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반려
이것은 일종의 회상이다. 그러니사실과 다를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가능한 한 최대한 기억 그대로 서술을 하리다.
때는 내가 5살일 적이었다.
동무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일는지 모른다마는 나는 이 이야기를 부득이 시작하지 아니치 못할 그런 동기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명렬 군의 신변에 어떠한 불행이 생겼다면 나는 큰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현재 그는 완전히 타락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의 타락을 거들어 준, 일테면 조력자쯤 되고만 폭이다.
-생의 반려 中-
나는 책을 덮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어떠한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픔을 느끼는 것도 아닌 당시 세는 나이로도 5살이던- 빨강 망토 달고 다니던 어린애던 내 머리로는 고 문단에서 이해를 못할 단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부모님은 내 삶에 많은 제한을 두셨다. 그 빡빡한 제한 하에 놀 곳이 없어 구립 도서관에 드나들다가 어린애를 위한 책이 아닌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 기준으로 제법 큰 책을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펼쳤을 제 조그마한 글자와 읽기 힘든 단어의 향연으로 읽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다섯살 아이에게 제한을 두는 것이 아무리 당연하다고 해도 우리 부모님은 그 강도가 보통이 아닌 것이 여간 진절머리 나는 것이 아니라서 자유를 찾는답시고 동네 뒷산을 올랐다. 이것이 나의 일테면 취미이자 도피였다. 그 작은 동네 뒷산 오른 것도 산의 초입이었겠으나 그래도 자유라는 것이 느껴지었다. 나뭇가지를 들고 흔들며 놀다 보면 도토리, 청설모나 개미가 보이고 조그마한 꽃이나 버섯 보며 옷을 더럽히던 것이 고 당시 나의 취미였다.
내가 하얀 독사에게 물린 것- 비유적인 표현으로 백사의 이가 내 살을 파고든 것도 이때 즘이다. 백사는 날 물지 못하였다.
백사랑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고 하얀 새끼 뱀은 사랑스러운 하얀 긴 머리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고 모습을 어떠한 요물 같다는 것도 느끼지도 못하였다. 그 아이가 알려준 장소의 나와 같은 아이들의 썩어가는 시체와 백골이 있는 것을 보고도 그저 냄새난다는 감상밖에 못 느끼었다. 어쩔 수 없었다. 5살이었으니깐.
그럼에도 그가 이빨로 물면 많이 아파질 것은 알았다. 우리 부모님은 수의사로 동물에게 잘 안 물리는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나 또한 그 기술을 뱃속에서 습득을 하고 나온 것인 듯 백사의 이를 잘 피하였다. 그때에는 그가 물려고 시도를 한 것이 만화 속 악동의 행동과 같은 짓궂은 장난이라고 생각을 하였으나 이때쯤 되어서야 고것이 순수한 사랑이 담긴- 살의에 의한 거대한 집착인 것을 알게 되었다.
물어 죽인다- 그것이 그 애의 애정 표현이자 집착이었다. 그러나 비난을 하지 못하였다. 죽음의 의미를 알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시체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묻지 않았다. 나도 본능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고 자리에서 나뭇가지로 시체를 쿡쿡 찔러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것이었다. 그렇게 그 애와 나는 덜 썩은 시체로 인형 놀이를 하였다. 파리 윙윙대어도 내쫓아내면 그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기괴한 꼴이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로 즐거웠다. 그렇게 놀다 집에 돌아가면 엄마 아빠는 날 심하게 혼내는 것이 나는 싫었다. 나는 그럴수록 더욱이 산으로 향하였고 그것이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나는 그러다 결국 백사랑을 부모님께 소개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산에서 잘 안 내려와서 평지는 어색하다는 말에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을 하며 아파트 단지로 손을 이끌었다. 그때까진 부모님이 우리의 우정을 허락해줄 것이라는 어떠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생각보다도 너무한 분이셔서,
"묵우리."
하고 내 이름을 한 번 무겁게 부르더니-
"너, 저런 애랑 놀 거면 밖엔 영영 나가지 말아라!"
하고 엄포였다. 그러나 5살에 부모보다 사랑이 더욱 소중했다. 나는 백사랑의 손을 잡아 집 밖으로 다시 강제로 이끌었다. 그때 아마도 내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나보다. 울었던 걸까. 어쨌든 서러웠던 거 같다. 백사랑과 떨어지라는 명령도 다시는 부모를 영영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앞날도 다 서러웠다.
첫사랑- 하면 10대 즈음의 청춘이나 여름 분위기를 떠올린다. 그러나 가벼운 연애 감정을 처음 느꼈을 제를 말해보라 하면 아주 어리게 내려간다. 나는 두 종류의 첫사랑이 전부 그였다. 하얀 긴 머리 휘달리며 종종종 뛸 줄 알고 빨간 눈 긴 하얀 속눈썹 참 어여쁘던, 사랑을 먹고 자라던 백사가.
"백사랑. 너는 어쩌다가 뱀이 된 거야?"
"아빠 때문에."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이었어? 엄청 화 잘 내고 화내기 대마왕이고."
"응. 완전 그랬어."
내 빨간 망토는 쓸 곳이 많았다. 밤 이불로 쓰기도 좋았다. 지금은 다 잊었으나 아주 두려운 꿈을 꾸었다. 정말 무서운 꿈이었고 내가 다르르 떨며 울 제 그 애가 내 옆을 지켜주었다. 비가 툭툭 덜어지고 옷도 비에 흠뻑 젖었다. 그 때에 우리는 비를 피해 산 더 깊은 곳 커다란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름 장맛비는 보통이 아니었다. 백사랑이 모아둔 시체와 백골들도 떠내려가서 없었고 장마 기간에 나는 꽤 자주 아팠다. 그때마다 이름 모를 풀과 버섯들을 생으로 먹으며 버티었다.
