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기억을 빚어내어(2)
스테파니비앙 X 아이메리크
- 1편에서 이어서
어느덧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누구보다 인상 깊게 남았을 만남 이후, 집에 돌아온 단골 손님은 양초가 일렁이며 피워낸 작은 불이 밝히고 있는 방 안의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두운 탓에 유독 밝게 빛나는 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고,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서류더미를 바라본다. 자신이 자주 이용하던 공간이다. 비록 본래는 둘이었고 그 중 하나는 잊어버렸지만, 남은 하나는 잊어버린 이의 몫까지 끌어안으며 기억하고 있었다. 추억이 남겨진 공간에서 깃펜을 들었다. 사각거리며 종이에 검은 흔적을 아로새긴다.
감정이 가는 대로 좋아하는 것을 찬찬히 써내려간다. 이미도 그 끝에 남겨질 대상이 정해진 탓에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기록을 이어나간다. 무엇을 떠올려도 존재를 이루고, 추억의 형태를 다잡으며 기억을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은 전부 하나로 직결된다. 바로, 이름이다. 그렇기에 단골 손님은 종이 위로 그 안에 넘칠듯한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 이름을 적었다.
[ 스테파니비앙 ]
목표를 마친 그대로 깃펜을 본래 자리에 꽂아넣었다. 엄지 손가락으로 이름을 쓸자 그대로 묻어난다. 단골 손님은 자신의 몸을 무너뜨리며 이름을 쓴 종이를 감싸듯 손으로 쥐어보았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이름 위로 투둑 쏟아진 감정의 잔재가 본래 모습을 흐려지게 만든다. 온통 답답하고 틈새 조차 없이 꽉 막힌 마음이 가득 넘칠만도 하건만 결국 흘러내린 것은 고작 몇 방울의 감정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과분하다는 듯 눈가를 꾹꾹 누르는 손길로 자신을 제어해본다.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 한켠에 있는 침대로 향하고는 상념에 빠져있던 정신을 끌어올렸다.
밤이 꽤 깊어졌기에, 내일을 위해 잠에 들 시간이다. 그는 적당히 이불을 끌어 덮고서, 오늘의 꿈만 같던 하루가 또다시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돌이킬 수 없는 미래가 되기 전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머리 속에 각인되어 영원히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꾹 감고 기꺼이 잠을 청했다.
빛이 내리쬐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아침이 밝아왔다. 이슈가르드는 저마다의 활기로 북적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떠드는 소리, 움직임에 갑옷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 조곤조곤 말을 나눈다던가 식기가 덜걱거리는 소리와 같은 것이 울려퍼졌다. 여느 날처럼 활기찬 때에, 단골 손님과 공방주 역시 각자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 아침은... 역시 간단한게 좋지. 네게 오길 잘했군. "
" 모처럼이니 많이 들게. 양을 꽤 넉넉하게 만들었으니 부족하진 않을거야. "
단골 손님의 아침은 약간의 의외의 요소가 하나 들어가있었다. 오랫동안 다른 곳을 떠돌던 친우가 모처럼 돌아온 것이다. 그는 아침으로 간단하게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대접하고 제 몫의 음식 접시를 앞에 놓은 채 홍차에 시럽을 적당량 넣으며 티스푼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익숙한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의 친우는, 토스트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 그나저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
" ...응? 그건 왜 묻는건가? "
" 그냥, 네 얼굴에 나 고민있어요~ 하고 써져 있는 것 같아서 말하는거다. "
정곡이라도 찔린 것 처럼 찻잔 끝을 매만지던 손길이 문득 움직임을 멈춘다. 어색한 웃음과 함께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친우는 턱을 괴고 단골손님을 바라보았다.
