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샘플 3

1차 / NCP / 약 8,000자 / 무협

커미션 by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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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사랑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팽가의 성을 쓰는 이가 남궁에 몸을 의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실 하북팽가 정도 되는 곳의 자제가 타 세가에서 지낸다는 것은 많은 것을 놓아주어야 함을 뜻했다. 성도를 다스리는 무소불위의 권력하며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는 환경 속의 안락함이 그러했고, 은근히 팽가를 남궁의 아래로 밀어 넣을 호사가들의 입방아 아래 짓이겨지는 자존심 역시 그러할 터였다. 얻을 것은 없는데 잃을 것은 너무도 많다.

방황을 끝내고 싶었더라면 제 가문으로 돌아갔어야지.

그런 한 마디가 모이고 쌓여 형체를 갖추더니 이내 어깨를 짓눌렀다. 귀 기울여 들은 적은 없었다. 다만 팽가의 하나뿐인 여식이라는 것이 저 꼴인데 오라비가 제정신이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버겁던가.

그럼에도 S는 안휘에 남기를 택했다.

상실을 두려워했다면 무림에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테고, 현재에 안주했다면 애당초 팽가에서 온실 속 화초로만 자라났을 것이다. 세간의 시선 따위를 의식했더라면 가문을 나와 사파로 돌아서는 일 역시 없었을 터. 방황하던 삶이 쌓아온 세월은 이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라 종용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좋았다. 잃는 것은 두렵지 않다.

무엇보다도 남궁에는 항상 그를 반겨줄 이가 하나 있었으므로.

‘M, 그… 괜찮다면 내가 남궁에 머물러도 될까?’

조심스러운 부탁에 대한 답은 담백한 의문이었다.

‘왜.’

짧게 돌아오는 물음에 되돌려줄 말은 궁하기만 해서, 말꼬리를 흐리며 그냥이라 변경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 또한 상대를 만족시키기엔 충분치 않았는지 여전히 무심한 낯 위로 떠오른 물음표는 그대로였지만. 타 세가의 사람을 안에 들이는 것이니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어찌 답을 해야 상대가 만족할까.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려니 여전히 담담하기만 한 재촉이 이어졌다.

‘할일이 그리 없나?’

이대로면 안 된다. S는 제 앞에 있는 이가 친분이 있든 없든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쏟는 이가 아님을 안다. 저 성정에 여기까지 기다려준 것도 많이 봐준 것일 터. 침묵이 더 이어진다면 어울려줄 시간 따위는 없다며 자리를 떠나 버릴 게 분명했다.

때문에 S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말을 예쁘게 꾸밀 수도, 예의를 지킬 겨를조차 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아니, 그게, 여기서 공부 좀 하려고…!’

건재한 팽가를 두고 남궁까지 와 수학을 하려는 이유는 저 역시 모른다. 그저 남궁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일 거절을 뱉는다면, 물러나기 전에 몇 번 정도는 더 매달려보지 않을까. 그만큼이나 제겐 간절한 일이었다. 그런 각오를 눈치챘는지, 아니면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지 잠시 말을 아끼던 상대는 고개를 돌리며 긍정의 답을 흘렸다.

‘마음대로 해라. 지낼 곳은 내어줄 테니.’

하여 S는 남궁에 머무를 수 있었다. 제 오라비가 갇힌 뇌옥에 진을 설치하는 것을 살피기 위해, 그 또한 이제껏 미뤄두었던 수학을 마저 이어가고자. 연모하는 이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길게 붙어 있을 수도 있었으니 이만하면 원하는 건 전부 얻었지 않나. 그럼에도 어찌 속에서 치솟는 불길은 잠잠해지질 않는지.

이는 일 년이 지난 후의 하북에서, 예상치 못하게 잠재울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가주와 그 외의 직계들만이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화합을 명목으로 모이는 오대세가 회의에서 S는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자그마치 그가 나고 자란 하북에서.

‘에?’

황망함에 바보 같은 소리나 겨우 뱉었던가, 잘 모르겠다. 다만 낯선 얼굴인 것을 보니 안면을 트지 않은 방계이거나 자신이 없는 새 들어온 식솔이거나 할 터였다. 옆에서 고운 미간을 찌푸리고 무어라 입을 열려는 M이 보였으나 S는 모른 척하고 떠밀 듯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의 다정은 항상 달기만 했으나 지금은 차라리 혼자가 나았다.

