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니의 성분

재유승대

자투리 필름 by 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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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니가 났다. 정확히는 나고 있다고 했다. 검진 받는 김에 뽑고 가시는 건 어떠세요. 마침 뒤에 예약된 진료도 없는데. 그게 좋겠네요. 되게 바르게 났어. 사무적으로 줄줄 읊던 의사가 질문과 답, 감탄을 모조리 혼자 처리했다. 달리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어 고개만 짧게 몇 번 주억였다.

[ 사랑니 뽑고 복귀하겠습니다. ]

[ 사랑니 뽑고 ㅣ ]

[ 조금 늦을 거 같습니다 온김에 사랑니 뽑고가라데요 ]

[ 조금 늦을 거 같습니다 온ㅣ ]

[ 사랑니 뽑고 갈게요 ]

잠깐의 틈을 타 팀 감독에게 연락을 돌렸다. 답장은 빠르게 돌아왔다. 그래. 짧은 두 음절을 확인하고 눈을 감는다. 의사가 신은 슬리퍼 뒤축이 질질 끌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우선 약부터 드시고요 약효 돌면 발치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우습게도 임승대 생각이 났다.

사랑니의 성분

재유.

승대 쫌 무섭지 않나.

징글징글한 매미 구애소리를 뚫고 느닷없이 던져진 질문에 내뱉던 숨을 멈췄다. 잠시 참았던 호흡 조용히 이어 붙이며 생각에 잠긴다. 걔가 무섭다고? ...무거운 게 아니라? 매서운 땡볕이 쓰다듬고 간 아이스크림 표면이 녹아 나무 막대를 타고 손가락 위로 흘렀다.

글쎄... 내는 잘 모르겠는데.

글나...

손가락 위를 지나 손등을 타고 흐르는 걸 가만 바라보다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 한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무른 아이스크림이 뙤약볕에 덩달아 달아올랐던 입 안 온도에 마구 부서졌다. 차가웠다.

가만 듣자 하니 표준 규격을 한참 벗어난 덩치가 그 첫 번째 이유랬다. 고만고만한 사내놈들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머리통.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침마다 공을 들여 한껏 세운 머리가 부수적으로 덧대진다. 어줍잖게 고개 드는 걸로는 눈 한 번 맞추기도 힘든 거구와 이를 더 크게 보이게 하는 헤어스타일. 거기다 임승대는 시선 한 번 흘끔 내줄지언정 빳빳한 고개는 허투루 숙이지 않는 놈이었다.

위압감 느껴진다이가.

진재유는 적당히 동의했다. 정확히는 그런 척 했다. 벤치에 앉아있거나 나란히 바닥에 앉을 때가 아니면 시선 맞붙이고 있을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여전히 무섭다는 의견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글타고 금마가 무섭나. 깊은 눈이 또다시 골몰한다. 암만 머리를 굴려봐도 무섭다기보다는... 아이스크림이 있던 흔적만 남은 막대가 손가락 끝에 걸려 까딱거렸다.

두 번째 이유는 말이 너무 없다는 것에 있었다. 여기서 진재유는, 오늘의 화두에서 완벽하게 배제되기로 한다. 진재유가 기억하는 임승대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저 지난 경기를 돌려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러 와서 치근덕대기 일쑤인 놈이었으니까. 창고에 등 대고 선 학우의 입이 끊임없이 임승대를 짜냈다. 턱 괸 채로 눈을 감고 완벽한 타인의 입장에서 얼기설기 엮어낸 임승대를 본다. 여기저기 실밥이 튀어나오고 코가 빠져 구멍이 송송 뚫린 모습이었다. 이 역시 진재유가 익히 아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전 자습 시간에만 해도 진재유 어깨 위에 대뜸 제 턱 얹어두고 귓속 사정을 궁금해하던 놈이다. 정작 이어폰을 나눠주면 아연한 표정을 하면서도 꼭 그랬다.

아가 낯을 가려가 그런갑다.