" 뭐야, 무슨 문젠데? 최근에 그... 예전에 연락이 끊겼던 그 사람과도 다시 만났다며. 그거랑 관련된 문제야? "
"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군. 물론, 겉으로 보기에 문제라고 할 것은 딱히 없네. ...이건 그저 내 마음의 문제일 뿐이야. "
" 마음...? 아, 기억을 잃었다고 했지. 그거 때문인가? "
" 그렇다기 보단... "
입술이 달싹이며 적당히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될 말을 고른다. 이해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간결하고 짧은 요약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사실만을 담아서 꾹꾹 욱여낸 말이 잇새로 흘러나오다 꾹 다물렸다. 내뱉은 것이 스스로 독이 될까 두려워 다시금 삼켜내고 눈을 감는다. 이윽고 단골손님은 자신의 친우를 향해 다른 무엇 하나 없이 그저 담담하지만 더없이 솔직한 마음만을 담아 말했다.
" 지금 이렇게 들뜬 마음을 갖고 혹여 기대라도 가졌다가, 믿었던 이에게 독배를 받는 상황이 되풀이되면 어쩌나.. 하고 홀로 고민하고 있을 뿐이네. "
" 뭐?! 그녀석이 너한테 독을 먹였다고? "
" 실제로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비유야. 그가 또 기억을 잃는 일이 반복되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을 한다는 얘기다. 두 번은 버틸 자신이 없거든. "
어느새 홍차와 함께 맞물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달콤함의 흔적을 찻잔에 두어번 톡톡 두드리며 떨어뜨린다. 분명 제 입맛에 맞을 것임에도 닿지 못하는 것은 이유모를 두려움이 손목을 감싸 내리누르는 탓일 터다. 습관처럼 입 안을 지그시 깨물자 아릿한 감각과 함께 따뜻하며 비릿한 것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온통 쓰고, 떫었다.
" 그래서, 지금 손에 넣은 이 일상이 사라질까 무섭네. "
마침표를 찍으며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 있는 친우는 여전히 그린 듯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단골손님을 바라보며 눈을 살풋 찌뿌리고 있었다. 어느덧 거의 빈 접시를 뒤로 한 채로, 몸을 일으키며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그를 마주하자,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 그렇다고는 해도, 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 아니냐? "
" ...에스티니앙. "
" 어렵게 다시 돌아온 기회잖아. 이래 저래 후회할거라면, 차라리 뭐든 해보는게 나을지도 모르지. 두려워서, 무서워서 가만히 있다가 또 잃어버리면 그땐 어떡하려고? 머뭇거리다 기회를 잃어버린 스스로를 탓하다 또 무너지기라도 할거야? "
이전에도 그렇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최악의 결말을 맞았다며. 그와 다르게 가식을 알지 못하는 진실된 친우의 말은 더없이 사실만을 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아팠다. 단골손님은 찻잔을 꾹 쥐고있던 주먹을 떼어 손 안쪽으로 끝을 감추다 그대로 테이블 위에 얌전히 두 손을 내려놓았다.
" 그러다, 영영 잃어버리게 되면? "
" 네가 다시 찾으러 가면 되지. "
" ...에스티니앙.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
" 단순하지 않을게 뭐 있나. 부딪혀보고, 무작정 찾으러 가보고, 안되면 다른 방식으로 부딪히고. 그렇게 하면 되는거지. "
안그래?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기어코 인정하고야 만다. 그의 말대로 할 수야 있겠지. 아니,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단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행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빼면 말이다. 단골손님은 결국 그 자리에서 얼버무리며 어떻게든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다.
" 나는...... "
" 아이메리크. "
" …왜 그러나, 에스티니앙. "
" 네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도망칠 생각 하지말고 똑바로 마주 봐. "
해봐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덜 후회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단골손님은 친우의 말에 쓴 웃음을 머금었다. 끊어지기 쉬운 만큼 인연은 다시 이어지기도 쉬웠다. 예외인 경우도 있으나 그는 지금, 두 사람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물론, 알고 있다. 똑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고 해서, 그 결말마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작은 계기로도 바뀔 수 있는 것이 미래이며, 이전과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것이, 고작 한 번 반복되었을 뿐이라면 그렇겠지.
시럽이 든 병을 들어 찻잔에 들이붓듯이 쏟아낸다. 더이상 차가 아닌, 시럽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질린 눈으로 제 찻잔을 바라보는 친우의 눈을 보며 단골손님은 티스푼을 들어 잔에 들은 내용물을 휘휘 저었다.
