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IF. 축복해야 마땅한 자들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온 세상이 축복으로 가득했다. 신의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가(聖歌)와 가요가 한밤중 거리 곳곳에 울려 퍼졌다.

오늘도 많은 이들의 행복과 들뜬 기분을 안고 고요히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색채를 입은 풍경은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흰 눈이 내렸다. 흰 빛깔이 연말의 화려한 색으로 장식한 길가를 조금씩 검게 물들였다.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으로 크로엔 숙소의 거실도 어두컴컴하고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멤버들은 모두 얼마 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본가로 떠났다. 숙소에는 채주현과 권여루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주현은 본가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고, 여루는 본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정말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채주현은 불이 꺼진 거실 정중앙에 서서 소파를 장장 세 시간 째 쳐다보고 있었다.

거실 베란다 창의 바깥 건물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으로 인해 어둠에 적응이 되면 그리 어둡지는 않은 시야였다.

누군가가 소파 위에 미동 없이 누워있었다. 얇은 담요가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를 타고 흘러 내려가듯 반쯤 덮여있었다. 흰 팔이 소파 아래로 축 늘어져 있다.

주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깨어나지 않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어디선가 유명한 구절의 성탄 노래가 들려왔다. 환청이 들렸다. 그건 성탄절을 축복하는 찬가였다.

온 세상이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제 세상은 세 시간 전에 빛이 꺼졌다. 흰 눈이 내리는 소리로 사방이 고요했다. 눈이 내리는 소리는 세상을 축복하는 천사의 노래였다.

주현은 날개가 꺾인 천사의 앞에 무릎 꿇었다. 떨리는 손을 그제서야 뻗어서 늘어진 팔을 잡는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냉기가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천천히 소름이 끼치고 무언가 북받쳐 오른다. 미처 뱉어내지 못한 뜨거운 감정이 목에 걸렸다.

성인이 되지 못한 소녀는 축복으로 가득한 성탄 전야에 생명을 꺼트렸다. 새해를 맞이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빛 하나가 스러졌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

- 형! 저희는 휴가받았으니까 먼저 가볼게요. 형은 집에 안 가요?

- 야, 너는... 쟤가 가긴 어딜 가.

- ...아.

- 잘 쉬었다 와. 나는 숙소에 있을게.

- ...

12월 23일. 짧은 휴가를 받고 멤버들은 본가로 돌아갔고 채주현은 숙소에 남았다.

주현은 각자 매니저들과 뿔뿔이 흩어지는 멤버들을 보다 아파트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높은 층수를 누른다.

곧 우웅- 하고 낮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붕 뜨는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 주현은 저녁 거리를 머릿속으로 고르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여루야. 나 왔어.”

거실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소년은 대답이 없는 반응에 익숙한 듯 신발을 벗어 현관에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다시 뒤를 돌았다.

소파에 누군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순간 아찔한 느낌이 들며 터무니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주현은 다급한 걸음걸이로 소파에 다가갔다.

여루가 누워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모습에 심장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인 걸 알면서도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미약하게 날숨이 느껴졌다. 그제야 안심하며 숨을 확인한 손으로 소녀의 뺨을 쓸었다.

손에 닿는 살결이 따뜻했다. 뺨에 닿은 손길에 여루가 깼는지 눈을 떴다.

“...”

“잘 잤어?”

“...응.”

소녀가 눈길을 애매하게 피하며 느릿하게 눈을 꿈뻑였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얇은 담요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현은 그것을 주워다 소파 위에 얹어두며 입을 열었다.

“춥게 이러고 거실에서 자고 있었어?”

“...그냥.”

“또 그런다.”

“...미안. 그냥 여기가 편해.”

주현이 자연스레 여루의 옆에 앉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여루는 묵묵히 그 행동을 감내하며 시선을 베란다 쪽으로 돌렸다.

오늘 밤부터 눈이 내린다 했다. 운이 좋으면 크리스마스 당일까지 눈이 내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제겐 의미 없을 풍경이었다.

소녀는 자신의 방에, 아니 채주현의 방에 숨겨놓은 알약들을 생각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서하늘을 통해 구해다 받은 수면제였다.

더 이상 버티기엔 그의 사랑이 너무나 진심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끝을 맺고 싶었다...

“여루야. 오늘 하루는 어땠어?”

“오늘은... 책을 읽었어.”

“무슨 책을 읽었는데?”

“「욥의 노래」.”

“책 내용이 궁금해. 알려줘.”

“몰라. 그냥 책장에 있길래 읽어봤어. 어려워. 성경 얘기 같아. 너무 옛날이라 그런가, 시대착오적인 표현도 많고. 재미 없어.”

“흐음.”

여루는 눈짓으로 협탁 위의 책을 가리켰다. 히브리 구전문학의 시집이 그 곳에 놓여있었다.

죄 없는 자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이유 없는 고난에 대한 모티브로 쓰인 책은 제대로 읽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아마 앞부분만 대충 읽다 그만뒀나 보다.

여루는 제 목덜미에 고개를 묻는 주현을 느끼며 그나마 읽은 내용을 되새겨 보았다. 생은 꽃망울 마냥 툭 터져 시들고, 악인은 평생 고난이 가득한 삶. 입에 담아봤자 이 아픔 줄어들지 않지마는...

꽃망울처럼 툭 터져 금방 시들어 버린다는 것이 꼭 저 같았다. 사실 책은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목차만 대충 훑어봤을 뿐. 그러나 목차에 들어간 표현들이 하나같이 마음에 와닿는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앞 부분의 내용에는 시대착오적이고 혐오적인 문장이 많아 건드려보다 말았다. 족장 시대 사람이라니 말 다했지.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입술을 지분거리기 시작하는 주현을 떼어내며 여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잘게.”

