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환상으로 변한 채로
드림이 아닌 실제로 꾼 꿈을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라두스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현실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잔인하기만 한지. 탄식과 절규에 가까울 말이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한 채로 삼켜졌다. 교황청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지나가다 본 이들은 그저 그가 할로네께 용서를 빌어야 할 일이 있어 그렇다고 여겼다. 그는 이방인이 아니었고, 성도의 일원이었으며, 무언가 특별한 것 하나 존재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최근에 성도에 들어와 이슈가르드의 개혁을 이끌어낸 주력 중 하나인 모험가, 혹은 영웅, 빛의 전사라고 불리는 이처럼 특별한 힘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그것이 외부인이 아니라면 성도 내부에서는 그를 경계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면 라두스, 그는 이슈가르드의 모든 이들이 존경하고 선망했던 창천 기사단의 친우이자, 그들을 누구보다도 아꼈던 이였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라두스는 자신이 그토록 놓고자 했던 창을 쥐고, 그 끝을 그들의 적에게 기꺼이 겨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올바르지 않는 정의를 향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 할로네시여, 부디 제게 자비를. "
전쟁의 신, 이슈가르드의 수호신인 할로네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라두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하얀 머리칼이 시린 바람을 타고 일렁이듯 흔들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눈앞에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기라도 할 듯이.
그가 걸음을 옮긴 곳은 섭리의 땅이었다. 성도가 가장 잘 보이는 곳이자 점성술을 배우는 이들이 믿는 달의 신, 메느피나의 비석이 있는 곳. 그리고 누군가의 그리움과 비탄이 가득 담긴, 맹우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라두스는 창끝이 바닥에 끌리게끔 느슨하게 쥐고 늘어뜨린 채로 그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보란 듯이 익숙한 얼굴을 맞이했다. 비석을 등지고 앉아있던 이는 몸을 일으키며 눈을 털어내더니, 뒤를 돌았다. 그 일련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던 이를 맞이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일순 무언가 속이 비틀리는 느낌이 들어 심장을 꾹 누르고 있자니, 흐린 눈보라 속에서 더욱 맑게 빛나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을 내고 자신을 직시하며 옅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 오랜만이에요. "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는 변하지 않은 듯 그대로였다. 그 손에 많은 이들의 피와 희생을 묻힌 것과는 대비로, 처음 만났었던 그때와 같이 여전히 공허한 것 처럼 보였다. 시선을 굴려 자신이 쥐고 있는 창을 보았음에도 무기를 꺼내거나 경계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오랜만이라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서 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다. 그를 모르는 이가 본다면 손안에 진득하게 자리 잡은 생명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 그래, 오랜만이네. "
" …보아하니, 대화를 나누러 온 것 같진 않고. "
살기, 적대감. 그는 어느 쪽으로든 좋은 의미는 아니었을 시선을 온전히 받아내며 태연하게 손을 뻗었다. 붉은 마법진이 펼쳐지고, 푸른 카벙클이 허공에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소환되며 눈이 가득한 곳에 또 하나의 발자국을 남겼다. 자신의 소환수를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잠시 그리움이 스쳐 지나갔으나, 착각이라 여길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그를 주시하고 있던 라두스만이, 그가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이렇게 후회하고 그리워할거면서... 너는. "
" 라두스. "
" ……. "
" 그들은 곧 성하에 의해 신도화 될 겁니다. "
라두스는 침음을 삼키며 떨리는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갑작스레 내뱉어진 그의 말이 이슈가르드 내부에 알려진다면 큰 파란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다. 라두스는 그들이 누구이며, 누가 그들을 신도화 시키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성하라고 부르는 이는 단 하나, 토르당 7세뿐이었고, 교황인 그가 신도화 시키는 존재라면 그를 위해서 만들어진 친위대, 창천 기사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었기에.