그 때에도 열이 내가 펄펄 끓는 날이었다. 가만히 있기도 그렇다고 몸이 여간 뻐근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화장실은 가고싶어서 몸을 일으키고 등산로를 걸어 공중화장실을 찾으려고 했다.
경찰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도망을 갈 생각을 못하였다. 그 당시 내겐 경찰은 이놈 아저씨 정도의 인식이었으며 그 일을 불러오리라고 생각을 못하였다.비척비척 비 오는 산길을 걷고있는데 경찰이 보이던 것이다. 그들이 악의를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실종된 아동을 찾아주는- 또는 시체라도 찾고자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나는 이놈 소리가 두려워서 살고자 도망치었다. 백사랑이 치마에 한가득 버섯과 풀들을 따다가 이쪽을 보았다. 나는 애써 무시했다. 사랑하는 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5살도 나름의 순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5살이 아무리 빨간 망토를 걸쳐도 슈퍼파워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경찰에게 잡히었을 제 얼마 안 되어 의식을 잃었고, 정신이 든 때에는 어린이 병원에서 하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 부모님은 뒷산이 없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나는 착한 아이가 되겠다며 빌고 울고 뉘우치며 죄송하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백사랑과 처음- 물리적으로 헤어졌다.
내가 아무리 울고 빌고 뉘우친다 하여도 우리 집은 이사를 강행했다. 나는 링거 덕지덕지 온 몸에 붙이고서 빌고 또 빌고 울었다. 백사랑과 헤어지기가 싫었다. 백사에게 홀렸다고 할 수 있었다. 정신병원에도 갇혀보았다. TV에 나오는 아동 행동 교정 프로그램에 부모님이 사연을 보내거나 하기도 하였으나 나는 그 앨 잊을 수 없었다.
대중교통으로 1시간, 어른에겐 별거 아닌 거리이나 5살에겐 혼자 비행기 타고 가는 것 만큼이나 멀게 느껴지었다. 나는 결국 혼자 갈 용기는 없었다. 백사랑과 재회를 하였을 때는 어린이집 음악회 때- 내가 말 없이 사라진 지 반년이 안되었던 겨울이었다.
어린이집 음악회 때였다. 내가 속한 산새반은 마지막을 장식해야 했다. 애들에게 깜찍하고 불편한 옷을 입혀두니 우는 아이도 있어도 실수를 하는 아이도 잦았다. 나도 울 뻔하였다. 나는 노래를 좋아해서 내 노래를 백사랑이 꼭 들어주기를 원하였다. 부모님은 바빠 오지도 않았다. 보통의 아이였다면 이미 울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을 테다.
내가 다닌 어린이집 창문은 반지하여서 나는 위- 창문만을 보며 내가 익숙한 신발이 보이지 않는지 계속하여 탐색하였다. 그러다가 본 것이 하얀 뱀이었다. 백사랑이 종종 변하기도 하던 모습인 작은 어린 하얀 뱀.
나는 내 목소리로 강당이 전부 차게 배와 목에 힘을 넣고 크게 노래를 불렀다. 그때에는 내가 노래 천재라는 착각이라서 목소리에 헛바람을 넣은 너희들- 우는 바보들과 내 노래는 달라. 백사랑에게 최고의 노래를 들려줄 거야-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간 민폐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얌전히 노래를 하면 다른 애의 목소리마저도 묻혀버렸으니. 그러나 이 역시 5살이었다는 변명으로 일축하리다. 그때에는 백사랑 만큼이나 나도 인간이 덜 된 상태였다. 나는 우리가 그때 하던 시체 인형 놀이를 떠올린다 울 거 같기도 했고 얼굴이 뜨거워져서 행복하기도 했다. 나는 양가감정이라는 단어를 그때 몰라서 별별 의성어에서 내 감정을 설명하려 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집에 가는데 부모님은 없어서 다들 들고 가는 꽃다발 나만 없었다. 그때에 부모님은 새로 자리잡은 동물병원 일을 하느라 바빠 날 보러 올 시간도 없어 어쩔 수 없던 일이었다. 나는 강하니깐 참을 수 있었는데,
"이거 받아."
"이거 꽃이야?"
"으응."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아직도 흙이 묻어있는 거리의 하얀 들꽃이었다. 내가 나올 즈음엔 인간의 모습을 가고 있던 백사랑은 들꽃과 잡초 들고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중에는 세 잎 클로버도 있었다. 엄마가 내게 해준 이야기를 내가 그에게 해준 적이 있다. 그래서 세 잎 클로버였나보다. 내겐 그 엉성한 꽃다발이 지구보다도- 내 장래 희망이던 스테놉테리기우스보다도 무겁게 느껴지었다.
내가 준 낡은 옷을 입은 그 애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고맙던지 나는 아프게 꼭 안았다. 백사가 이젠 함께이다. 또 나를 찾아주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갑자기 떠난 날 비난할 만도 한데 백사랑은 내가 건강해서 기쁘다며 웃었다. 순수했다. 그가 왜 아빠- 계부도 아닌 친아빠에 의해 살해당했는지 이해가 안되었다. 작은 입 오물거리며 말할 때 보이는 독을 품은 이까지 사랑스러워서 그때는 지금 팔이라도 내어주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나도 목숨을 버리고 싶어질 만큼 사랑을 했다. 산이 없어서 우리는 갈 곳이 없었다. 가서 놀 곳이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어린아이 신발로 겨울 산행은 보통 위험한 것이 아니었을 테다.