…어차피 제겐 팽가의 자격도, 남궁의 이름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회의에 참여한들 의미도 없을 테고.

밖에서 멍하니 기다리는 와중에도 상념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아무리 집을 나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용모파기 정도는 익혀둬야 하지 않아?

그럼 또 아, 하고 생각나는 것이다. 제 용모파기라고 해봤자 사파로 분류 당하며 생긴 것밖에 없구나. 정파로 난 주제에 사파로 빠진 직계라, 치부라 여겨져도 어쩔 수 없었다. 역시 팽가의 성을 쓰는 주제에 권귀라는 별호는 너무 실망스럽겠지. 명성을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있던 것들마저 내버리는 인간이라면 소개하기도 부끄러울 터.

…M도 그렇게 생각할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스쳐 지나간 상념이 목을 죄는 느낌이다. 차라리 저를 경멸하는 것이었으면 나았을진대, 아예 알아보지도 못하는 이를 두고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제야 깨달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S는 서서히 오대세가에서 잊히고 있었다. 자신이 몸 담았던, 과거를 함께 살았던 그곳으로부터. 그러니 그곳에 서 있던 것은 팽가의 막내 팽 S가 아닌 권귀라 불리던 한낱 사파인 중 하나였을 뿐이다. 분명 각오했던 일이이건만 그게, 괜스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나, 무림맹으로 갈까 해. 이제 방황은 그만하려고. 또… 할멈도 세상을 좀 더 돌아보고 오라 했거든! 그러니까… 작별 인사를, 할까 해서….’

들불처럼 번지는 불길이라면 길을 터주면 되는 문제였다. 방황하던 이라면 돌아갈 곳을 만들어주면 되는 문제였고. 무림맹에 투신하겠노라 다짐하는 이를 앞에 두고 M은 항상 그래왔듯 담담하게, 그러나 자신이 바라던 무심한 온정을 띈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라면 알아서 앞가림 정도는 할 테지.’

오는 것도 멋대로였던 주제에 가는 것 역시도 그러하군.

덧붙이는 말에 웃어주는 걸 끝으로 남궁에 의탁했다던 팽가의 사람은 안휘를 떠났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했던가. 가솔들은 종종 그의 소식을 들고 왔다. 어느 지역으로 가 혈교를 상대했는지부터, 그뿐만 아니라 어느 날에는 수적을, 어느 날에는 산채를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맹에 들어가 새로 쌓은 친분에 대한 것들도 들었고, 알음알음 새로운 별호가 붙었다는 소문 역시도 들었다. 대부분의 날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흘러갔으나 가끔 그가 떠오를 때면 M은 창가에 앉아 무림맹이 있을 방향 어드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짧지 않은 시간을 쌓으며 더욱 단단해져 있을 이의 모습은 어렴풋이나마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저보다 커다란 체구로, 전부는 해소되지 않았을 불길의 잔재를 애써 덮어대는 몰골로,

분명 어렸을 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로 웃을 터였다.

그러기를 삼 년, 지난 혈투를 잊기엔 이르나 안온에 취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죄인을 가둬둔 지하 동굴에서 혈교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잔챙이들일 뿐이다. 망설이지 말고 전부 베어내라.”

검이 지나간 궤적마다 짙은 어둠 위로 붉은 선혈이 튀었다. 날붙이가 살을 꿰뚫는 소리, 붉은 웅덩이를 밟는 발에 달라붙는 질척임, 고통을 참는 신음과 분노에 찬 기합. 전장에서 지겹도록 마주했던 것들이 자그맣게 축소되어 지하를 메웠다. 누구 하나 쉬이 말을 꺼내는 법이 없는데도 귀가 먹먹하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고막에 눈가를 막 찌푸렸을 무렵, 희뿌옇게 흐려지는 소음들 새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년이 전부 허상이었던 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저 지긋지긋한 혈교가 이리 쉽게 쓰러지진 않을 텐데. 여전히 그날의 전장에 저 홀로 남아 있어 저들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의 끝에 마침표가 찍힐 무렵, 동쪽에서부터 대열이 흐트러지는 게 기감에 잡혔다. 찰나에 돌린 시선에는 오로지 창천, 하늘만이 있었다. 서로 검을 겨눈 두 사람. 한 명은 아득하게 먼 시선으로 멍하니, 다른 한 명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 봐, 정신 차려!’ 처절하기까지 한 외침도 잠시였다. 몇 초의 대립 이후엔 똑같은 눈빛을 하고서 몸을 돌린 채 다른 이를 향해 검을 겨누었으니까.