" 이걸 나에게 말해주는 목적은? "
" 저는... 그들을 막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끝이 어떻든, 결과는 비슷하겠죠. 그러니... 당신 또한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그들과 저의 친우니까요. "
" 결국, 그들을 죽이겠다는 얘기군. "
" 신도화가 된 이들은, 그 주체인 야만신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소멸합니다. 물론, 시체도 남지 않죠. 그러니 성하를 막게 된다면... 성하로 인해 신도화가 된 창천 기사단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
" ……. "
" 막지 않으면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될 겁니다. 당신이 친우라 여기는 이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이들 조차도 신도로 변하고 말겠죠. "
" …나라고 해서 그들의 죽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겠죠. 하지만.. "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승리라는 단어를 적어 내려야만 합니다.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것에 라두스는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영웅이라 불리는 저 모험가 또한 자신처럼 그들을, 창천 기사단을 아끼지 않았던가. 그 마음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익숙하다는 듯, 당연한 일이라는 듯 덤덤하게 사형선고를 내뱉는다. 그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한다고.
그들이 올바르다 외쳤던 정의와 자신의 신앙을 향한 올바른 섭리라 여겼던 신념은 그리도 간단히 거짓으로 정의되어 부서질 것이었던가. 이대로 흔적도 없이 스러져버린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그들의 삶은, 생명의 흔적은, 그저 별것 아닌 잔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인가.
속이 엉망이라도 된 듯 뒤틀렸다. 신도화가 된 이들의 최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어왔지만, 시체조차 남지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에 더욱 그랬다. 다른 이가 말하였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 말을 내뱉은 것이 수많은 야만신을 홀로 상대하고 그 끝을 두 눈으로 목격한 존재라면, 믿을 수 밖에 없었다. 믿고 싶지 않더라도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진실이자, 현실이기에.
" 전에 내게 말하길, 너는 성하의 이상에는 동의한다고 했었지. "
" 그랬었죠. "
" 그가 야만신이 된다면 그의 이상 또한 이루어질 텐데, 그것이 네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
"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은, 거짓된 신앙 위에 새워진 평화가 아닙니다. "
물론 토르당 7세가 야만신이 되어 이룩할 평화는 어쩌면 이슈가르드 모두에게 이상적인 평화일 수도 있었다. 전쟁에 지쳐 무엇을 믿어야 할지 구별 조차도 불가능한 이들에게는 그들의 신, 할로네를 향한 믿음만이 창과 검을 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을 테고, 그의 대리자와 마찬가지인 교황이 절대적인 정신적 지주였을 테니까. 평화를 위해서라면 희생이 필수 불가결이라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누구나가 살아온 삶이 그러하듯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홀로 희생한 누군가로 인한 평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올바른 타협점을 찾아 생긴 평화, 뜻을 굽히고 굴복되며 무릎을 꿇어 복종으로 쌓아 올려진 평화가 있듯, 존재하지 않는 믿음을 강요받아 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좇게 되는 것도 평화의 한 주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평화라 정의될 수 있는가.
" 그게 옳은 일이었다면, 기꺼이 성하를 도왔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
그가 망설이듯이 내뱉은 말을 속으로 삼켜버리고는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며 라두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또다. 또 그 눈이었다. 그는 가끔 저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흐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의미를 물어보아도 별거 아니라 반문하는 것에 더 이상 묻지 못했지만, 늘 미련이라기엔 깊고, 그리움이라기엔 너무나 동떨어진 감정이 투명한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대개 이런 눈을 한 다음에 내뱉는 말은 거의 동일했다. 이를테면,
" …라두스, 나는 당신의 탐구와 지식욕을 좋아합니다. "
갑작스레 화제를 돌리는 것이라던가.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겨 라두스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예기치 못한 그의 행동에 투명한 보랏빛 눈에 비친 라두스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경직되어있었다.