그때부터 우리가 놀이터 삼은 곳은 어린이 도서관이었다. 1층에는 아동용 도서만 있어서 읽고 놀기가 여간 좋던 것이 아니었고 산 생활만 하는 백사랑에게 공룡의 멋짐을 알려주고 싶기도 하였다.
하얀김 입에서 훅훅 나와도 빨간 망토 메고 집에서 나와 도서관으로 향해 그 아이의 구불거리는 하얀 머리칼 보면 내 마음도 뱅뱅 꼬이는 듯하면서도 두근거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도서관으로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아마 백사랑과 만나는 것을 몰랐을는지도 모른다. 또는 모른 척- 이 가설은 지금도 싫다.
나는 부모님께 매주 3000원 용돈을 받았는데 백사랑과 함께하면 그 용돈을 금세 써버렸다. 그 애는 보답으로 길에서 찾은 예쁜 꽃과 먹을 수 있다는 풀을 선물로 주었고 나는 그걸로 내 방을 장식하는게 등산 다음으로 생긴 새 취미였다.
당연 부모님은 벌레가 나온다던가 하며 싫어했다. 그러나 말리기 어려운 나잇대 중 하나가 5살이고, 또 말리기 어려운 것이 소녀의 사랑이다. 나는 매일 같이 풀과 꽃을 받아왔다.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내 방은 언제나 뿌리까지 뽑아온- 받은 풀과 꽃으로 가득이었다.
"묵우리, 너 왜 이러는 거야."
"⋯."
엄마는 내 눈앞에서 매를 흔들었다.
"맞고 말할래, 그냥 지금 순순히 이야기할래."
나는 무서웠다. 그럴수록 더더욱 입 열기 어려웠다. 소변이 마렵기 시작하고 시선이 계속 밑으로 떨어졌다.
"몇 대 맞을 건지는 네가 정해."
나는 그 말이 싫었다. 일방적인 폭행을 합리화하고 합의 된 것처럼 말하는 것- 결국 원하는 만큼 때리고 다리에 검게 멍이 들 때까지 매를 휘두르고 뺨을 때리고 주먹이 내 머리를 향하다가 핸드폰 벨 소리에 모두 멈춘다. 이러한 체벌이 나는 가장 싫었다. 나는 또 다시 집을 나갔다. 집이 싫어서, 백사랑이 보고 싶어서 어디는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 동네에는 산이 없어서 어디로 갔을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길 한 가운데서 울었다. 어린애답게 소리 내 울었다. 맞아서 부은 뺨, 한 걸음 내딛기만 해도 욱신거리는 멍이 든 다리가 고통이었다. 백사랑을 찾으려고 울면서 계속 동네를 돌았다. 내가 울적할 때에 날 넣어주고 우는 것을 허락해주던 그 품이 그리웠다.
그애는 언제나 상처가 있었다. 처음으로 죽을 때 아빠에 의해 생긴 상처 했다. 온 몸이 상처가 뒤덮여 있어서 5살이 보기에도 여간 아파 보이던 것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는 백사랑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 죽었는지 짐작이 되기에 웃지는 못하겠으나 겨우 동네 저수지 정자에서 찾아서 만났을 때는 내 상처를 보여주며 똑같다고 웃었다. 그 꼴이 얼마나 웃기는지 짐작을 하지 못하지만 가로등에서 좀 떨어진 곳 내 그림자 안에서 짓는 그 미소가 유난히 아름다웠다.
"너 노래 잘하더라."
"아직도 기억해?"
"응."
"또 노래해줘. 네 목소리가 좋아."
내가 다시 노래를 하자 백사랑은 아주 좋아했다, 만화 속 천사의 노래를 듣던 관객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모습이- 겨울 소리와 그 계절 특유의 먹먹함이 놀라게 향취를 더해주었다.
이러한 음악회도 좋았다. 아니- 어린이집 음악회보다 훨씬 좋았다. 내 노래가 끝나자 한 요물의 한 사람만을 위한 작은 손으로 치는 박수가 빈 소리를 매웠다.
집에 밤늦게 다시 돌아갔을 때는 부모님이 또 경찰에 신고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를 꽉 아프게 안고서는 “또 그러지 말아라!” 하며 무릎 위에 얹혀놓고 엉덩이를 때리었다. 나는 이러한 벌에 수치심을 느껴 차라리 손바닥을 회초리로 맞고 싶었다. 경찰들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가벼운 웃음소리롸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저번처럼 또 어디 이상한 애랑 놀고온 건 아니지?”
하고 다시 화내는 소리를 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계속 반복하여 질문하는게 날 믿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질금 날 정도로 서러웠다.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으나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백사랑은 이상한 애가 아닌 사랑하는 친구였다.
우리는 사랑의 모든 형태에 탐닉했으며 사랑이 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맛보았노라!
—하고 이젠 기억이 가물한 책에 나온 구절을 인용하야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오도카니 서서 부모님의 눈총을 받다가 이제 되었다는 체념 반 섞인 소리에 발까지 구르며 진짜 아니라고 하였다. 나는 이 때에 아니라고 최소한 네번은 말하였으나 통 받아주지 않고 내일 간식이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부모님이 다시 미워지었다. 맞은 곳들이 쓰라리었다.
아기는 이 땅에 떨어지고 무턱대고 귀염만 받으려는 특권을 가진다. 나는 이 문장을 대형마트를 걷다가 위를 올라다 보며 속에 새기었다. 나 또한 그러한 특권을 가진 5살이었다. 그 나이 특유의 어른을 동경하는 성질로 다 큰 사람과 어리광 부리려 스스로를 아가라고 지칭하며 오락가락이었으나 어찌하였는 고 나잇대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숫자로도 정신으로도 아기에 훨 가깝다 할 수 있다.
