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2화. 음악실의 소년, 소녀 (2)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하누 고등학교. 학교 별관의 아무도 없는 음악실 안. 정오의 따스한 햇살이 창문의 커튼 자락 너머로 새어 들어오고, 살짝 열린 창문의 틈으로 운동장의 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지금은 계절의 온기가 어쩌면 미지근하게 느껴질 법도 한 최초의 여름. 그저 여름이다.

이제 막 다음 계절을 넘긴 시간은 어째 사람을 기다려주지를 않는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이다. 여루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먼지를 멍하게 바라보다 구석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검은색의 거대한 악기가 그림자 속에서 홀로 빛나고 있었다. 이 시간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음악실인 걸 알았지만, 혹시나 싶어 뒤를 슬쩍 보고는 무거운 피아노 의자를 뒤로 끌어다 앉았다. 푹신한 가죽 결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오른발이 페달 위로 올라간다. 두 손은 유려하게 건반 위에 안착하고. 이윽고 손 끝으로 가볍게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알레그레토로 시작한 화음이 리타르단도로 바뀌고, 아르페지오로 연결되는 멜로디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특정한 곡을 연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음을 창조해내 즉석에서 쳐낸 멜로디였다. 그러다 갑자기 악장이 바뀌고 어떤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거장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나는 바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오늘은 변덕을 부릴 셈이었다.

사실 *바이올린을 위한 변주곡이라 현악기에 더 걸맞는 음으로 이루어진 곡이었으나, 지금 제가 가진 것은 피아노뿐이었다. 애초에 바이올린은 다룰 줄 모르기도 하고. 짧고 경쾌한 멜로디가 부드럽게 공기를 울리고 연주자는 그 떨림을 즐긴다. 아, 행복한 풍경이었다.

본디 춤곡이어서 그런지 어깨가 들썩이는 것도 같다. 파르티타 연주에 한참을 집중하고 있노라니 슬슬 땀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여름은 여름이라 이건가. 선풍기를 틀지 않았더니 더웠다. 여루는 고집 있게 마지막 한 음까지 놓치지 않고 잡아둔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덥네.”

손등으로 대충 땀을 훔치고 창가로 다가간다. 커튼을 확 열어젖히자 평범한 일상의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여름 학교의 운동장은 그야말로 청춘이었다. 여루는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내가 안고 갈 과거였다. 지키고 싶은 현재이자 미래였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여름을 마주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아니면... 내가 바라는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날이 내게 영원히 쥐여 질까. 누군가 앗아가지는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그녀는 본래 현실 도피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힘든 일은 미루고 나중에 생각하는 편이라, 미래의 불안정함은 지금 고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 실패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비범함을 평범함으로 바꾸는 용기가 내게 필요할 뿐.

그렇기에 더욱... 채주현이라는 소년의 존재는 제게 가당치 않았다. 아이돌 연습생이라니. 세상에서 평범함과 제일 거리가 먼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가 가까워지려 하는 것이 기껍지 않았다. 쾨텐에 살던 때의 바흐가 세속의 세계에서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했는지는 관심 없다. 결국 남은 것은 그의 음악 뿐이었으니.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권여루는18세기의 사람처럼 고지식한 음악으로 인생을 평가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클래식을 사랑하나 내 인생은 클래식(Classic)한 것이 될 수 없었다. 사랑하면 닮는다지만, 예외도 있는 법이다.

아, 종이 쳤다. 점심 시간의 끝을 알리는 소리였다. 슬슬 교실로 돌아가 봐야 했다. 아쉬움 하나 없는 태도로 발걸음을 옮겨 음악실을 나선다. 이제 거장이 만들어낸 고전 세계에서 빠져나올 시간이었다.

*참고 :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마장조 – 3. 가보트와 론도, BWV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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