"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면, 그때에는 기꺼이 당신과 창을 맞대겠다고 약속하죠. 질문에 대한 답도.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
태연하게 내뱉는 말과 다르게 떨리는 손끝을 숨기려 주먹을 쥐는 모습이라던가, 미소를 지으려 경련하는 입 끝이라던가, 긴장하고 있는 듯한 눈꼬리와 같은 것이 그가 많은 말을 삼키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다는 것은 성하를 막고, 일시적이나마 평화가 찾아올 순간을 말하는 것이겠지. 라두스는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고집을 부린다고 그가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그래서라기 보다는 그저... 그래, 그의 눈동자가 너무나 절박해 보여서, 그걸 친우로서 외면할 수 없었다. 사소하고도 작은 이유가 발목을 잡는 것을 보면서도 눈을 감은 채, 라두스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대신 답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거야. "
" 설령, 그로 인해 당신이 죽을 수도 있다 하더라도? "
" 그래. 너도 나한테는 소중한 사람이지만, 그들은... 창천 기사단은, 기사단이기 이전에 내 생명이나 다름없는 이들이야. 손을 놓은 채로 가만히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
" ……. "
" 물론,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발악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 "
입안이 온통 쓰고 떫은 것으로 가득찼다. 라두스는 주마등마냥 그들과 함께하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에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웃을 수 있던, 행복을 느낄 수 있던 시간의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들었던 창의 끝은 위를 향하는 것이 아닌, 생명을 빼앗을 이의 심장을 향할 것이다.
신의와 우정을 위해 지키던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며 나아갈 것이다.
그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향할지라도.
" 그래요. "
픽 하니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떠오른 미소는 슬픔을 담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불안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라두스의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으려는 듯 찬찬히 눈을 감았다 뜨고는 이내 환하게 미소지었다.
" 부디, 약속입니다. "
발악하고, 끊임없이 저항하며, 쓰러지더라도 일어서서, 포기를 알지 못하는 듯이 간절하게. 설령, 희망이 모두 불에 타버린다고 하더라도. 부디,
나를 막아주세요, 라두스.
그는 라두스의 창을 툭 건드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스쳐 지나가며 걸음을 옮겼다. 라두스는 그를 막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위령비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자연스레 둘은 서로의 반댓방향으로 향하게 되었으나, 어느 한쪽도 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뉘어진 발걸음은 끝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시간과 관계, 그리고 운명까지도.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둘은 교황청 내부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었다. 제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두 무찌르며 나아가는 영웅의 눈 앞에 보인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자신의 친우였다. 라두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창을 늘어뜨리고는 그를 막아서듯 앞으로 나서며 문 앞에 서 있었다.
" 이런... 곤란해요, 라두스. "
희미한 미소와 함께 향해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날카로운 적의였다. 순간적으로 온 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기운에 라두스는 창을 다시 그러쥐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친우는 믿음을 꺾이고 이용당한 기사들이요, 그가 가로막은 이는 소중한 인연이자 빛의 전사라 불리는 영웅이라는 사실이. 영웅이라 불리는 제 친우는 손에 쥐었던 창의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여기에서 그만두는 것이 좋을겁니다. "
" 아니..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 "
" 확신을 가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잘못 된 것이라면 그저 만용이 될 뿐이에요, 라두스. "
" 웃기지 마. 그렇다면 네가 지금 하는 것은 기만일테지. "
" ...오늘. 내 앞에서 죽는 친우는 하나면 충분합니다, 라두스. 부디 내게서 친우를 둘 씩이나 앗아가게 하지 말아주세요. "
