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어느 오래된 절망에 관하여

백야의 날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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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 | 5000자 | 《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 기반

*장르 논란이 터지기 전의 작업물입니다.

(C)떨리고설레다 2023


  리는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찬란한 비극의 흔적을 앞에 두고. 

어느 오래된

에 관하여

기시감(旣視感).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일.

일찍이 로직은 기시감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다. 사람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같은 순간을 두 번이나 겪겠는가. 세상에 아무리 기묘한 능력을 가진 환상체란 것이 있다지만, 시간을 조작하거나 생명을 되살리는 종에 관해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로직은 E사의 교육팀 팀장이자 회사의 가장 오래된 직원 중 하나로서, 정보팀으로부터 환상체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대부분 전달받는다. 그가 알지 못하는 환상체의 존재는 불가능이나 마찬가지란 뜻이다. 

어떤 찰나를 거듭 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기시감이란 그저 뇌가 낯섦에 부담감을 느껴 만들어낸 착각. 즉 한 인간의 나약함의 증거일 뿐이다. 그렇게만 여겼다.

그러나 그날, 부인할 수 없는 비극의 흔적을 앞에 두고 E사의 젊은 팀장은 생각한다.

지금껏 간직해 온 세상의 정의를 몽땅 고쳐먹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로직 자신의 나약함 혹은 기시감의 존재. 여태껏 부정당했던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모두가 마침내 인정받는 날의 도래였다.

.

.

.

하나,

둘,

셋.

누군가 카운트다운이라도 한 듯, 로직이 정신을 차리는 데에 걸린 시간은 정확히 3초였다.

로직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풍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단조로운 회색의 벽과 바닥, 복도 양옆에 일정한 간격으로 달린 똑같은 문. 어디를 보나 규칙을 발견할 수 있는, 회사라기보다는 감옥 같은 분위기의 건물.

여긴 아는 곳이다.

그래, 평범한 E사의 복도다.

로직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다른 생명체의 기척이 전혀 없는 적막에서 문득 안도감이 느껴졌다. 안도감? 로직은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줄곧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단 것도 방금에야 알았다. 

발걸음이 그치자 공간은 비로소 조용해졌다. 소리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운 건 완벽한 고요. 쥐새끼의 발자국마저 요란하게 들릴 법한 침묵이었다. 로직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제 폐로 공기가 오가는 소리가 어렴풋이 났다.

그러한 정적에 둘러싸여 로직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딜 가고 있었더라.

묘한 위화감이 발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뱀처럼 미끄덩거리는 감촉이 다리에 선명했다. 집어삼켜질 것만 같은 기분. 떨쳐내고 싶었다. 로직은 두어 번 발을 굴렀다. 그러나 별로 소용은 없는 듯했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확 소름만 끼쳐올랐다.

"선배님…."

인기척이다. 긴장한 근육이 화들짝 놀랐다. 뒤늦게 밀려오는 머쓱함을 숨기려 애쓰며, 로직은 부름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말고 사람이 또 있었던가. 나직한 신음의 주인은 몇 발짝 뒤의 케디악이었다. 로직의 빠른 걸음으로 대략 3초 정도 걸릴 거리에, 한 손으로 목을 감싸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로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케디악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져 맺혔다. 복도의 엷은 전등빛과 그의 평범한 시력으로도 쉽게 감지될 만큼 커다랬다. 로직은 주춤했다. 그의 후배는 감정 표현이 풍부한 놈이었다. 차라리 소리내어 울면 울었지, 저런 식으로 처량하게 울먹이는 모습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케디악은 그러고 있었다.

"…괜찮냐?"

케디악은 눈동자만 굴려 로직을 올려다보았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말하고자 했으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자신이 없었다. 대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로직은 눈을 깜박였다. 혼란스러웠다. 케디악은 뭐라도 설명을 해 주고 싶었지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레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더니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냥 복도를 걷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케디악을 따라서. 선배의 반 발짝 뒤에서, 빠른 걸음에 맞추려 노력하면서, 그냥 복도를….

복도를 걸어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었더라.

질문을 던지는 순간 턱, 숨이 다시 막혀왔다. 케디악은 목을 감싼 손에 바싹 힘을 주었다. 죽는다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죽긴 싫은데.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지고, 건조한 목구멍에 스치는 공기가 따가웠다. 본능적으로 기침이 나왔다.

콜록대는 소리에 로직은 케디악을 보았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손이 목을 감싸쥐었다. 손등에는 핏줄이, 손가락에는 마디가 도드라졌다. 동시에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로직은 후배를 향해 몇 발짝 떼었다.

"진짜 괜찮…."

말하다 말고 로직은 미간을 찡그렸다.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해 하얀 손가락은 이제 희다 못해 창백하다. 그 손틈 사이로 붉은 것이 언뜻 비쳤다.