한참 생각하다 적당히 말 잘라낸다. 어쨌거나 당사자 없는 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먹이는 건 썩 유쾌하지도, 정당하지도 못한 일이니. 팔을 몸 뒤쪽으로 뻗어 기대며 고개 젖혔다. 얼굴 위로 있는 힘껏 내리꽂히는 태양열이 따가웠다. 임승대가 말이 없다고. 한숨과도 같은 얕은 웃음이 샜다. 코트 위 진재유가 도맡는 포지션은 전체적인 판을 볼 줄 알아야 했고 넓은 시야를 가진 쪽이 유리했다. 그리고 진재유에겐 그 재능이 있었다. 같은 코트 위에 선 사람들 중에 견줄 자가 없느냐 하면 또 완벽하게 그렇다고 할 순 없었지만, 어쨌거나 특출난 면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남들은 들을 수 없는 임승대의 말들을 읽어낼 줄도 알았다. 걔 말은 무척 쉽게 들렸다. 희한하게도.

재유. 뭐해.

바로 지금처럼.

젖히고 있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한창 거론되던 주체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끈적한 나무 막대를 쥐고 있던 손에 움찔 힘이 들어갔다. 거꾸로 마주 본 임승대는 평소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나른하게 끔뻑이는 눈을 맞대고 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고개를 든다. 빛을 등지고 있어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손 들어 차양을 만들려다 끈적임부터 덜어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대강 털었다. 흘금 돌아본 학우들 낯 위로 낭패감이 서려 있는 것 같아 가볍게 손짓한다. 걱정 말라는 의미였다. 막대 쥔 손 들어 부동자세로 선 임승대 팔을 가볍게 치고 고갯짓한다. 느른한 눈이 슬금 따라붙었다. 봐라, 지금도 할 말 무지 많은 눈인데.

다 되셨어요. 잘 참으시네. 최소한의 친절을 담은 건조한 목소리가 진재유를 일으킨다. 이런저런 유의 사항을 적당히 새겨들으며 잇몸 사이 차지하고 앉은 솜을 혀 끝으로 살짝 눌렀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처방전을 받아들고 병원을 나선다. 미지근하게 익은 바람이 뺨을 뭉근하게 누르고 지나갔다. 학교로 향하는 버스는 마중이라도 나온 양 정류장 지척에 있었다. 텅 빈 버스 안, 창가 자리 차지하고 앉아 머리를 기댔다.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아 둔한 입 안을 이리저리 들쑤시며 가방 끌어안는다. 출발까지는 아직 몇 분 남아있었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쓰레기통이 없었다. 나무 막대가 끈적이다 못해 지문 사이사이에 달라붙은 것 같아 한시라도 빨리 손을 씻어내고 싶었다. 애매한 거리를 두고 걷는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자리했다.

재유.

임승대가 먼저 입을 연다.

어.

뭔 얘기하고 있었는데.

일정한 보폭으로 걷던 발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우뚝 멈춰선 임승대를 돌아보며 낮게 신음한다. 지칠 줄 모르고 쏘아대는 태양열에 정수리가 따가웠다. 애먼 나무 막대 까딱이다 짧은 한숨 뱉어내고 다시 한 걸음 내디딘다. 곧이어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

니 욕 했다.

구라치지 마라.

......

......

......

...... 진짜가.

만다꼬 무게 잡고 다니노. 아들이 니 무섭다 안하나.

임승대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 굳게 닫혔다. 따끔따끔한 침묵은 체육관에 들어설 때까지 지속됐다. 내 손 쫌 씻고 온디. 임승대는 고개 한 번 까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서서히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걸음을 재촉한다. 진재유는 마주치고야 말았다. 닫히기 직전 문 틈새로 보이던 임승대의 얼굴을. 오늘따라 긴 청소 시간이 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재유.

어.

니 키스해봤나.

