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변하지 않는 우주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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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전체 공개 | 3000(+500자) | 1차 헤테로 페어

(C)떨리고설레다 2022



무슨 과목이었더라, 응, 통합사회였다. 이번 수행 평가는 2인 1조로 조를 짜서 진행할 거라고, 분명 선생님이 그랬었다. 제출은 다음주 마지막 수업 시간까지, 발표는 그 시간부터 추첨을 통해 순서대로.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누가 손을 들고 질문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럼 조는 어떻게 짜나요?"

윤서령은 시큰둥하게 앉아 있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수행평가를 조별로 한다면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조?"

선생님이 어깨를 으쓱했다.

"랜덤으로 돌릴 거야."

아아, 혹은 우우우. 아이들이 야유했지만 선생님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서령도 따라서 안도했다. 자칫 하고 싶은 사람끼리 하라고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서령이 가장 싫어하는 선생님이 그런 부류였다. 모든 아이들의 인간관계가 원활할 거라고 생각하고 (혹은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않은 아이들 외에는 관심이 없어서) 모든 것을 학생들에게 맡기는 작자들. 서령은 사회 선생님을 나름 좋아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번 일로 정이 떨어지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존심을 버리고서라도 안 친한 여자애들 무리에 억지로 끼는 편이 나을 뻔했다. 컴퓨터 뽑기 프로그램이 결과를 뱉어냈을 때, 모니터 제 이름 옆에 뜬 세 글자 때문에 서령은 거의 기절하고 싶어졌다.

역시 우리 학교, 오지 말았어야 했어.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길 때마다 서령은 늘 그런 후회를 했다. 고등학교 원서를 제출할 시기에, 두 학교 사이에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한 일을 두고 하는 생각이었다. 역시 그 때, 1지망을 바꾸지 말 걸 그랬어. 서령은 한숨을 쉬었다. 대각선 앞쪽하고도 한 칸 더 앞에 까만 뒤통수 하나가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서령이 앉은 자리에서 조금만 몸을 틀어도 시야 한가운데 들어오는 위치였다. 화면을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안타깝게도 바뀌는 건 없었으므로. 서령은 허탈해진 채 벌어진 필통 사이로 반쯤 튀어나온 주황색 당근 핀을, 박민재의 미세하지만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분필로 딱딱 칠판을 쳤다.

"자는 애 깨워라."

뒷자리 여자애가 등을 두드려 박민재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무심코 들어올린 시선 끝에 텔레비전 화면이 잡혔다. 나열된 이름 사이에서 습관적으로 제 것을 찾았는데, 그 옆에 웬걸, 좋아하는 이름이 있었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뭐지, 무슨 상황이야? 박민재는 눈을 깜박였다.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박민재는 교탁 앞 사회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진짜 마지막이니까 잘 들어."

친절해서 인기가 많은 사회 선생님은 이번에도 기대를 깨지 않았다. 간략하게나마 수행평가 설명이 반복되었다. 박민재는 당연하게도 듣고 싶은 부분만 골라 들었다. 조별 평가. 두 어절짜리 말이 귀에 꽂히자마자 나머지는 자연히 걸러졌다.

조별 평가래. 조원은 두 명이래. 그러면, 그 핑계로, 둘이 있을 시간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박민재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표정을 확인했다. 서령은 예의 그 무관심한 얼굴로 턱을 괴고 창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혼자서만 설레발치는 것 같아 박민재는 조금 무안해졌다.

물론 겉모습만 평온해 보일 뿐 윤서령은 굉장히 불안하고 불편했다.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한 채 달달 떨고 있었지만, 박민재는 거기까지 알 재간이 없었다.

"수행평가 공지는 여기까지. 수업 들어간다."

박민재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두근대는 것을 진정시키고 나니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수행평가 짝, 다른 아는 사람이었으면 그냥 어영부영 넘겼을 텐데 하필 윤서령이었다. 보니까 내신, 도 챙기려는 것 같던데. 평소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임했다가는 피해를 줄 게 뻔했다. 그러면 더 볼 것도 없이 안 좋은 인상으로 남겠지. 그건 조금 과장을 보태서 죽기보다 더 싫었다. 멋있는 남자, 까지는 되지 못해도 형편없는 꼴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장서서 과제를 주도하기엔 박민재는 너무 과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 박민재는 쉬는 시간 종이 칠 때까지 깨어 있었다. 그냥 하자는 대로 얌전히, 시키는 것만 열심히 따라가자. 다짐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았다.

윤서령 또한 수업에 딱히 집중하지는 못했다. 수행평가에 관해 얘기는 해야 할 텐데 과연 박민재가 이쪽으로 올지, 아니면 제가 가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형광펜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내 생각하다가 종이 치기 직전에야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누군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결심이 필요했다.

나무 바닥에 쓸리는 슬리퍼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느껴졌다. 애써 무시하고 서령은 박민재의 책상 앞에 섰다. 박민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령을 올려다보았다.

"있잖아, 수행평가 말인데…."

