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유료

1월 23일의 마미 테일러

언제나 당신과 함께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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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일부 공개 | 1차 헤테로 페어

(C)떨리고설레다 2023


“춥다!”

애슐리가 과장되게 외치며 외투를 벗었다. 챔은 따라서 제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히터 때문에 가게 안 공기는 훈훈한데도, 애슐리는 옷 위로 쓱쓱 팔을 문질렀다. 챔은 흘끗 그녀의 옷차림을 곁눈질했다. 그렇게 입으니까 춥지…. 잔소리가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참았다.

애슐리 프란시스의 차림새는 사시사철 비슷했다. 위는 파이고 아래는 짧았다. 겨울이랍시고 복슬복슬한 소재로 바뀌고 팔이 길어지기는 했으나, 어쨌든 근본적인 형태에서는 크게 변화가 없었다. 거기에 여름에는 볼레로 가디건, 봄가을에는 자켓, 겨울에는 도톰한 패딩, 끝이었다. 찬바람에 그대로 드러난 목을 볼 때마다 챔은 제가 더 추운 것만 같았다. 저러는데 감기에는 또 잘 안 걸리는 게 신기했다.

“애쉬, 목도리는?”

크리스마스에 머플러를 사 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건 또 어디에다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꼬박꼬박 챙겨 다니는가 싶더니 처음 일주일이 전부였다. 이후로는 영, 하고 나타난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 맞다.”

“좀 하고 다니라니까.”

지적하면 돌아오는 것은 늘 똑같은 대답. 챔은 한숨을 쉬었다.

“목을 좀 신경쓰란 말야. 보컬이잖아.”

“미안, 계속 잊어버려.”

혹시 맘에 들지 않았나 걱정했는데 그런 눈치는 아니었다. 머플러가 있어서 확실히 덜 춥다고 기뻐하는 말투는 진심이었다. 챔이 목도리를 하고 나온 날이면 종종 빼앗아 두르기도 했다. 그의 목도리는 애슐리의 것과 매우 비슷했으니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 것도 아니었다.

“내일은 진짜 할게.”

“그래….”

그러니까 애슐리는 그냥, 정말 매번 까먹는 것이었다. 챔은 조금 서운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실수인데 어쩌겠는가. 다음을 기약하며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주문할게?”

“메뉴판이 없는데?”

“그냥 하면 돼.”

애슐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거나 다 먹지?”

“으응.”

“오늘의 칵테일로 두 잔 주세요.”

바텐더를 불러 주문하는 폼이 능숙했다. 한두 번 와 본 가게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데서 혼자 청승이나 떠는 건 애쉬한테 안 어울리는데. 챔은 절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제가 싫었다. 그럼 전에는 누구랑 왔을까….

“어제도 무대에 서는 꿈 꿨어.”

다행히도 애슐리가 침묵을 깨어 우울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속내를 들킬 리는 없었으나 괜히 부끄러웠다. 챔은 머쓱하게 볼을 문질렀다.

“꿈에서도 노래를 부르네.”

“그냥 무대 말고.”

슬쩍 쳐다본 애슐리는 그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마주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래서 시선을 돌려야 하는 쪽은 오히려 챔이었다. 불편한 일이었다. 애슐리 프란시스는 대화할 때 늘 청자의 눈을 쳐다보았는데, 그 버릇은 종종 상대를 너무 설레게 만들었다.

“그럼?”

“내가 재데뷔한 날 말야.”

챔은 빨개진 손끝을 슬쩍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마찬가지로 열감이 느껴지는 귀는…. 아마 애슐리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길 바랐다. 챔은 애꿎은 구두코만 탁탁 부딪쳤다. 이럴 때만큼은 그녀가 눈치 없는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그날 진짜 떨려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진짜’를 힘주어 발음하며, 애슐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열다섯 번쯤 반복된 이야기였지만 챔은 한 번은 더 들어 주기로 했다. 기분이 들뜨면 좋아하는 얘기를 반복하는 것도 애슐리의 습관 중 하나였다. 챔은 그녀가 저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면 열다섯 번을 더 들어도 결코 지루하지가 않았다.

“‘오늘의 칵테일’이요.”

“잠시만요.”

핸드폰과 지갑이 치워진 자리에 잔이 놓였다. 명함 사이즈의 종이 두 장이 함께 딸려나왔다. 1월 23일, 『마미 테일러』. 화려한 필기체로 적힌 글씨를 애슐리가 소리 내어 읽었다. 재료는 스카치 위스키, 레몬 주스, 진저 에일….

챔이 중얼거렸다.

“레몬. 좋네.”

두 사람 모두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정확하게는 애슐리만의 취향이었었다. 그는 신맛을 썩 즐기지 않았지만 그녀 탓에 어느새 자주 먹고 있었다. 챔은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애슐리는 홀짝 술을 맛보고는 입술을 핥았다.

“무슨 얘기 했지?”

“재데뷔.”

“맞아, 행운의 피크도 잃어버려서….”

처음 기타를 배울 때 썼던 클로버 그림의 피크를 애슐리는 행운의 부적이라도 되는 양 가지고 다녔었다. 그걸 무대가 시작되기 직전 잃어버린 탓에 평소보다 몇 배는 긴장해 올라갔다. 하지만 결국 멋있게 해낸 건 애슐리가 가장 좋아하는 모험담. 그녀가 감성에 젖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레퍼토리였다.

슬쩍 곁눈질로 훔쳐본, 흥분으로 발갛게 상기된 옆얼굴이 예뻤다. 챔은 제 잔을 한 모금 비웠다.

“덕분에 행운은 네가 만드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잖아.”

“그렇지.”

애슐리는 더는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피크에 소원을 빌지 않아도 되었다. 비단 음악에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었다. 익스트림 스포츠에 도전하거나 물건을 환불하러 갈 때, 하다못해 오븐에서 뜨거운 음식을 꺼낼 때에도. 일상에서 용기가 필요한 모든 순간, 그녀는 이제 미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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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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