맥락도 의중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오늘따라 얘고 쟤고 질문이 많네. 꽂아 넣은 이어폰을 핑계로 못 들은 체 한다. 옆자리 꿰차고 앉은 임승대의 끈덕진 시선이 옆얼굴을 마구 핥는 것 같았다. 꿋꿋하게 들여다보던 핸드폰 내려두고 미간 꾹꾹 눌렀다. 갑자기 뜬금없이 뭔소리고. 한숨과 함께 고개 뒤로 젖혔다가 방향 틀어 내린다. 답지 않게 제 양 무릎 끌어안고 있는 꼴이 제법 웃겼다. 늘상 할 말 가득 적힌 눈이 옅게 침질해 있었다. 조금 전에 놀렸던 게 살짝 켕기기도 했고. 오늘은 장단 좀 맞춰줄까 싶었다. 몇 초 정도 가만히 마주하다 시선 끊어내며 짧게 대꾸했다.

어.

뭐? 언제?

대답 내어놓기가 무섭게 훅 달라붙어 온다. 임승대는 늘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거리감을 좁혔다가 제멋대로 멀어지곤 했으므로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드물게 크게 뜬 눈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 핸드폰 화면을 다 가렸다. 바닥 짚고 있던 손 들어 임승대 얼굴을 옆으로 꾹 밀어냈다.

비키라. 안 보인다.

언제 해봤냐니까.

오래도록 공을 잡아 또래보다 큰 축에 속하는 진재유 손보다 임승대 머리통이 한참 컸다. 꿈쩍도 하지 않는 이마를 가만히 바라보다 혀 한 번 차고 장단 마저 맞춰주기로 한다.

... 언제는 뭘 언제고. 혜서 누나 만날 때 있다이가.

...... 와 진재유 꼬맹인 줄 알았더만.

불쑥 들이밀었던 몸 도로 물리고는 다시 벽에 등 기댄 채 주르륵 늘어진다. 그러면서 또 한참을 주절댔다. 얌전한 줄 알았는데 부뚜막에서 놀고 있었네 배신이네 하는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다시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건수 하나 잡았다 이거지. 느슨하고 옅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일자로 쭉 뻗어 시야 귀퉁이에 걸리는 튼튼한 장딴지에 잠시 시선 두었다가 핸드폰 화면으로 돌리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불쑥 치고 들어와 옷깃을 쥐고 당겼다. 방심한 사이 훌쩍 끌려가 몸의 무게중심이 완전히 무너진다.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얇은 입술 표피 위로 타인의 콧김이 닿아 몸 굳혔다.

야 니 뭐 하는,

무식하게 짓누르는 입술에 말 허리가 뚝 끊겼다. 핸드폰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인마가 진짜 미쳤나. 다부진 어깨 밀어내며 미간 한껏 찌푸린 채 있는 힘껏 노려보지만 두 눈 질끈 감은 낯짝만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해 벌어진 입술 틈새로 두툼한 혀가 밀고 들어왔다. 물컹하게 닿는 감각이 등줄기에 길게 소름을 깔았다. 뭐고 이거. 진짜가. 맹세컨데 진재유는 단 한 순간도 친구와 주둥이 부비겠다는 발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임승대라면 더더욱. 두터운 혓바닥이 거침없이 입천장과 치열을 훑어댔다. 무식하게 들쑤시는 게 꼭 제 덩치 생각 못하고 시야 끄트머리에 걸려있는 임승대 본인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아니 근데 이거 진짜 버거운데. 호흡할 틈도 뭣도 주지 않고 입 안에 꽉 들어찬 타인의 살덩이는 영 달갑지 않았다. 허용한 적 없는 침입에 혀가 바싹 굳었다.

어깨를 밀어내다 못해 세게 내려치고 나서야 쥐어 잡았던 멱살을 놓아줬다. 타액이 죽 늘어져 체육복 위로 동그란 자국을 남긴다. 보란 듯이 손등으로 입술 벅벅 문질러 닦았다. 손등에 입술을 댄 채로 흘겨본 임승대는 번들거리는 입술로 실실 쪼개고 있었다. 정신 한 번 야무지게 나간 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나.

