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뱀은 백지로 태어나 마녀의 곁에서 지내며 수만 권의 책을 읽었다. 그 서적의 필적들이 집대성되어 지금의 뱀을 이루었다.
무슨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끊임없이 무언가 알아내고 탐구하는 것은 뱀의 본능이었다. 마녀의 곁에서 시간이 남을 때마다 책을 읽었으므로 마녀 또한 종종 책을 구해다 주곤 했다. 소설과 시詩야말로 마음의 양식이란다…… 지식이 늘어 갈수록 뱀은 그런 분야에 통 관심이 없어졌으나 마녀가 구해다준 건 별말 없이 읽곤 했다. 어찌되었든 뱀이 가장 열심히 탐독한 분야는 인문학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그 또한 마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탓이다.
그리하여 도출한 결론이라 하면 사람의 본성이 포악하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거칠고 조화를 이룰 줄 몰라서 온갖 규율로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이룬 문명은 제아무리 빛나는 것이었어도 반드시 파멸을 향해 저물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뱀은 인간에게 흥미가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람을 좋아했다. 뱀에게는 오랜 수수께끼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뱀은 마녀를 영영 이해하지 못하리라 직감했다.
"사랑이란 그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 또한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이랍니다."
"어머나, 이번에는 어떤 책에서 그리 말하든?"
"여기서 그러더군요."
뱀이 두꺼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마녀는 그걸 몇 장 뒤적거리다가 보따리에 넣었다. 나도 천천히 읽어야겠어, 네가 인상 깊게 본 것 같으니까. 그렇게까지 느낀 건 아니라고 항변하려다가도 여한일은 곧 입을 다물었다. 주인이 책을 읽든 말든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 느꼈으니까.
유독 봄비가 잦은 나날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책이 다 젖어 버리니 여한일은 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둘은 인간들에게 쫓기다가 어느 폐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번에는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죽을 위기에 놓인 여자아이를 대신해 누명을 뒤집어써서 그랬다. 뱀은 빗물이 새는 곳마다 바가지를 두고 나서야 마녀의 곁에 앉았다. 마녀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뱀은 다소 지루한 낯으로 그의 시선을 좇았다. 인간들이 개미만큼 작게 보였다. 이렇게 보면 실로 미물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뱀은 수도 없이 똑같은 답을 들었던 질문을 또다시 던졌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지요? 인간들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대신 그 아이는 살아가며 사랑을 알게 되겠지. 그거면 돼."
"그들은 당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 바꾸어 말하니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무언가 생각하는 양 낯이 진지해졌다. 여한일은 답변을 대강 예상할 수 있었다. 사랑이란 대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거나,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도 괜찮다거나…… 예상 답변 목록을 추리고 있자니 뱀은 조금 짜증이 났다. 인간들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진화해 왔는데 마녀는 그런 방식을 취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렇대도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책 속에서 사랑에 대한 구절을 읽은 후로 줄곧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이 마녀는 분명 나를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보다 중요한 게 한참 많으니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정해져 있는데도.
뱀이 툴툴거리던 중에도 줄곧 무언가 생각하던 마녀는 수천만 개의 빗방울이 지상을 두드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 답변은 뱀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이란…… 그저 마음이 가는 거야. 마음이 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니? 내가 붙잡으려 애써도 어느샌가 나를 두고 훌쩍 떠나 버린다는 말이야."
"잘 모르겠군요."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걸. 조금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더라도 여전히 마음이 가는 감각을."
이내 마녀가 활짝 웃었다. 뱀은 불친절한 낯짝을 한 채 마주 웃어 주지 않았다. 예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방긋방긋 잘 웃어 줬는데,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크게 한 번 웃어 보인 후 마녀는 다시금 빗줄기 떨어지는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뱀은 마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녀의 낯빛에 비치는 쓸쓸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떠나가는 것들을 잡을 수 없어. 사람도, 나의 마음도, 언젠가 장성하면 나를 두고 떠나 버릴 너도 말이지……."
"너도 많이 컸구나, 그렇지 않니?"
쫓기다 보니 둘은 어느샌가 산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뒤쫓아 오던 성난 인간들은 산 중턱 정도에서 지쳐 나가떨어졌다. 마녀의 곁에서 족히 몇백 년을 머무른 뱀은 산 하나 정도는 거뜬히 탈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붙었다. 누군가 강하게 키워서 말이죠. 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아무 바위에나 앉았다. 인가조차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산꼭대기에는 이름 모를 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제아무리 높은 산을 올라도 도통 가까워질 줄 모르는 달빛이 형형하게 빛을 내는 밤이었다. 이내 마녀가 뱀의 곁에 앉아 말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말야.
"정말 많이 컸어, 이제 혼자 살아도 될 만큼."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같이 도망 다니기 영 거슬리나요?"
"그럴 리가. 단지 나 때문에…… 이렇게 쫓겨다니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그리 말하며 마녀가 웃어 보였다. 뱀은 그 낯에서 쓸쓸한 기색을 읽어냈다,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그제야 뱀은 마녀의 말을 이해했다. 마녀의 사역마들이 주인을 떠나 살게 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있었다. 그렇더라도 뱀은 단 한번도 그런 가정을 해본 적 없었다. 그렇기에 대답은 망설임 없이 명료하게 나왔다.
"저는 안 떠나요. 저를 주운 게 잘한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혼자는 쓸쓸하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나의 마음일 뿐이지, 너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저에게는 당신의 마음이 더 중요해요. 그렇게 된 지 오래되었고, 오래 지내다 보니 당신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 되었어요……."
"나의 옆에서 얻는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이제까지 그래왔듯 말이지."
"보고 들은 게 이런 것뿐이라 이렇게 자랐습니다. 베푼 걸 돌려받을 줄 모르는 마녀의 곁에서 지내다 보니까요."
사랑을 베푸느라 정작 사랑을 받는 법은 잊었던가. 타인의 사랑을 지키느라 정작 자신의 사랑은 뒷전이 되었던가. 뱀은 마녀의 낯을 가만 들여다 보았다. 뱀은 마녀와 다르게 욕심과 탐욕이 많았다, 인간들의 지식을 그대로 답습한 탓이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건 모두 가져야 했다. 뱀은 마녀를 가지고 싶었기에 다소 심술궂은 방식으로 진심을 전했다. 마치 책임을 당신에게 지우는 것처럼.
"그러니 당신도 잡고 싶은 걸 잡아 주세요. 제가 당신에게 중요하다면 말이에요……."
마녀에게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아주 많았지만, 그것들 중 으뜸이 자신이 된다면 상관 없었다. 중요한 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돌려받지 못한 만큼의 사랑을 베풀면 되었다.
그렇게 말해도 마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마녀는 뱀이 행복하길 바랐다. 그렇대도 뱀이 마녀의 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뱀은 기꺼이 손을 뻗어 마녀의 손을 잡았다. 마녀가 모르는 건 특별히 알려주면 되었다, 뱀은 아는 것이 아주 많았으니까. 마녀가 욕심을 낼 줄 모르면 뱀이 탐욕스럽게 굴면 되었다, 뱀은 욕심이 아주 많았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놓쳐도 괜찮습니다. 제가 잘 잡고 있을 테니까요. 제 마음은 이미 훌쩍 당신께 가 있거든요."
그러니 당신은 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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