" 조언해줘서 고맙네. 덕분에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들었거든. "
이만 일어날까.
그래.
단골손님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친우를 배웅하기 위해 식탁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뭐하러 마중까지 나오냐며 귀찮은 투로 손을 내미는 것에 그러고 싶다, 고 답하며 이어이 그가 첨탑 위로 뛰어올라 사라지기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광활하고 자유로운 하늘 속을 파헤치듯 박차오르며, 친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조만간 큰일이 나겠거니 싶다. 감정은 독과 같아서, 눈치채지 못하는 새 조금씩 스스로를 좀먹어가며 서서히 침식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머리 속을 장악해갔다. 본인이 인지하지 못한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그건 완전히 먹힐 때까지 손을 놓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더군다나, 친우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단골손님은 주변 사람을 불러 조언을 요청하는 것 말고는 도움을 구하려 하지 않는데다, 홀로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려는 성격이다. 안봐도 뻔한 미래가 그려지는 것을 곱씹으며, 본래 향하던 목적지를 향해 다시금 도약하고는 중얼거렸다. 물론, 이것 또한 저 밑에 자리한 당사자는 듣지 못할 소리였지만.
" 저녀석... 그렇게나 고민한다는 건 본인이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게 분명한데. 대체 뭐가 그리 어려운지. "
한숨을 짧게 내쉰 친우는 구름 너머로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고, 그렇게 이슈가르드를 벗어났다. 점이 되어 사라지는 그를 끝까지 바라보던 단골손님은 그제서야 옷 매무새를 다듬고서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 익숙한 누군가를 맞이했다.
" 어라, 이런 데에서 보다니... 우연이네요. "
동그랗게 뜬 눈동자에 일렁이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그 찬란함을 나타내듯 빛이 내리쬐는 듯한 금발. 틀림없는 공방주의 모습이다.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던 탓에 호수에 파문이 일렁이듯 눈동자에 당황한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물론, 갑작스러운 만남에 동요한 것은 단골손님 뿐만 아니라 공방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이야기는 시간을 좀 건너뛰어서 진행. 두 사람이 친근해지는 것을 중점으로 작성.]
" 스테파니비앙. "
" …나를 좋아해? "
단골손님은 입을 달싹이다 꾹 다물었다. 그는 이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할지 알지 못했다. 기억을 잃기 전, 아주 오랜 시간 부터 그를 사랑했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과오로 인해 죽었던 그를 위해 또 한번 다가갔지만 잃을까 두려웠던 탓에 미련하게도 계속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를 사실. 아무것도 그에게 답해줄 수 없는 자신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손틈 사이로 스며든 차갑고도 불쾌한 기운이, 불안이라는 감정에 속절없이 휘둘린다. 속에만 담아왔던 말들이 밖으로 쏟아지려 했기에 하염없이 눌렀다. 그와 자신은, 여전히 단골손님과 공방주로서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아이메리크가 홀로 가지고 있는 기억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잊혀진다면 이 기억들 또한 공중에 무참히 내던져지고 이내 바스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돌아오지 않아도, 살아있는 동안, 생명의 불꽃이 꺼뜨려질 때까지 홀로 간직한다 하더라도...
아. 탄식과도 같은 숨을 내뱉는다. 아니, 고작 그정도에 그칠리가 있겠는가. 습관처럼 욕망을 짓누르고 이상에 어긋날만한 행동을 잘라내는 것은 자신의 생각 속에서 더없이 불필요한 것이리라. 겉을 둘러싸고 있는 포장을 조심스레 벗겨내고서 슬쩍 본심을 드러내본다. 찻잔을 그러쥐는 손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안에 찰랑이는 푸른 물결을 보자면 누구를 떠올리는 것인지는 아무리 둔한 이라도 눈치챌 만큼 선명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내밀었던 모습을 감추며 무표정을 가장했다. 이미 자각했던 마음을 다시금 수면 위로 끌어올린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과 함께 단골손님은 고개를 내렸다.