음, 별로.

그럼 더위라도 먹었나.

그것도 아인데.

느물거리는 낯짝이 능청스러운 대답만 짧게 톡톡 잘라 내뱉었다. 그 얄미운 행태에 한참 입술 문질러 닦으며 눈으로 힐난하던 진재유 손이 느릿하게 뻗댄다. 임승대의 큰 몸이 다가올 충격에 대비라도 하듯 움칫 굳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두터운 목덜미 위로 투박한 손이 가볍게 얹힌다.

... 야 설마 진짜 때리게?

니는 진짜 말이 참 많네...

어쨌거나 진재유도 고등학생 남자애였다. 호기롭다면 호기롭고 승리욕도 꽤 있다고 할 수 있는. 미적지근해 보이지만 제법 커다란 불을 품고 있는 운동부 남자애. 그러니까 이번에도 지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당혹감과 기대감이(왜?) 미묘하게 뒤섞인 표정 가만 들여다보다 목덜미에 얹어두었던 손에 힘주어 느릿하게 당겼다. 육중한 몸이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넘어왔다. 은은하게 차오르는 고양감에(그러니까 왜?) 어쩐지 웃음이 샐 것 같아 혀 끝을 꾹 눌러 씹었다.

그리고 여기서 임승대는 숨을 참는다. 진재유 얼굴이 가까워지는 게 생경하고 또 난생처음 보는 낯을 하고 있어서. 걔가 쳐다보는 게 눈이 아니라 조금 더 아래를 향해있어서.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낮게 포복한다. 내리깔린 눈이 점차 눈꺼풀에 가려진다. 슬로우모션이라도 걸린 양 느릿한 움직임에 몸 어딘가가 몹시도 근질거리는 것 같아 운동화 안에 갇힌 발가락이 절로 곱아들었다. 조금 크게 뜬 눈으로 진재유의 감은 눈 위를 더듬는다. 속눈썹 한 올조차 떨리지 않는 게 어쩐지 고까워 심통이 났다. 입 꾹 여문 채로 얼마나 있었을까. 닫혀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고 시선이 다시 얽힌다. 참았던 호흡 조심스레 흘리며 짙은 눈동자 위를 읽었다. 은은하게 타오르며 침입 허용을 요구하는 빛깔이었다. 그 기세에 몰려 못이기는 척 힘주어 닫고 있던 입술에 살짝 힘을 풀어낸다. 부드럽게 침투하는 살덩이와 함께 마주한 눈이 도로 감겼다. 그게 꼭 '그래, 그렇게.'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뒷덜미 내리누르는 손바닥 아래 맥박이 마구 뛰었다. 쿵쿵거리는 고동 소리가 진재유에게서 건너오는 건지 임승대 본인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라인 밖에서 딥 쓰리! 깔끔하게 들어갑니다!

나동그라진 이어폰에서 중계 소리가 마구 튀었다. 바닥 짚은 손 아래에는 땀이 배어 나왔다. 조심스레 파고든 혀가 여린 살을 훑고 입천장을 쓸며 맞부딪힌 살덩이를 가볍게 빨았다. 새털 같은 움직임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뜨뜻한 손바닥은 여전히 임승대 뒷목을 감싸 쥐고 있었다.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가락이 가만가만 목덜미를 쓸어내리자 빳빳하게 굳었던 몸이 머뭇머뭇 풀렸다. 가물거리는 시야 속 진재유가 고개를 살짝 비튼다. 엷게 찌푸려진 눈썹을 보고 있자니 뭔가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기어코 눈 마주 감기로 했다. 서늘한 체육관 구석에 매미 우짖는 소리와 드문드문 질척한 소리만 났다. 입술 위에서 터지는 입김이 뜨거워 주먹 꾹 말아쥔다. 아, 이거 좀 위험하다. 뒤늦은 감상이었다.

