀴가 붉어 건수는 속으로 좀 웃었다. 피차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자. 죽 먹고 약 먹고 더 잡시다. 고 형사님.”
건수가 희멀건 야채죽을 내려다봤다.
“김치 낙지 죽이 더 좋은데.”
“오늘은 순한 거 먹자. 낫고 해줄게.”
“곱창 먹고 싶어….”
갑자기? 이어지는 투정에 선배가 웃으며 답했다.
“낫고 실컷 먹게 해줄게.”
“나. 선배….”
“낫고 실컷-….”
선배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는다.
“-낫고 나면 맘대로 해. 찜쪄먹든 삶아 먹든 맘대로 하세요. 고건수 형사님.”
지금은 이걸로 참아.
마스크 쓴 얼굴이 가까워진다.
*
마스크?
그때 선배가 이랬던가?
*
건수는 마지막까지 듣지 못했다. 스스로 떠올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건수가 해결하지 못한 많은 미제 사건들처럼 영영 수수께끼로 남고 말았다.
평생 곁에 있어 줄 것 같이 굴고서는.
*
“건수야.”
선배. 선배.
나 아파.
“괜찮아.”
선배 없는 줄 알고. 나…
선배. 문제… 모르겠어…
알아낼 때까지 계속,
계속 옆에 있어 줘.
08.
“고건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게 이 낯짝이라니. 건수는 정말이지 다시 잠들고 싶었다. 아릿한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마주한 것은 악몽 같은 현실이었다.
“악몽…?”
박창민은 제 침대 옆에 의자를 데려다 앉아있었다. 박창민 너머 탁자에 민아 사진이 걸린 액자가 보였다. 최근에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인화한 사진은 민아와 저, 불청객 한 명은 잘라냈다.
그리고 선인장과 최근에 박창민이 산 정체 모를 사자 인형이 장식되어 있었다. 받자마자 건수는 인형을 패대기칠 뻔했지만, 민아가 저와 닮았다고 좋아해서 차마 버리지 못했다.
뭐가 이리 어수선해.
“유감이네. 이쪽이 현실이야.”
열어주지도 않았는데 잘도 들어오네. 집 비밀번호는 언제 안 거야. 이 새끼라면 모르는 게 더 이상할 일이긴 하지. 정말이지 새삼스럽게 놀랍지도 않았다.
“이 새, 콜록! 콜록.”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목이 아프고 입안이 말랐다. 빌어먹을.
“자. 물.”
말하기도 전에 물컵이 내밀어졌다.
“이번엔 네 입으로 마셔.”
건수는 몸을 살짝 세워 물컵을 받았다. ‘이번엔’? 건수가 박창민이 내뱉은 말들을 곱씹다가, 문득 질문했다.
“…이상한 거, 탄 거 아니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서 나왔다.
“먹기 싫으면 마세요~.”
박창민이 물컵을 뺏으려는 듯이 손을 뻗자, 건수가 반사적으로 물컵을 위로 들어 올렸다. 박창민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하냐 너.”
그러게. 건수도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물을 먹기도 찝찝하지만, 저놈이 뺏어간다니까 괜히.
건수가 물을 들어 눈으로 한번 노려보고 코로 킁킁 냄새를 맡다가, 살짝 혀를 대어 맛봤다.
맛봐도 모르겠는데. 건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박창민이 뭐가 웃기는지 킥킥댔다.
“그러면 뭘 알기나 해? 애초에 뭘 어쩔 생각이었으면 해도 더 일찍 했지. 귀찮게 굳이.”
“…….”
그것도 그랬다. 박창민이 굳이 뭔가를 숨겨서 저를 독살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이 개새끼는 그냥 대놓고 먹으라고 줄 놈이었다. 건수는 박창민을 노려보다가 문득 평소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박창민의 턱이 까칠했다. 항상 멀끔하게 미는 놈이 별일이었다.
“너, 뭐 하러 왔어.”
“그 질문은 조금 섭섭하네. 우리가 올 이유가 따로 있어야 만나는 사이인가.”
이 새끼는 하여튼 말 참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럼 우리가 뭔 사이인데 새끼야.
“고건수 형사가 전화를 오죽 안 받았어야지. 서부서에 물었더니 고건수 형사가 감기라지 뭐야.”
…도희철 그 새끼를 진짜 족쳐야지. 그놈은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건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친히 상사와 부하 사이의 우정을 돈독히-도희철에게 병원균을 옮겨주고 싶었다는 말이다- 하고 싶었다. 그놈의 소개팅을 망쳐주고야 말리라.
“집 비밀번호는 희영이한테 들은 거야.”
…하여간 귀신 같은 놈. 건수는 비밀번호가 생각보다 정상적인(?) 루트를 통해 넘어갔다는 게 오히려 놀라웠다. 희영이는 그래도 동생이니까 좀 봐줘야지. 물론 제가 평소에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러는 건 결코 아니다.
“민아한테서도 전화 왔어. 엄마가 전화 안 받으니 걱정된다고.”
“…….”
족칠 인간들 리스트를 채우던 건수의 분노가 갑자기 갈 길을 잃었다. 민아는 죄가 없다. 하여간 이 모든 건 사실 박창민 때문이지. 건수는 관대하게 나머지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박창민을 족치자. 건수가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누웠다.
×발.
……일단 낫고 나서. 낫고 나서 하자. 건수가 화를 식히기 위해 탁자 한쪽으로 치워놓은 물컵을 잡아 꿀꺽꿀꺽 마셨다.
“얼씨구.”
아차.
“고건수. 아프니까 지능이 더 낮아지나 봐.”
창민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고건수는 멍청한 제 행동을 복기하고 약간의 수치심을 느꼈다.
“목이 많이 마르는가 봐. 더 줄까?”
“닥쳐! 이, 쿨럭, ××새끼, 야.”
“하여간 입만 살았지.”
꼬르륵. 뱃속에서 고동이 울렸다.
박창민은 이제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위장도 살아있네. 고 형사 건강하네.
×발 진짜.
고건수는 박창민에게 병간호 같은 짓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기대한 적도 없지만 아프니까 별것이 다 서럽고 평소보다 배로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날 기운도 없다는 게 건수를 더 짜증 나게 했다.
“자. 전화.”
박창민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미심쩍게 박창민을 올려다봤다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보고 아연했다.
희영 부재중 전화 5건. 이 서방 전화 2건. 그리고 민아가 보낸 메시지까지.
그리고 박창민이-
“…….”
…이 새끼가 제일 전화를 많이 했네.
평소에도 일 때문에 전화를 못 받고는 했는데 유난스럽게. 아. 날짜가 다르구나. 시간 감각이 없어서 몰랐다.
“희영이가 도희철이랑 통화를 했나 봐. 독감인 것 같다고 조심하라고.”
“…….”
도희철은 역시 족치자. 왜 쓸데없이.
건수는 도희철의 안부 문자를 확인했다. 중간에 삭제된 메시지가 있었다. 뭐냐 이 새끼 내 욕했나? 건수는 낫고 나면 두고 보자는 살인예고장을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보내주었다.
그렇게 건수가 다시 분노의 화살을 다시 당기는데, 박창민이 제 핸드폰을 뺏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야! 콜록, 너. 멋대로 뭘-”
신호음이 간 지 얼마 안 되어 전화가 연결되었다.
- 엄마?
