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제레 / 비긋기
드래곤네스트
밤새 별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날이 흐리더니 동이 트기 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거리며 잘게 흩어진 빗방울은 아르젠타와 제레인트가 움직일 때마다 팔이며 다리에 들러붙었다. 딱히 비를 피할 이유는 없었지만, 피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겨우 몇 시간 쉬어간다 해도 케이어스의 조각들이 크게 잘못되거나 날뛸 리는 없었다. 비가 오니 잠시 쉬어간다는 것을 제레인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르젠타의 제안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두 명이 비를 긋기에 충분한 나무 아래, 아르젠타와 제레인트는 자리를 잡고 편히 앉았다. 한 뼘 떨어져서 본 빗방울은 섬세하게 짜인 천처럼 가늘고 얇았다. 제레인트는 안개 같은 비가 신기한지 허공에 손을 휘둘러보거나 혀를 내밀어보았다. 아르젠타는 제레인트의 곱슬머리가 제멋대로 말려 올라가는 것을 정리해주다 이내 그만두었다. 평소보다 배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씨름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비는 무척 비밀스럽고 고요하게 내렸다. 형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나무 아래 역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레인트는 이따금 아르젠타를 힐끔거리며 날개를 펄럭거렸다. 아직 제레인트는 사람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날개를 꺼내놓고 있었다. 드래곤의 것이라고 하기에도 우스울 만큼 작은 날개가 비에 젖어 처진 것을 보며, 아르젠타는 일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을 재빨리 지워버렸다.
드래곤은 비를 맞아도 체온이 내려가거나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당연하다는 듯이 제레인트를 걱정한 것은, 너무 오래 인간들과 있어서 약한 사고방식이 옮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아르젠타는 일축해버렸다.
제레인트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인간들과 함께 있게 된 지 벌써 50년. 드래곤에게 있어서는 눈 깜짝할 순간인 그 섬광의 시간이, 마치 어두운 곳에서 불을 켰을 때 앞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눈이 부셔 그만 잠시 눈이 멀어버렸던 것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수천 년을 살아온 긴 인생에서 인간과 얽혀서 좋게 끝났던 일은 없었다. 인간들을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여기던 제레인트도 결국은 인간들 때문에 죽었다. 아르젠타는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레인트의 죽음을 고하며 보옥을 건네던 인간이 떠오르는 탓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언제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치밀어오르는 짜증과 한탄과 슬픔, 그리고 그 인간을 떠올리면 아려오는 마음이, 아르젠타는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감정에서 고개를 돌렸다. 인간들 때문에 울고 화내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미 몇 천 년 전에 충분할 만큼 했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답지 않게 상념에 젖어 있던 아르젠타를 현실로 끌어낸 것은, 망토를 잡아당기는 제레인트의 손짓이었다.
“실버 드래……, 아니, 아르젠타.”
“뭐야?”
호기심이 많은 아이니까 또 무언가를 물어볼 것이 분명하다고, 아르젠타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제레인트가 조심스럽게 손을 잡자 아르젠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형처럼 작고 부드러운 두 손은 아르젠타의 손을 덮었다. 꼭 쥐면 빗방울처럼 잘게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손은 너무나도 낯설었지만, 제레인트는 아르젠타에게 무척이나 익숙하고도 그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르젠타, 손이 차가워. 엘프가 그랬는데, 차가우면 아프대.”
걱정과 친애를 담은 적동색 눈동자가 아르젠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앳된 고집이 가득한 눈 그 속에서, 아르젠타는 그리운 형제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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