“너는 어디서 자?”
“여기 저수지 수풀에서 똬리를 틀고.”
“그럼 맨날 여기로 올게!”
“정말? 정말이지?”
꺄— 소리를 내며 내 양손을 잡고 방방 뛰는 백사랑을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얼마 안 되는 거리이나 5살 어린애 짧은 다리로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총총총 걷다가 자전거를 탄 교복입은 학생들이 자동차보다는 아니나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고 나잇대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사줘 사줘 사줘 사줘 사줘!!!”
“얘, 얘가 평소엔 안그러더니 왜 그래?”
나는 이러려고 점심 요구르트까지 양보하면서 떼를 효율적으로— 뭐, 그 애나 나나 뜻도 모르고 붙인 꾸밈말이었으나 잘 쓰는 방법을 배웠다. 그때에도 빨강망토를 새로 구해다 메고있던 때였기에 다행이도 하얀 상의는 더러워지지 않았다. 세발자전거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것을 누구는 귀를 막고 또 누구는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지나가면 반 성공이라는 친구의 가르침을 아직도 기억한다. 부모님이 버리고 가는 때의 대책도 완벽하였다. 미아보호소는 언제나 가까이 있으니깐.
결국엔 세발자전거를 얻는 것에 성공이었다.
나는 페달을 힘차게 밟아 전진하였다. 기분이 참 좋았다. 아이 다리로는 낼 수 없던 속도에 기분이 좋아져 노랫소리가 절로 나왔다. 골목에서 담배를 태우던 고등학생들도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내가 정말 멋져서 바라보고 있다고 착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색인 파랑과 그 애의 눈동자 색인 빨강의 조화, 그리고 그 중간을 장식하는 포인트 컬러 노랑. 흔한 어린이 용품 색이지만 내게는 특별한 의미였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서 우물 근처로 가서, “사랑아—“ 부르면 그 애는 배로 기는 것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동년배 작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하야 방긋 웃으며 안자고 양 팔을 벌리었다. 옷은 언제나 꼬질하였으나 우리 사랑에 그러한 거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여기 타봐! 뒤에 타는거다! 네 자리야.”
수줍게 그 자리에 앉았다. 뱀 한마리 무게따위 무거울리가 없었다. 사랑이 커다란만큼 무게가 덜어졌다. 페달을 돌릴 때에 꺄르르 웃는 것이 여간 즐거워보이던 것이 아니라서 같이 기뻐져 나는 테레비에서 본 영웅의 웃음소리를 흉내내어 내었다. 시끄러운 거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야 민폐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극소수를 제외한 아이들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 아닌가. 저녁 먹일려고 아파트 단지 내를 샅샅히 뒤졌을 부모님께는 약간 미안하다. 일하고 많이 피로하셨을텐데 하필 내가 그렇게나 자유로운 성질이었다.
자전거 바퀴는 계속 굴러가고 내 심장도 뛰었다. 그 애가 팔로 날 감싸잡을 때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거 같았다. 이것이 운동으로 인한 심박수 증가와 다른 것임을 그때에도 알았던 거 같다.
지칠 때까지 페달을 돌리고 놀았다. 신이 났다. 매일같이 그렇게 놀았다. 이렇게 평생 내 허리에 그 애의 손이 있기를 바라였다. 그때부터 이것이 연심이라고, 가족이랑 평생 함께 하고 싶은 것과 다른 종류의 사랑이라고 느끼었다. 세발자전거를 안 타는 날은 없었다.
“운동 열심히래서인다? 우리 딸, 키 많이 컸네.”
아빠가 머리를 헝클어트릴 때에 나는 백사랑도 자라고 있다는 것을 느끼었다. 늘 나보다 작아서 몰랐는데 아끼던 고무줄 치마가 작아졌다 하였다. 이름이 이름인만큼, 사람이 아닌만큼 사랑을 먹고 자라는 거 아닐까 나름 추리였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는 좀 작게, 그래도 나랑 꽅같이 자라게 사랑해주려 애를 썼다.
우리가 자전거를 타고 노는 것을 보고있는 삑삑 소리나는 신발 신은 아이들이 부탁을 해도 한 번 들어주는 법 없아 우리의 데이트를 즐기었다. 그는 내가 사준 비눗방울을 뒤에서 후 불고 그러면 아이들이 이끌리듯 따라왔다.
“언니, 나도! 나도!”
“왜 이래? 치릴라구.”
손으로 슥 밀어내면 겨우 3살이던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으나 나와 그 애는 고작 5살이라서 일직선으로 달아나버렸다. 잘 달리는 애들은 비눗방울리라도 터트릴려고 뒤따라 달리다 넘어져 울기도 하였는데 어른에게 동생들에게 양보 좀 하라고 한 소리 들으면서도 그것을 꽤 즐기었다. 12월 중간 쯤이 되었을 때엔 아빠나 외삼촌이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때면 백사랑은 빠르게 뱀의 형태로 변하여 수풀 속으로 숨었다.
“나, 나 혼자 놀고있었어.”
“그래, 그래….”
아빠가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보며 그 애는 어떤 표정이었더라 잘 기억이 안난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우는 소리였다. 집착이 여간 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애는 나만의 것이었으니 나는 그애만의 것이어야만 했고 다른 친구를- 아니, 사람과 친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5살엔 그저 귀찮다는 감상으로 끝났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린아이 몸으로 날 찾아 전국을 떠돈 것이다. 여간 힘들고 무서운 일이 아닌데 나는 무지하였다.