" 너는 알지 못해. 아니, 앞으로도 알지 못하겠지. 서로가 전부인 것 처럼 소중히 여기며 모든 시간을 함께 채워가던 순간도, 내 얼굴도, 모습도, 전부 낯설 뿐이야. "
테이블을 지나 난간 너머 까마득한 높이로 가라앉은 절벽은 안개로 덮여 도저히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아이메리크는 습관처럼 희미한 웃음을 띄우고서 스테파니비앙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능숙하게 속을 감추고, 바라 마지않는 이상을 보이기 위해.
" 그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볼까. 미리 사과하지. 나는 네게 거짓말을 했어. "
" ……. "
" 그저 친우로서 함께하는 것이라 거짓말했고, 이전에 본 적 없냐는 말에는 태연하게 아니라 답하기도 했지. "
담담하게 내뱉는 목소리의 끝이 잘게 떨리며 나침반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입가에서 흘러나온 하얀 김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옅게 흐려져갔다. 아니, 흐려지는 것은 아이메리크 그 자신이었다.
" 너를 사랑하고 있어, 스테파니비앙. "
" ......! "
" 하지만 그 마음을 네가 받아들이기를 바라진 않아. 물론 지금까지 자네와 함께 지냈던 시간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지만. …이런 나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군. "
" 뭐......? "
" ……미안해, 파니비앙.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은 더이상 겪고 싶지 않거든. "
그리고, 어차피... 다 잊어버릴거잖나.
알 수 없는 말들의 연속이다. 공방주가 흔들리는 눈으로 단골손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만도, 허상도, 그 무엇도 아닌 온전한 진실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공방주는 입술을 꾹 물었다가 놓는다. 세상에는 불가능이라 칭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존재하며, 개중에는 필연적으로 따라야하는 운명에 의한 불가피함도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이별은 어떨까. 아니, 당장 그것을 살피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해보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은 비단 다른 이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 이건 그저 그런 이야기네. 우리의 미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다시 반복될 테고,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린 너를 찾아 또 한번 발걸음을 옮기겠지. "
" 무슨, 무슨......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
" 네가 나와 함께한다고 해도... 나는 또 다시 너를 내 눈 앞에서 잃을 자신이 없다는 얘기야. "
그래야만 하는 결말과, 그로 이어지기 위한 과정이다. 단지, 이번에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단골손님의 몸 너머로 주위의 풍경이 보인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 상태를 모를 리 없음에도 태연하기만 하다. 당연한 것을 마주하듯, 어쩌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공방주가 손을 뻗자, 고개를 저으며 막는다. 내게 닿지 마. 단호한 눈동자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 그래도, 이번에는 네가 살아갈 내일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야. 너를 죽인 운명이, 이번에는 내게 찾아 왔잖나. "
어쩌면 네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단골손님은 여전히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서 공방주를 바라보았다. 점차 제 몸이 지워지는 것을 여실히 느끼며, 그저 웃는다.
나를 위해 울지 말기를.
나에 대한 것은 그 무엇하나 기억하지 않기를.
참고 누르고 압축되다 못해 마음 밑바닥에 달라붙은 감정에, 이겨낼 수 없는 스스로의 나약한 의지와 그로 인한 수많은 결과가 스쳐 지나갔던 과거를 향해 질타하며 잠시 들었던 손을 내려놓고서 주먹을 쥐었다. 작별은, 늘 그렇듯이 언제나 고요했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공방주의 눈을 마주보며, 단골손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웃었다.
" 늘 행복하기를 바래, 나의 스테파니비앙. "
" ■■, ■■...! ■ ■■ ■■■...! "
해사한 웃음이 닿지 못할 이를 향했다. 그 웃음은 태양을 닮았으나 결코 그와 같을 수는 없었던 탓에 금방 사그라지고 말았다. 단골손님의 모습은 이내 흐릿해지다 못해 세상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지워지고 있는 까닭에 울부짖으며 내뱉는 상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리라. 공방주의 표정이 절망과 비탄에서 점차 공허해지다 의아한 듯 변해가는 것을 보며 단골손님은 또 다시 웃었다. 아, 역시나. 이번에는 세상이 공방주가 아닌 그를 지우려 하고 있었다. 직감과 맞물려 떨어진다는 것은 한 편으론 매우 씁쓸한 일이다.