"그건 뭐냐?"

"…에?"

호흡곤란은 갑작스레 시작된 만큼 갑작스레 사라졌다. 긴장이 풀리자 자연스레 다리에도 힘이 빠졌다. 케디악은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후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기도를 타고 폐로 넘어가는 산소가 서늘했다. 로직은 후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축해 일으키려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케디악의 힘이 빠진 손이 가슴께로 살짝 흘러내리면서, 목의 붉은 자국이 조금 더 드러났다.

"왜 그러세요…?"

"목에서 손 치워 봐. 너 그거 뭐냐고."

케디악은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흐릿한 전등 아래 상처가 비로소 온전히 드러났다.

로직은 마른세수를 했다. 땀이 배어난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 자국을 알았다. 언젠가 패닉 상태에 빠진 직원을 깨우려, 제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목을 조른 적이 있었다. 녀석이 좀 멀쩡해졌을 즈음 피부에 생겼던 모양을 기억했다. 지금 케디악의 목에 새겨진 그것과 똑같이, 손가락 모양으로 남은 흉터.

로직 자신의 손자국이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케디악은 겁에 질려 우물우물 물었다. 선배의 저런 모습은 난생처음이었다. 눈에 차오른 눈물이 고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케디악은 흘긋 눈동자만 올려 로직의 눈치를 보았다. 로직은 반대로 말없이 케디악을 내려다보았다. 질문에 대답해 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그도 두려웠다. 케디악의 턱에 맺힌 눈물방울이 흔들거리다 톡, 떨어져 옷깃을 적셨다. 

새카맣고 작은 동공 두 쌍이 침묵하는 허공에서 얽혔다.

거기서 두 사람은 하나의 지옥을 보았다.

.

.

.

죽은 다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종교를 믿는지와는 별개로, 언젠가 죽음을 경험할 생명체로서 한 번쯤 고민해 볼 만한 질문이다.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하는가?

로직은 천국보다는 지옥 쪽에 관심이 있었다. 듣자하니 가면 좋고 못 가면 마는 장소인 천국에 비해, 지옥은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될 곳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가지 못해도 상관없지만 지옥만은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확실히 존재한다고는 딱히 믿지 않았지만, 만약을 대비하고자 여러 종교의 서적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 

하하…. 로직은 실소를 흘렸다. 그런 제 옛모습이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보니 전부 헛된 노력이었다.

지옥을 찾으러 굳이 사후세계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는데.

"선배님…. 죄송합니다. 부탁이에요."

사람이 죽기 직전엔 삶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던가.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로직은 저도 이제 죽는 건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케디악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시체 더미를 비집고 숨은 피투성이의 모습이, 당장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명이 있었던 몸뚱아리들은 아직 식지 않아 뜨거웠다. 그 틈에 바싹 붙어 앉아 케디악이 속삭였다. 맞닿는 어깨가 축축했다. 로직은 슬쩍 몸을 움츠렸다.

"선배님…. 제발 저를 죽여 주세요."

듣기 싫다. 그보다 더 끔찍한 말을 로직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흐느끼는 눈을 가리고, 움직이는 입을 틀어막아 저 소리를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해서,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그런 심정을 꿈에도 모르는 케디악이 거듭 간청했다.

 

"부탁이에요. 저는… 인간에게 죽고 싶습니다."

케디악이 내뱉는 말의 마디마디가, 음절 하나하나가 날선 칼이 되어 로직에게 날아와 박혔다. 로직은 차라리 귀를 막고 혀를 깨물어서라도 죽고 싶었다. 저는 그 말을 들어야 할 입장이 아니다. 아무리 비극에 경중은 없다지만, 굳이 따지자면 해야 하는 쪽일 것이다. 

재앙 앞에서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 퀸. 퀸이다. 정확하게는 괴상하게 변이한 여자다. 종소리가 회사를 뒤덮는 순간, 퀸의 등에서는 날개가 돋아나고 얼굴에는 새 부리 가면이 씌워졌다. 동시에 피부는 하얗게 세었으며 관절은 갑옷처럼 붉게 도드라졌다. 로직은 꿈을 꾸고 있나 싶어 눈을 비비고 팔뚝을 꼬집었다. 퀸이 거대하고 붉은 낫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하마터면 묵사발이 될 뻔한 순간까지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퀸은 누구인가. 로직의 가장 오래된 친구다. 입사 동기 중 유일하게 그녀만 아직까지 남았다. 로직은 퀸과 입사도, 부서 이동도 함께했다. 퀸은 로직이 가장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자, 그가 유일하게 소중하게 여긴 동료였다. 

