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울지 마. 그곳엔 반드시 내가 있을테니까.
읽으시기 전에 잠깐!
이 글은 지인 간의 티알을 구경하며 충동적으로 적어낸 글이며,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내렸기에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용과 관련된 스포가 있을 수 있기에... 는 맞는 얘기지만 그냥 핑곕니다. 지인분을 위해 저 멀리 던져진 글을 가져와서 다시 쓰고 있는 거라 읽으시는걸 추천드리진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기꺼이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즐거운 감상 되시길!
오랫동안 이어진 전쟁은 때때로 몇몇 이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전시의 위험함과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서는 안된다는 각오가 흐려지기 시작했고, 많은 이들이 전쟁을 괄시하고 생명을 경히 여기는 이들에 의해 죽어 나갔다. 당장 눈앞의 자신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명가에 속한 이들이든, 혹은 떠도는 이들이던 간에 상관없이 모두 같았다.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그들의 지도자는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이 반드시 치뤄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도 많이 마주한 채였다.
"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
그리고 몇 년 만에 복귀한 과거, 이슈가르드 귀족원의 의장이자 신전기사단의 총장이었던 아이메리크는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도시 전체를 몇 번이나 돌았건만, 아무리 자신이 몇 년 동안 행방불명인 상태였다고는 해도 이렇게나 성도가 바뀔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였다. 무엇보다, 성도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그의 얼굴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 누구도 알아보는 듯한 기색이 없었던 탓에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듯한 기시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로 인해서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게 사실로 자리 잡았건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 희망, 좋지. 만약, 수확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수확이 있었다면, 말이다.
아이메리크는 푸른 검을 허리에 단단히 매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성도 내부는 여전히 조용했고, 또한 소란스러웠다. 곳곳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리다가도 금세 고요해지는 것의 반복. 지나가다 마주친 이에게 말을 걸려고 해도 대부분 무시하거나 말을 얼버무리며 피하기 일수였다. 몇 시간을 계속해서 돌아도 수확이라곤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과거 교황을 섬겼을 때와 같이 지도자 하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것, 기존의 외관이나 구조, 건물까지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성 레마노 대성당으로 향한 아이메리크는, 제일 뒷자리에 앉아 할로네 동상을 바라보며 손을 모았다.
" 할로네시여... 이 일을 어찌 해야 합니까. "
" 어떡하긴, 이대로 돌아가면 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이야. "
철컥.
낯선 금속음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등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뒤통수에 닿은 차가운 느낌이 온 몸을 서늘하게 만드는 기분에, 아이메리크는 눈을 뜨며 팔을 쓸어내렸다. 달싹이던 입은 이내 익숙한 한 단어를 만들어내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침묵에 매듭을 지었다.
" ...스테파니비앙. "
이슈가르드 기공방의 주인. 총기와 같은 무기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곧잘 사용할 수 있을 법한 도구나 장비를 만들어내어 전쟁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그야말로 누구나 인정할 법한 영재.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코 쉽지 않은 상대를 마주한 탓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성도 내의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던 와중 자신을 알아보는 익숙한 이가 나타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자신의 친우였기 때문이다. 이런 총구 따위는 겨누지 않을, 누구보다도 매우 소중하게 여겼던 친우.
" 이게 무슨 짓인가. "
"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아이메리크. 이게 무슨 짓이야? "
" 뭐라고...? "
" 성도 내부를 휘젓고 다니다니.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나. 수상한 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시민들이 불안해하잖아. "
느리게 툭, 툭. 뒤통수에 차가운 감각이 닿았다 멀어지기를 두어번 정도 반복했을까. 이내 작은 금속음을 내며 총이 거둬지고, 그대로 걸음을 옮긴 스테파니비앙이 아이메리크의 앞 좌석에 턱을 괴고 앉았다.
" 네가 알던 이슈가르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 돌아가, 메리. "
" 스테파니비앙...!! "
" 왜, 또다시 의미 없는 짓을 반복하고 싶어? "
어디 한 번 해봐. 잔뜩 깊어져 대각선으로 씩 올린 입꼬리가 비웃음을 자아낸다. 도발이 아닌 경고였다. 가늘게 휘어진 눈과 작게 드러나는 푸른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명한 적의와 경멸. 스테파니비앙은 한 손으로 총을 휙 돌린 후 가볍게 쥐며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행동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 직후, 아이메리크는 모았던 손을 풀고 팔을 뻗어 스테파니비앙의 목 근처 옷깃을 억세게 붙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 유감이군. 또다시, 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 말이야.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아니, 잊었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말해주지. "
" ....... "
"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스테파니비앙. 내가 이대로 순순히 포기하고 넘어갈 것 같나? "
갑작스레 당겨진 몸에 놀란 탓일까, 동그랗게 뜨인 눈이 잘게 떨렸다가 가라앉았다. 그 직후, 파박 거리며 불씨를 타고 피어난 푸른 불꽃이 눈동자 안쪽 너머로 넘실거리며 심해를 마주했다. 그가 익히 알고 있었던 뜨겁게 타오르는 종류의 것이 아닌 더없이 시린 듯한 느낌을 준다. 찰나의 순간, 검은 빛이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마치, 노이즈 같은...
" 그래, 너라면 포기하지 않겠지. "
상념을 이어가기 전에 들려온 목소리가 깊어지려던 생각을 끊어내었다. 담담하게 말하는 것은 아무런 꾸밈이 없는 사실 그 자체였다. 스테파니비앙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쥐었던 총을 다잡고 아이메리크의 머리에 겨누었다. 직전까지 제 머리에 닿아있었던 탓인지, 서늘했던 총구의 온도는 살짝 미지근할 정도로 데워져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죽음 바로 앞에 놓여 있는 상황에서도 아이메리크는 태연하기만 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그러니 남아있는 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 뿐이다.
" 있잖아, 메리. 만약 우리가 끝없이 많은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면 대체 언제까지 의미 없는 짓을 계속해서 반복해야만 하는 걸까. "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이었다. 끝없이 많은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면, 이라니. 꼭 책 속에서나 볼 법한 문장이었다. 그런 일이 현실로 이루어질 리가 없으니까. 죽음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주기 전 작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던 걸까.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저으며 스테파니비앙의 말에 답했다.
" 글쎄... 잘 모르겠군. 하지만 나라면, 끝을 상징하는 순간이 다가올 때 까지 멈추지 않겠지. "
" 그 끝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해도? "
" 그래, 기약 없는 끝을 위해 반복하며 다음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억지로라도 품고 나아가지 않을까. "
"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니...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이네. "
" ....... "
그 말 대로였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란, 이 얼마나 슬픈 단어인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 희망을 손에 쥐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또 다시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의 반복일 테지. 몇 번이나 반복하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에야 모든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한없이 절망하고 체념할 것이다. 스테파니비앙에게 자신은 다음에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가겠다고 했지만, 그게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수 백, 수 천번을 반복한다 해도 그대로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정신을 놓는다면 모를까, 인간은 모름지기 희망을 쥐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희망마저 덧없는 것임을 깨달은 순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대답 역시도 그저 이상에 불과했다.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들자, 여전히 제 머리에 겨누어져 있는 총과 그 방아쇠에 올려져 있는 손이 보였다. 그래, 마치 지금과 같은 순간이 반복되어 희망은 덧없는 것임을 매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다면..
이미 무너졌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 그러니, 만약 우리 둘에게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
" ....... "
" 그저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겠어. "
눈을 감는다. 운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호흡을 정돈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아이메리크는 그저 웃었다. 미련을 털어내며 늘 그렇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스테파니비앙은 떨리는 손 끝에 힘을 주어 제 몸쪽으로 당기며 입을 열었다.