저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한껏 찌푸린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을 하며 안아주고 쓰다듬어주면 쉽게 풀린다고 그 후에 또 같이 저수지 언 물 위를 걷기도 하며 놀았다. 그걸로 행복이었다.
“우리야 물어도 돼?”
“안돼.”
“잇자국 남기고 싶어. 내 거라고 도장 꾹 찍고싶어.”
“그래도 안돼.
“치이…. 난 네거도 넌 내거잖아.”
그 애의 말은 충격적일정도로 논리적이었다. 물론 5살 기준이었으나, 나는 설득 당해서 잇자국 남기기 외에 서로 자신의 것이라는 흔적을 남길 방법을 찾았다. 그에 대한 답은 인근 고등학교의 여학생이 알려주었다. 꽤 간단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에 나는 엄마나 외삼촌에게 용돈을 5살치곤 많이 받는 축이었고 문구점에서 장식 없는 조그마한 은색 반지 두 개는 200원에 팔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헐렁해서 엄지손가락에 끼워야했으나 왼손 약지에 끼우는 것이 특수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닌, 밥 먹는 손 하였을 때 오른손 드는 것과 같은 류라고 생각하여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반지가 손가락에 들어가는 것 뿐으로도 행복이었다. 문구점에서 저수지까지는 5살 기분으로 멀었다. 기분좋게 자전거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전진하다가 차에 치일 뻔 하기도 하면서 웃음소리로 길을 채웠다.
백사랑의 외모가 수려한 것을 둘째치고도 그 형태나 색조가 특수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가끔,
“너, 동생 때리지 말아라!”
하고 흉을 보고 착각하여 설교를 늘어놓던 어른들이 있던 것은 어쩔 수 없던 일이었다. 나는 여간 억울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비가 사랑의 살아있는 인간 시절에 만들어놓아 그대로 요물이 되어 사라지지 않게 된 것을 나보고 어찌하라는 것인가. 현재에 와서는 그 상처 가리는 법을 다 알았으나 때에는 그 애나 나나 어려서 화장의 화 자도 몰랐기에 오해가 더욱 많았다. 것보다 싫여하던 건 경찰이었다. 이사를 한 이후로 경찰은 우리에게 있어 이놈 아저씨 외에도 놀고 있을 때에 종종 붙잡아 그는 귀찮은 이미지까지 생긴 것이었다.
그들은 학대피해 아동을 보호하고자하는 착하시고 좋은 분이었겠으나 학대가 새의 한 종류인줄 알던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것이 여간 귀찮던게 아니었다. 엄마 아빠는 어디있니? 질문에 대신,
“얘 엄마는 도망갔구요. 아빠는 호랑이에 물려서 죽었대요.” 하면 날아오던 것은 당연 장난치지 말라는 소리나 꿀밤이었다.
“어른들은 왜 다 안믿어주는거야!”
“어른들은 다 그래.”
하며 우리는 카페 의자에 앉아 삼촌이 준 카드로 주문한 어른커피- 정작 나온 것은 생딸기 우유던 것을 마시며 불만을 토해냈다. 그때에도 질문세례가 귀찮아 도망치고서 자전거를 주차장에 두고 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그 날의 경찰 아줌마는 끈질기었다. 또 어떻게 찾아왔는지 다시 찾와와 그럼 보호자는 없냐는 소리였다.
“보호자가 뭔데요?”
“으음, 엄마나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랑 오빠— 어른들이라면 남편과 아내처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런 내가 사랑이 보호자인걸!”
나는 그 애의 왼손을 잡아 들었다. 양 손으로 컵을 들고있던 탓에 우유가 쏟아지었으나 그 애도 잠깐 놀랄 뿐 신경을 쓰지 않는 거 같았다.
“맞아요, 우리가 제 남편이에요!”
이쯤이면 귀여워서 웃고 가줄만 했는데 그는 웃지않고 우리의 부부관계를 부정하였다. 그때는 진짜 부부가 아니었으니 당연하지만 어린 나이에는 나름 상처였다. 울컥하여 바라보는 것밖에 못하는 것이— 그 애를 지켜주기에 약하다는 증거라는 생각에 저 강한 울트라 슈퍼걸이 되고싶었다.
“아빠, 더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해?”
“음… 일단 엄마아빠 말 잘듣고, 편식하지 말고.”
“뻥치시네.”
“…손들고 벌서있어.”
“네.”
둘 다 내가 못할 일이기에 나는 아무말 안하였다. 그저 어린이집 신체 놀이시간에 더 열심으로 열정을 쏟으리라는 결심이었다. 빨리 더 강해져서 진짜 보호자가 될 수 있는 남편이 되고싶었다. 이때에는 시간이 참 느렸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잔뜩 먹으려 했는데 크리스마스도 아직이었다.
이때에 내가 잠꼬대를 많이 했나보다. 또는 틈만 나면 그러한 질문이었거나. 엄마는 눈치가 빠르지도 않은데,
“너 또 사랑인가 뭔가 하는 애랑 노니?”
하고 쏘아드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알아낸것일까 무서워져서 나는 바로 전부 말하였다. 그 애와 나와 연인인 것, 그 애는 부모가 없어서 매우 자유인 것— 그러자 바로 한숨을 쉬셨다.
“걔는 고아원에서 관리를 안한대니?”
“고아원?”
“이 근처에도 있잖아, 고아원. 집 값이 어쩐지 싸더러니. 어휴….”
“고아원이 뭔데?”
“그래도 노숙이나 이상한 부모랑 사는 것보다야 낫네.”
“고아원이 뭔데?!”
하고 가계부를 쓰는 어머니는 고아원이 뭐냐는 내 질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 답을 못 들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엄마의 말을 이상하게 변형하여 생각했고 다음 날, 사랑이를 만나러 가서 이야기를 전하였다.