“…….”
- 엄마야?
수화기를 든 박창민이 고개를 까닥였다. 어서 받으라는 것처럼.
“그래 엄마야. 민아야.”
-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가능한 쇳소리가 덜 나게 노력했는데도 결국 티가 나는구나. 박창민. 이 개새끼. 고건수가 박창민을 노려봤다. 박창민은 어깨만 으쓱였다.
- 엄마. 감기 걸렸어…?
“응. 살짝.”
- 엄마 목소리 안 같아…….
“별거 아니야. 큼, 금방 나을 거야.”
- 으응.
“별일 없니? 잘 놀았어?”
- …응. 근데 이모가 있지. 음.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왜 그런지는 예상이 갔다.
“엄마가 이모랑 통화해볼게. 민아는 걱정하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
사실상 의미 없는 말이지만 주워섬겼다. 희영도 제 기분을 애 앞에서 티 내는 성정은 아닌데, 어지간히 속이 편치 않았나 보다. 건수는 제가 아픈 중에도 희영의 속내를 생각하니 덩달아 속이 쓰렸다.
- …응. 엄마 근데 있지.
“…….”
- 이모부 엄마가, 할머니가 많이 아픈가 봐. 보는 데 막 있지.
“…….”
- 기분이 이상했어.
마른 팔. 부은 다리. 살이 내린 뺨. 팔에 주렁주렁 연결된 선들.
자신과 닮은 얼굴.
- 그냥 너무 이상했어.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
건수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잔상을 애써 지웠다. 모친이 돌아가신 일에 대해서 민아는 당시에는 별말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도 장난감을 갖고 놀며 천진난만해 보였다. 물론 당시에 자신은 민아까지 챙길 정신이 없었다.
아름답게 화장한 채 누워있던 엄마 앞에서 민아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민아는 관으로 다가가 죽은 이의 얼굴을 만졌다. 시간이 많이 흐른 나중에 제 귀에 속삭이길,
“할머니 피부가 너무 차가웠어. 기분이 이상했어.”
- 이모는 기분이 안 좋고, 여기 어른들은 심각하고, 언니들도 오늘은 잘 안 놀아주고. 그런데 이모가 통화하는데 엄마가 막 아프다는 거야. 그러니까 막 기분이 더 이상해서, 엄마가…
엄마가 보고 싶었어.
*
가까운 이의 죽음의 기억은 지켜본 이들에게 상흔을 남긴다. 어떤 형태로든.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아니 어린아이이기에 어쩌면 더더욱 깊이 남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다 자란 어른에게마저 상처를 남기는데.
- 엄마. 많이 아파?
민아가 가까운 어른의 죽음을 연달아 지켜본 것이 이 아이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건수는 자기 상황에 쫓겨 아이의 마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엄마 실격이다. 진짜.
“아니야. …엄마 많이, 안 아파.”
건수는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목이 아팠고, 다른 의미로 목이 멨다. 보고 싶다는 아이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서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제 꼬락서니는 애를 안심시키기는 커녕 더욱 걱정시킬 게 뻔했다.
- 엄마. 아프지 마…….
민아는 급기야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고, 건수도 덩달아 조금 울었다.
괜찮아, 엄마는 괜찮다고. 엄마는 괜찮을 거라고 계속해서 다독이면서.
*
- 창민 삼촌이 있어서 다행이야.
건수는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 엄마한테 전화했는데 엄마는 안 받고, 그래서 막, 창민 삼촌한테 전화 걸었다? 그러니까 창민 삼촌이 자기가 가서 봐주겠대.
이어지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 엄마 불낙지죽 좋아한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창민 삼촌이 막 웃었다?
민아는 잘 모르겠다는 듯 왜 웃었지, 하고 말했다.
- 창민 삼촌이 죽 사 간다고 했어. 엄마 죽 먹었어?
“아니. 그…….”
건수가 박창민을 돌아봤다. 박창민은 죽 체인점 로고가 그려진 용기를 건네줬다.
“어. 줬어. 그, 맛있더라.”
- 다행이다. 내가 엄마가 불낙지죽 좋아한다고. 꼭 그거로 사야 한다고 했어. 잘했지!
“…그래.”
건수가 봉지를 열어보니, 죽이 맞기는 했다. 죽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죽이기는 했다. 불낙지죽은 아니고, 야채죽이었다.
건수가 박창민을 흘겨보자 박창민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래 저놈이 나 좋은 일 할 리가 있겠냐.
- 엄마 있지. 내가 가면, 따뜻한 죽이랑 해서 엄마 방에 가져다줄게.
- 저번에 아팠을 때 말이야, 엄청 아팠는데. 엄마가 그래서 있지. 경찰서 안 가고 옆에서 오래 있어 줬잖아.
“…….”
- 엄마가 일 못 가게 해서 미안했는데. 근데 있잖아. 너무 좋았어.
건수는 자신이 어릴 때를 생각한다. 아이에게 돌봄 받았던 기억은 크게 남는가 보다. 그때는 어른들이 참 커 보이고 자신은 참 작게 느껴졌다.
- 그래서 있지. 나도 엄마 챙겨줄래.
그럼 언젠가 민아도 자라 어른이 되어 혼자 앓아야 하는 순간마다 그때를 떠올리게 될까.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
“고마워. 민아야.”
언젠가는 홀로 남겨지더라도.
거동하지 못해 병원의 신세를 지는 무력한 몸이 되더라도,
어른이 된 자식의 뒷모습만 쫓게 되더라도.
끝에는 자식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는 날이 언젠가 오더라도,
“엄마는 우리 민아밖에 없어.”
지금 건수는 이걸로 족했다.
*
“고건수. 너 우니?”
전화가 끝나고도 건수는 콧물과 눈물을 훌쩍였다.
“더럽게.”
손으로 쓱쓱 닦고 있자니 박창민이 티슈를 내밀었다. 건수는 티슈를 팍팍 뽑아서 코를 세게 풀었다. 그러다 문득 제가 울다가 웃는 추태를 이놈 앞에서 다 보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뭐 됐다. 어차피 지금 머리는 떡지고 땀에 절은 몰골일 텐데. 이놈 앞에서 뭐 좋다고 단장하고 다니냐.
“야. 그런데 왜, 야채죽이야. 콜록. 민아가 어, 지정까지 해줬는데.”
“감기 걸렸을 때는 야채죽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박창민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건수가 더 아연했다. 저를 골리려고 일부러 한 게 아니었나.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근데,”
박창민의 손이 불쑥 가까워지더니 제 이마를 짚었다.
“고건수 너 진짜 뜨겁네.”
심지어는 지 이마를 들이대기까지 했다.
“씹! 콜록, 콜록. 너 뭐 하는-”
“평소에도 높은데, 지금은 더 높아.”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이 새끼는 가끔 이상한 데서 이상하게 반응하곤 한다.
“신기하네. 천하의 고건수도 감기에 걸리니까 기운이 없네.”
별. 감기 걸린 사람 처음 보냐.
지척에서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제가 싫어하는 재수 없는 눈깔이 가깝다. 눈에 담긴 건 걱정은커녕 순수한 호기심뿐이라 건수는 이놈의 성정을 익히 잘 알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건수가 박창민의 얼굴을 밀었다. 젠장. 아파서 힘도 안 들어간다.
“제발 좀, 쿨럭. 꺼져.”