그녀의 무차별적인 공격에서 최대한 많은 직원을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그 와중에 부딪히고 베이고 얻어맞으면서 로직은 처절하게 실감했다. 퀸이라는 여자는 이제 이 세상에 없구나. 몸의 상처는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내 곁엔 나 혼자만 남았구나.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데, 그래서 더 이상 아무런 불행도 겪고 싶지 않은데. 로직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후배의 얼굴을 보았다. 그에게는 아직 한 가지 해야 할 비극이 더 있었다.

총은 잃어버렸어요. 케디악이 말했다. 로직은 손을 뻗었다. 에고 기프트는 구석에 처박혀 있게 두었다. 비극의 원천에서 추출한 무기로 감히 사람을 찌르고 싶지 않았다. 맨손에 피부의 감촉이 닿았다. 식어가는 피로 뒤덮여 끈적거리면서도, 저는 아직 살아 있다는 듯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로직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케디악은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누운 직원을 타고 앉아, 로직은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케디악이 꿈틀거렸다. 깨지고 상한 손톱이 살해자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제가 원했으면서도 죽음에 저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명체의 본능이다. 컥컥대는 소리와 함께 목의 근육이 움찔거렸다. 그래, 너는 살아 있구나. 로직은 케디악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마주 올려다보는 눈에 고통의 눈물이 고였다. 로직은 제 얼굴도 똑같이 일그러졌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아 있고 싶구나.

목이 졸려 죽은 사람의 주 사인(死因)은 호흡의 차단이 아니라 뇌로 가는 혈류의 차단이다. 뇌 조직은 산소 공급이 10초 이상 끊기면 즉시 괴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죽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매우 고통스러우리라는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게, 액살(縊殺)당하는 사람은 10여 초 안에 의식을 잃는다. 

따라서 움직임은 금세 멈췄다. 로직은 한참을 더 체중을 실어 내리누르다 손을 떼었다. 손등에는 손톱 자국이 깊게 남았다. 약간씩 피도 배어나오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통증은 없었다. 그저 꿈을 꾸는 것처럼 둔탁하게 느껴질 뿐이다. 로직은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케디악도 아프진 않았을 것이다.

후배의 얼굴은, 입가에 흘러내린 타액과 피로 지저분해져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확실히 편해 보였다. 로직은 손을 뻗어 케디악의 눈을 감겨 주었다. 이렇게 놓고 보니 꼭 잠든 것처럼, 정말 말도 안 되게 평화롭다. 죽음은 모두 이런 것일까. 더 이상 아프지 않고, 그저 잠잠하게…. 살리지 못한 여러 얼굴이 케디악의 것에 대입되었다 떨어졌다. 머리카락을 늘 신경써서 관리하던 롤리. 긍정적이고 말이 많던 친. 어제 입사한 메리, 지나.

퀸.

로직은 다행히도 난리통에 잃어버리지 않은 제 총을 꺼냈다.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이곳은 지옥이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너희를 결코 죽게 두지 않으마.

.

.

.

로직은 눈을 떴다.

지옥에 돌아왔다.

그것도 멀쩡히 살아서.

머릿속을 메운 생각은 한 가지였다. 도망가고 싶다. 로직은 케디악을 바라보았다. 후베의 눈동자 역시, 같은 생각으로 빽빽히 채워졌다. 여길 벗어나야 한다. 케디악은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차마 닦아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버려 두었다.

함께 있는 상대가 격앙되면 반대로 자신은 차분해지는 법이다. 케디악이 격해지는 만큼 로직은 안정을 되찾아 갔다. 케디악이 스펀지처럼 감정을 흡수해 간 빈자리에 로직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퀸.

퀸은 어디 있지?

"너, 다시 죽고 싶지는 않지?"

공포와 흥분으로 달달 떨면서 케디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체중을 실어 저를 넘어뜨릴 때 등에 부딪히던 바닥의 냉기가, 억센 손아귀에 목이 졸리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곳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옥이었고, 케디악은 그 비극으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케디악이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로직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과거 - 어쩌면 미래? 둘 중 무엇이 맞는지 그는 잘 몰랐다 - 가 두려운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로직이 말했다.

"다시 해 보자."

퀸을 찾아야 한다.

"어차피 여기서 멀쩡한 퇴사 같은 건 못 해."

.

.

.

기시감(旣視感).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상황을 이미 경험한 것처럼 친숙하게 느끼는 일. 인간에게 어떤 순간을 두 번 사는 일은 있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그저 현재를 회피하려는 마음이 빚은 나약함의 증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날,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찬란하고도 비극적인 절망의 흔적을 앞에 두고 서서. 로직은 마침내 두 가지 신념을 새로이 정립한다.

먼저는 기시감은 되돌아간 시간이 남긴 증거라는 것이요,

둘째는 그 거대한 절망 앞에서 하나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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