“고아원 가면 행복해져?”
“응, 엄마가 그랬다.”
“근데 고아원이 뭐야?”
“나도 몰라.”
우리는 일단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기로 하였다. 그때는 보육원이 일테면 슈퍼마켓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이 틀림이 없다. 노래부르며 길 가며 사람들에게 보육원에 가는 길을 물었다. 그때에 다들 하나같이 모른다는 답이어서 여간 답답하던 것이 아니었다.
“너희들—.”
경찰이 보이자 페달을 거세게 밟으려고 하다가 길을 잃으면 경찰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라고 어린이집에서 배운 것이 생각이 났다. 길 묻는 것은 5살 자존심에 나름 금이 가는 것이었지만 남편으로서 그것보다 아내의 행복이 중요하였다. 어른인 척 목을 가다듬고,
“아저씨, 고아원이 어디죠?”
질문이었다. 그는 우리 둘을 보다가 태워주겠다고 우리와 자전거를 차 안에 넣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내 장래희망 두번째가 소방차였으니깐 경찰이 싫다해도 소방차의 친구인 경찰차는 좋아하였다.
54마을- 그 당시엔 54애육원이던 보육원은 집에서 꽤 가까웠는데 건물 겉이 보육원보다 일반 센터 같았다. 그가 내려줄대 고개 꾸벅숙여 인사하고 자전거를 끌고 건물 안으로 향하였다. 그러자 직원 중 한 분이 우리 눈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추고 말을 걸었다.
“어머, 무슨 일이야?”
“행복을 찾아서 왔어요.”
“저도 따라왔어요.”
엉뚱한 답이었다. 그는 우리 둘을 살피더니 의무실로 이끌었다.
“아구, 이거 누가그랬어?”
“아빠가요.”
그 다음엔 다른 어른들과 다를 바 없는 질문 세례였으나 투명한 색의 소독약을 처음 본 나는 그의 치료로 사라이의 상처가 다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로 가만히 지켜보았고 빌문데 차길히 대답을 했다. 그러나 결말은 좋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는 착각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을 한 것 일테다. 나는 그 애의 배와 다리 등, 모든 곳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학대당했던 아이가 맞았고 학대 당하는 아이로 보이는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랑이는 보호해야 할 대상인 것이 당연했다. 아빠가 매일 때렸다고, 가혹행위와 성학대를 암시하는 말까지 하였으니깐. 그 애는 친부에게 당한 것이 너무 오래되서 기억 안난하고 하나 마음이 쓰이게 하는데 그 직원은 얼마나 했을까 한다.
보육원에 들어갈 때는 같이였으나 돌아갈 때는 혼자였다. 반지는 어느새 켜진 가로등 불빛을 반사라며 반짝였고 나는 반지를 내동댕이 치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를 지켜야 하는 나니깐 울면 안된다고 되뇌일 뿐이었다. 그 날엔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 남은 하루가 어땠는지 모른다. 그저 커다란 한 사건에 묻히었다.
그 날이후 난 눈에 띄게 우울이었다. 햇빛을 보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잠에서 깨어나 빛을 보면 밤동안 사라졌던 모든 생각이 내게로 날카로운 날붙이가 되어 향하였다. 나는 이것이 더 강해지기위한 영웅의 시련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뼈가 시릴만치 아파서 잠 못들던게 성장통인지도 몰랐다.
부모님은 직업이 의사셔서 그런지 약을 참 좋아하셨다. 어디 가서 처방받아온 여섯 개 각각 다른 얄약을 삼키는 것이 어린 아이이던 내게는 너무 힘들어서 종종 약을 토해내었는데 그러면 수의사 아니랄까봐 날 붙잡고 입 안 깊게 약을 쑤셔 넣고 물을 부었다.
외출 할 맛도 거의 나지 않았다. 등원까지 거부하고 내복을 안 갈아입고 웅크려 누워있었다.
“너 그 애하고 싸웠지?”
“아니.”
“거짓말 하긴, 걔가 사는 곳 가서 말해. 미안하다고. 그게 가장 빨라.”
“나 고아원 가도 괜찮아? 엄마 아빠 있잖아.”
“그럼 그동안은 담 넘어 다녔어?”
그 말에 사흘 전 처럼 보육원에 평범히 들어가서 다시 만나면 된다는 것을 겨우 알았다. 멍청하다 소리 들어도 어쩔 수 없다. 다른 변명을 해보자면, 별 거 아닌 것에 하늘이 무너지고 어려운 답을 바로 찾아내어도 쉬운 것을 빙빙 돌려 생각하고 하루도 몇 년 같이 느끼는 것이 어린 아이들의 성질이니깐. 그말에 나는 옷 갈아입고 보육원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빠진 날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그 정도로 뱀에게 휘감겨 있었다. 보육원 아이들이 적기는 하였지만 거기서 하얀 머리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종종 보육원 원아로 오해받는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서로 남편 아내 하는 호칭이 입에 붙었던 거 같다. 어른들은 소꿉놀이냐고 질문을 하였으나 우리는 진지하였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
엄지에 반지가 끼기 시작해 검지에 끼던 때 쯤이었나, 백사랑이 잠시 보육원에 없던 때가 있었다. 그 시침이 반 움직이는 짧은 시간동안에 너무 두려워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애가 너무 예브고 사랑스러워서 누가 데려갔을까 걱정이었다.
