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초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 6차시…. 모종의 이유로 초안에서 퇴고를 못하고 있음. 언젠간 하겠지, 언젠간….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물체는 크게 보인다. 한 자리에 못 박힌 물체를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면서 쳐다보면 눈에 보이는 크기가 점차 커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이유도 배워서 알고 있다. 이런 당연함을 어슐러 K. 르 귄은 <길의 방향>에서 완전히 뒤틀어버린다. 상대성 이론을 테마로 잡았다는 글답게 읽어나가다 보면 시점과 요소가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툭 걸린다. 걸려 넘어진 자리에서 낯설어진 글을 들여다본다. 상대성 이론은 낯설게 하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절대적이라고 믿어온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은 몇 번이고 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이를테면, 수학. 견고한 정의로 뼈대를 세우고 분명한 답을 육신으로 삼았으니 절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과목은 폭풍처럼 수의 개념을 갈아엎어 댔다. 1, 2, 3 같은 자연수만 숫자라고 불렀던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들어가면 음수와 유리수, 더 나아가 무리수와 실수를 배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는 “허수라는 게 있는데-”하고 운을 뗀다. 새로 만난 개념 앞에서 몇 번 울상을 지었던가. 겨우 익혔다 싶은 낯선 세계는 매년 “사실은-”이라면서 뒤통수를 때렸다. 과학 이론이라고 다르지 않다. 단단한 지반이라고 배운 정의가 몇 번이고 깨져서 다시 붙으며 넓어졌다. 가장 굳건하다고 믿었던 수학이나 과학조차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에 따라,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현상이 발견되면 바뀐다. 어른이 된 지금은 어떤 학문이라도 절대적인 정의가 없다는 걸 안다. 상대적인 것투성이다. 하물며 내가 보는 세상이나 나 자신이라고 안 그럴까.

내가 상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면 발밑이 훅 꺼지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 상대적이란 말을 불안정하다고 읽지 않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읽어보면 어떨까. 왜냐하면 ‘나’는 여기 분명 존재하니까. 세상 많은 것이 상대적일지언정,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존재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이다. 《살구 칵테일을 마시는 철학자들》의 첫 장에 나온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자. “나는 하고자 선택한 것들을 통해 스스로 본성을 만든다. 물론 나는 나의 생물학적 한계나 문화나 개인적 배경에 의해 영향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떤 것을 합해도 나를 만드는 완전한 설계도가 될 수 없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내 자신을 구성하며 내 자신보다 한발 앞서가 있다.” 인간은 선택이라는 자유를 가지고서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니 좋은 상태건 나쁜 상태건 지금 모습이 영원하지 않고 지금을 사는 내 선택에 따라 차곡차곡 모양을 바꿀 수 있다. 돌연 낯설게 비친 세상을 받아들일 유연함이 있다면, 선하기를 원하며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 내일의 나는 오늘보다 한 발자국 괜찮은 사람이지 되지 않을까. “삶은 생각이 되고 생각은 다시 삶이 된다”던 메를로퐁티의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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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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