" 대답은 들었으니 그럼 이만 작별 인사를 해볼까... 만나서 반가웠어. "
탕,
작별인사와 함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머리를 관통하여 저편으로 날아간 소리가 뇌와 심장을 가득 메우며 죽음이라는 이름의 노래를 만들어낸다. 그 완벽함에 잠시 멈추었던 시간이 흘러가며 온통 붉은 장미로 가득 채운 듯한 호수가 피어나며, 이윽고 허물어지기 시작한 신체는 누군가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힘 없이 고꾸라진다.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건만, 정작 그 모든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그저 힘없이 팔을 밑으로 떨구며 제가 앉은 의자 위로 엎어진 머리카락과 이내 물방울이 되어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생명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메리크가 조금 더 깨어 있을 수 있었다면 덧씌워진 가면이 흘러내린 채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친우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러지 못한 채로 어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숨이 멎으며, 호흡이 잦아든다. 뇌와 심장을 연결하던 것이 존재를 잃고 허공을 떠돌다 이내 사라져가고, 따스한 불꽃은 돌아가야 할 곳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 어둠은 몸을 잠식해가고, 끝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자, 이윽고 혼자 남겨진 이는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오롯이 제 눈동자에 풍경을 담아내었다. 어쩌면 이것이 최선의 결과일 것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고, 거짓된 모습을 덧씌우며 가장 이상적이라 여겨질 모습을 눈에 담았어야 했으니까. 달라진 성도와, 낯선 친우. 어느 것도 익숙한 형태를 띄지 않은 채 진실을 안다고 해 봐야, 결국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끄는 결과만이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 가운데에서 행복을 찾아봐야, 작은 희망 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 또 만나자, 아이메리크. "
그 때는 모든 희망을 손에 쥐고서.
담담히 내뱉은 말은 일종의 선고였다. 마치 정말로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제는 서늘하게 식어가는 친우의 모습을 보며 스테파니비앙은 몸을 일으켜 성 레마노 대성당을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래가 버석거리고, 무너진 콘크리트 조각이 굴러다니는 어느 폐허 한켠에 쓰러져있던 익숙한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지금은 밤이라 쉽사리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아이메리크의 모습을 본다면 지나가는 이가 누구든 빈말로도 멀쩡한 상태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 터다. 머리에는 흙먼지와 핏자국이 함께 말라붙어 있었으며, 몸 여기저기에는 베이거나 긁힌 상처가 가득했고 입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했으며, 거기에 더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해진 안색에,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동자라니. 꼭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지 않은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이메리크는 매우 제정신이었다. 단지, 조금 지쳐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내 툭 떨어뜨리는 것은 감정의 잔재. 아이메리크는 높이 솟아오른 건물을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끝을 예감했건만,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현실은 잔혹함을 남김없이 드러내었다.
걸음을 옮겨야 했다. 다시금 성도를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가득 메웠다. 아이메리크는 잔뜩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옮겨 한 걸음을 내딛자, 잃어버렸던 기억과 저 멀리 버려져 있던 퍼즐 조각이 제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긋나 멈추었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새로운 기억을 찾아낸다. 그것은, 오래도록 한 사람에게만 주어져 있었던 원하지 않는 특혜였다.
내가 원한 건 이런 대답이 아니었어......
...또한, 생명을 가벼이 여겼던 지도자의 옛이야기였다. :: 외전 01 中
아이메리크는 저 멀리 보이는 성도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사랑했던 이슈가르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이제는 알았다. 지금의 이슈가르드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성도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아이메리크는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외관의 용머리 전진기지부터, 대심판의 문. 그리고 마침내 성도 내부에 이르기까지. 이전과 달리 삭막하게만 느껴지는 이슈가르드의 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쉰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다는 것 정도일까. 눈에 띄는 복장과 무기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사람이 없는 것에 안심하며 바닥에 떨어진 벽보를 주워들었다.
[새로 뽑힌 지도자, 그의 행보를 쫓아서.]
익숙한 얼굴과 함께 그를 찬양하는 메시지가 가득 적혀있었다. 무너져가던 이슈가르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던가, 체제를 정비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던가, 그 후 이슈가르드 내부가 빠르게 안정되었고 지금은 주변 국가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전히 동맹국을 맺고 있으며, 새로 발표한 정책들이 모두 원활히 시행되고 있다는 것 따위의 내용이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아이메리크의 눈에 마지막 문단에 익숙한 이름과 함께 적힌 문장이 보였다.
[스테파니비앙, 그가 100년동안 이슈가르드의 지도자로써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100년이라.
참으로 애매하고도 긴 시간이다. 무엇이 되었건 간에, 이 모든 것의 열쇠는 스테파니비앙이 쥐고 있겠지. 벽보를 접어 품속에 넣고서 기공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와 관련이 있는 곳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었다. 그는 이슈가르드의 지도자이기 이전, 기공방의 주인이었으니.
익숙한 분수대와 깨어진 동상이 있던 자리-이제는 스테파니비앙의 동상이 있는-를 지나 기공방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기계들이 내는 불규칙하고도 투박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다시 두드려도, 여전히 답이 없었다. 문을 당겨보아도 잠겨있을 뿐이다. 주인이 없어졌으니 당연한 일인가.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곳을 먼저 다녀와야겠다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 목소리 낮춰. 지척에 시선이 가득 깔려있으니까. "
잔뜩 가라앉아 긴장한 것이 역력한 목소리에 행동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자 깊게 눌러쓴 망토 모자 사이로 삐져나온 은빛 머리카락이 보인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이쪽을 향하는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과연. 아무도 신경을 안 쓰는 줄 알았건만, 연막이었던 건가. 하기야, 이런 복장을 하고서도 눈에 안 띄길 바라는 건 무리였겠지만.
상념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 새 잊힌 기사 주점에 다다른 것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대는 익숙한 듯이 문을 열고서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아이메리크 또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본디 왁자지껄한 분위기였을 주점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은 채 텅 비어있었다. 근처에 마련된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야 깊이 눌러썼던 모자를 벗어낸 이가 한숨을 쉬며 아이메리크를 올려다보았다.
" 태평하게 돌아다닐 시간이 있나 보지. 네가 있는 것을 보니 이쪽은 스테파니비앙인가 보군. "
" 에스티니앙... 자네가 그걸 어떻게. "
" 묻지 마. 나도 지금 혼란스러우니까. 그보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
" 이 곳이 100년 뒤의 미래라는 것, 지도자가 스테파니비앙이며 내가 알고 있던 이슈가르드와는 다른 곳이라는 것... 스테파니비앙의 말을 듣고 유추한 바에 따르면 그가 나를 죽인 것이 한 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으며, 나는 죽더라도 늘 돌아왔다는 것 정도겠군. "
한숨이 안도를 담아 내뱉어졌다. 다행히 너무 늦진 않았군. 그렇게 중얼거리다 아이메리크의 눈을 마주한다. 답지 않게 텅 비어버린 눈동자에 작은 희망이 반짝였다.
