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봄
지인의 글을 보고 끄적여보다
여느 때 처럼 눈이 가득 내리는 어느 겨울 밤이었다. 눈보라가 제법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건만, 바깥으로부터 단절되어 건물 안쪽에 자리잡은 이들에게는 당연하게도 닿을 리가 만무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 속 불길을 바라보며 작은 틈새를 기어이 비집고 들어온 추위라는 이름의 바람에게서 위로를 받고자 했다. 그럼에도 손 끝이 저려오는 감각은 여전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저 눈보라가 떠올리게 하는 어떤 기억의 주인을 잊는 것이었으니까.
콜록거리며 밭은 기침이 연거푸 내뱉어지자 황급히 빨간 목도리를 동여매었다. 아무래도 몸이 으슬거리는 것이 조만간 감기라도 걸릴 듯 했다. 창문에 달린 커텐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막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두운 바깥 풍경을 가릴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둘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그러하듯, 저 바깥의 흉흉한 날씨도 금세 잠잠해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자신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가 새하얗게 뒤덮인 세상에 발자국을 새기며 원래 가야 했던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사실이다.
고개를 움직이자 툭 하니 어깨에 내려앉는 움직임에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같이 있던 것임을 깨달았다.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는 시선에도 공허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반짝이며 또 다른 세상을 비출 빛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도 끝을 건내며 극의 마무리를 지은 이의 숨결을 고스란히 주인에게 돌려주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어본다. 물론 이미 갈 길을 잃은 숨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갈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웃었다. 과거에 머물러 있기 위해. 미래를 등지고 현재를 바라보기 위해. 힘을 들이지 않음에도 원하는 바를 이뤄낸 이의 손길이 사락거리며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꽤나 오랜 시간을 마주했음에도 쉬는 일이 없던 눈꺼풀은 그제서야 천천히 가라앉아 이상을 비추어낸다. 움직이지 않던 시간을 느릿하게나마 돌리고 나니,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찰나의 순간임에도, 그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봄이 오면, 여행을 가자.
언젠가 흘러가듯이 했던 이야기였다. 세상이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 찼을 때, 마주잡은 손을 간질이는 바람과 더없이 맑은 웃음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을 그 순간에 충동적으로 내뱉은 한 마디였다. 그에 긍정을 답하는 모습이 어떠했는지, 무슨 표정을 지으며 제게 답하였는지 그 무엇하나 기억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바로 어제의 일 만큼이나 생생하고도 뚜렷한 기억이었다. 비록 눈을 들어 바라본 내일의 모습이 무채색으로 가득 찬 무언가에 불과할지라도, 그에게는 찬란하게 반짝이는 색이 가득한 현재가 있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단 하나의 세상이.
그러나 겨울이 봄이 되기 위해서라면, 그는 미래를 마주봐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지만, 색이 바래져버린 그에게 다시 한번 싱그럽고 아름다운, 은은하고 선명하게 반짝이는 세상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는 몇 번이고 눈을 들어 미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용기를 내어 바라본 미래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는 그 속에서 현재에 반사되어 숨겨져있던 작은 색과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홀린 듯 쫓아가다 어느새 느릿하게 흘러가는 미래 속에서 점차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는 다시한번 미소를 띄우며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나와 같이 미래를 넘어서 저 멀리까지 가보자.
그곳에는 분명 봄이 있을테니까. 온통 추측으로 난무한 것임에도 그 작은 문장 하나에 확신이 가득 들어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던 색이 마침내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색과 닿았을 때, 그는 내밀었던 손에 살포시 얹어진 꽃잎 하나를 조심스레, 그러나 떨어지지는 않도록 강하게 붙잡으며 미래로 끌어당겼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지금도 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비록, 아직 밖은 겨울임을 여실하게 알려주는 눈보라만이 존재할 뿐이지만 그는, 그들은, 반드시 봄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봄에 다다랐을 때 그는 말할 것이다.
온통 너로 가득찬 세상에 도달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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