혼란은 물 위로 먹을 떨어뜨린 것처럼 급격히 퍼졌다. 몸집을 키워가는 파도가 동쪽에서부터 M이 있는 서쪽으로까지 넘실거리며 다가왔다. M은 파도의 본질을 어렵지 않게 꿰뚫었다.

“…세뇌인가.”

손에 들린 흑야를 한 번 허공에 내리긋는 것으로 피를 털어낸 M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갔다. 오로지 저 하나를 향해 쏟아지는 검날을 피하며 맨몸으로 파도를 뚫고 나간 이가 파도 너머로 도망치려 한 혈교인의 목을 베어냈다. 그럼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여전히 M은 파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술을 행한 이가 죽어도 소용없나 보군. 짧은 감상을 마친 후엔 다시 검을 들었다. 남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던 가신들이 이제는 남궁을 향해 검을 들었다. 우습지도 않은 촌극이다. 드높은 하늘이 고작 검 따위로 베어질 것이라 여기기라도 하는지.

“원망은 말도록.”

원망을 해야 한다면 세뇌에 걸린 그 나약한 정신머리를 원망해라.

M은 망설임 없이 가장 앞선 가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세뇌가 먹물 번지듯 퍼져가는 것이라면 망설임은 비수가 되어 되레 그의 목을 뚫으려 할 테니. 다만 가주님! 하는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은 음성이 그를 잡아채지만 않았어도 저 목을 베어냈을 텐데.

어린 목소리다. 저와 닮았되 닮지 않았으며 감히 스스로 남궁의 소가주라 일컫던 아이의 것이었다. 툭하면 S와 함께 붙어 제 눈치를 살피고 관심을 바라던, 그런 아이의 목소리가 무작정 안 된다고 외쳐댔다. 무엇을? 되물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흑야의 날은 허공만을 베어내었고 이를 악 문 자신이 손잡이로나마 가신의 뒷목을 내리쳐 제압했으므로. 그러니까, 차마 베어내지 못했다는 말을 쓰는 것이 옳다.

한 명을 제압할 때마다 하나의 상처가 생긴다. 대부분은 약간 쓸리거나 부딪히는 정도였으나 여럿이 덤벼들 때는 그 역시도 피를 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피를 내어주었는데 살을 취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살을 내어준대도 뼈를 노리기는 요원해 보이고. 지극히 불공정한 처사이며 계산이었음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말마따나 나약한 정 따위에 휘둘려 귀찮은 짓을 사서 한 셈이었으니.

그깟 정이 뭐라고.

일단락된 사건의 뒷수습은 가솔들에게 맡기고 M은 지하를 벗어났다. 더는 전장도, 지옥도 아닌 곳으로 올라온 후에야 숨이 트였다. 이곳은 몇 년 전의 그 무저갱이 아니다.

“―M!”

붕대를 동여매고 있자니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예의 그 환청이라 여기기엔 방향도 명확하니 아마 실제 사람일 터였다. 현실을 살고 숨을 쉬는 사람. 체격은 저보다 훨씬 커다란 주제에 늘 어리게만 굴고 그리 느껴지는 이. 고개를 틀어 그 짧은 새 가까워진 거리 너머 S를 바라본 M이 드물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떡해. 피가…! M, 괜찮아? 약 필요 할까 봐 가져왔어. 물론 남궁에도 충분히 있는 건 알지만! 그냥 걱, 걱정이 되어서….”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 이의 눈시울은 이미 한 차례 울기라도 한 것처럼 붉었다. M은 S의 이런 얼굴을 알고 있다. 그가 이제 막 별호를 따고, 상대가 아직 팽가를 떠나지 않았을 적. 범람하는 애정을 어찌하지 못해 꾸역꾸역 삼켜내려 들던 때에도 이렇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때는 둑이 무너지기 전에 자신이 수문을 열어주었다. 쏟아지는 연심을 마셔주지는 못해도 옷자락 끝 정도는 담가주면서, 그렇게.

달리 말하자면, S는 이번에도 쉬이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근방에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한 것 같은데.”

“피가 너무 많이 나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S.”

“붕대, 붕대가 더 필요할 거 같아. 의원은 어디 있어? 내가 데려올게. 조금만 기다려, 응?”