" 나도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 빠르게 설명할게. "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아이메리크와 같이 어떠한 굴레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서두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모든 것은 어떤 거대한 힘과의 계약으로 인한 것이라는 것.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선 이를 끊어낼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것. 그 매개체를 이용해 계약자를 공격한다면 중도 파기와 함께 계약이 해지된다. 그렇게 된다면 비로소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메리크는 에스티니앙의 말을 들으며 테이블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며 생각에 빠졌고,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알아차리기라도 했는지 단호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 어중간하게 팔 혹은 다리를 노리지 마. 심장이나 머리를 노리는 게 좋을 거다. "
" ......심장이나 머리라. 후우, 노력해보지. "
" 쉽지 않은 일이라는걸 알지만 해내야 해. 3번의 공격을 마치면 계약을 보호하고 있는 막이 깨질 테고, 그 이후엔 뭐든 좋으니 공격해라. 그럼 완전히 끊기게 될 거야. 단, 계약이 중간에 깨지는 만큼 그 여파는 당연히 존재할 거다. 어쩌면 혼이 이미 다 먹혔다면... 가망이 없을 수도 있어. "
"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건가. "
" …계약을 깨는 것에 성공했다 해도, 그 대가가 생명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
그를 살리기 위해 달려 나갔던 것이, 전부 소용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자신의 손으로 그의 숨을 끊어내는 결말이 되는 거지. 에스티니앙은 이미도 정해진 것을 말하듯이 차분했다. 그는 각오하고 있다는 거겠지. 그것이 어느 쪽인지는 불분명했지만. 아이메리크는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 만약 계약을 깨지 않는다면? "
" 그렇다면, 결국 모두 죽게 되겠지. 이 도시와 함께 영원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처럼 잊혀질 거다. "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제대로 기억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며,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라질 이들, 세계가 지우려고 하는 이들이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의 존재를 선명하게 인지했겠지만, 점차 흐려져 간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라고 했다.
" 그러니, 매개체와 녀석을 찾아.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 "
" 그래... 고맙군, 에스티니앙. "
" 젠장, 감사 인사는 오히려 이쪽에서 해야 하는데...... 본인에게 다시 알려주게 될 줄은 몰랐다고. "
" 응...? "
" 아무것도 아니다. 괜한 겉치레 인사는 그만두자는 말이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
품 속에서 꺼내 펼친 지도에는 이슈가르드 하층과 상층의 구조가 자세히 나타나 있었고, 그 위에 빨간 화살표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그중 하나,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 여관 뒷문을 통해 상층으로 올라가. 이전에 녀석을 만났던 곳 중에 기억에 남은 곳이 있다면 우선은 거기부터 가보는 게 좋을 거다. 되도록 사람이랑 마주치더라도 말은 걸지 않는 게 낫겠군. "
" 그러지. ...자네는 어쩔텐가. "
" 어쩌긴. 네가 쫓고 있는 그 녀석과 같이 바보 같은 놈이 하나 더 있으니, 찾으러 가야지. 이만 일어서자고. "
어쩐지 급해 보이는 모습에 의아할 즈음,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일으키고는 계단을 내려갔고 아이메리크는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익숙한 듯 뒷문에 걸린 빗장을 풀고 문을 열자 눈보라가 휘날리는 익숙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에스티니앙은 덤덤하게 다시 모자를 뒤집어쓰고, 아이메리크의 등을 밀었다.
" 어서 가, 더 늦기 전에. 훗날,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면 이슈가르드에서 다시 만나자고. "
" 그래, 자네도 꼭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길 바라겠네. "
어색하게나마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려 달려 나가자, 뽀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길을 따라 발자국이 남겨진다. 그가 아는 친우라면, 아이메리크라면 스테파니비앙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티니앙은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침을 돌리며 마지막으로 옅게 웃었다.
" 잘 있어라, 아이메리크. 그리고... 미안했다. "
바스라진 생명이 미련 없이 작별을 고하고 무너져내렸을 즈음, 아이메리크는 최후의 보루를 지나 성 레마노 대성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 분명... 이 곳이었지. "
기도를 하다 스테파니비앙을 마주하고 죽음을 마주했던 곳. 에스티니앙의 말대로라면, 매개체 혹은 스테파니비앙 그 본인이든 어느 한쪽의 단서는 존재하겠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안쪽으로 향한다. 성 레마노 대성당의 입구에 도달하며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다행히 잠겨있지는 않군. 그리 안심할 즈음, 전쟁신 할로네 동상 앞 단상에 서 있는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대성당의 내부는 어두웠고 멀리 있는 얼굴을 판별하기에는 어려웠기에 가늘게 뜬 눈이 탐색하듯이 상대를 훑어보더라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메리크는 결국 걸음을 옮겨 거리를 좁혔고, 점차 인영에 가까워질 수록 서서히 흐릿하던 모습이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이윽고 둘 사이의 거리가 3미터 쯤 남았을 때였을까, 담담한 목소리가 대성당을 가득 울리며 흘러들었다.
" 어서 오게, 아이메리크 경. "
그린 듯한 미소, 반듯하게 하나로 모아 깍지를 낀 손. 둥글게 휘어져 살짝 올라간 눈매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꼭 제가 아는 누구와 닮은 듯한 얼굴과 결정적으로 한 쪽 귀에서 흔들리고 있는 푸른 귀걸이. 설마 하며 우려하던 일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날 기다리고 있었나? "
" 그래. 네가 이 곳으로 올 거란 건, 이미도 알고 있었으니까. "
" ...스테파니비앙은? "
" 아쉽게도, 그는 빙천궁 예배당 옥상에 있어. 유감이군. 본의 아니게 허탕을 치게 만든 셈이니 말이야. "
말과는 다르게 아쉽다는 얼굴도, 유감이라는 표정도 아니었다. 단지 성가시다는 듯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의무감이 깃든 것도 같았다. 아이메리크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이를 바라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 왜 나를 막는 거지? "
"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이것이 사랑해 마지않는 친우가 원하는 것일 테니. "
비소를 지으며 등에 매고 있던 총을 내려놓는다. 그린 듯이 띄운 미소는 가식에 불과했다. 허리춤에 매고 있던 단검 하나를 꺼내 들어 가볍게 쥐고는 남은 하나를 이쪽으로 던진다. 챙강 소리를 내며 굴러온 단검을 주워 들자 눈을 휘어 웃곤 말을 이었다.
" 나를 꺾지 못한다면, 그에게도 갈 수 없을 거야. 이 도시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
" 결국 싸울 생각이군. "
" 세상엔, 쉬운 일 하나 없다는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때론 자기 자신마저 넘어서야 하는 것이 인생이지. 불합리한 것에 무릎을 꿇고 승복해도 상관없지만, 자네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
늘 그랬듯이 말이야.
먼저 공격한 것은 상대였다. 망설임 없이 다가와 단검을 휘두르고, 막아내자 몸을 틀어 다시 한번 파고든다. 황급히 단검을 들어 마주하자 날붙이가 마찰되며 속을 긁어내려 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을 내지르고, 땅을 박찬 발이 회전을 그리며 내리쳐온다. 아이메리크는 짧은 숨을 머금는 것과 동시에 그 모든 공격을 막고, 또 상대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공방을 이어 나가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주먹을 쥐기 전에 가볍게 손을 터는 습관 같은 것이라던가, 검을 쥐고 아래에서 위로 파고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치며 찔러 들어가는 공격과도 같은 것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오랫동안 이어왔던 전투방식.
서로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탓에, 쉽사리 끝이 나지 않았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도 몰아붙인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틈틈이 살피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대성당 내부에 싸움을 이어 나가는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교전하며 서로가 지쳤을 즈음, 문득 의아하다는 듯 상대에게서 물음이 내뱉어진다.
" 지도자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선택이지. 자기 자신이 아닌 공의를 위해서, 이 도시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것 말이네.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남의 탓을 하며 외면할 셈인가? "
그와 함께 다가온 검날에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흔들리자 아이메리크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손등으로 볼을 훔치자 선혈이 묻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저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이에게로 향한다. 그런 저를 보고 설핏 얼굴을 굳히고서 긴장을 가득 담은 눈을 하고 있는 것에 매우 위화감이 들었다. 행동이나 말, 혹은 공격을 하는 자세 모두 오랜 시간 반복 해 왔던 것 처럼 익숙했음에도, 스스로의 모든 것을 낯설어하는 듯한 태도라니. 쌓여왔던 거짓으로 인한 가면이 굳어져 진실이 되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어색하다. 가까이 다가서며 걸음을 내딛는 순간 의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함께 담아 단검을 버렸다. 그의 시선이 떨어지는 단검을 보며 흔들릴 때, 힘껏 주먹을 쥐어 얼굴을 향해 내지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을 쥔 손에 힘이 빠지며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가만히 보다 단검을 모아 적당한 곳에 던져두었다.