사실 그냥 출생신고를 하고 병원에 예방접종을 하러 들렀을 뿐인데, 그 와중에 내 생일- 3월 17일과 비슷하게 3월 7일로 했다는데 울음을 그치기 어려웠다. 그 애도 참 웃긴게, 내가 우니깐 같이 울고싶다고 울먹이던 것이다. 결국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울어서 서로 안은채 우느라 달래느라 바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니 나와 그 애는 금세 여섯살이 되었다. 보육원 한 켠에 눈사람 두개 만들고 예쁘게 꾸미다보면 시간이 많이 가있었다. 심술쟁이 18살 오빠가 눈사람을 차지 못하게 벽돌을 심어놓으려다가 혼나기도 하면 집에 갈 시간.
그렇게 내 유아기는 백사에 휘감긴 채 녹은 마시멜로우처럼 달콤하고 끈적한 추억으로 남았다.
여기서 나는 바로 청소년기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초등학교 적은 기억안하기로 하였다. 별 일은 아니고, 백사랑과 다른 학교에 배정이 되었으며 끝에는 사춘기의 초입이었고 차라리 물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사건이 생기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은 의외로 빠르게 지나간다. 기억 하려해도 못하는 이가 많을 것이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이다.
교복을 입은 모습은 이미 알았으나 입학식장에서 보니 감상이 달랐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있고 저 흉을 안 숨긴 상태서는 그러지 못한다는 점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남학생들도 이야기를 나누고 수군거리는 것이 들리었다.
“야, 묵우리다. 정신병자. 왜 같은 반이래?”
“1반 애들 존나 부러워. 저 하양이 개 예쁘지 않냐?”
“백발?”
“어.”
“근데 어디서 처맞고 왔냐?”
“야. 쟤 보육원에 산대. 그러니 맞고 사는거지.”
“헐, 졸라 불쌍해.”
남학생들이 남 이야기를 멋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한 대 패주고 싶었으나 초등학교에서 대부분이 그대로 올라온 중학교라 내 편이 되어줄 애가 하나도 없었다.
1반 1번 학생이 입학선서를 하고 나는 백사랑과 손인사를 하고선 각각 1반과 4반 교실에 들어갔다. 입학식 이후에 백사랑의 외모는 타 학년에게도 소문이 났는지 2, 3 학년도 구경을 많이 하러 왔다. 그는 늘 시선을 책상에 떨구고 있다가 내가 올때야 화색이 돌았다.
“우리야!”
시선은 내게로 향하였다. 우리반 애들 빼고 다 나가라는 말을 무시하고 1반 교실로 들어갔다.
1반 애들은 그가 여간 싫은 게 아닌 거 같았다. 방과후에 같은 학원 다니던 애에게 들은걸로는— 쟤랑 있으면 우리까지 동물원 원숭이 기분이야. 그런데 어디나라 공주님이신지 아무말도 안하고 있어. 하며 그녀를 비꼬며 욕하였다. 사랑이는 분식집 밖에서 다 들으며 조금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입모양으로 내게만 ‘우리야.’ 하는 모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5살에 산 반지는 잃어버리진 않았으나 더 이상 차지 않게 되었다. 그대신 6학년때 패션잡화점에서 각각 2000원 주고 산 큐빅이 박힌 반지가 왼손 약지에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의 남편이었고 아내를 모욕하는 것을 참기 싫다는 중학교 1학년의 치기이기도 했다.
내가 자리를 나설 제에 또 말소리—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이 들렸다.
“묵우리, 쟤도 참 쟤다.”
“저러니 왕따지.”
“끼리끼리 사귀네 수준 참 잘맞는다.”
나는 잊었던 가방을 챙기고 지갑에서 떡볶이 값 2000원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애들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으며 뒷담화를 계속하였다. 심호흡을 했다. 그애에게 5학년 때 물린 곳이 이따금씩 아파왔다. 왜 그때까지 난 5살때 공룡이 장래희망이었다는 것이 속에 깊이 있었는지 모른다.
가끔은 백사랑의 탓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홀리지만 않았더라면 모든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는 생각 탓이었다. 사춘기 답다. 그 애에게 홀리지 않았다면 이사를 안했을 것이고 정신병원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게 알려져서 따돌림을 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난 부모님께 왜 영지도 있는 곳에서 내가 정신병원에 입원 했던 것을 말했냐고 성을 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백사랑은 집착이 심하다. 5살에는 몰랐으나 중학생 때는 알았다. 나도 혼자라면서 안기려고 하는 그는 그때 속으로 웃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속상해하고 있었을까.
"백사랑."
"왜?"
"넌 남자에게 인기 많지 않아?"
"아니, 고아인 거 들켰어. 그래서⋯."
"놀아주었다면 놀았을 거라는 거야?!"
나는 그제서야 내가 백사랑에게 화를 내고 있는 이유가 가장 약한 내 아내에게 그 모든 화살이 향한 것임을 알았다. 그 애는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입고리를 파들거리며 올렸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그를 안아 토닥거리며 달랬다. 백사랑은 웃으며 나는 괜찮아 반복하였다. 지금보면 호르몬 탓도 있겠지만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느 말이 들어맞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님은 내 중학교 진학 이후로 나를 반 쯤 포기한 듯 보였다. 거의 짐승보듯 보았다. 수의사라고 날 동물 취급하며 말하고 다루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알약 4개를 삼키고 잠에 들기위해 침대로 갔다. 사랑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를 알아주는 것은 나의 사랑이 뿐이었다. 나는 그때에 어떠한 연기에 휩싸여 눈앞이 흐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 때에 하나의 등대가 백사랑이었다.
“미안해.”
“괜찮아. 나 곧 취침시간이야.”
“그래? 잘자. 사랑해.”
“으응, 사랑해.”
중학생때- 정확히는 3학년 1학기 때 까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생때를 기억 안하기로 한 것과 다르다. 그냥 도려낸 것 같았다.
