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 in the Abyss_Part.Noctyx (2)
2. 과거 편 - 유고 아스마의 시점에서
유고 아스마에게 새로 생긴 침대 위에는 확실히 자유는 없었지만 푹신함은 있었던 모양이다.
유고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지만 교도소 생활 덕에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교도소 밖에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늦잠을 자버리다니! 저 부지런해 보이는 써니나 그의 말이라면 뭐든 듣는 듯했던 알반이 이 시간까지 유고를 자게 내버려뒀을 리 없으니 깨우러 온 것도 모르고 잤다는 얘기가 된다. 젠장, 안 그래도 어색해서 다른 놈들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걱정했단 말이야. 제시간에 깨서 나갔어도 민망한데 하필 늦잠을 자다니.
혀를 차며 우선 귀를 문에 기울여 본다. 거실에 아무도 없었으면 슬쩍 나가서 세수만 하고 돌아올 수 있겠지만 멀리서 작은 볼륨으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큰 목소리는 거의 알반의 것이고 거기 동조하는 써니의 목소리도 계속 들려오는 중에 낯선 목소리가 군데군데 섞였다. 어제 얘기했던 두 사람이 돌아온 걸까, 생각하며 어제 저녁 식사 중 써니와 알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아이크 이브랜드가 포함되어 있는 지명수배자들을 체포하기 위한 특별수사팀의 에이전트는 네 명. 일단 대장인 써니 브리스코가 있고, 도둑 출신이며 사법거래를 통해 수감되었다가 VSF의 에이전트로 일하고 있는 알반 녹스가 있고, 펄거 오비드와 우키 비올레타라는 두 사람이 VSF와는 다른 기관에서 파견되었다고 한다. 안타깝게 유고는 펄거와 우키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듣지 못했다. 한 시간 정도의 저녁 식사 시간은 수배자들의 상세한 정보를 듣는 것만으로도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유고가 그 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펄거가 근접전투의 스페셜리스트로 설정된 인조인간이고 우키가 초능력자라는 정보뿐이었다. 펄거는 그렇다 치고, 초능력자라니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그게 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뒤에 들은 정보가 더 어이가 없었다.
악마라니.
악마의 계약자라니.
유고가 가장 궁금해 할 정보는 아이크 이브랜드에 대한 것이라고 판단해서였을까, 아니면 그가 가장 큰 위험인물이기 때문이었을까. 써니는 수배자 다섯 중 아이크의 옆에서 그의 도주를 돕고 있다는 복스 아쿠마에 대한 정보를 가장 상세히 들려주었다. 복스 아쿠마가 악마이고 아이크 이브랜드가 그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는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써니의 표정은 지극히 진지해 결코 농담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또 VSF가 수배자들이 숨어 있다는 글로리어스 아일랜드를 처음 공격했을 때의 전투 기록을 읽어 보니 혼란스러운 한편으로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 혼란은 깊어져 갔다. 그 악마를 제어하기 위해 스페셜리스트로 펄거와 우키가 파견된 것이고, 펄거가 갖고 있다는 비장의 수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운 정보와 우키가 악마를 상대할 무기를 벼리러 자신이 소속된 기관으로 잠시 돌아간 상태라는 정보를 끝으로 어제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로 인해 혼란 속에서 잠을 못 이루다 새벽에야 간신히 눈을 붙였으니 늦잠을 자버린 것도 사실은 그럴 법한 일일까.
어쨌든 어제 만나보지 못했던 두 명이 돌아왔다면 써니가 요구한 대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7년 전 아이크 이브랜드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평생 안고 가기로 작정했던 ‘비밀’ 의 상자를 열어야만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후. 길게 심호흡을 하고 유고는 방문을 열었다. 네 쌍의 눈동자가 문 열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돌아본 것은 덤이다. 머쓱하게 방에서 나오는 유고를 향해 가장 먼저 손을 흔든 것은 역시나 알반이었다.