창민이 눈썹 한쪽을 휘더니 침대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저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된다.
“너무 하네. 고건수. 아까는 그렇게 매달리더니.”
“개소리, 콜록. 하지, 마.”
“개소리 같아?”
이불 속으로 불쑥 손이 침범해 들어왔다.
“고건수. 열을 내리는 데는 약 말고 다른 방법도 있는데 말이야.”
땀에 젖은 옷 안까지 순식간이었다. 축축한 제 몸과 달리 박창민의 손은 건조했다.
옆구리부터 겨드랑이까지 쓸어올리자 건수의 등허리 솜털이 삐죽 속았다.
“이 미친, 콜록. 새끼가-!”
“아프니까 고분고분하네…….”
입만 살았다니까. 박창민의 손이 제 가슴 끝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건수가 신음했다. 손은 이내 배꼽 근처로 내려와 뭉근하게 압박했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잘도. 박창민이 익숙한 길을 찾듯 제 몸을 만진다. 아픈 몸에는 작은 자극도 큰 고통으로 느껴졌다. 건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침입한 손이 팬티 위를 살짝 누른다. 기어이 팬티 안으로 기어들어 가려는 손을 건수가 간신히 제지했다.
“그만, 해, ×발 놈아.”
박창민은 순순히 물러났다. 제 위를 가린 그림자가 사라지자 간신히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놈 새끼 앞에서 조심성 없는 옷차림이긴 했다. 혼미한 정신으로는 제가 무슨 옷을 입고 잤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옷을 입고 잤는지. 자다가 벗었는지. ×× 근데 아픈 인간 건드는 이 새끼가 또라이 아니야?
“……너 설마 나 자는, 콜록. 동안 이상한 짓, 했냐?”
“글쎄. 이상한 짓 한 건 내가 아니라,”
박창민이 지긋이 저의 얼굴을 훑었다. 뭐야.
“고 경사겠죠.”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나 보네.”
“무슨.”
“혼자 보기 아까웠는데~ 찍어둘 걸 그랬네.”
진짜 뭔 짓 한 거야 이 새끼?
“죽 먹고 잠이나 자. 다음 주 부산항에서 거래 있는 거 알아 두고. 그때까지 몸 만들어두라고.”
…깜빡했다고 느낀 게 이거였나. 어쩐지 등골이 싸하더라.
“골골 환자인 채로 가고 싶으면 맘대로 하고.”
×× 진짜 이 ×새끼를 족치고 만다.
그럼 일단 기운을 차려야지. 건수가 비장하게 야채죽을 한 입 떠먹었다. 차가워. 이 새끼가 진짜. 최소한 데우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니냐.
건수가 한 손에 죽을 들고 하반신을 이불로 둘둘 만 채 어기적어기적 거실로 나갔다(어쨌든 이놈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다니지 않을 정신머리는 있었다). 거실 소파 한쪽에 제 옷이 성의 없이 널려 있었다. 바지로 손을 뻗는데 뒤로 확 끌어 당겨졌다.
건수의 몸이 붕 뜨더니 어딘가에 안착했다. 박창민의 어깨였다. 미친!
“야! 이거, 쿨럭, 안 놔?”
허공에서 건수의 팔다리가 휘적거렸다. 허우적거리다 죽을 놓쳤다. 내 죽! 닥치는 대로 가까운 창민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으나 박창민이 쉽게 빠져나온다. 성큼성큼 걷더니 침대 위로 저를 던졌다. 아오 ×발!
“아프면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누워있어.”
일단 나 환자라고! 건수가 거칠게 기침을 토했다.
“× 미친, 콜록. 곱게, 콜록. 눕힐 것, 이지, 사람을 던지긴 왜, 던져!”
제가 화를 내거나 말거나, 박창민이 죽을 데워왔다. 불낙지죽이었다. 야채죽만 사 온 게 아니었나.
뭐야 있으면 말을 할 것이지.
쟁반에는 동치미와 오징어 젓갈도 작은 그릇에 담겨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건 희영이 담근 물김치. 제법 안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
까닭 없이 속이 울렁인다.
“야.”
“바지도 좀.”
박창민이 저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왜. 뭐. 어쩌라고.
“감기 나을 때까지 바지는 잊어.”
“콜록, 야!”
“바지 입으면 또 빨빨 싸돌아다닐 게 뻔하잖아. 난 시체 나르기 귀찮아.”
이건 또 왜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니면 제 발로 걸어가서 주워오든가.”
“…….”
“그 이상한 고양이 캐릭터. 민아가 좋아하는 거지?”
×이발……. 건수는 수치심에 반쯤 졸도하고 싶었다.
“아주 깜찍하던데요. 고건수 씨.”
캐릭터는 민아가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캐릭터가 그려진 아동용 속옷을 사주려고 했는데, 그 라인이 성인 여성도 입을 수 있는 사이즈가 있었다. 이걸 찾아 입는 어른이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놀랍게도 수요가 꽤 있는 모양이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민아가 커플 속옷이라고 좋아해서 같이 샀을 뿐이다. 그거까진 좋았다. 하필 제 연이은 철야로 속옷 빨래가 밀렸고, 하필 여분의 팬티가 없었던 건수가 옷장 안에 쓰지도 않고 처박아둔 미개봉 팬티를 찾아 입기 전까지는.
어차피 혼자 있으니 상관없다 생각했다. 그걸 생각할 정신도 없었고. 근데 하필 이 새끼가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는. 알몸인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노의 화살은 돌고 돌아 결국 박창민에게로 돌아왔다.
…일단 죽을 먼저 먹자. 속이 홧홧하니 매운 게 당겼다.
“김치 낙지 죽…….”
“꺼내 먹어.”
아무래도 이 새끼는 배려고 남의 기호고 뭐고 그냥 종류별로 사 온 모양이다. 건수의 머릿속으로 죽 체인점에서 가서 여기서 여기까지 다 달라고 박창민이 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드라마 속 재벌 남주인공도 아니고. 하여튼 골 때리는 놈.
“곱창 먹고 싶다….”
“시켜 먹든가.”
“나-…….”
“…….”
“…….”
박창민이 뭐 하자는 거냐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그러게. 나 뭐하냐.
죽은 어쨌든 맛있었다. 죽 하나로는 양이 차지 않아서 하나 더 데워달라고 했다. 창민은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왜. 뭐. 어쨌든 데워주긴 했다.
뱃속이 따끈해진 건수는 약까지 먹고 자리에 누웠다. 자리에 누워 제 방안을 찬찬히 훑는다. 바뀐 문이 눈에 들어왔다. 부서진 방문 대신 문이 새로 달렸다. 귀책 사유가 있는 박창민이 돈을 내긴 했다. 문제는 새 방문 손잡이가 열쇠형인데, 그 열쇠 중 하나를 박창민이 가져갔다는 거다. ××새끼. 조만간 새로 바꾸고 만다.
본래 문에 달려있던 철제 옷걸이도 사라졌다. 이것도 박창민이 한 짓이다. 시선이 베란다로 연결되는 창문, 그리고 벽으로 옮겨간다. 최근에 액자가 늘었다.
제 미련과 상관없이 시간이 어쨌든 계속 흐르는구나. 갈 사람은 가고 남아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시간과 더불어 추억이 계속 쌓인다.