" 자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서 정정하자면 말이지, "
" ...큭, 쿨럭...!! "
" 지금의 나는 지도자가 아닌, 그저 아이메리크라는 한 사람에 불과해. "
"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했던 일들이 없어질 거라 생각하나? "
" 그래서 책임을 지러 왔잖나. 내가 벌인 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
툭툭,
가볍게 손을 털고서 어깨를 으쓱이자 그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다시 한번 살펴보아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다. 어쩌면, 그 본질조차도. 오히려 거짓으로 이루어진 쪽은 지금의 아이메리크일지도 모르지.
" 어쩌면 우리는 죽은 사람일지도 모르네. 아니, 이미 죽었겠지. 그렇게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지 않나.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오는 것은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야. "
" 남 탓을 하며 외면할 셈이냐고 물었던 사람답지 않은 말이군. "
" 그가 바라는 건 이렇게 죽고 죽이는 삶이 아니라,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삶이었으니까. "
울컥이며 쏟아내는 감정이 버겁다. 절망 속에서 살아온 이의 울음이 내뱉어진다. 수없이 많은 자신을 마주하고, 그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겠지. 때로는 스테파니비앙을 위해 들었던 총으로 그 자신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 인해서 망가진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그렇게 마음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련 없이 돌려 걸어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눈물로 범벅되어 잔뜩 흐려진 얼굴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와 작게 간질였다.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에 머문 그와 미래에 머물게 된 자신. 거짓을 판별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 그렇다고 해서, 이 겨울을 계속 반복하게 두고 볼 수는 없어. "
"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결과라면. 이 모든 것이 반복된 지도 벌써 100년이 지났네. 우리가 끝없이 많은 순간을 반복했던 것 처럼, 그도 처참하게 부서지게 되는 결말을 바라지 않아. 바라는 대로 함께 이상을 이루어주며 기다릴 수도 있잖나. "
지금의 스테파니비앙에게는 두 존재 모두 거짓에 불과할 뿐이겠지.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봄이 오려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겨울이건만, 행복을 눈앞에 두고 마주한 고통은 더욱 크게 다가오겠지. 그것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그의 말대로, 스테파니비앙의 이상을 이루어주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온전히 모든 시간을 이어오지 못했기에, 뒤틀림에서 피어오른 이질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봄을 안겨주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 아니, 결국 끝은 우리가 맺어야만 해. 그도 나와 같은 선택을 했다면 이 이야기는 결코 끝이 나지 않을 테니까. "
" ....... "
"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지. 언제까지고 추운 곳에 주저앉은 친우를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어. "
자신으로부터 비롯되고, 그로부터 반복된 비극이었다. 기적이란 이름의 불행을 이제는 끊어내야만 했다. 주저앉은 이에게서 터져 나온 것이 바람이 되어 뺨을 스쳤다.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서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에 아이메리크는 그저 웃어 보였다. 내가 졌어. 그렇게 말하며 내려두었던 저격 총을 등에 메어주는 것에 몸을 굳히자,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 매개체야. 나보다는 네게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를 막으려면 이게 필요할 거다. "
" ……. "
" 어떻게 사용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라 믿어. "
" …그래, 그 말대로군. 바로 어제 배운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
" 당연하지. 누구에게 배운 건데. 최고의 스승에게 배운 대로, 한 방 먹여주고 와. "
그리고...
이어지지 못한 말을 삼켜내었다. 그러나 그 뜻은 전해졌기에 아이메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얹어진 묵직한 감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꾹 쥐어진 주먹이 다짐을 가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면,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면 되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아이메리크. "
" 그럼, 당연하지. "
" ....... "
" 우리는 늘,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으니까. " " 우리는 늘, 그가 웃을 수 있기를 바랬으니까. "
" ...그래. 이번에는 그를 구할 수 있기를 바라겠어. 무운을 비네. "
작별인사와 함께 서로의 등이 돌려진다. 과거와 미래는 그렇게 서로를 마주하며 각자의 길로 떠나기 시작했다. 아이메리크는 저 높이 보이는 교황청의 모습을 바라보며 총을 다시 한번 단단히 매고는, 마침내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한 마지막 걸음을 옮겼다.
이미도 한번, 혹은 수천만번 올랐던 길이기에 더욱 익숙한 길이었다. 복도와 계단을 올라, 과거의 자신이 반복하여 마주했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몸을 돌렸다. 그 끝에 있는 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 위로, 끝없이 위로 올랐다. 마침내 마지막. 옥상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내딛자, 별이 가득 수놓은 밤하늘이 가득 펼쳐졌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은, 익숙하고도 익숙한 제 친우의 모습이었다.
" 어서 와, 아이메리크. 생각했던 것 보다는 조금 늦었네. "
" 오는 도중에 일이 좀 생겨서 말이지. 그래도 네가 보고 싶어 걸음을 서둘렀으니, 그걸로 봐줘. "
퉁명스레 내뱉어진 환영인사에 능청스럽게 답하며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등을 돌리고 있던 몸을 마주 보며 가볍게 양 팔을 벌리고서는 그린 듯이 웃어 보인다. 그러나 미소에 담긴 것은 적의와 경계, 체념과 실망감. 서로 반대되는 것 같으면서도 좋지 않다는 점에서는 같은 계열에 속하는 감정들 뿐. 제 등에 매인 총을 보며 잠시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진다.
" 그래, 나의 영웅께서 그렇다니 봐줘야지. "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상황이 결코 안전하지만은 않음을 알려주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곧바로 공격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일까. 난간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여유가 가득했다.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인다. 마치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이라도 된 듯했다.
" 이번엔 총이야? 저번엔 단검이더니. 나날이 사용하는 무기가 다양해지고 있네... 그래봤자 전부 실패할 텐데. "
" 마음에 드나? 네게 익숙할 만한 무기도 한 번쯤은 가지고 와보고 싶었거든. 누구에게 배웠던 걸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고. "
" ....... "
" 반응을 보니, 가져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
" ...이제 와서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전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처럼 대답하다니, 농담이라면 지나친걸. "
" 내가 모든 걸 기억해냈다면, 어떡할 텐가. "
"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메리. 네가 기억해낸 마지막 순간이 반복될 뿐이니까. 그 총을 내려놓고서 나와 함께하겠다 말한다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
" ....... "
대답을 한 이도, 들은 이도 없었지만 이미도 알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이상을 향해 몸을 돌려 새하얀 거짓말로 이루어진 세계를 진실이라 치부하고 나락을 향해 내려간다거나, 파멸이 눈앞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거짓된 행복을 이어 나갈 수는 없다는 것을. 물론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 서로의 곁에 있겠다는 선택을 할 이들도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 하지만 외면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희생되었고, 이 곳에 있는 이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늘이 심해를 내려다보며 먹구름을 드리운다. 얼핏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스쳐 지나간 것도 같았다.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이어진 것도 잠시, 아이메리크는 등에 매고 있던 총을 꺼내어 익숙하게 장전한 후, 스테파니비앙을 바라보았다.
" 끝은 시작이나 다름없다는 말을 아나? "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서로를 위한 마음이 독이 되어 돌아왔고, 그리하여 마주하게 된 미래가 이런 모습이라니. 절로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졌다. 익숙한 듯이 자세를 잡고 총의 끝을 겨누자 조준경 안에 스테파니비앙의 모습이 가득 담긴다. 동그란 유리 안에 갇힌 모습이 마치 억지로 틀에 끼워맞춰진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이 상황에서까지 그와 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심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 마음도 그에게는 단순한 기만일 뿐이겠지.