박민재는 제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말이 제대로 들릴지 의심스러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경청했다. 서령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오늘 학교 끝나고 시간 돼?"

서령은 하기 싫은 일은 빨리 해치워 버리자는 주의였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이 적격이었다. 반면 박민재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민재는 원래 하기 싫은 일을 끝까지 미루는 편이었다. 아니 물론 같이 있는 건 싫지 않지만, 또 수행평가 준비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괴로워지고…. 하여튼 여러 가지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래도 서령이 그러자고 하니 일단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받아낸 서령은 후다닥 자리로 돌아왔다. 남은 쉬는 시간 내내 통합사회 교과서를 펼쳐 둔 채, 수행평가 범위를 확인하고 주제를 선정하고 간단한 개요를 구상하며 보냈다. 점심 시간에는 선생님한테 가서, 선생님이 퇴근하기 전까지라면 교실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아 놓았다. 

…그랬는데.

박민재는 잠만 잤다. 점심 시간부터 7교시가 끝날 때까지 내리, 그러니까 말 그대로 '하루 종일'. 아무리 지켜봐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6교시 중간쯤 서령은 박민재가 혹시 기절한 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하지만 엎드린 등이 여전히 고르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도 사람이 깊이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서령은 처음 알았다.

이대로 그냥 놓고 집에 갈 수도 있었다. 연락을 한 통 하거나 쪽지를 남기면 충분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다음에 시간을 다시 내어야 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런데 나중에도 하기 싫을 게 분명하다면 미리 해치우는 게 나았다.

"저기."

서령은 박민재의 책상을 톡톡 쳤지만, 그래도 미동이 없자 용기 내어 어깨를 흔들었다. 아직은 때 이른 생활복 상의 위로 느껴지는 체온이 따뜻했다.

"일어나."

한편 고개를 든 박민재는 제 눈 앞의 윤서령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합당한 추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서령은 한 번도(다시 만난 이후로, 적어도 박민재가 기억하기로는) 박민재의 이름을 불러 준 적이 없었다. 그것도 성 떼고 이름만으로,

"…민재야."

라고는 절대로.

박민재는 다시 눈을 감으려다가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건 꿈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꿈이니까 조금의 욕심 정도는 부려 봐도 되지 않나? 대신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앞자리에 앉은 서령의 얼굴은 당황으로 빨개져 있었다. 난 꿈도 정말 사실적으로 꾸네, 본인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 박민재는 서령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물론 이것은 분명한 현실이었으므로, 뜨거운 시선을 받아내는 건 오로지 윤서령의 몫이었다. 서령은 어디 도망쳐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말라 비틀어질 듯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분명 쪼그라들 거야. 그러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수 있을지 몰라. 우스갯소리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애써 담담히 책을 펼쳤다.

"여기 봐."

교과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차근차근 계획을 설명했지만, 박민재의 귀에는 당연히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서령도 그 점을 눈치채고는 한숨을 쉬었다.

"…듣고 있어?"

"으응?"

"이렇게… 하는 게 어떻냐고."

"너무 좋아."

대답이 지나치게 빨리 돌아왔기 때문에, 순간 제 질문 말고 다른 것에 대한 답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서령의 직감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박민재는 교과서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이미 그곳에 있던 서령의 손끝과 손끝이 닿았다.

"그거 알아?"

박민재가 배시시 웃었다.

"내가 너 정말 좋아하는데."

서령의 뇌가 방금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진짠데, 하고 그동안 박민재가 덧붙였다. 어차피 진짜 너는 못 들을 테니까 상관 없어, 꿈이니까…. 

서령은 한 박자 늦게 놀랐다. 만화였다면 귀에서 펑, 하고 연기가 나왔을 정도로 화들짝. 서령은 교과서 위에 올렸던 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나이 열일곱 먹고, 스물일곱이나 되어도 들어 볼 일 없을 줄만 알았던 남자애 잠투정을…. 제 얼굴이 정신없이 빨개져 있으리라는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뭐야. 부끄럽고 민망하고 혼란스러웠다. 다른 잡념은, 심지어 수행평가에 관한 생각마저도 싸그리 사라지고 도망쳐야겠다는 강한 의지만 남았다. 역시 1지망을 바꿨어야 했어-. 다시금 후회하며 서령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미안. 급한… 일이 생각나서."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내일, 내일 다시 얘기하자."

"응."

박민재는 못내 아쉬운 얼굴로 서령을 쳐다보았지만 붙잡지는 않았다. 서령은 후다닥 가방을 둘러메고 교실 문을 쾅 닫았다. 창문으로 흘긋 넘겨다본 박민재는 다시 책상에 머리를 붙이고 졸고 있었다. 정말 깨우고 가지 않아도 되나, 여린 죄책감이 고개를 처들었지만 서령에게는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선생님 퇴근하실 때 깨워 주시겠지. 합리화하며 서령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잡생각이 바람에 떨어져 나가도록, 버스 정류장까지 정신없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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