벽면 한쪽은 민아와 찍은 사진들과 민아가 그려준 제 초상화, 어버이날에 받은 카네이션이 중구난방 붙어있었다. …박창민의 침실 안에도 카네이션이 붙어있었지.
그걸 볼 때마다 건수는.
“…….”
속이 울렁거렸다.
뭐지, 체했나. 배고프다고 너무 급하게 먹었나.
시선이 바닥에서 멈춘다. 못 보던 가습기가 수증기를 뿜고 있었다. 저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웬, 가습기야.”
“방 안이 건조하길래. 담에 우리도 용량 큰 거로 하나 사야겠다. 그리고 실내온도가 높아서 좀 낮췄어. 난방비 걱정도 안 돼? 고건수 부자네.”
제가 자는 사이에 집안을 아주 휘젓고 다녔네. 정말이지 누가 집주인인지.
“여기가 네 방, 이냐. 콜록, 콜록. 치워.”
“이방 고건수 너 혼자 쓰냐. 방안이 칙칙해. 화초도 좀 더 갖다 놓자.”
제 앞에서 멋대로 남의 방을 꾸밀 계획을 떠들고 앉았다. 그러는 네놈 방은 더 칙칙하다 못해 삭막하기 그지없는 주제에 남의 방 가지고 품평은.
미친놈.
건수는 박창민의 인테리어(?) 계획을 한 귀로 흘렸다. 베개에 얼굴을 묻자, 익숙한 푹신함과 함께 어렴풋한 기억이 찾아든다.
희미한 기억 속, 잠결에 자신은 계속 곁에 없는 사람만 찾았다.
아파서 그런가. 자꾸 자신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잘 대해주지 못한 사람, 미안한 사람, 인정받고 싶었던 사람,
잡지 못했던 사람.
건수가 쌓인 메시지를 제대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희영과의 대화방은 1이 사라지고 자신을 걱정하는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거기에 자신이 예상한 타박은 없었다. 순수한 걱정뿐.
자기 일만도 바쁜 동생한테 괜히 마음 쓰게 했구나. 건수는 건강 하나 관리 못 한 자신을 다시금 자책했다.
“희영이가 엄청나게 걱정하더라.”
“희영이한테 잘해. 그런 동생 속상하게 하면 천벌 받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내가 알아서, 콜록. 해.”
그런데 이 새끼는 친근하게 남의 동생 이름을 막 부르고 앉았다.
“너, 뭐냐. 남의 동생, 콜록. 이름을 막, 부르냐?”
“뭐야. 질투해?”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몰랐어? 희영이랑 나 동갑이잖아.”
몰랐다.
“그거야 우리 고건수 형사님은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모르지.”
“지난번 술자리에서 친구먹기로 했잖아. 서로 말놓기로 했는데. 술 취해서 기억 안 나나 봐.”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 미친놈이 내 동생이랑 친구로 지내기로 했단 말이냐. 나 모르는 새 언제 그런 무서운 일이 벌어진 거야. 희영아. 이놈은 안된다 이놈은!
박창민이 얼굴을 푹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아, 진짜. 고건수.”
“뻥이야. 진짜 열 때문에 더 멍청해졌나 봐.”
고건수 표정 지금 ×나 웃겨…….
“…….”
그래서 결국 뭐가 뻥인 거지. 둘이 동갑이라는 거? 아니면 말 놓기로 한 거? 둘 다?
모르겠다. 희영이 오면 물어봐야지. 희영이 오면. 이 새끼의 말을 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희영의 메시지는 감기 걸렸을 때 주의할 점부터 박창민이 곧 방문할 거라는 것, 자기 방 안에 가습기를 갖다 쓰라는 말과 냉장고 안쪽 물김치의 위치까지 연달아 이어졌다.
마지막에는 언니는 자기 건강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다소 쓴소리까지.
어쩌면 희영이 전화를 여러 번 건 이유도 민아와 같았는지도 모른다. 병환으로 가족을 잃어본 사람은 이런 데 예민해진다. 어쩔 수 없이 남는 상흔처럼.
“애초에 고건수 형사님처럼 하고 다니는데 코로나 안 걸렸을 리가 없다니까요. 걸렸는데 모르고 지나간 거겠죠.”
그래.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건강하다는 건 제 자만일지도.
*
소중하게 아꼈던 것들은 제 손에서 떠나고 남은 건 미친 살인마 새끼와의 언제 끝날지 모를 악연뿐이다.
바닥에 죽 체인점 쇼핑백이 눈에 들어왔다.
[늘 감사한 당신께 드리는 속 편한 선물]
염병하네.
*
의지 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 없다. 돌봐줄 사람도, 내 곁에 더는 없다.
시야의 박창민이 걸린다. 아니. 그래도 이놈은 아니지.
“결국, 사람은 누가 옆에 있어야 해.”
갑자기 왜 그 말이 생각나는 건지. 엄마 이런 놈이라도 말이야? 어쩌면 이런 놈이라도 옆에 남자가 있다고 좋아하실지도 모르겠다. 참나.
역시 아픈 건 싫었다. 무엇보다도 무기력하고 무력해지는 게 싫다.
어차피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건수는 영영 알 길이 없는 일이었다.
박창민은 사자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았다. 얘가 외로워 보이지 않냐고, 짝을 하나 사주자고 개소리를 했다. 어쩌라고. 네 맘대로 해라.
박창민은 나갈 기색이 없다. 민아랑 희영이도 곧 올 텐데.
“난 백 퍼센트 확신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박창민에게 그걸 말해두는 게 좋을까. 팀장이 우리 뒤를 쫓고 있다고. 우리, 라. 박창민과 저를 묶어서 지칭하다니. 건수는 조소했다.
박창민에게 말을 해서 어쩌겠다고. 같이 대책을 세우자고? 제 목줄을 쥐고 있는 게 그놈인데. 정말이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떡해야 할까. 팀장이 말하는 투를 봐서는 자신은 최상호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참작해준다는 뉘앙스였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복도에서 할 만한 대화들은 아니었기에 우회적으로만 언급했지만.
아마 식사 자리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겠지.
……
약발이 도는 모양인지 솔솔 다시 잠이 쏟아진다.
사고가 점점 느려진다. 그 문제는 일단 낫고 나서 좀 더 생각해보자.
그런데 이놈은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을 참이지. 내가 잠들 때까지?
“너, 안가냐.”
만약 아까 잠에서 깼을 때 아무도 없었다면 나는.
“시체 치우기 싫다니까.”
…모르겠다.
“개소리. 희영이 곧. 콜록, …올 거야.”
깨어나면 박창민이 없을까. 계속 있을까?
“알아.”
가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나는 어쩌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아프고 졸리고 몸이 무겁고 생각도 점점 둔해진다.
자꾸 속이 울렁거린다. 아무래도 죽이 얹혔나. 자다 깨서도 낫지 않으면 소화제를 사달라고 할까. 오늘의 박창민은 어쩐지 사줄 것도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렇게 생각한 자신을 비웃었다.
아파서 일 것이다. 평소답지 않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몸이 아프다고 마음도 덩달아 약해져서는.
아픈 게 정말 무섭다니까.
*
파도처럼 외로움이 밀려오고 나간다.
그리움이 쓸려나간 자리에는-…
*
“너도 나이 들어 보면 알 거다. 내 나이 되어보면.”
엄마. 난 여전히 모르겠는걸.
