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눈이 올 때 삿포로에 가자

사랑한다는 말이야

이우는 밤 by 떨레
33
0
0

연성교환 | 3000자 | 1차 헤테로 페어

(C)떨리고설레다 2023


“먼저 들어갈게요.”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며 머리끈을 끌렀다. 머리카락이 기다렸다는 듯 어깨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류진 류헤이는 살짝 머리를 흔들어 뭉친 덩어리를 정리했다. 매일 묶었다 풀었다 하기가 너무 귀찮았다. 머리를 길게 기르지도 않아 솔직히 묶으나 마나인데. 하지만 명색이 서비스직인지라, 깔끔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일단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으응, 류헤이, 내일 봐.”

인사하는 매니저의 얼굴에 언뜻 웃음기가 서렸다. 이유가 궁금해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가게의 유리창 너머에 선 길쭉한 그림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타야가 웃었다. 류헤이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맺히는 반가움은 쉬이 가릴 수가 없었다.

“오늘은 일찍 끝났네.”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류헤이가 중얼거렸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목 부근에 따뜻한 온기가 와닿았다. 우타야가 목도리를 끌러서 둘러 준 탓이었다. 류헤이는 머플러에 코까지 폭 파묻혀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남색 체크 목도리에서는 시원하고 깔끔한 냄새가 났다. 반노 우타야라는 남자를 닮은 풋풋한 숲길의 향이었다.

우타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위험해.”

저녁 아홉 시는 여자 혼자 다니기에 결코 늦은 시간이 아니고, 류헤이가 일하는 카페는 번화가 한복판인 데다, 지금은 연말이라 길거리도 환하다고 몇 번이고 설명했건만. 위험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우타야는 굳이 시간을 내어 류헤이를 마중 나오기를 고집했다.

“혹시 나랑 집 가는 게 싫어?”

“그건 아니야!”

우타야가 조용히 물었다. 풀 죽은 강아지마냥 목소리가 축 늘어졌다. 류헤이는 깜짝 놀라 부인했다. 우타야와 같이 있는 걸 내가 싫어할 리가 없잖아…. 우타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됐어.”

“하지만…. 우타야가 춥잖아.”

“안 추워.”

우타야가 주장했다. 코는 새빨갛게 얼어붙었고 숨을 내쉴 때마다 뽀얀 김이 올라온대도 하여튼 그렇댔다. 날이 추운데 남자친구가 고생하는 것 같아 류헤이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요즘 감기가 독하다던데, 이러다 몸이라도 아프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따뜻한 실내에서 벗어나 차가운 밖으로 발을 내딛을 때, 함께 걸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았다.

점심쯤부터 내리던 눈은 저녁이 되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밤을 지나 내일 새벽까지 쭉, 이렇게 같은 날씨가 반복된다 했다. 풍성한 함박눈이 길가에 소복이 쌓여 정말 겨울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눈송이가 하나, 둘 류헤이의 코트와 바지에도 내려앉았다. 결정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크고 선명한 눈송이였다. 류헤이는 습관적으로 어깨까지 손을 올렸다가, 모양이 예뻐서 털어내지 않고 그냥 두었다. 대신 천천히 녹아드는 형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누가 한 해의 끝을 외로운 계절이라 불렀던가. 12월의 한복판은 이리도 뜨겁고 열정적인 것을. 넓은 광장을 걷고 있자면, 일본에 연인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하고 감탄 아닌 감탄을 하게 되었다. 어딜 돌아봐도 사랑이 있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남녀.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겨울 간식을 사는 커플. 부끄럽지도 않은지 길거리에서 꼭 껴안고 입을 맞추는, 서로에게 온전히 물든 사람들….

하지만 우리도 그렇지. 류헤이는 소매에 감춰 두었던 손을 빼 슬쩍, 우타야의 주머니에 꽂았다. 우타야가 힐끔 류헤이를 쳐다보았다. 류헤이는 웃었다. 후끈 달아오른 주머니 안, 맞닿아 오는 살갗이 따끈했다.

광장 가운데의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는 별 모양 전구가 알알이 달린 기다란 줄을 두르고 있었다. 12월 1일에, 맨 아래 전구부터 하루에 하나씩 켜지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꼭대기의 가장 큰 별에 불이 들어오는 식이었다. 크리스마스도 곧이구나. 꺼진 전구를 세는 게 빠른 트리를 쳐다보면서 류헤이는 날짜를 헤아렸다. 이번 주 금요일이네?