“그럼 같이 자자.”

“......”

“곧 씻고 들어갈게. 먼저 누워있어.”

자연스러운 태도로 욕실로 향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이제는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여루는 텅 빈 시선으로 그런 주현을 바라봤다. 시선을 잠깐 주다가 곧 방으로 들어갔다.

스스로 방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들어갔다. 거미줄을 향해 열심히 날아가는 나비 같았다. 제 꼴이 우스웠다.

퀸사이즈 침대 옆에 놓인 협탁의 아래. 그곳을 더듬자 거꾸로 붙여놓은 작은 비닐 주머니가 만져졌다. 안에는 수면제가 잔뜩 들어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으로 어둠이 침잠했다. 여루는 눈을 감았다. 손에 닿는 알약의 형태가 느껴졌다. 그것을 손끝으로 굴리듯 만지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

크리스마스 이브. 하늘에서 눈이 흠뻑 내렸다. 주현은 급한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여루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다 너무 늦어버렸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배가 고프진 않겠지. 아직 저녁 안 먹었을 텐데.

손에는 백화점 쇼핑백이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메시지 창이 띄어져 있는 핸드폰.

유소연 :  주현아. 여루 정말 해외로 이민 간 거 맞아?

나 : 응.

유소연 : 어머니랑 아버지께도 연락 드려봤는데 답장이 없으셔서. 여루는 잘 있대?

나 : 응.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있어.

유소연 : 그래, 다행이네. 그럼 또 여루 소식 전해줘.

애가 바빠서 그런가 연락도 없고... 속상하네.

아무튼 다음에 다시 문자할게.

여루의 친구 유소연에게 온 문자였다. 벌써 여덟 번째였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지 자꾸 물어대는 통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쉽게 들킬 수는 없으니 적당히 대꾸해주고 화면을 꺼버렸다. 서둘러서 아파트 로비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연말 무대는 사전녹화로 잘 끝내뒀고 이제는 내일 크리스마스 당일 생방 때 얼굴만 잠깐 비추고 숙소로 돌아올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급하게 뛰쳐나와 문으로 다가갔고 곧 도어락을 해제했다.

“여루야, 나 왔어.”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주현은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거실 소파에 누군가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이제 막 들어와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주현은 겨울의 냄새를 안고 들어와,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인영을 끌어안으며 익숙한 태도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여루야...”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주현은 이상함을 느끼고 여루를 품에서 떼어내 얼굴을 살폈다. 소녀의 갈색 눈이 반쯤 닫혀 있었다. 제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이상했다. 체온은 아직 따스했다... 아니, 제가 이제 막 밖에서 온 거라 차가운 거였나. 갑자기 머리끝에서부터 소름이 진하게 타고 내려갔다.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주현은 황급히 제 입술을 상대의 숨결에 겹쳤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생의 자락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은 천천히 겹쳤던 입술을 떼어냈다.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지만 곧 꺼질 듯했다.

“...주, 현아.”

“응, 여루야. 구급차 부를게. 조금만─”

“아니. 부르지 마...”

“뭐?”

핸드폰 잠금화면을 급하게 풀고 119를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주현은 이제 소파에 누워 축 늘어진 소녀를 허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반바지에 반팔이라 추워 보였다. 또 너는, 그렇게 내게 시위하듯 춥게 입고.

“주현아. 나 졸려.”

“...여루야.”

“나 잘테니까... 깨우지 마.”

“...”

“미안해. 나 너무 지치고 졸려서... 이따가.”

투욱.

손목에 걸고 있던 쇼핑백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아니지. 제가 여루에게서 팔을 거둠과 동시에 자연스레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주현은 말없이 그저 서서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한 시간째.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상관하지 않고, 그는 소녀의 가슴이 느리게 오르락 내리락 하다 잦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실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베란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렸다. 곧 해가 졌다. 어둠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주현은 이미 날개가 꺾인 천사의 앞에 주저앉았다. 자신은 신에게 기도할 수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없었다.

세상에서 불이 꺼졌다. 빛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세계를 채우던 색채가 옅어졌다.

다시 무채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단편 영화를 상영하던 브라운관에서 색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무라도 바라는 건 베어져도 새순 돋아 전과같이 끊임없이

그 뿌리는 땅에서 늙고 나뭇등걸은 흙먼지로 죽어 가도

몰 냄새에 봉오리 펴, 심어 가꾼 식물마냥 여린 가지 만드는데

사내라도 없어지니 끊긴 숨은 어느 곳에 있나요?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흐느낌이 목 바깥으로 힘겹게 새어나왔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감정이 비가 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치지 않는 장마였다.

제 세상에서 새어 나간 색은, 빛은 어디로 갔는가.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는가, 땅으로 꺼져 자취를 감추었나.

욥이시여, 귀 기울여 들으소서, 고즈넉이, 말할게요.

할 말 있으면 대답하여 주십시오, 당신도 옳다하기 원합니다.

할 말 없으면 잠잠하게 들으소서, 당신께 지혜를 알려드릴게요.

세상이 온통 성탄(聖誕)을 축하하는 들뜬 분위기로 달아오를 때 한 소녀의 육신이 생의 바닥으로 추락했다.

당신 하신 그 말 내가 듣자오니,

"나는 깨끗하고 나는 잘못 없고 어떤 부정 내게 없다.

...

정도(正道) 굽게 죄 지어도 내게 갚지 않으시고

내 목숨을 건지셔서 무덤 가지 않게 하니 내 생명이 빛을 보리."

*참고 : 욥의 노래, 김동훈 역, 민음사, 2016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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