“고건수 형사가 젊은 경찰 양반이랑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다고.”
“제가 좀 헷갈리거든요.”
다들 멋대로들 지껄이기는.
졸음이 밀려와 건수는 모든 질문을 유보한다.
*
언젠가는
새살이 차오를까.
*
*
잠들기 직전, 건수가 물었다.
…야. 너 불낙지죽이 뭐가 웃겨. 왜 웃었어.
죽도 꼭 자기 같은 거 먹길래.
그런데 난 불낙지죽이 불닭볶음면 이런 건 줄 알았거든. 감기 걸렸는데 그런 걸 잘도 처먹는구나 싶었지.
건수는 어이가 없었다.
박창민 이 새끼도 불닭볶음면 같은 걸 먹나. 도련님처럼 생겨서는. 건수는 상상을 시도하다 포기한다.
하여튼 재수 없는 새끼였다.
후기.
우미노 치카 작가의 <허니와 클로버>와 <3월의 라이온> 속 에피소드에 영향받았음을 밝힙니다. 영향받은 다른 작품들도 있겠지만, 명확하게 인지하고 쓴 건 이 두 작품입니다.
건수가 잠결에 전남편을 찾고, 창민이를 전남편으로 착각하는 장면을 보고 싶단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열을 내리는 다른 방법 이 대사를 한 번쯤은 써보고 싶었고. ai 건수와 대화했을 때 건수가 엄마와의 관계를 애증 관계로 언급한 부분이 흥미로워서 써먹었습니다. 하여튼 건수 같은 딸이 있으면 세상에 어느 엄마라도 생각이 많아질 것 같긴 하죠. 얘가 세상에 잘 꿰맞춰서 살아야 할 텐데...
아픈 걸 싫어하는 건수는 공식(?)에서 짧게 언급해주신 내용이기에 어떻게든 써먹어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 좀 더 단발적인 고통을 싫어한다는 뜻인 것 같지만, 감기처럼 길게 아픈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 어머니의 긴 투병 생활을 지켜보기도 했고(뇌피셜), 가장이니까 아프면 안 될 거고. 아파서 무력해지는 거 자체를 싫어할 것도 같고요. 그런 단상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 외에는 동인에서 언급한 건수를 구석구석 씻기는 박창민 밸런스게임ㅎㅎ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평소 팔딱팔딱 날뛰는 건수답지 않게 축 처진 고건수를 조금은 재밌어하고 신기해하면서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어떻게든 챙기는 창민이의 모습이 그리고 싶었습니다.
전남편 파트 진짜 신나서 썼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나온 적 없는 사람 가지고 뇌절하네요. 정말 수요 없는 공급이라 미안합니다. 중반 구상까지만 해도 창민건수라고 하기에는 전남편파트가 더 길고 창민이 분량이 양심 없네,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창민이 등장 파트를 실제로 쓰기 시작하자 분량이 길어져서 웃겼어요. 역시 창민이 대단하네... 어떻게든 본인 분량을 확보하는 이 남자.
쓸 때 쓰는 사람이 즐거운 게 1차 목표이지만 그래도 혹시나 이런 캐붕 팬픽이라도 다른 분들도 재밌게 읽으셨다면 기쁠 겁니다.
+ 박창민은 고건수가 팔딱팔딱 살아 날뛸 때를 재밌어하는 놈이라 죽은 듯이 있거나, 기운 없고 아픈, 무기력한 고건수를 그다지 재미없어, 할 거 같아요. 고분고분하게 굴라고 하지만 정말 고분고분하게 굴면 싫어하지 않을까.
07.
“****이요. 네. 열리네요. 네. 감사합니다.”
민아 생일이잖아. 하여간 이 집 인간들은 언니나 동생이나 조심성이 없다고 창민은 속으로 혀를 찼다. 뭐 제 알 바야 아니지만.
고건수의 휴대폰 비번도 민아 생일이다. 참 어지간했다. 제가 핸드폰을 만지는 걸 목격한 뒤로는 패턴을 추가한 모양인데 그것도 너무 쉬웠다. 고건수는 보안이 일 순위가 아니라 지가 기억하기 쉬운 게 우선인 인간이다. 그냥 비번을 바꿀 것이지. 고 형사, 경찰이 이렇게 허술해야 쓰겠냐고.
익숙한 신호음과 함께 창민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시에 센서 등이 켜진다. 어린 애 신발 한 켤레. 남자 구두 하나. 하얀 구두. 그 옆에 던지듯 벗어놓은 익숙한 워커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다른 신발 위에 얹어져 있다. 벗어놓은 꼬락서니도 제 주인을 닮았다. 창민은 그 옆에 가지런하게 제 신발을 벗어놨다.
“실례.”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더 가관이었다. 허물처럼 옷과 가방들이 안쪽으로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창민은 익숙하게 거실 불을 키고 안으로 들어섰다.
고건수는 옷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는 나쁜 습관이 있다. 물론 고건수의 나쁜 습관은 이것만은 아니었다. 치약을 중간부터 짜는 것, 샴푸 통을 쓰고 거품을 묻힌 채 그대로 두는 것. 씻고 나서 머리카락을 줍지 않는 것. 씻고 머리를 제대로 안 말리고 자는 것. 닦은 수건도 아무 데나 걸쳐 놓질 않나.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었다. 같이 사는 동거인으로는 최악이 아닐 수 없다. 창민은 처음에는 창민 자신의 집이라고 고건수가 일부러 지랄하나 생각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유감스럽게도 건수는 제집에서도 심했다. 창민은 속으로 희영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담배를 재떨이가 아닌 곳에 비벼 끄기도 했다. 그건 내 집에서만 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기껏 재떨이를 사다 놨더니.
동거인으로서의 고건수의 장점도 물론 있기야 하다. 주는 대로 처먹는다는 거? 가리지 않고 무던하다는 점이다. 어쨌든 제가 끌고 다니는 식당 음식들도 군말 없이 먹었으니까. 군말 없다 못해 가끔은 절 맛집 앱처럼 쓰는 것 같다. 저번에는 희영이네랑 갈 건데 거기 맛있냐고 묻질 않나. 창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번은 고건수가 냉장고 앞에서 우유 팩째로 마시고 있었다. 제가 주는 건, 물 한 잔도 조심하는 주제에 어떤 점에서는 놀라울 만치 경계심이 없었다. 그런 점이 우스웠다. 그 우유는 유통기한이 꽤 지난 우유였다. 이럴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정말 부주의했다(창민은 다시 한번 속으로 희영을 위로했다). 창민은 구태여 말하지 않고 고건수가 화장실을 들락거릴 미래를 기대했으나 별일 없이 지나갔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철위장이 따로 없다. 하여간 위장마저도 참 주인을 닮았다니까.
음식 외에도 비슷했다. 고건수는 제 욕실 찬장에 있는 스킨로션을 아무거나 그냥 발랐다. 질문도 허락도 없었다. 말도 없이 스킨로션을 처바르는 꼬락서니를 화장실 문에 기대 지켜보고 있자니 뭐, 왜. 꼽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잘 맞았던 모양인지 그냥 다른 걸 찾아 쓰기 귀찮았던 건지 고건수는 제집에서 자고 갈 때는 매번 그걸 썼다. 제 스킨 케어 제품은 그것 외에도 있었지만 고건수는 대충 스킨로션만 바르고는 쓰러져서 잤다. 안 바르고 잘 때도 많았다. 아저씨가 따로 없다니까. 최상호도 고건수보다는 더 신경 쓰지 않았을까?