이야기에서 퇴장한 이의 말로는 존재의 말소. 결말에 남는 것은 주인공의 감정과 미래이지 않은가.
되돌아온 생의 주체를 바꾸는 것에 성공한 비극의 악역은 무대의 막을 내림과 동시에 그 뒤로 완벽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백과 함께.
직후, 두 사람은 마주보고 있었다. 아니, 실은 한 쪽이 바라보는 방향에 다른 하나가 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어긋난 시선 속에서 마주보고 있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다 해도. 그리고 누군가에겐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터다. 단골손님은 멍하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공방주의 모습을 보았다. 중얼거리는 잇새로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하지만,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다 마치지 않은 이는 또다시 변화구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완벽히 투명해진 몸은 그에 닿을 수 조차 없다. 막의 뒤 편에서 그를 바라볼 뿐. 끝이 맺어진 역할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작은 위안을 삼자면, 작별을 겪은 주체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없던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에 적어도 단골손님은 누군가의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익히 예상하고 있던 것이였다. 세계는, 공방주에게까지 검게 뒤덮여 잊혀진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는 저주를 내리진 않았을테니, 이 결말은 당연하다.
보이지 않는 감정, 누구도 알 수 없는 눈물은 그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하는지 갈피를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단골손님은 웃었다. 그저 웃었다. 마침내 그는 수백, 수천 번을 맞이했던 삶의 종착지를 비틀었다. 물론 이미 그렇게 되어있던 것을 반대로 저울질하며 인과가 기울고, 또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 전에 깃펜을 들어 그 다음 줄을 써내려가야 했지만 한 편으로는 홀가분하단 생각이 들었다. 정해진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여기서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가. 단골손님은 투명해진 자신의 몸을 이끌고 공방주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울음이, 울음으로조차 남을 수 없을만큼 광활하고 절망스럽던 때에 끝을 맞이했던 비극의 시작점으로 가야만했다.
목표는 성도에서 가장 높은 곳, 교황청의 옥상.
그들이 처음으로 이별과 끝을 맞이했던 장소였다.
교황청의 가장 높은 곳, 성도를 발 아래 구는 것과 같이 오만하며 구속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듯 탁 트인 시야. 옥상의 공중 정원에 다다른 단골손님은 그 가운데에 타들어가 얕게 패여져있는 검은 상흔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기이하게도 아무리 진실이 거짓으로, 거짓이 진실로 되돌아간 그 수많은 시간 속에서 이 상흔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치, 그들이 겪은 첫 번째 죽음이 실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기라도 하듯이. 상흔은 시간을 반복할 수록 더욱 검고, 검게 변해갔지만 결코 옅어지지는 않았다. 단골 손님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본다. 늘 분명한 형태를 갖고 이곳에 당도했던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그에 덧씌워지는 것은 지금의 투명한 모습이다. 이번에는 달라. 그리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 상흔을 만져보았다. 돌바닥의 거친 느낌이 손 끝을 통해 느껴진다. 처음과 달리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그것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문득 눈을 들어 앞을 보면, 작은 석판이 눈 앞에 놓여져있다. 그 위에 써진 글씨는 적어도 그들이 아는 한 이곳에 존재하지는 않는 문자임에도 무슨 기연이 일어나기라도 한 건지 별다른 해석이 적힌 것이 아님에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Q.
기다긴 시나리오의 끝에서 이곳에 당도한 것을 환영합니다.