아이메리크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신과 달리 그는 지금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또 다시 되돌아갈 시간, 반복될 싸움을 지속해 나가다 보면 응당 그러할 수 밖에 없지 않나. 마냥 끝이 오기를 기다리기엔 100년이라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으니 말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자신이 그의 손에 스러졌겠는가. 자신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참아내며 죽이고, 또 죽여왔을 터다. 스테파니비앙에게는 지금 이 상황조차 그 수많은 과거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진심으로 만들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 때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났으니,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 날이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 내가 전쟁터에 나간 것이 우리의 끝이라고 정의하자면, 돌아오고 나서 일어난 모든 일이 또 다른 시작이겠군. "
" ……. "
" 그동안 기약 없는 기다림에 끝을 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으니, 이젠 쉬어도 된다는 얘기다. 누가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겠나.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자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이들이 어찌 너를 마주 볼 수 있을까. 그들이 널 이해할 수는 있나? "
눈을 감았다 뜨며 입술을 깨문다. 잔뜩 갈라지고 말라버린 입술 사이로 비릿한 맛이 감돌았음에도 아이메리크는 힘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붉은 것이 옅게 퍼지며 피부가 창백한 빛을 띌 때 쯤에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입가로 몰린 것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통증이 있을 법도 하건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양 굴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보다 선명해진 조준경에 비치는 스테파니비앙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메리크는 긴 숨을 내쉬었다.
"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메리. "
비웃음이 가득한 대답이다. 어쩌면,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마음을 헤아릴 수 조차 없이 깊이 가라앉은 마음이다. 배신감, 후회, 절망. 어느 할 것 없이 부정적으로 치우친 감정들이 한데 모여 증오라는 이름의 거부로 이어진다. 허리춤에 찼던 단검을 빼어 공중에 던졌다 받으며 날을 아래로 향한 채 손잡이를 잡아 심장 근처 정도의 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상대가 총을 들고 있으니 포기하고자 무의미한 저항을 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었다. 총이 익숙한 것은 아이메리크가 아닌 스테파니비앙이다. 많이 상대했던 경험만큼 자신보다 더 자신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 이제 와서 위선이라도 베풀고 싶어진 거야? 그것참 영광이네. "
" 위선이라고 생각하나? "
" 그래. 그게 아니면, 무슨 이유로 또 다시 이 곳에 행차하셨을까. 응? "
" 글쎄... 더 이상 네가 나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반복하고, 끝이 없는 시간 속에서 친우를 계속해서 죽여나가야 하는 고통을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라고 해두지. "
" ......!! "
그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지고 쓰러지지 않을 것 처럼 견고하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분명 심장을 노렸기에 총상을 입은 것을 증명하듯 울컥거리며 새어 나온 생명이 발악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건만, 어째서인지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아이메리크는 이를 악물며 다시금 자세를 잡고 총을 겨누었다. 덤벼, 파니비앙. 짓씹듯이 내뱉은 말에 어느샌가 훅 다가온 단검에 몸을 젖히고, 총신을 눕혀 검날을 쳐내고는 거리를 벌린다. 스테파니비앙은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공격을 이었고, 죽이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처럼 집요하게 급소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총을 가로로 잡아 그를 튕겨내자, 얼마간 거리를 두고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아이메리크는 그런 그를 보며 호흡을 채 가다듬지 못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그러니... 제발 그만 해, 스테파니비앙. "
" 미안하게 됐네. 이제 와서 그만둘 수는 없어. "
툭툭, 손을 털고서 어깨를 으쓱인다. 주먹을 쥐어 심장께를 짚고, 눈을 접어 웃으며 환하게 미소 짓는다. 방금 전에 총을 맞은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쪽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아이메리크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짓씹듯이 내뱉었다.
" 왜, 끝없이 나를 죽이고 죽이다 보니 죽고 싶어졌나? 내가 억지로 비틀어 살려내었던 생명을 내던질 만큼? "
" 지금, 뭐라고......? "
" 너는 나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를, 살아남아서 앞으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랬다. 그래서 기꺼이 또 만나자고 말할 수 있었어.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
" ....... "
" 품속에 안고, 그렇게 네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면... 이렇게 우리가 총을 겨눈 채 만날 일은 없었겠지. "
그가 멈칫하는 사이 두 번째 방아쇠가 당기어지고 또 한 번 스테파니비앙의 몸이 휘청거렸다. 힘이 풀리기라도 한 것인지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떨구며 밭은기침을 두어번 내뱉는다. 이어, 허망한 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나를 두고, 내 앞에서 그렇게 떠나버렸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어. "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아 보여도, 여전히 손에 쥔 단검은 놓지 않은 채다. 눈을 들어 마주한 시선이 매서웠다. 원망과 두려움, 끝에는 살의와 비슷한 것으로 물들어간다. 아직 끝이 아니야. 제 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심을 하고 있다면 언제든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치였다. 아이메리크는 점차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을 고스란히 짊어지고는 총을 들어 스테파니비앙에게 겨누었다.
마지막 한 발.
" 너와, 동생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것만을 바랬어. 그런데, 너도... 동생들도 모두 잃었다면... 난 대체 뭘 해야 하지?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었겠어. "
언젠가 돌아올 것이란 희망을 품었기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리란 소원을 품고, 부패한 이 도시의 지도자가 되기를 자청했으리라. 목표가 사라졌기에 의지마저 잃어버린 지도자는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간절히 바랬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진 일이 등을 돌려 다시 한번 기회를 줄 수 있기를. 그것이 금지된 것에 손을 뻗는 일이 되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알고 있었더라도 기꺼이 그리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운명이라 말하겠는가, 혹은 누군가가 써 내려간 희극이라 말하겠는가. 어느 쪽이라 정의한들, 정당성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겠군. "
불가능한 것을 해낸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심장을 세 번 내리치어 자신의 혼을 바친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강한 힘은 모든 것을 이루어주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지는 않았다. 가장 바랬던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한없이 쏟아부었던 노력이 모두 물거품으로 변해버렸을 때,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을 돌이키기엔 이미 늦어버렸다고. 자신이 되돌렸던 희망을 스스로 부수는 것을 반복하며 대가를 반복하는 것 외에, 지도자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 지금의 네 모습을 네 친우와 동생들이 본다면 분명 슬퍼할 거다. "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따지지 않았다. 멍한 시선이 들려 아이메리크를 향한다. 그 자신이 눈앞에 서 있음에도 스스로를 부정하는 기이한 일을 마주했다. 아이메리크는 눈을 감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와 동시에 제 뒤에서 수많은 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의 의지가 아닌, 그를 옭아매던 힘의 마지막 발악이다.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메리크는 끝을 위한 마음을 다짐했다. 어쩌면 이것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회한. 자신이 듣고 싶었고, 그토록 간절했던 이야기.
" 그러니, 이젠 모두 내려놓아도 괜찮아. "
마지막 총알과 함께 뻗어나간 것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해 내질렀던 발걸음과 누군가 손을 뻗어주기 바랬던 마음. 포기와 체념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있던 눈물. 지위와 책임 아래 늘 솔직하지 못했던 감정을 마주 보는 거울. 온 몸이 꿰뚫리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어왔던 간절함. 동시에 제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공격이 버거웠으나, 견뎌낼 수 밖에 없었다.