둘 다 도찐개찐이려나.
어쨌거나 창민은 같은 스킨로션을 두 병 더 주문했다.
창민은 점점이 이어지는 고건수의 허물을 따라갔다. 얼씨구. 창민은 바닥에 떨어진 검은 스포츠 브래지어를 두 손가락으로 집어 올린 후 소파에 던졌다.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길에는 화분이 여럿 있다. 그중에는 제가 선물한 것도 있다. 알로카시아, 디펜바키아, 이건 산세비에리아였나? 희영은 마침 언니가 부주의하게 화분을 몇 개 부숴 먹었다면서 고마워했다. 그 화분이 제 언니의 머리에 부딪혀 깨졌다는 건 영영 모르겠지. 고건수는 옆에서 이만 갈았고, 창민은 고건수 형사가 참 칠칠치 못한다면서 맞장구를 쳤다.
창민의 시선이 제가 선물한 화분에 잠시간 머물렀다. 죽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 고건수가 신경 쓰진 않을 테니 아마 희영의 관리 덕분일 테다. 제법 보기 좋았다. 창민은 화분을 깨부술 일이 다신 없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고건수에게 달린 일이었다.
실내온도가 평소보다 높다. 고건수가 온도를 높인 모양이다. 이어지던 옷은 화장실 앞에서 한번 끊겼다. 화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고,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며 창민은 어쩌면 화장실에서 알몸으로 쓰러진 고건수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장실에는 고건수가 없었다. 화장실 바닥에는 정리하지 않은 목욕용품들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다 내려가지 않은 목욕물 위에 대야가 동동 떠 있었다. 창민에게도 제법 익숙해진 풍경이었다. 제대로 닦고 나오지도 않았는지 화장실에서 고건수의 방까지 물이 뚝뚝 흘러 있었다.
활짝 열린 고건수의 방 안에는 고건수가 없었다. 헐벗은 고치처럼 이불만 동그마니 놓여있다. 그리고 땀에 전 고건수의 체취가 약간.
침대 아래랑 장롱까지 뒤졌으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베란다로 이어지는 창문을 연다. 아쉽게도 매달려 있는 사람은 없었다. 창민이 전화를 건다. 뚜르르… 신호음은 고건수의 방에서 울리고 있었다. 창민은 탁자 위에서 고건수의 핸드폰을 찾았다. 익숙하게 암호를 풀어 핸드폰을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다 제가 아는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이건, ‘최선영’?
박창민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알기로 최상호가 사망한 뒤로 고건수와 최선영이 개인적으로 접촉한 일은 없었다. 서부서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까지야 다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도희철을 통해 얻은 정보 중에도 이런 건 없었는데.
최근에 뒤를 파는 놈들이 있더니. 이쪽이었나. 시기가 공교로웠다. 이 시점에서 최선영이 갑자기 고건수에게 접근한다? 우연치고 시점이 공교로웠다. 단순히 안부 인사 일수도 있겠지만, 글쎄. 그런 것치고 단어 선정이 의미심장했다. 최선영과 최상호는 절친한 동창 간이라고 했지. 그럼 이건 단순히 원한에 의한 복수, 그런 건가. 억울하게 죽은 친구를 위해?
원하는 것이 진실규명인지 한풀이인지에 따라 대처하는 법이 달라질 것이다. 똑똑한 인간이면 좋겠는데. 애초에 정말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면, 이런 식으로 들쑤시지도 않겠지.
귀찮게 됐다. 하여간 고건수와 엮이고서는 피곤한 일들 뿐이다.
어차피 근처 CCTV 영상은 다 파기했다. 수개월이 지나 증거다운 증거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더 파봤자 건질 수 있는 것도 없을 텐데. 이미 포크레인 운전사의 과실 선에서 정리된 사건이다.
문제는 고건수다. 고건수는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이미 친구를 한번 저버리고 딸을 택했으니 그 건에 대해서도 걱정이 되진 않는다.
창민은 고건수의 드라이브에 있을 메일을 유념하고 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삭제했지만 이미 만들어진 자료다. 분명 어딘가에 백업해 놓았겠지. 고건수가 꼼짝 못 하는 것을 자신이 붙잡고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그 메일이 보내질 리 없을 것이다. 창민에게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고건수를 믿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최선영은 제가 문자를 확인하는 것까지 계산에 넣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건 도발이었다. 혹은 시험이거나. 모종의 의도가 느껴지는.
최선영, 최상호, 고건수.
…이건 좀 더 알아봐야겠는걸.
창민은 평소보다 꼼꼼하게 고건수의 통화기록, 메신저 앱과 문자까지 마저 훑었다.
가장 많이 온 전화는 개새끼, 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
창민은 거실로 돌아갔다. 화장실과 희영 부부네 방, 민아의 방까지 뒤졌으나 고건수는 보이지 않았다.
고건수. 이 나이 먹고 무슨 숨바꼭질이야.
창민은 고건수가 집에 들어와서 허물을 하나씩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아니 욕실은 나중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약을 먼저 먹었을까.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자다가 중간에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식탁 위에는 약봉지와 물병과 컵이 정돈되지 않은 채 널려 있었다. 창민은 약봉지에 쓰인 약 성분과 먹는 방법을 읽어내린다. 발급 일자와 시간이 적혀있다.
[하루 3번. 식후에 복용할 것]
뜯겨 있는 봉지는 한 봉지였다.
의자 위에 수건이 걸려있다. 축축했다. 대충 수건으로 머리를 털다 말았겠지. 창민의 머릿속에서 씻고 따끈따끈하게 알몸이 된 고건수가 물을 뚝뚝 흘리며 냉장고 문을 연다. 창민이 고건수의 동선을 복기하며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미지근했다.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새로 꺼내 마셨다. 제가 이 브랜드 물을 즐겨 마시는 걸 안 희영은 냉장고에 몇 병씩은 꼭 쟁여 놓고는 했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희영의 언니는 원치 않을 배려일 테지만.
“하늘로 솟았나요, 땅으로 꺼졌나요.”
창민이 빈 물병을 허벅지에 툭툭 쳤다.
“빨간 머리, 고건수 씨.”
찾는 사람은 대답이 없고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윙윙 울렸다. 창민은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서 욕조 마개를 열어 남아있는 물을 뺐다. 물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배수구로 같이 딸려 내려간다. 창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욕실 수납장 안에서 수건을 하나 새로 꺼내 손을 닦았다.
수건을 발아래 깔고 물기를 닦으면서 고건수의 방으로 다가선다. 창문으로 다시 시선을 준다. 날아다니는 놈이니 혹시 모르지. 창민은 베란다를 확인하기로 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두 번째 물병을 깠다. 물병을 마시면서 화분을 툭툭 치며 거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소파 뒤쪽 커튼으로 다가서는 데 뭔가 걸렸다.
“…….”
커튼 아래, 반쯤 헐벗은 붉은 머리가 시체처럼 모로 누워있었다.
창민은 어이가 없었다.
“아, 건수야. ×나 놀랬잖아.”