한참 후에야 떨어져 나간 진재유가 또다시 입술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임승대는, 하마터면 물러서는 몸뚱아리를 붙잡고 다시 입술을 붙일 뻔했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뒤늦게 얼굴에 열이 몰려 지퍼를 턱 끝까지 올려 잠갔다. 흘깃 쳐다본 진재유 귀 끝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 키스는 이렇게 하는 기다. 니처럼 무식하게 휘젓는 게 아이라.

어색한 침묵 위로 진재유의 머쓱한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임승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르튼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진재유 입술 한 번 흘겨봤을 뿐이다. 그래서 진재유는 임승대의 눈을 들여다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바닥에 꽂힌 임승대 시선은 들릴 줄을 몰랐고 진재유는 그 시선 붙잡아 당길 생각까진 없었다. 고요해진 이어폰 집어 귀에 꽂으며 마지막까지 시야 끄트머리에 임승대를 달아두기만 했다. 다른 누군가가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침인지 피인지 모를 끈덕진 액체를 삼키며 체육관 문 밀어젖힌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맛이 계속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안쪽에서 슛 연습을 하던 성준수가 먼저 다가와 진재유의 얼굴을 살핀다.

재유. 사랑니 뽑았다며.

적당히 온건한 목소리를 듣자 하니 별일 없었던 모양이다. 시선 살짝 빗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부원들 한 번 훑어보고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왼쪽 뽑았나 보네. 부었다, 거기.

맞나...

짧은 대화 몇 마디 나누고 체육관 구석에 가방 툭 내려둔다. 내 화장실 쫌. 어 다녀와. 핏물 진득하게 배어 나오는 솜을 뱉어내고 싶었다. 체육관 밖에는 여전히 쓰레기통이 없다.

잇몸에 달라붙어 있던 솜 뱉어낸다. 너저분한 쓰레기 사이로 핏덩이 같은 솜이 툭 떨어졌다. 혀 위에 얇은 막이라도 생긴 양 이질적인 느낌이 들어 세면대 앞에 선다. 입 헹구지 말라고 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두 손 모아 오목하게 만들어 물을 담았다. 차가웠다. 마취가 여즉 풀리지 않은 입에서는 핏물이 줄줄 샜다.

임승대가 말도 없이 전학 가기 일주일 전, 뜬금없이 사랑니가 났다고 했었다. 불규칙한 선을 그리며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연홍색 물을 바라보며 떠올렸다. 재유. 나 사랑니 났다. 달리 붙여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그러냐 하고 말았던 게 생각났다.

다시 입을 헹구고 뱉는다. 세면대가 또 벌겋게 물들었다.

멋모르고 떠들던 애들한테도 말해줄 걸 그랬다. 걔는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어금니 뒤쪽에 숨겨두고 있는 것 뿐이라고. 만약 걔한테 사랑니가 난다면 그건 분명 입 밖에 내지 못한 것들이 잔뜩 뭉쳐 만들어진 걸 거라고. 걔가 꺼내놓지 못한 말들은 눈 속에도 잠들어있고 어금니 뒤쪽에도 박혀있고 혀 아래에도 잠겨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키가 컸을까. 할 말을 여기저기에 다 소분해 담아내느라고.

이제 와 다 의미 없는 일일 거다. 햇볕이 유난히 뾰족하고 하늘이 무척 쨍하게 빛났던 여름 가운데. 녹아떨어져 콘크리트 바닥 위로 점점이 남았던 아이스크림의 이름조차 희미했다. 의미 없이 물 흘려보내던 수도꼭지를 잠그고 고개 들었다. 거울 속 한쪽 뺨이 벌겋게 부은 제 얼굴을 마주한다. 담담한 낯짝 위로 드러난 표정의 이름을 고민하다 문득. 입술을 세게 씹었다.

누군가를 훤히 읽을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이 한사코 펼쳐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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