내 사춘기는 빨리 끝났고 초경은 늦었다. 그만큼 키가 늦게까지도 자라 나의 키는 160 후반대를 바라보고 있어 또래 중에서도 눈에 띄고 남자애들보다도 크기도 하여 종종 키를 165cm라고 낮춰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백사랑은 성인이 되어서 160cm는 넘을는지 155cm도 넘지 못하면서 자라긴 자랐다는 결과를 보고도 기뻐하였다.
중학교 3년 내내 우리는 다른 반이었으나 나의 사춘기가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년 때까지로 빨랐던 만큼 나머지 때에는 자유를 추구하는 성질을 억누르고 어느 정도 학생다울 수 있었다. 동급생에서 친구가 안 생기면 하급생과 친해지면 되었다.
"아 진짜, 묵우리 기분 나빠."
"레즈 퀸이라니까. 여자애가 저게 뭐야."
하고 큭큭대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초등학생 때 산 커플링도 이제 슬슬 녹이 슬지 않냐고 말을 할 때에,
"나 이제 보육원에서 나오려고."
"뭐, 뭐어?"
"이제 나 나와도 되는 나이. 그러니 나올 거야 자립 지원급도 꽤 많이 되니깐."
그말이 지나지 않아 백사랑은 진짜로 보육원을 나와 학교에서 버스로 몇십분이 걸리는 곳 옥탑방을 구하였다. 그곳이 우리의 신혼집이 될 거라고 우리는 그 곳을 하교하면 매번 들려 손수 꾸미었다. 내가 생각을 해도 나는 참 순애보 적인 것이 그 신혼집- 그 6평짜리 자취방의 인테리어가 완성 되었을 제 내년에 생일이 되면 결혼을 하자는 흥분이었다. 나는 그 나의 사춘기가 끝을 맺자 다시 컨트롤에 들어가려는 부모가 싫어서 아예 그 싹을 자르고 싶었다.
아무리 억누른다 해도 자유로운 것과 원하는 것을 꼭 한다는 그러한 성질은 변함이 없어서 우리는 졸업식 때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는 졸업식 때 꽃다발을 두 개 받았다. 그러나 백사랑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없었다. 그때 사랑이 이런 기분으로 5살의 날 보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나보다 사랑이에게 더 어울릴 분홍 꽃다발을 안겨주고 부모님께는, 고아라는데 불쌍해서— 하였다. 그저 착한 마음에 그런 줄 알고 부모님은 잘 했다 쓰다듬는데 이것이 꽤 웃긴 꼴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백사랑에 대해 하얗게 잊은 거 같았다.
고등학교는 남고와 여고가 붙어있는- 신혼집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학교였다. 여차하면 학교의 큰 나무로 뛰어내려 등교를 해도 될 것 같았다.
여고는 좋은 대학에 잘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 학교로 이 학교에 합격을 했다고 했을 당시 부모님은 정말 기뻐하셨다. 학교와 집이 꽤 거리가 멀다고 해서 자취를 동성 친구와 한다는 말에 허락까지 떨어졌다.
새 교복을 맞췄다. 키가 더 자랄 것을 염두에 두고 하복은 나중에 하자던가 말이 나왔지만 결국엔 하복도 같이 샀다. 교복은 검은 세일러 카라가 특징인 무릎 밑으로 5cm 내려오는 검고 긴 치마 교복이라 부모님도 이건 우리 때보다 치마가 더 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입학식장에 가보니 다들 치마를 어느 정도 줄인 상태였다. 그러니 거기서 유일하게 치마가 그대로인 우리가 커플룩을 입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바로 앞- 뒤 번호라서 손을 잡았다. 그리고선 천천히 흔들었다. 교실에서도 당연히 짝이었고 이것이 임시래도 마음에 들었다.
백사랑의 상처- 흉에 학생들은 처음엔 신경을 쓰는 듯하였으나 일주일이 지나고 흉터임을 알자 언급을 피했다. 그리고 일주가 지나고 이주가 지났다. 우리는 개인 면담을 최대한 뒤로 미루었다. 내 생일 이후에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내 생일날에 집으로 가지 않았다. 가방을 맨 채 그대로 동사무소로 향하였다. 혼인신고 서류를 찾아 작성했다. 웃어보기도하고 눈물이 조금 날 거 같기도 했다.
"내가 이날을 위해 3월 생인 거야."
"나도 이날을 위해 3월생 한 거야."
우리는 혼인신고서에 이름을 썼다.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 소꿉놀이나 뜻 모르고 하는 호칭- 보호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닌 전부 알고 하는 것. 손 끝이 파드드 떨리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복제를 해둔 부모님 도장을 썼다. 혼인신고 절대 취소 불가라는 글자는 왜 이리도 강하게 강조가 되어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알 바가 아니었다.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자 잠시 멍하였다. 이렇게 간단하게 부부가 된다니,
"여보."
"왜?"
닭살이 돋았다. 그러나 이것이 영 싫다고만 할 수는 없던 것이다.
"장보고 들어갈까?"
"그래."
손이 맨질맨질 예뻤다. 이제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학교에서는 미친년 둘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때에는 왜 미친년이냐고 그러지 말라고 짜증을 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알 것도 같았다.
“그래, 혼인신고를 했다고.”
“네.”
“그래서…. 서로가 보호자라고.”
“네.”
“노총각 선생님 놀리냐?”
“맞아요.”
그 선생님은 으이그- 하며 불지도 못하시는 단소 집어들고 때리려는 척이었다. 우리는 웃으며 교실로 도망쳤다. 고등학교 1학년, 우린 반에서 정신나간 커플로 불렸다. 꽤 행복했다.
참고로 그 이후로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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