격통과 함께 온몸이 너덜거리는 것을 느끼며 총을 등에 메고서 푸른 검을 들었다. 신념과 마음이 담긴 것을 달빛이 비춘 순간, 번쩍 들어 또다시 친우를 베어낸다. 차마 내뱉어지지 못한 사과가 흐릿하게나마 깃든 순간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깨어진 것이 흩뿌려지며 오랜 시간 스테파니비앙을 옭아매었던 속박을 끊어내었다. 그의 미련과 끝없이 이어오던 고통이 마침내 끝을 마주하는 순간, 하늘을 닮은 눈동자에 붉은 노을이 담겼다.
자신은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일의 향연이다. 아이메리크의 몸이 무너져내림과 동시에 푸른 검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눈물이 가득한 채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쓰러진 친우의 모습이 한가득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종막의 울림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연극이 끝을 이야기했다.
" 그래... 네가 이겼어, 메리. "
울지 마. 영웅이란 건, 비극으로 끝나는 법이니까.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죽어가던 생명이 고개를 들고 세상을 마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반대로 흩어지는 목소리가 허망하기만 하다.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신호가 몸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기어이 끌어올리고, 날붙이가 스스로의 손을 파고들더라도 짚고 나아가 높이 오른다. 애석하게도 그 끝에 닿은 건 산의 정상이 아닌, 검의 손잡이였다. 아이메리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아가 스테파니비앙의 몸을 들어 한 손을 제 어깨에 올리고 그대로 일으켜 세웠다. 성한 곳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어서야만 했다. 끝의 너머에 있는 풍경을 보기 위하여.
" 그만 포기해, 메리. 나는...... "
쇳소리와 엇비슷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몸을 긁어내린다. 애써 모른척하며 눈물에 맺힌 감정의 잔해를 숨겼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란 뻔한 것이다. 이걸로도 괜찮다거나, 끝을 마주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명이 더 이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아이메리크는 이대로 마지막이어선 안된다며 강박적인 말로 스스로를 옭아매었다. 끝끝내 그의 몸을 끌어올리고서 걸음을 내딛는다. 자신의 손으로 맺은 끝이, 이미 스러져가는 몸이, 붉고 검은 것으로 잔뜩 얼룩진 이 만남이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이어서는 안됐다. 아이메리크는 끝내 밖으로 내뱉지 못해 속으로 울음을 삼켜내고 비명을 지르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이어지지 못한 걸음을 옮기고, 또 나아갔다. 푸른 검이 그에게 열리지 않을 길을 열어주는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등에 짊어진 스테파니비앙도, 허리에 덜컥이는 녹슨 총도, 손에 쥐어진 푸른 검도 무엇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메리크는 나아가는 것을 택했다. 모두의 해피엔딩을 위해서. 우리의 과거를 위해서.
" 찬란했던, 우리의 이슈가르드를 위하여. "
그의 다짐이 높은 하늘에, 창천에 닿기라도 한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던 삭막하던 땅의 흔적은 어느 순간 끊어짐과 동시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눈을 들어 다시 아래로 내려보자면 풀과 꽃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어진 언덕 끝에 작은 비석이 서 있었다. 그러나, 절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메리크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그가 가야 할 곳임을 깨달았다. 저곳에 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있을 리 없는 평화가 존재하는 풍경을 보며 아이메리크는 잠시 멍하니, 그러나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내렸다. 함께 봄을 맞이할 수 있어. 그렇게 믿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 그래, 결국... 네가 날 살려내는구나. "
" 조금만 힘을 내게. 거의 다 왔으니. "
어쩌면 후련함이 담긴, 그러나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스테파니비앙 또한 기운을 차린 모양이었다. 아이메리크는 비석을 향해, 아니...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근원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금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기쁨이 고통을 이긴 탓에 모든 것이 전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걸음을 내딛으며 봄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 ......안녕, 메리. "
그와 동시에 끝이 강제로 쥐어진다.
아이메리크는 황급히 스테파니비앙을 등에서 내려 비석 옆의 풀밭에 그의 몸을 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일이 있었건만, 그의 얼굴은 한없이 평온하게만 보였다. 작게 떠오른 미소는 그가 행복하게 눈을 감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그제야 손에 잡고 있던, 이제는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조차 알 수 없도록 되어버린 붉어진 검의 손잡이를 던져두고 스테파니비앙의 몸을 붙들었다. 방금 전까지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 환상인 것만 같았다.
...잠깐, 환상이라고?
아이메리크의 눈동자가 그 어떤 동요를 담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세게 흔들리며 울렁였다. 그래, 환상. 아이메리크는 그제서야,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가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무사하기를 바래서, 그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기에, 그와 함께 미래를, 저 따스한 태양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어서, 그와... 행복해지고 싶어서. 그래, 모든 것이 자신의 바램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아이메리크는 잔혹하게 깨어난 현실을 마주하며 무릎을 꿇고 목 안에서 내내 끓어오르던 소리를 내질렀다.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듯이, 그렇게.
" ....... "
" 일어나, 아이메리크. "
담담하게 이름을 부른다. 그 어떤 꾸밈 조차 없었다.
그 부름에 한참을 쓰러진 채로 누워 널브러져 있던 몸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겨울잠에 빠진 눈동자가 다시금 봄을 마주했다. 아이메리크는 목도리를 맨 채로 가을에 어울릴 법한 모직 코트를 입고 있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한 미소가 저를 향하는 것에 울음을 삼키고, 고개를 젓는다. 명백한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입을 열었다.
" 네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않나. "
" ....... "
희미한 미소에 어린 것은 작은 물기. 아이메리크는 따스한 손이 자신을 이끄는 대로 일어나,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다정하게 자신을 쓰다듬는 손이 원망스럽다. 얽혀버린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한없이 비통했다. 두 눈이 마주한 순간, 그는 상대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대로 무너지지 않으려 버텼다. 과거와 미래가 마주 보는 순간, 비로소 현재가 펼쳐지고 있었다. 스테파니비앙은 죽었다. 그리고, 아이메리크 또한 죽을 것이다. 단호하게 마주한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왜, 어째서...... "
" 그러니 마지막으로, 두 눈에 모두 담아오게. 네가 사랑했던,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커르다스의 전경을 말이야. "
" ....... "
" 나는 그러지 못했거든. "
떨리는 손이 어깨를 잡은 손을 덧씌운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머금어진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불과하다. 알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은 계약을 맺고, 멋대로 깨뜨린 대가였다. 팔을 밑으로 툭 떨구며 손을 거두고, 등에 매인 총을 풀어내어 건네자, 뉘어져 있던 스테파니비앙의 모습이 점차 흐릿하게 변하며 희미해지는 것이 보였다.
" 나는,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배웅을 마치고 싶어. 돌아오면, 모든 것이 다 끝나있을 테니까... 다녀와, 아이메리크. "
익숙한 듯이 총을 등에 메고, 등을 돌려 비석을 향해 나아간다. 손에 쥐어진 작은 할로네 거베라 꽃다발이 노을 빛에 일렁이며 흔들렸다. 상처로 얼룩진 손이 붉게 물든 푸른 검을 쥐며 망설임 없이 앞으로 걸어간다. 아이메리크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하지 못했던 이는 결말을 맞이했고, 구할 수 있었던 이는 마지막 여행을 떠날 순간이다. 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엔딩이라 하더라도, 모든 것은 끝을 맞이하기 마련이니, 원하지 않는 마무리는 그렇게 억지로 매듭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언덕을 내려와 한참을 걷자, 용머리 전진기지와 함께 익숙한 전경이 보였다. 회색으로 바랜 풍경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양쪽으로 뻗어 위로 올라가는 계단길 사이, 둥글게 빚어진 아치형의 터널을 따라 반대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푸른 깃발을 보며 방향을 틀고 그 길을 따라 바깥으로 향하다 보면 마녀의 비탈길이 그를 반겼다. 외곽을 걷다 보면 까마득한 밑이 보인다. 두려움을 외면하고서 섭리를 따라가자면 무너진 또 하나의 경계초소가 보였다.
