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2화. 음악실의 소년, 소녀 (3)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

다음 날. 여루는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음악실을 찾은 참이었다. 음악실에 가는 날이면 늘 그렇듯 평소와 같이 식사를 거르고 종이 치자마자 별관으로 달려갔다. 음악실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걸리면 생각해둔 대로 피아노 대회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하면 될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음악 선생 덕분에 그녀가 피아노를 잘 치는 건 교내의 교사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여루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 음악실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복도 맨 끝에 있는 음악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기분 좋은 땀을 흘리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문 앞에 당도하고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미닫이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놀라서 굳어버렸다.

“…”

“……”

아무도 없어야 할 음악실에 선객이 있었다. 그것도.

“안녕.”

“아… 으응, 안녕.”

채주현이었다. 그가 교실의 책상 위에 걸터앉은 채 느긋한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루는 당황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나, 나가야 하나? 아니, 내가 왜? 뭐가 아쉬워서. 딱 봐도 쟤는 피아노를 치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내가 써도 될 거 같은데. 보는 눈이 있는 건 부끄러워서 달갑지 않지만…

“뭐해? 안 들어오고.”

“아, 아니. 그… 알겠어.”

머뭇거리다 등 뒤로 미닫이문을 밀어 닫고는, 음악실 내부로 한 걸음 들어왔다. 여루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교실을 둘러보다, 그를 지나쳐 피아노 쪽으로 향했다.

“피아노 칠 줄 알아?”

“응...”

“그래? 나도 같이 들을래.”

허락을 구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서 거절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한 당연한 태도가 느껴졌다. 여루는 그저 무력하게 그가 그랜드 피아노의 긴 의자 쪽으로 다가와 제 옆에 앉는 것을 지켜봤다. 검은색의 의자가 푹 꺼졌고, 허벅지가 맞닿을 만치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그에게서 나는 청량한 향이 확 풍겼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서 연주하라는 듯 손과 얼굴을 번갈아보며 바라보는 탓에, 여루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딱히 채주현이라서가 아니라, 가족 앞에서도 그 누구 앞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한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손끝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시선을 무시하려 애쓰며 건반을 눌렀다. 의외로 소리는 떨림 없이 부드럽게 울렸다. *슈베르트의 즉흥곡이 천천히, 단순하고 가볍게 멜로디를 타고 흐른다. 합쳐진 음이 이윽고 안단테(Andante)로 끌고 가는 곳은 아다지오로 가득 찬 언덕 위. 물 흐르듯 매끄러운 연주가 더해져 풍성한 곡조를 완성한다.

**축복받은 예술이여, 어두운 시간 속에, 인생의 잔인한 현실이 나를 둘러쌀 때, 너는 나의 마음에 온화한 사랑의 불을 붙여, 나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는구나. 주현은 그저 가만히, 손끝이 빚어낸 세계 속에 몸을 담갔다. 말은 필요 없었다.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의 초여름이 온전히 순간 속에 녹아있었기에. 더 이상 채울 것은 불요(不要)했다.

조용하고 느리게, B♭장조의 악장을 연주하던 여루가 돌연 애매하게 마디를 끊어내더니, 살짝 상기된 얼굴로 부러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 곡, 완주하기엔 너무 길어서.”

“...그래.”

“...그, 어때…?”

여루가 곧 용기를 낸 듯 떨리는 시선으로 옆에 앉은 주현을 올려다 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칭찬을 바라는 다람쥐 같아서, 주현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일부러 시간을 끌며 대답을 피했다.

“글쎄, 내가 보기엔...”

“아, 역시 아까 프레스토로 칠 때 반음 틀렸나? 그걸 들었어? 으으...”

“…”

그건 아니지만. 멋대로 짚고 좌절하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주현은 그제야 그녀가 원하는 답을 말해주었다.

“멋졌어. 아주 듣기 좋았어.”

“정말…?!”

“응. 누구 곡이야?”

“슈베르트. 너, 클래식 좋아하니?”

“실은 나도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알아서.”

“대박! 진짜? 멋지다!”

갑자기 흥분한 여루가 재잘대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도 클래식 좋아하는구나. 나중에 나랑 같이 곡 하나 맞춰보지 않을래? 일단, 좋아하는 작곡가 누구 있어? 나는 리스트랑 라벨, 아, 엘가도 좋아하고…

어느새 더욱 가까워져 맞붙은 다리에서 서로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여루는 의식하지 못했고, 주현은 그것에 만족했다. 여름, 한낮, 음악실의 소년 소녀.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더운 공기가 흘러들어왔고, 새하얀 커튼 자락이 바람에 맞춰 미세하게 나풀거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둘만 존재하는 공간이었으며 세계였다.

*Schubert: 4 Impromptus, Op. 142, D. 935 - No. 3 in B-Flat Major: Theme (Andante)

**슈베르트 - 음악에(An die Mu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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