■̞̘̲̫̏̊̃̀͊͐͐̋͜■̵̢̛̖̬̣̳̗̭̙͛̍̔̾̾̽̐̈́ͅ■̢̤̞͕͍̳͙͊͋̋̍̃̓̇͢■̮̫̼͔̟̪̤͔̒̀͗͗͒͢͠■̷̴̵̵̶̨̧̨̧̧̨̧̧̢̢̛̫̱͔̬͎̳͚̗̗̮̝̖̝̗͚̩̠̤͎̹̫̗͚̝͇͚̜̬̤̩̮̯̜͇͖̙̹͙̖̪̰̗̮͍̹̘̪̩̱̭͎͕̫͇̜̯͖̹͔͈̳̤̙̲̳̹͖̮̞͙̰̞̤̮̮̞̮̞̞̫̫͉̜̤̰͕̖͎̲̳͕͎͓̤̱̈́̏̆̎͐͌͛̅͒̽̀̓͐̾͐̋̑̌́̀́̅̓̐̎͋̌̅̒̽̌̑̾̒̀̈́̀̐̉̋̿̃̍̏̈́͗̀̂͑̉̿̅̊̍̀̇̄̒̔̽̓̋̒͐͂̐͒͑́͌̍͗͗́͐͗͂̽̏̂̓̀̂́̂̔̌͆͋̓̄͒́̎́̕̕̚̚͘̕̕͘̚̚̚̚͟͟͢͢͜͢͢͜͠͡͡͝͡͞͞͞͠͝͠͡͡͠͝ͅͅ , 그대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온전히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본인의 의지로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매번 같은 길을 반복하면서 스스로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나요? 그대는 불가피한 희생에 끝까지 저항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이야기의 끝에 다다를 때면 늘 마주하는 질문이었다. 반복을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순서였다. 단골 손님은 완벽히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깃펜을 들어 자신의 답을 쓰려 몸을 숙였다. 그러나, 그 아래에 비어있어야 할 답란은 이미 누군가의 의지로 채워져있었다.
A.
헛소리 집어치워. 매번 같은 길이라고? 누가 그딴 소리를 해.
이번엔, 내가 기필코 반드시 그를 살릴거다.
차갑다 못해 뜨거운, 시리다 못해 열정적인.
감정과 마음을 전부 꾹꾹 눌러담은 것 처럼 진하게 새겨진 문장에 단골손님은 웃었다. 누가 썼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던 까닭에. 그리고 그는 깃펜을 석판 위에 내려놓았다. 답이 채워진 이상, 자신의 몫은 그곳에 없었다. 절로 쓴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석판에 쓰인 문장은 단골손님을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루어지지 못할 불행한 꿈이 될 바에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슬프지 않을 악몽이 되기를 선택한 그를 비난하고, 불완전함을 가차없이 내버린 냉정함을 탓하고 있었다. 그가 하지 못한 것을 이루는 이의 찬란함을 마주하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 결국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맞서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꼴이군. "
아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단골손님은 그린 듯한 미소를 띄우며 뒤를 돌았다. 푸른 눈동자에 만신창이가 된 몸. 총신을 바닥에 세워 겨우 휘청이는 스스로를 지탱한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방주의 모습이 가득 담겼다. 결국 이리 된건가. 느릿하게 굴러간 시선이 그 무엇보다도 반짝이는 하늘을 내려다본다. 직후, 점차 가까워지는 빛을 맞이하며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웠다.
" 어서 오게, 이번에는 내가 늦었군.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움직였을텐데 말이야. "
" …무슨 속셈이야. "
" 속셈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
" 대체 무슨 생각으로...! "
" 스테파니비앙. "
담담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격하게 반응하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처럼 굴던 스테파니비앙은 그의 부름에 잠시 멈추고는 여전히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단골손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바닥에 놓인 총신에 꽂혀져있던 시선이 시리도록 불타는 그의 눈을 마주함과 동시에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힘 빼지 말게. 자네의 예상대로 벌어진 일에 불과하니. "
" 아니길 바랬는데... 역시 그럼 네가 그랬던 거구나. 이슈가르드가 그렇게 변한 것도, 처참하게 죽은 이들도 전부... "
배신감에 몸을 떨며 제게 외치는 이는 공방주가 아니다.
제멋대로 일그러진 결말을 바꾸기 위해 억지로 개입된 경고에 불과하다.
이 세계가 바라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다만 수백 수천번을 반복해오는 동안, 자연스러운 이별 끝에는 억지스러운 공백에 따른 결말을 수도 없이 마주해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세계는 확실하게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제대로 그를 위해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그렇게 하겠다면, 기꺼이 그가 원하는 대로 공방주를 살려주겠노라고.
" 나를 경멸하나? "
" 뭐......? "
" 내게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이해할 수 있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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