“앗, 유고! 잘 잤어? 좋은 아침~ 아, 물론 이미 점심때긴 하지만! 피곤했을 테니까 더 자도 괜찮았는데. 배 안 고파? 너 일어나면 같이 먹으려고 우리 다 기다리고 있었어.”
“우선 세수하고 와라. 얘기는 그 다음부터다.”
써니가 일어나 부엌으로 가고 알반이 돕겠다고 뛰어가자 거실에는 소파에 앉아 있는 두 남자와 유고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은발과 진한 보랏빛 머리가 인상적이다. 은발의 남자는 유고가 언제 자기소개를 할까 기대되는지 흥미진진해하는 눈을 유고에게 돌렸고, 반대로 다른 한 명은 유고가 방에서 나온 것만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버렸다. 유고에게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 것 같았다. 보랏빛 머리 남자가 소파 등받이 너머로 손을 움직이더니 빨간 천에 뭔가를 감싸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어색하게 그들과 대치하다가 고개만 꾸벅 숙여 인사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유고에게 인사하는 것보다 유고의 시야에서 가리기를 우선한 물건이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말해,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다행히도-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세수하고 나왔을 때는 알반이 거실로 돌아와 있었다. 아예 모르는 두 사람을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먼저 본 사람이 옆에 있는 것이 당연히 편하다. 짧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란히 앉아 있는 펄거와 우키, 써니의 빈자리를 채워 앉아 있는 알반을 피해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입장이 입장이라 다른 사람 옆에 앉고 싶지 않아 한 행동이었는데, 덕분에 마치 자신이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된 양 애매한 위치를 선점하고 말았다. 자연스레 둘러앉아 있는 모두의 시선이 유고를 향해 쏠렸다.
“이쪽은 유고! 써니가 데려오겠다고 한 ‘목격자’ 야. 유고, 이쪽은 어제 얘기했던 펄거랑, 우키.”
알반이 한 사람씩 짚어가며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보랏빛 머리의 음울한 미인인 우키 비올레타는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반면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은발의 남자 펄거 오비드는 ‘웬 목격자’? 라고 당장 묻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유고는 무릎 위에 올려뒀던 두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알반이 유고의 사정을 써니에게 들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그가 사용한 ‘목격자’ 라는 단어는 지극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사정이야 어쨌든 우리한테 도움이 될 사람이란 거잖아. 그렇다면 대환영이야. 뭐든 돌파구가 되어준다면 기쁜 일이지.”
그 침묵이 길어질 것 같아서였을까, 펄거는 그렇게 이야기를 정리하고는 종이컵을 하나 집어 물을 따르더니 유고 쪽으로 밀어주었다. 긴장하지 말고 물이나 한 잔 하라는 뜻 같았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기계로 만든 게 분명한 새빨간 손이 얇은 종이컵을 밀어주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이러니해서, 종이컵을 받아드는 손이 아주 잠시 떨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유고를 관찰하고 있었기에 분명 그 모습도 눈에 들어왔겠지만 누구 하나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펄거는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런 목소리로 대화를 시도했다.
“자세가 제법 바르네. 같은 교도소 출신인 누구누구는 기품이 없기로는 우리 팀 1등인데.”
“뭐라고?! 흥, 평일에 쉬는 회사원 아저씨처럼 앉아 있는 사람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오, 백수라고는 안 하네? 그건 다행인데.”
“나 펄거 싫어!”
이에 알반이 매섭게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가벼운 말싸움이 일어났지만 도저히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과장되어 보였다. 어색하게 앉아 있는 유고와 익숙한 듯 소란을 무시하는 우키를 내버려 두고 펄거는 계속해서 알반을 놀렸고 알반은 웃으면서도 펄거에게 짜증을 냈다. 그렇게 이어지던 한 편의 시트콤 같은 말다툼은 식사를 준비하던 써니가 적당히 하라고 말리러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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