본래 S는 M의 말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였다. 붕대 위로 번져가는 붉음이 지나치게 자극적인 탓이었다. 난, 의술은 배운 적 없단 말이야….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가 주변을 힘없이 맴돈다. 그제야 M은 S의 불안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아챘다. 그것이 하등 쓸모없다는 사실 역시도.

“그만.”

S의 것보다 작은 손아귀가 그의 손목을 잡아챈다. 나는 괜찮으니 진정해라. 시선을 마주하고 답지 않게 입술을 느리게 벌렸다 다물기를 반복하면 단어 하나가 완성된다. 그것이 다시 여러 번 반복되면 문장 하나가 되어 혓바닥 위를 매끄럽게 유영한다. S는 이제 막 첫 숨을 틔워낸 생명체처럼 그 말을 따라 더듬어보다 이내 입술을 즈려 물었다.

“M…. 나는 정말, 로 무연이 잘못된 줄, 알고….”

숨이 거칠어진다 싶더니 이내 물기에 젖었다. M은 제 몸을 감싸오는 온기에 잠시 멈칫했다가 그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심장 소리라도 들려주어야 할까. 하지만 그건 제법 귀찮은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둑이 무너졌으니 물이 전부 쏟아진 후엔 평소와 같이 평화롭게 흐르는 강줄기가 반겨줄 터. 굳이 그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이 패왕이 고작 이런 일에 죽을 이로 보였나?”

“아니, 그건 아니지…. 그래도 피가 이렇게 나니까….”

S는 품에 안은 이를 조금 더 바짝 당겼다. 저보다 작은 몸이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우스운 이야기임을 알지만 제 시선이 닿는 곳에 두고 지켜주고만 싶었다. 이렇게 피를 흘리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위험에 처한다면 가장 앞장서서 길을 뚫을 수 있도록.

“나는 M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걸 뭐라 부르지. 그는 아직도 서툴렀고 무지했다. 자신보다 강한 이를 지키고 싶다는 욕망을 오만 말고 다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던가. 물기에 젖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S가 느리게 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이 와중에도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이 불길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불길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금 이 순간 어느 때보다도 이성적이었다.

“…M, 있잖아.”

숨을 가다듬고 손에서 힘을 푼 S가 거리를 벌렸다. 앉아 있는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자 자신은 바닥으로 내려가 무릎 하나를 땅에 내리고 나니 의아한 눈길이 와닿는다. 듣고 있다. 항상 듣던 그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돌려준다. 그 여상함에 그래, 정말 잘못되지는 않겠구나, 깨달은 후에야 불길이 꺼진 자리에 새로이 채워진 감정을 읊어보았다.

“괜찮으면, 내가… 남궁에서 머물러도 될까?”

상실을 두려워했다면 무림에 발조차 들이지 않았을 테고, 현재에 안주했다면 애당초 팽가에서 온실 속 화초로만 자라났을 것이다. 세간의 시선 따위를 의식했더라면 가문을 나와 사파로 돌아서는 일 역시 없었을 터. 방황하던 삶이 쌓아온 세월이 이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라 종용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좋았다. 잃는 것은 두렵지 않다.

아니, 나는 M을 잃는 게 두려워.

다른 모든 걸 잃는다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그는 안 돼. 목구멍 너머로 삼킨 울음을 대신하여 M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인 S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내가 M의 호위가 되게 해줘. 곁에서 지켜볼 수 있도록, 팽가의 성을 쓰더라도 내가 당신 앞을 지키는 것이 당연해지도록, 그리하여 내가 안도할 수 있도록.

여전히 아이처럼 구는 법밖에 모르는 이를 내려다보던 M이 입을 다물었다. 호사가들이 지칠 줄 모르고 입을 열어댈 터다. 입방아 위에 오르는 것은 남궁과 팽가일 테지. 제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떠나고 나면 그제야 멈췄던 호흡과 함께 이야기를 퍼뜨려 댈 것이 눈에 훤했다. 하나 그것이 저와는 무슨 상관이던가. 자신은 애초에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둔 적이 없었다.

M은 여기서 어떤 답을 해야 할지 알았다. 무르익지 않았던 과실이 열렸던 그 날의 여름과 같은 답이면 충분할 터다.

“그래.”

여름은 여전히 길었다.

열병이 가시고 난 후에도, 여전히 떨어지는 눈물이 뜨거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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