" ...함께 왔었으면 더 좋았겠지. "
탁 트인 공터의 끝에선 구름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성도의 모습도, 척박하다 못해 험난하게 보이는 산맥의 모습도, 그들이 사랑했던 이슈가르드의 모습을 가득 담고 있었다. 평소라면 눈보라가 가득하여 뿌옇게 흐려져 보였을 테지만, 오늘은 햇볕이 찬란하게 내리쬐고 있으니 가히 장관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감고 느리게 불어오는 순풍을 만끽하며 무언가를 갈망하듯 손을 뻗어본다. 찬찬히 바람을 손에 쥐고서 뒤를 돌아도 지켜보는 이 하나 존재하지 않았고, 아이메리크는 뽀득이는 소리와 함께 걸음을 돌렸다. 발자국이 남는 곳마다 미련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별과 운명을 마주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아도넬을 지나 한참을 걸었을까, 급격하게 심해지는 눈보라에 누군가가 위급한 상황에 몸을 숨겼을 법한 작은 탑을 지나 그 뒤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몸을 잠시 의탁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동굴 안이 온통 푸른 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과 빙하가 얼어붙어 푸르게 변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주변에 푸르게 빛나는 구체들이 떠다니는 것이 이유인 듯했다. 반짝이며 일렁이는 것이 마치 꽃이 가득 피어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멍하니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고, 커다란 종유석에 너무나도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 ...할로네시여, 부디 자비를. "
모든 여정이 끝난 그와 자신에게 온전한 평안을.
기도와 함께 모든 여행을 마치고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기만 하면, 정말 끝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음과 동시에 눈보라가 그치는 것이 보였다. 정말 숨 쉴 틈도 주지 않는군. 하긴, 끝이 정해져 있는 여행이라면 길게 이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 아이메리크는 한숨을 내쉬며 여행의 마지막을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이 마치 계획된 것을 행하는 양 자연스러웠다. 다른 곳을 향해 눈길을 돌리지 않은 것은 이미도 오래전부터 끝을 정해놓았기 때문일까.
기공방을 지나 검은 초코보를 타고 서부 고지로 들어서자 하늘 위로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펼쳐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메리크는 그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새하얀 눈길을 짓밟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보는 것이 죄악이라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다. 그토록 많은 비극이 있었음에도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제게 보여지는 세상은 이토록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끝없이 주저앉은 절망이 있었음을, 물러서지 못한 부서진 마음이 있었음을 부정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했다.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진 눈길의 향연이 집어삼킬 듯이 다가와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답지 않은 망설임이 잠시 머문 것도 잠시, 아이메리크는 기꺼이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부터 무너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곧 자신의 시간이 끝나리라는 것을 체감한다. 그 전에, 담지 못한 풍경들을 눈에 담아내야만 했다.
터벅거리는 소리가 이어짐과 동시에 전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추억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영원할 것만 같은 침묵은 생명의 노래가 되어 공중에 흩뿌려졌다. 차라리 중간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드높은 창천의 끝은 아직 제게 닿지 않은 모양이지. 텅 빈 웃음이 고요하게 머금어지며 염원을 담은 미래에 불안정한 감정이 짓이겨진다. 이뤄질 수 없는 희망으로 꿈을 덧씌운다. 이것은 온전히 그를 위한 추억.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어떤 이야기의 끝에서 그를 기억한 채로 잊혀지기 위한 마지막.
심장이 느리게 고동한다. 눈앞에 보이는 흑철교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태양마저 저물어버린 밤하늘엔 반짝이는 별들이 수놓아 은하수를 그리고, 작은 등불들이 그의 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담담히 그 모든 것을 눈에 담고, 그 위로 제 친우를 그려내었다.
" ......메리? "
끝에 다다랐을 즈음, 작은 의문과 함께 들려온 목소리에 아이메리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다. 전해지지 않는 대답을 향한 물음이 절로 내뱉어진다. 그것은 비단 있을 리 없는 기적이 눈 앞에 펼쳐지고, 제 이름을 부르며 놀란 듯이 눈을 뜨고 있는 이의 모습이 가장 그리워하던 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또 자신의 환상이나 착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봐 두려워 뒤로 물러나기를 택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다가온 행복은 아이메리크가 겁을 먹고 도망쳐 숨어버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고, 친우의 모습을 한 그것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망설임 없이 다가와 그를 안고 온기를 전해주었다. 온몸을 감싸 안고 기꺼이 몸을 맞대며 지금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일깨운다. 그제서야 눈앞의 친우가 거짓된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깨달은 아이메리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스테파니비앙을 붙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 보고 싶었어, 나의 메리. "
다정한 말이 마음을 파고들며 얼어붙은 몸을 녹여낸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러나 애정을 담아 내뱉어진 목소리가 묶어두었던 기억을 깨어내고 그를 덮쳤다. 눈물 젖은 눈가에 스치는 것이 불에 데일 듯이 뜨겁기만 하다. 영영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은 또 다른 봄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만약 또 다시 수없이 많은 겨울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봄은 오리라. 반드시.
" 나도, 너를 정말... 정말 많이 보고싶었어. 스테판. "
언제나 서로를 위한 생명이 이어질 수 있길 바라는 선택을. fin-
외전 01 :: 맞춰진 기억
교황청 너머, 빙천궁 입구 부근에서 목이 졸린 채 발 디딜 공간조차 없이 허공을 하염없이 걷어차고 있는 스테파니비앙과,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가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자 대충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새하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에스티니앙이군. 놀란 마음을 가라앉힌 채로 담담하게 낙인을 찍듯 내뱉은 이름을 되새기며 아이메리크는 입 안쪽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스테파니비앙은 숨이 조여드는 와중에도 망설임 없이 목을 쥐고 있는 손의 주인을 응시하며 손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두어 발자국 정도만 더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땅은 너무나도 멀게만 느껴졌으며, 아득히 저 아래로 뻗어나간 지상은 상냥하던 과거의 모습을 뒤바꾼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생명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비극이라는 말에 걸맞는 상황이다. 아이메리크는 손을 뻗어 스테파니비앙의 손을 잡았지만, 그대로 투과하는 것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과거, 그 자체라는 것을.
" 이, 러지...마......!! 도대,체.. 왜, 이러, 는...... "
밭은 숨이 새어 나오며 억눌린 말이 내뱉어진다. 무력감에 손이 떨리고, 두려움에 온몸이 진동했다. 누가 봐도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양새에도 에스티니앙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탁하게 흐려진 눈동자로 초점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저 막연히 가라앉을 뿐인 늪과 같았다. 그 모든 것을 바라보며 아이메리크는 이를 악물었다. 이다음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음에도, 그저 과거에 불과하다고 되내이는 것 조차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도 불사할 수 있을 텐데.
" ...스테파니비앙..!! "
간절히 바란다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타인, 아니 또 다른 본인을 통해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다.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푸른 검을 든 채로 숨을 몰아쉬는 자신의 모습에 아이메리크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막을 수 없나. 바들거리며 떨리는 몸을 일으키고, 제 친우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문다.