무릎을 굽혀 바닥 온도를 잰다. 다른 곳보다 유독 서늘했다. 희영의 소유인 이 낡은 구축 아파트는 보일러 배관이 지나가지 않는 영역이 있었다. 본인이 온도를 높여 놓고 더웠던 모양이지. 본능적으로 시원한 곳을 찾아 기어들어 갔나 보다.
미친놈. 이러다 단명하지. 아주 감기 심해지라고 고사라도 지내지 그래.
“고건수. 죽었어?”
창민이 건수의 붉은 털 뭉치를 콕콕 찔렀다. 뒤척이며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감기가 독하긴 한 것인지 고건수의 얼굴이 시뻘겠다. 본인 머리카락 색처럼. 고건수가 잠결에도 끙끙댔다. 이마에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고, 뜨거웠다.
얇은 이너 한 장에 아래는 팬티 한 장. 고건수는 같은 침대에서 잘 때면 매번 껴입고 잠들었으나 아침이 되면 속옷 차림이곤 했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지 자는 중에 벗는 모양이다. 본인은 그런 자각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같은 침대에서는 자는 대게의 경우, 알몸으로 잠들었다. 고건수의 체질과는 무관했다.
땀에 젖은 이너가 달라붙어 가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난다. 축축하게 젖은 하얀 천 조각은 짙은 가슴 끝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창민은 시선을 잠시 그곳에 두다 천천히 내린다. 이내 하의에서 멈췄다. 웬일로 드로즈가 아니네.
민아 취향인가? 이상한 캐릭터가 그려진 삼각팬티였다. 우스꽝스러운 작태에 헛웃음만 나왔다. 털이 수북한 어른이 입기에는 지나치게 깜찍했다.
고건수가 뒤척인다. 움직임에 천이 말려 올라간다.
“추워…….”
그야 추우시겠지.
창민은 무방비하게 드러난 옆구리를 따라 물병을 굴렸다. 냉장고에서 나온 물병 표면에 온도 차이로 이슬이 맺힌다. 고건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을 쉴 때마다 배가 오르락내리락한다. 흉터도 따라서 부풀었다 오므리기를 반복한다.
고건수의 몸은 상체 하체 가릴 것 없이 멍과 흉터가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심한 건 복부에 난 흉터였다. 언젠가 범인에게 맞은 칼 때문에 길게 흉터가 남아있다. 상처가 깊었다고 했다. 한 끗 차이로 생사가 갈렸다던가. 그때 살아남은 걸 보고 동료들이 고 형사 목숨줄도 질기다고 말했던가. 그 이야기를 누가 했더라.
창민은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할 때마다 흉터를 꾹 눌러보고는 했다. 고건수는 그때마다 진저리를 치며 싫어했다. 이제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흉터일 텐데.
“엄마…….”
캐릭터 팬티를 입고 바닥에서 어기적거리며 엄마를 찾는 애 엄마라니.
“다 큰 어른이 모양 빠지게. 이게 무슨 꼴이니 건수야.”
손가락이라도 물려줘? 창민이 고건수의 입안으로 엄지를 밀어 넣었다. 평소보다 입안이 뜨겁다. 이물감에 고건수가 움찔한다. 무엇인지 가늠하듯이 혀가 제 손가락에서 미끄러진다. 입에 물린 게 뭔 줄 알고. 고건수가 제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문다. 입천장과 혀뿌리를 손가락을 세워 긁어주자 고건수가 으응, 하고 얕게 신음한다.
창민은 고건수의 입안을 가지고 한동안 손가락 장난에 열중했다. 손가락을 빼내자 타액이 늘어진다. 그대로 제 입으로 가져가 빨았다.
“…….”
이대로 두면 감기가 더 심해질 것이다. 어떡할까?
창민은 고건수의 비슷한 꼬락서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몸을 못 가누고 끙끙 앓는다는 점에선 생리할 때랑 비슷했다. 아니, 술이 떡이 되게 취한 때와 제일 비슷할까. 흐물흐물해서 공격력도 방어력도 없는 상태. 체온은 좀 더 높고 땀이 많이 흐르는 게 차이일까. 이럴 때의 고건수는 푹 찌르면 그대로 움푹 들어갈 것처럼 보였다. 실상은 근육으로 뭉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갓 찐 떡처럼 보이지만, 입에 넣으면 막상 맛이 없는.
고건수의 동료들 말마따나 목숨줄 질긴 고건수가 고작 감기로 죽을 것도 아니고, 며칠쯤 세게 앓는다고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다음 주에 부산으로 내려갈 일이 있었다. 고건수를 운전사로 쓸 예정이었다. 사실 오늘 연락한 이유도 그 건 때문이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은 건 행운이었다.
창민은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걸 선호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기야 했지만.
“…….”
어쨌거나 창민은 습관적으로 그 방법을 제외하고, 고건수가 빨리 낫는 편이 낫다는 결론에 이른다.
새로운 동업자는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었다.
창민이 고건수를 일으켜 세웠다. 고건수의 발이 질질 끌렸다. 여전히 누가 업어가도 모를 듯하다. 움직임이 불편했다. 창민은 건수를 그대로 번쩍 들어 올렸다. 고건수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다. 기력을 잃은 유단자는 제법 묵직했다. 머리통이 제 어깨에 기댄다. 추운지 어깨와 목 사이로 파고든다. 더운 숨이 창민의 목덜미에서 비비적댔다. 땀에 젖은 붉은 머리카락에서 고건수의 체취가 물씬 났다.
한창 할 때 고건수에게서 나는 냄새랑 비슷했다.
“…….”
내가 열이 올라서 어쩌겠다고.
창민이 성큼성큼 고건수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대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어주자 알아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옷을 입혀야 하나?
당연하게도 창민은 누군가를 간호한 경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고건수처럼 감기 걸렸을 때 목욕을 한다거나 팬티 바람으로 발코니에 기대자는 미친 짓은 해선 안 된다는 상식은 있었다.
고건수. 민아 키우려면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지. 가만 보면 몸이 꼭 두 개라도 있는 것처럼 군다니까. 고건수의 과로에 일조하고 있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워…….”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창민은 반쯤 비운 물병을 건수의 이마 위에 올려놓았다. 찌푸렸던 미간을 조금 피더니 색색거리는 숨이 가라앉는다. 물병을 쥐었던 제 손이 차가운지 뺨을 대고는 비비적댔다.
허.
“건수야, 너 뭐하냐.”
고건수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깼나. 깼으면 일어나서 약이나 좀 먹지 그래.
입을 달싹인다. 뭐라는 거야.
“일어났으면-”
“…선배…….”
*
“선배.”
“…….”
“선배……. 나 아파.”
“…….”
뱉는 말에 물기와 희미한 열기가 배어있다. 감기로 인한 것이 아닌 열기.
“나 지금, 힘들어.”
자신은 모르는 종류의.
“‘뭐가’”
창민은 입을 열었다.
충동적으로.
“‘…힘든데?’”
저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고건수가 제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을 리가 없으니까. 뾰족뾰족 날을 세운 고건수는 어디 가고 이 고건수는 무르다 못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냥. 다.”
창민은 질문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저를 딴 놈으로 착각하는 고건수도.
그리고 맞장구쳐주고 있는 저 자신도.
“<개새끼> 때문에 힘들어?”
고건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새끼가, 그 새끼가 상호 죽였어.”
일러바치는 거야? 창민이 실소했다.
