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FF14/메리냥] Propose

“아,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 툿친분 요청으로 먼저 들고 나온 메리냥

* 11회 디페스타(2017년)에 배포했던 배포본입니다. 티스토리에서 <Suddenly>라는 글 보신 적 있나요? 그거 가필수정본입니다.

* FF14 3.3 사룡의 포효 이후를 날조…했으므로,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다른 완전 창천한 글입니다. 양해바람.

* 얘는 너무 오래된 글이라 일단은 원문 그대로 올리고, 나중에 손 좀 볼 듯 합니다(안 침착함)


용시전쟁이 끝나고 그길로 푸른 용기사가 사라진 지도, 신전기사단 총장직 대신 상·하원의원을 총괄하는 의장직이 생긴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이슈가르드는 여전히 시끄럽고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우기에 바빴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이슈가르드의 하늘은 창천이라 불리는 이름값답게 새파랬고 웬일로 가느다란 눈발조차 흩날리지 않게 맑았다. 아이메리크는 오늘 올라온 의제들과 회계부에서 내놓은 최종 안을 간단히 훑어보고선 창문을 열었다. 예년보다는 따뜻한, 딱 선선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바쁜 건 언제나 마찬가지이지만 꽤 아래까지도 권력의 분배가 이뤄지고서는 그래도 제가 할 일은 차차 줄어가는 추세였다. 안 그러면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없었을 테니까. 지붕마다 쌓여있는 잔눈이 햇살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저만치서 은빛이 툭툭 튀어 오는 것도 보였고.

“응?”

갑자기 시야에 끼어든, 꽤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에 향하는 은장발에 아이메리크는 반사적으로 창가에서 비켜섰다. 익숙한 모습이기는 했다. 날아드는 게 새까만 갑주가 아닌, 그냥 어딜 가도 흔히 볼만한 옷차림이어서 그렇지.

“에스티니앙...?”

“넌 또 왜 창문을 죄 열어놓고―아니, 오자마자 잔소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어쨌거나 오랜만이다.”

시야 끄트머리에 들어 오기기가 무섭게 겨우 몇 초 만에 창문으로 날아든 에스티니앙은 또 머리가 풀렸다며 짜증내더니 반쯤 풀린 머리칼을 우악스레 쥐어들고 하나로 동여 묶었다. 뭔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아이메리크는 이 모든 장면을 그저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며칠 전에 모험가가 림사 로민사에서 에스티니앙을 봤었다는 이야기도 했고, 이제 에오르제아 도시동맹에 속해 비공정만 타면 이슈가르드까지 한나절로 오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이 둘을 조합하면 지금 사태는 논리적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지만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 넋이 나간 표정이었던 듯 에스티니앙이 미간 새를 구겼다.

“내가 뭐 못 볼 사람이냐. 표정이 왜 그래?”

“아,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언제는 안 그랬나, 뭐. 아, 맞아. 림사 로민사. 거기 맛집 많더라. 나중에 가면 들러봐라.”

갑자기 들이닥쳐 자기 할 말만 하는 에스티니앙이라면 충분히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그 내용이 아예 달라져있어서 얼떨떨했다. 사룡의 권속 모가지를 몇 개 땄다느니 어떤 새끼가 지랄발광을 하기에 얌전히 목을 꺾어주었다느니 같은 살벌한 이야기를 듣고 지낸 게 거의 십 년이었는데 난데없이 맛집 추천이라니. 어쨌거나 멍하니 시간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 요즘은 그래도 일이 줄었으니까 언젠가는 시간이 나겠지. 그래서 얼마나 머물 생각인지 물어도 괜찮을까?”

“나야 이제 남는 게 시간인데. 바쁘신 총장 나으리―아니지, 의장이랬나? 너야말로 저 서류더미는 어떻게 처리하고서 말하지 그러냐.”

“저거 오늘 안에 끝나.”

“허, 영 못 미더운데. 너 총장직 있을 때도 저만한 서류 계속 밀려 왔잖냐. 기껏 와줬더니 그런 식으로 약속 파토 냈던 게 누구였더라?”

“하하. 이제 내가 모든 일을 처리해야하는 건 아니다. 예전하고 달라.”

늘 주고받는 대화의 패턴이 잡히니 확실히 여유가 돌아왔다. 아이메리크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불샤드로 데워둔 찻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그 사이에 에스티니앙은 소파에 구겨 앉았다. 제가 들고 오는 티세트를 보는 눈이 샐죽 놀리듯이 휘었다.

“여유 있다는 건 맞나보네. 차도 꺼내올 시간도 다 있고?”

“그래서 말했잖아. 나도 이제 여유 좀 부릴 수 있게 됐다고.”

이만큼 대화를 주고받았는데도 아직 돌발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한 번 풀렸던 마음을 조여왔다. 이러다가 언제 또 훌쩍 떠날지, 어떤 폭탄발언을 할지 나름의 준비가 필요해서 절로 등허리에 힘이 들어가 자세가 뻣뻣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스티니앙은 전례 없이 편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지난 여정을 잡다하게 늘어놓았다. 용기사단장으로 보고하던 때의 버릇이 한껏 묻어나는 이야기였다. 말도 없이 길을 나섰던 날부터 하나하나 찬찬히 둘러봤던 장소들, 감상. 맘에만 묻었던 펀데일에 갔다온 것과 비공정도 열린 김에 세 도시를 둘러봤던 감상까지. 평화로운 일상 이야기에 제 긴장도 덩달아 풀렸다. 거기에 제가 늘 그에게 바랐던, 색채를 되찾은 삶이었으니 미소마저 지어졌다. 전쟁이 끝나고 남아있는 삶이 있을까를 걱정했던 건 의외로 기우였을지도.

할 이야기가 다 떨어진 건지, 답지 않을 정도로 말이 많았던 에스티니앙이 갑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근황보고는 끝났으니 지금까지 그랬던 대로 훌쩍 떠나려는 건지 기색을 살폈지만, 놀랍게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잘만 설득하면 오늘 제 집에 묵게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는데, 에스티니앙이 선수를 쳤다.

“아까 그리다니아도 다녀왔다고 했잖냐?”

“어, 아. 그랬지. 처음 창을 쥐었을 때 지냈던 곳이라고 했었나.”

“그렇지, 뭐. 그 아저씨들, 잘만 지내더라. 어쨌든 거기, 이번에 다녀오니까 내 기억하고도 좀 다르고 해서, 인상이 좀 바뀌었거든.”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십 년을 알고 지낸 바에 의하면 이런 뜬금없는 대화의 끝은 그가 쓸고 다니는 전장마냥 황폐화되곤 했다. 괜히 재앙의 입을 가졌다고 소문난 게 아니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긴장으로 목이 타서 절로 찻잔에 손이 갔다.

“그러니까, 할래? 언약.”

“뭐?”

채 삼키지도 못한 홍차가 주륵 흘렀다. 대체 내가 지금 무얼 들은 거지. 찻잔을 용케 떨어뜨리진 않았지만 표정이 볼만 했는지 에스티니앙이 인상을 팍 썼다. 그 귀 끝이 발그스름하게 물든 걸 발견하고서야 아이메리크는 사태를 파악하고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손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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