“무슨 생각 해?”

우타야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류헤이가 웅얼거렸다.

“곧 크리스마스라서.”

크리스마스, 하고 우타야가 반복했다. 뜨거운 손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류헤이의 것을 감쌌다. 류헤이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날 아르바이트 빼도 정말 괜찮아?”

"같이 일하는 언니가 대신 봐주기로 했어."

언제든지 필요한 날에 두 번, 대신 일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은 굳이 밝히지 않기로 했다. 나 때문에 그런 불리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돼, 하고 우타야가 미안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우타야는 늘 그랬다. 류헤이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그래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상처를 받으면 세계가 무너질 것처럼 굴었다. 그 애정에 류헤이는 늘 고마워했고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성탄절을 비우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런 사이로 맞이하는 첫 번째 기념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거 있어?”

“우타야와 함께라면 뭐든 좋아.”

그럴 줄 알았어, 하고 우타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류헤이를 돌아보는 얼굴은 모든 계획을 마친 이의 눈빛이었다.

우타야가 가슴을 쭉 폈다.

“금요일에, 기대해도 돼. 나만 믿어.”

물론 류헤이도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성탄절에 입을, 작고 예쁘고 보송보송한 의상을 몇 주 전부터 열심히 골라 두었다. 지금쯤 문앞에 택배 상자로 도착해 있을 것이다. 원래는 깜짝 이벤트로 선물하고 싶었는데. 참지 못하고 류헤이는 그냥 입을 열었다. 큰 문제였다. 우타야의 미소는 종종 이렇게, 류헤이를 너무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우타야도 기대해.”

우타야가 놀란 얼굴을 했다. 류헤이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우타야의 취향에 맞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타야라면 노력 정도는 알아보고 예뻐해 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좋아….”

우타야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류헤이의 선물이라면 뭐든 행복할 거야.”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신발 끈이 풀려 자꾸 속도가 느려졌다. 잠깐만, 하고 류헤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허리를 숙인 것은 류헤이보다 우타야가 먼저였다. 바닥에 무릎이 닿도록 몸을 낮추고 류헤이의 운동화 끈을 묶었다. 바지에 눈이 묻지 않을까 걱정되어 류헤이도 괜히 상체를 기울였다.

류헤이는 우타야가 끈을 매어 주는 것이 좋았다. 리본을 두 번 꽉 조여 묶으면 운동화 끈이 발을 힘있게 감싼다. 저를 꼭 끌어안는 품을 떠올리게 해서, 신발에 발을 밀어넣을 때마다 왠지 안정적이었다. 다 됐다, 하고 우타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시선을 마주치기가 조금 수줍어져서 류헤이는 눈을 피했다. 남자친구를 내려다보는 쪽으로 반전된 시야는 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우타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여행이나 갈까.”

“타츠야랑 렌도 같이? 재밌겠다.”

“아니, 우리 둘이서만.”

류헤이는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슬쩍 옆을 올려다보았다가 우타야와 눈이 마주쳤다.

“…삿포로에 가자.”

눈이 올 때에 맞춰서, 하고, 우타야는 잠시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류헤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겨울에 삿포로에? 게다가 눈도 오는데? 기차가 다니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가자는 거야.”

“왜?”

“그게, 사랑한다는 말이야….”

삿포로에 가자는 게 어떻게 사랑한다는 고백이 되는 거야? 류헤이는 다시 묻고 싶었지만 올려다본 우타야의 옆얼굴이 너무 부끄러워 보여 그만두었다. 우타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 검은 비니 모자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훑었다. 언뜻 드러난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추위 때문일까.

류헤이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갑자기 찬바람에 노출된 부위가 시려웠지만 상관없었다. 슬쩍 팔을 들어올리자 우타야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류헤이는 그대로 우타야의 귀를 감쌌다. 나눠 받은 체온을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손에 잡힌 피부의 감촉은 차면서도 뜨거웠다. 귓가를 붉히는 것은 사랑이었고, 열정이었다.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가 온몸을 에는 듯 지나갔지만, 한 겹 피부 아래에서 타들어가는 불꽃으로 이를 이겨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춥지 않았다. 그래서 정녕 겨울이야말로 연인의 계절이었다.

“나도 우타야를 좋아해.”

그대로 류헤이는 고백했다.

“우리 눈이 올 때 삿포로에 가자.”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