" 그만둬, 에스티니앙. "
짓씹듯이 내뱉은 말과 함께 옮기는 걸음이 비장했다. 검 손잡이에는 늘 그렇듯이 한 손이 올라가 있었다. 과거, 언젠가 그리했던 것 처럼. 지도자라는 이들이 늘상 그러하듯 아이메리크는 대의를 위해 움직여야만 했고, 이슈가르드라는 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공익을 위하여 행동을 규제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선택이 강제되는 것은 현재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친우의 사이에서 목숨을 저울질하는 것은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마침내 에스티니앙의 앞에 도달했을 때, 아이메리크는 과거의 자신이 에스티니앙을 향해 푸른 검을 들어 겨누었고, 그와 동시에 내던지며 달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
" 안돼...!! "
강하게 붙들던 손에 힘이 빠지고, 끝없이 파고들던 손이 미련을 버린다. 비통하는 이의 절규는 하늘의 노래요, 땅의 울부짖음이다. 그와 동시에 스테파니비앙의 몸이 아래로 훅 하니 떨어지기 시작했고, 과거의 자신이 그의 손을 놓치며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아이메리크는 저도 모르게 난간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닿지도 못한 채 그대로 통과할 것을 알았지만, 모든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미 없는 발버둥조차 멈출 수는 없다.
겨울 속에 있는 너를, 데리러 가기로 약속 했으니까.
아이메리크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허공에 던졌고, 이윽고 스테파니비앙의 팔을 잡아채어 힘껏 뒤로 당겼다. 하늘 위를 나는 느낌과 함께 스테파니비앙의 몸이 난간 너머의 공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강한 통증에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던 그가 자신과 눈을 마주한 채로,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이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그에게 닿을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사람들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던가. 아이메리크는 웃었다.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건, 기적 따위가 아니다.
" 또 만나자, 스테파니비앙. "
그때는 모든 희망을 손에 쥐고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이메리크는 그저 웃었다. 이건 그저 무기력했던 과거에 대한 스스로의 비탄과 후회의 산물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로 인해 지키기 위한 희생은 파멸을 불러일으켰고, 강요받은 선택은 정해진 미래를 낳았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반복하게 되는 결과로 돌아왔다는 것이겠지. 추락하여 떨어지는 몸과 세차게 감싸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자 아득한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저 밑으로 곤두박질치며 으스러질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멈추지 않는 것은, 이 또한 과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려놓았던 스테파니비앙 처럼,
모든 것을 지켜내기 위해 아이메리크 는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았으니까.
이것은 단지 용서받지 못할 힘에 손을 뻗은 대가로 인한 이야기이며,
단지, 행복한 미래에 닿지 못한 이들의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 외전(1) 맞춰진 기억 fin. -
외전 02 :: 간직해야만 하는 기억
돌 바닥에 내던져진 탓에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온 몸이 욱신거렸다. 스테파니비앙은 흐릿하게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 까지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것을 상기시키듯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분명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는, 아이메리크의 것이었다.
' 또 만나자, 스테파니비앙. '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행복하게 지내줘.
스테파니비앙은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본 것이 맞는지, 확신조차 할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황급하게 자신에게로 달려오며 눈에 띄게 안도하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메리크의 얼굴이 보였다. 익숙하고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건만 이 순간 만큼은 너무나도 어색하게만 보였다. 왜일까. 스테파니비앙은 시선을 돌려 아무런 감흥이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뒤를 돌아 저 멀리 솟아오른 에스티니앙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거친 숨을 가다듬었다. 방금 전 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미련 없이 이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목을 문지르자 멍이라도 든 것인지 욱신거리는 고통이 따라왔다. 분명 틀림없이 자신은 떨어져야 했을 터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당연하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스테파니비앙은 지금, 여기에 살아서 존재하고 있었다. 기적이라고 부르기에도 벅찬 일이었다.
" ...그때는 모든 희망을 손에 쥐고서. "
담담히 내뱉은 말은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아이메리크는 자신을 살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하늘에 내던졌다. 그렇다면, 제 곁에 있는 아이메리크는 누구인가. 그의 모습이 환영이나 착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제 친우가 맞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마치, 타인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탓이라며 애써 외면해봐도 눈에 새겨진 장면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대한 연극과도 같았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고, 아이메리크는... 누구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도 알고 있었건만 내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느 것에도 확신을 가지기란 어려웠다. 이 순간이 마냥 현실이 아닌 것 처럼 느껴질 뿐이다. 주먹을 쥐자 손톱이 파고들며 고통을 자아낸다. 그럼에도 스테파니비앙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자신을 걱정스레 살피는 아이메리크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 괜찮나? 어서 가서 쉬는 게 좋겠군. 에스티니앙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봐야 하니, 당분간은 신전기사단 내부에서 지내도록 해. "
" 메리, 내 소중한 친구... 아이메리크. 너 맞지? "
"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그럼, 당연하지. 네 앞에 있는 이가 네 친우인 아이메리크가 아니면 누구겠나. "
" 그래... "
분명, 그게 맞는 거겠지.
스테파니비앙은 아이메리크의 부축을 받아 교황청을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절규하며 자신에게 손을 뻗던 아이메리크를 보며 마지막을 예감하듯 눈을 감았던 그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당겨지며 돌바닥으로 쓰러진 직후 올려다본 하늘에서 마주했던 그 푸른 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는 다행이라는 듯 웃고 있었다.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아무런 미련 조차 없는 얼굴로 스스로를 내던지고서, 그것 마저도 기껍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익히도 잘 알고 있는 그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희망을 손에 쥐고서, 또 만나자고.
만약 이 모든 일이 그저 기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면, 책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졌기에, 자신을 살리려는 염원을 간절히 바란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면.. 아, 그는 본능적으로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여태껏 지내온 날들이 흐릿해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기억만큼은 잊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을.
- 외전(2) 간직해야만 하는 기억 fin. -
외전 03 :: 왜 그러지 않았을까
아이메리크가 떠난 성 레마노 대성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해졌다. 과거는 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푸르고, 자신이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 이 창천에 미련을 품은 것은 에스티니앙이나 나나 마찬가지로군. "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대부분의 아이메리크는 자신의 말을 듣고 곧바로 교황청을 향해 뛰어가거나, 함께 생명을 버리고자 했다. 매개체를 들고도 방아쇠 하나 당기지 못한 미련한 이도 있었다. 혹은,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이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많은 이들은 모두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가 웃을 수 있기를 바랬다고 말이다.
" 차마 행복이란 말을 내뱉지 못했던거야. "
그가 죽었던 과거를 거쳐 왔으니,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루프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동안 이루어졌고, 개중에는 억지로 미래로 끌려온 이들도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친우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고 있었으니, 행복이라는 말이 존재할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다 친우의 존재마저 부정했겠지. 그러니 그들 모두가 실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그동안 수고 많았네. 아이메리크, 그리고.. 스테파니비앙. "
100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도 더 길었으며 진실을 모두 알기에도, 해결 방법을 알기에도, 자신은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매개체를 가지고 있었다 해도, 자신은 미래가 아니었다. 친우를 살린 이가 아닌, 끝없이 죽고, 죽이는 것을 반복했던 과거였다. 영원히 과거에 남을 조각일 뿐이라는걸 모르지않았다.
그렇기에 비록 에스티니앙과 자신은 실패했지만, 지금의 아이메리크라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그리 믿었다. 그는, 이미 한번 스테파니비앙을 구했으니까.
상념이 끝남과 동시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대성당을 나서자마자 일렁이며 뒤틀리는 이슈가르드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비극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 결국 해냈구나. '
이젠 자신이 버려지고 깨어져 기억되지 못할 수많은 자신과 친우를 향한 애도를 하러 떠날 차례였다. 그 무거운 짐까지 이미 한번 목숨을 내버렸던 이에게 맡길 수야 있겠는가.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할로네거베라 꽃다발을 손에 쥐고서, 망설임 없이 성도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물론, 행운을 향해 전해지지 않을 한 마디를 건내는 것도 잊지 않은 채로.
" …자네 또한 행복하기를 바라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헤맸으니, 이젠 봄을 맞이하며 쉬어야하지 않겠나. "
그렇게 과거는 끝을 마무리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의 무운을 바라며.
- 외전 03 :: 왜 그러지 못했을까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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