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

글쎄요.

"사랑이 무엇이든, 그 녀석들보다는 나를 더 사랑한다… 정도로 여기고 있다면 만족해요."

거짓말이에요! 사실 나는 이 정도로 만족 못 해요! 머릿속은 이미 난리가 났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일은 혼자 지내는 걸 익숙해했다.

부모는 그에게 무관심했고 북쪽 영지에는 어린아이가 적었기에 어울릴 사람이 없었다. 심심하다 느낄 때면 저택의 서재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다. 부모는 시시한 통속소설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전문 서적에 익숙해졌다. 서재의 책을 달달 외울 정도가 되었을 때 부모는 영지 관리를 일에게 맡겼다. 네가 책임감 있게 잘 해낼 것이라 믿는다, 짐짓 신임이 담긴 듯한 말만 남기고 부모는 수도 부근으로 떠났다. 어른이 된 일은 그게 신뢰가 아닌 그저 떠넘기기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영지를 어떻게 관리하든 부모는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설령 폭동이 일어나거나 다같이 굶어죽게 되더라도.

그러면 더욱 악착같이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불효 아니겠는가?

당연하게도 초기의 어리고 유약한 대공은 영지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자리를 위협하고 탐내는 사람 - 대체 이 귀찮은 일을 왜 사서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이 발에 차일 만큼 많았다. 어렸을 적 이런저런 서적을 탐독하던 그는 꽤 다정한 사람이어서 더욱 만만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성인이 된 일은 더 이상 마냥 친절하게 굴지 않았다. 검을 뽑을 힘이 없다면 혀를 칼처럼 다룰 줄 알아야 했다. 무력을 쓸 수 없다면 지력知力으로 상대해야 했다. 그는 점차 간교해졌고 그의 잔꾀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정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따금씩 그는 변해 버린 자신이 낯설었다. 낯설어했던 것 같다. 그 느낌조차 이제는 희미해졌다.

"대공님, 많이 부드러워지신 것 같습니다. 배우자가 생겼기 때문일까요?"

그런가요? 집사장의 이야기를 그는 웃으며 넘겼다. 그렇게나 달라졌던가. 그저 성 안에 사람 하나를 더 들였을 뿐인데. 생각해 보면 그는 예전보다 많이 웃고 부드러운 표현을 썼으며 누구에게나 '일단은' 친절하게 굴었다. 변화를 스스로 느끼긴 했으나 결코 천성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저 새로 온 부인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그가 편하게 지내길 바랐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위선이었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 위선이 번거롭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을 세우고 살 때보다 편했다.

어쩌면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의 천성을 되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고요. 사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좋겠군요. 좋은 거잖아요, 그렇죠?"

부부 사이에는 속이는 게 없어야 합니다. 서로를 믿고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어야지요. 그가 사랑과 결혼에 대해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랐을 때 주변 사람들이 건넨 조언이었다. 아무리 결혼한 사이라도 헤어지면 남인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진실을 거리낌없이 얘기하면 언제라도 독으로 돌아오는데.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속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건 부담스러워. 헤어지면 그것들은 죄 약점이 된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

하지만 당신에게는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당신이 계약을 무르지 않도록 이미 얘기를 해 두었고, 당신은 내게 등 돌리지 않을 사람이니까. 당신이기에 보일 수 있는 진심을 그는 슬그머니 꺼내 보였다.

"그리고 그걸 한 번쯤은 내게 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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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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