“최상호가, 나, 때문에.”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가 돌아가셨어. 다 내가 잘못했대.”
이게 어린애의 칭얼거림인지 전남편에게 하는 하소연인지 목사에게 하는 고해성사인지. 청자를 착각한 고해성사는 계속 이어졌다.
“건수 네가 잘못하긴 했지.”
“미안, 해.”
웃긴 놈. 고건수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사과할 대상이 잘못된 것도 모르고. 지금 고건수는 어울리지 않게 풀이 죽어 끙끙대는 강아지 같았다.
고건수가 제 손을 계속 만지작만지작 댄다. 손가락 하나를 집요하게 지분거리더니 어?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왼손 약지였다.
“…….”
*
고건수가 찾는 건 손가락에 당연히 있어야 할 무언가였다.
아마 오래전에는 고건수의 손가락에도 있었을.
*
“‘괜찮아.’”
창민은 제법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목소리와는 다르게 뱃속은 점점 꼬였다.
“‘괜찮아. 건수야.’”
“희영이가…… 나랑 자기가 이제 고아라고.”
“우리 둘밖에 없다고….”
“…….”
웃기지. 우린 어른이 된 지 오래인데.
“그렇지만 있잖아. 사실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
고건수의 눈은 축축이 젖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우린 오래전부터, 이미… 고아가,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
잠과 열과 자기만의 슬픔에 취한 고건수의 말은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다가 왔다 갔다 했다.
창민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
“‘꿈꿨나 보네.’”
“꿈?”
그럴 리가.
“‘그래. 악몽 꾼 거야.’”
“꿈….”
“전부?”
“‘그래. 전부.’”
다행이다…….
고건수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진다. 평소의 고건수도 멍청했지만, 지금의 고건수는 평소보다 배는 멍청하다 못해 나사가 빠진 인간처럼 굴고 있다.
“선배 없는 줄 알고. 나…”
“선배. 문제… 모르겠어….”
고건수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풀 때까지, 곁에… 있어… ㅈ…”
고건수의 말꼬리가 늘어지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무엇에 안심했는지. 고건수가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고건수는 그러고 한참을 잠꼬대도 없이 잤다. 포장해온 죽이 창민의 발치에서 차갑게 식어갈 때까지.
그사이에 창민은 식탁과 욕실을 마저 정리하고 고건수의 허물을 소파 한쪽으로 치웠다. 민아의 방에도 들렀다. 제가 처음으로 선물했던 곰 인형부터 다른 장난감들, 함께 찍은 사진들까지 가득했다. 한쪽 벽면에는 키재기용으로 기린 그림이 붙어있다. 동물원 갔을 때 민아가 기린을 좋아했었지. 다음에 한 번 더 갈까.
제가 고건수에게 선물한 인형은 민아 방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창민은 그 인형을 챙겨 고건수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저번에 셋이서 간 놀이공원에서 산 인형이다. 고건수는 싫어했지만, 민아는 좋아했었다.
탁자 위에는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원래는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이 장식되어 있었다. 민아 사진이 어지간히 맘에 든 모양이지. 유치가 빠진 자리에 예쁜 새 이가 났다. 사진 속 민아는 가지런한 흰 이를 모두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
아마 곧 또 다른 이가 빠지겠지만.
키도 좀 더 자랄 것이고.
창민의 시선은 고건수의 방 벽에 붙은 카네이션에서 멈췄다. 뾰족한 카네이션 끝을 만져본다.
“…….”
이미 처음 봤을 때보다 민아는 꽤 자랐다. 볼 때마다 조금씩 자라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민아는 진짜냐고 자기 컸냐면서 좋아했다. 제 엄마를 따라잡고 싶은 모양이다. 시간이 좀 더 걸리기야 하겠지만, 아마 순식간이겠지.
좀 더 크고 사춘기가 오면 어쩌면 자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창민이 조금 웃었다.
고건수가 할 법한 생각이네.
어쨌든 창민은 민아가 잘 자라길 진심으로 바랐다.
고건수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
색색거리며 잠든 얼굴 옆으로 사자 인형을 가져다 댄다.
못생기고 성질 더럽게 생긴 게 역시 고건수를 닮았다.
“‘선배 나 아파’”
창민은 인형을 까닥이며 고건수의 말을 따라 했다.
“‘응 그랬어. 건수야.’”
오른쪽으로 옮겨 인형 머리를 끄덕인다.
“‘개새끼 때문에 힘들어?’”
“‘웅웅 나 힘들어’”
……지랄하고 앉았네. 뭘 하는 건지.
“고건수 씨.”
인형의 팔(아니 다리라고 해야 하나)을 움직여서 고건수의 볼을 꾹꾹 눌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너도. 나도.
고건수의 볼이 복어처럼 눌린다. 풀어진 미간이 다시 깊어지며 인상을 쓴다. 작게 욕설을 웅얼거린다.
창민은 아주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고도 할 일이 없어 화초 앞에서 잠시간 서 있었다. 이걸 내리칠까, 말까.
고건수를 깨운 뒤에 얼마 없는 나머지 천을 벗기고, 아니면 속옷만 벌려서 그대로-
“…….”
그래도 제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역시 이대로는 맛이 없어.
그렇게 화초의 생명이 조금 연장되었다. 집주인은 영영 모를 일이었다.
*
밤사이 고건수의 열이 오르내렸다. 그사이에 물병 몇 개가 냉동고에 들어갔다 나왔다. 고건수는 중간에 이불을 차거나, 제 열에 못 이겨 좀비처럼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했다. 그때마다 창민은 고건수를 침대에 칭칭 묶어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반쯤은 실천에 옮길 뻔했다.
고건수는 중간중간 꿈을 꾸는지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을 달싹이며 끙끙댔다. 신음 사이로 엄마, 희영이, 최상호를 찾았다. 정말 쓸데없이 감성적이다. 아마 제가 알 수 없는 일들과 감정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겠지.
사람이 아프면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건가. 지나간 과거에 대해서 후회를 해서 뭐 어쩌겠다고.
창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곁에서 본인을 돌보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곁에 없는 죽은 사람만 찾고 있는 꼴이라니.
고건수가 깨어나서 어떻게 반응하려나. 자기가 한 짓을 기억하긴 하려나. 고마워는 할까.
그럴 리가.
최선영 건은 나한테 먼저 말을 꺼낼까.
그럴 리가.
역시 귀찮아지기 전에 고건수를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창민이 마른세수를 했다.
피로가 몰려와 창민은 대답을 유보한다.
자신도 고건수의 꿈에 나올까. 인상을 쓰는 거 보니 제가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창민은 이왕이면 아주 지독한 악몽이길 바랐다.
*
새벽녘, 고건수가 우물우물 입을 달싹이더니 물을 찾았다.
“선, 배……”
무울….
“…….”
정말이지. 난 네 <선배>가 아니야.
창민은 잠든 고건수를 반쯤 세워 앉혀 물병을 기울인다. 당연히 잠든 사람은 물을 마시지 못한다. 흘러내린 물에 고건수의 앞섶이 축축이 젖어 든다.
칠칠지 못하게.
으응…
목, 말라.
알았다니까.
창민이 물병의 물을 머금는다.
“유감이야.”
어차피 꿈은 꿈일 뿐, 현실이 되지 못한다.
그대로 창민이 입술을 내렸다.
“어서 일어나라고, 고건수.”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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