짧고 간결하게 내뱉어진 말 속에는 아무런 것도 비추어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분노만이 표면 너머로 일렁였을 뿐이다. 슬픔이 잠시 스쳐 지나간 듯 보였으나, 이내 맑게 뜨인 연보랏빛 눈동자만이 라두스의 눈을 올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망설임없이 옮긴 걸음은 그를 스쳐 지나간다. 온몸이 묶여있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 지척에 있음을 본능이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라두스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영웅보다도 먼저 뛰어가며 걸음을 옮기는 은빛 기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문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어느 한쪽이 죽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넋 놓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
" 기다려, 리오르. "
담담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교황청 내부에 울려퍼지고, 너무나 간단하게도 걸음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서늘하리만치 훅 내려앉은 정적이 흐르는 것도 잠시, 쾅 소리와 함께 라두스의 주변에 작은 충격이 일었다. 귓가를 울리던 소리에 굳었던 몸이 풀리고 시선이 흘러, 제 옆에 박힌 창의 모습을 본다. 그 무기의 주인은 태연하게 손을 털고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친우를 둘이나 잃고 싶진 않다고요. "
그리고, 지금은 류라고 불러주세요. 그가 내뱉은 말은 언제나처럼 상냥한 웃음을 띄우며 말할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영웅에게는 여유가 없어보였다. 라두스는 일순,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고개를 숙였다. 저 멀리 앞서 뛰어간 은빛 기사가 영웅을 제촉한다. 서둘러야 한다, 류! 그 부름에 응하며 영웅은 등을 돌렸다. 다만, 홀로 절망속에 남겨질 친우를 위해 작은 한 마디를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당신은 그들과 연관되어있으니, 일이 마무리 되기 전에 이곳을 떠나세요. "
" 뭐......? "
" 막을 수 없다면, 적어도 힘을 기를 때 까지 몸을 웅크리고 기회를 노리길 바라죠. 다만, 그 전에... 갈 곳을 잃은 분노의 화살이 당신을 향하지 않도록 이슈가르드를 떠나는 것이 좋을겁니다. "
맑은 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제 눈앞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라두스는 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저렇게 파란 천으로 묶여 한대 묶어내린 머리가 아니라, 좀 더 짧았던 것 같은.... 아니, 부풀려진 것처럼 흐트러진 머리카락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듯한 기분이다. 의문을 가진 채로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린 채로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영웅, 아니 친우의 모습이 보였다.
" 잊어버려. "
선고와도 같은 말과 함께 굳게 문이 닫히고, 남겨진 이는 힘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슨 뜻인지, 왜 갑작스레 그런 말을 내뱉었던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억은 바람이 부는 것 같이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흘러들어와 저를 뒤흔들었고, 라두스는 제 눈앞에 닥친 한계와 그를 뒷받침하며 귀에 메아리치는 무엇보다도 선명한 목소리에, 그대로 주저앉으며 울 수 밖에 없었다.
' 대체 나는 몇 번이나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마주하며 회한에 잠겨야 합니까. '
' 영웅이라는 이름이 아닌, 당신들의 친우로서 끝까지 남고 싶었습니다. '
' 모두 다 같은 인연일진데 한 사람만 그 모든 원망과 비난을 피해간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 내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늘 주변을 통한 원망이 흘러들어올 뿐이군요. 나는, 대체 어디까지 모든 것을 관망하는 이로 남아야만 합니까. '
' 내가 당신들에게 바랬던 것은 삶을 이어나가는 것,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 하나마저도 들어주지 않는군요. '
' 야만신이 되어서 그대들이 그렇게 바라는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
' 희생이 되는 주체가 바뀌고 나서야, 후회를 하십니까. '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라두스는 제 친우가 말했던, '부디 내 친우를 둘 씩이나 앗아가게 하지 말아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영웅을 부르며 앞으로 나아가던 은빛 기사는 오늘 죽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운명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게 되리라.
다만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제게 들려왔던 목소리 중에 기이할정도로 담담하고 서글펐던...
' 야만신이 되어서라도, 기꺼이. '
' 나를 막아주세요... 라두스. '
퍼즐 조각이 맞춰지듯이 생각이 정리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슬픈 과거를 반복하고,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 야만신의 제물이 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라두스는, 황급히 교황청을 빠져나갔다.
막아야한다.
그의 친우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라두스가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자신을 막고 잘못된 과오를 바로잡아주기를 기다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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