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

오늘의 벚꽃

“나 안 이상하지?”

”같은 질문을 다섯 번째 하고 있으니까 좀 이상한데….”

아, 내가 잘 보일 사람이 있단 말야. 그건 그렇고 정말 괜찮지? 일은 한 시간째 안절부절못하며 교실 한구석의 거울 앞을 떠날 줄 몰랐다. 머리가 괜찮다 싶으면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들고, 둘 다 괜찮다 싶으면 목소리가 어쩐지 어색하고, 그애를 떠올리면 어쩐지 거울과 눈도 잘 못 맞추겠고… 그렇게 장장 이십 분을 거울 앞에서 허비했다. 저 범생이 녀석이 관심을 가지는 애가 있다니! 흥미롭게 지켜보던 친구들도 슬슬 질렸다는 양 하나둘씩 곁을 떠나갔다. 이어붙인 의자 세 개에 길게 드러누운 친구가 말을 얹었다.

”그 후배 때문이지? 하여간 유난은. 그러다 대학 떨어질 텐데~.”

”유난이라니, 나 엄청 진지하거든?”

친구에게 꿀밤 놔 주는 시늉을 하고 일은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후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오후에 그애와 함께할 생각 뿐이라, 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성적이 떨어지는지 알 것 같았다 - 그전까지는 궁색한 변명인 줄 알았다 -. 네 시에 만나기로 하면 세 시부터 기다려진다고 했었나.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두근거리던데. 오늘따라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지, 수업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남은 기분인지….

창문을 지나 손등을 간질거리는 봄볕이 따사로웠다. 점심을 든든히 먹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제 두 시간만 더 있으면… …


”괜히 제가 시간을 뺏은 건 아닐까요?”

”아니요, 전혀요! 자고로 봄에는 벚꽃 구경을 해야죠. 그리고 선배와 함께라서 더 좋은걸요?”

예상대로 바보 같은 말부터 나왔다. 거울 앞에서 그렇게나 연습했던 게 무색해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자신감 없이 시작할 건 뭐람, 수아가 기운차게 대답해 줘서 망정이지. 손 잡고 갈래요? 그가 머뭇거리고 있자면 수아가 가볍게 물으며 손을 내밀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곧바로 맞잡았다. 아, 잠깐 망설였는데 그건 눈치채지 못했길 바라야겠다.

벚꽃 만개한 공원은 당연하게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수아가 입을 열고 무어라 말을 하면 주변 소음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탓이다. 수아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보았던 벚꽃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글쎄, 안에 벌이 있지 뭐예요! 조곤조곤 말하고 종종 맑게 웃었다. 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가만 그를 바라보았다. 큰일이네. 명분은 벚꽃을 보러 온 건데, 자꾸 네게만 눈이 가서…. 그러다가 수아가 질문을 던지거든 그는 잠시 고민하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선배는 벚꽃을 좋아해요? 자주 보러 가셨나요?”

”… 아니요. 몇 번 보러 가긴 했지만 그마저도 기억에 크게 남지는 않았어요.”

가족들은 늘 바빠서 벚꽃놀이를 함께한 기억 자체가 없었다. 아주 어린아이일 때는 다녀왔을 법도 하나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친구들과는 몇 번 함께했지만 바닥에 쌓인 꽃잎을 보며 저걸 다 어떻게 치울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사실 수아가 아니었다면 구태여 꽃을 보겠다며 시간을 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 시간에 공부를 조금 더 하는 게 유익하니까.

”그래도 오늘의 벚꽃만큼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네요.”

하지만 그 풍경에 네가 함께한다면 분명 달라지겠지. 너의 목소리와 웃음과 이야기 같은 것들이 기억 속에 물든다면 나는 오늘을 분명 잊지 못하리라고.

정말요? 수아는 기쁜 투로 말하고는 잡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더 할 말이 있는 듯 고민하는 눈치였기에 일은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을 가르고 꽃잎 한 장이 수아의 머리카락에 붙었다. 그걸 떼어 주려 손을 뻗으니 거리가 부쩍 가까워졌다. 그때 고민을 마친 수아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도 종종 보러 오실래요? 그러면 선배의 기억 속에 꽃이 가득 피겠죠. 아, 이 공원은 여름에 해바라기도 예쁘게 핀대요. 그때도 같이 와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수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내 수아가 웃으면 그 또한 어찌할 바 없이 따라 웃고 말았다. 그제서야 깨닫고 만다. 바야흐로 봄이구나. 나의 마음 속 꽃은 이미 피어났지만 너와 함께 거닌다면 그 발자취마다 온통 꽃밭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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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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