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이우는 밤 by 떨레
10
0
0

커미션 | 전체 공개 | 3000(+400)자 | 1차 헤테로 페어

(C)떨리고설레다 2022



쓸데없이 날씨가 맑았다.

이른 봄의 몽글몽글한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그대로 비쳐들어왔다. 하늘에는 떠가는 구름 한 점, 하다못해 그 흔한 미세먼지 한 톨 없었다. 운동을 하거나 어디 놀러가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꽉 막힌 실내에 틀어박혀 글자나 읽기에는 최악이라는 뜻이었다. 

밖에 뛰쳐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박민재는 꾹 참았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은 책을 세워 가렸다. 윤서령이 주말마다 가는 곳을 알게 된 이후로 박민재는 아침 늦잠을 거르고 도서관엘 왔다. 윤서령 앞에서는 책을 좋아하는 척, 원래 도서관을 자주 가는 척 내숭을 떨었지만 솔직히 제법 피곤했다.

서령의 손은 샤프를 들었다, 지우개를 집었다, 필통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냈다 하며 분주했다. 박민재는 책 위로 눈만 빼꼼 내민 채 서령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덕분에 윤서령이 수학 문제집에 집중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서령은 그렇게 따가운 시선에 면역이 없었다. 예전에는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박민재는 앞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지는 책을 다시 직각으로 세웠다. 표지가 얼굴을 전부 가리도록 활짝 펼친 것은 제 딴에는 윤서령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그것이 <어린 왕자>, 한때 서령이 가장 좋아했던 책임을 혹시 알아봐 주지 않을까 해서. 

사실 서고에서 책을 골라올 때까지만 해도 박민재는 퍽 자신이 있었다. <어린 왕자>는 초등학생 윤서령이 마찬가지로 초등학생인 박민재에게 처음 말을 걸게 한 계기였다. 그때는 친구가 없어서,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앉아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넘기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느 때처럼 재미도 없는 책을 북카트에 올려놓고 다음 목표를 찾아 느릿느릿 책장으로 걸어가는데, 불쑥,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그게 윤서령이었다.

"안녕? 혹시 이거 안 읽어 볼래?"

"…?"

"미안, 너 책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 이거 정말 좋아하는데, 안 읽었으면 한번 봐봐, 재밌어!"

맥락 없는 제안이었지만 이상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디가 어떻게 좋았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설명하는 눈빛이 어린아이의 것치고는 드물게 확고해서. 박민재는 <어린 왕자>를 읽으면 윤서령이 무슨 반응이라도 보이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강한 선호는 시간이 흘러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박민재에 대한 윤서령의 인상은 고등학생이 잘 읽지 않는 책을 보는 특이한 애, 정도에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박민재는 속상해졌다.

"있잖아."

박민재는 서령의 문제집 위쪽을 톡톡 건드렸다.

"여기에만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아깝지 않아?"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

제발 가, 서령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부탁인데 그냥 나한테 신경 좀 꺼 주면 안 돼? 서령은 무릎이라도 꿇을 자신이 있었다. 여기는 사람이 조금 많으니까 저기 구석진 곳에서, 그렇게 하면 무조건 들어 준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그리고 인간이기에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박민재 또한 서령의 심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윤서령이 저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쯤은 이미 진작에 알았으니까. 하지만 윤서령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박민재는 그녀의 뜻대로 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박민재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됐어, 그럼."

그러고는 웃었다. 실은 그렇게 진심이 담긴 미소는 아니었다. 유쾌할 리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이, 심지어 그 '누군가'가 하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모르는 척 다시 다가가야 한다는 점이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 만일 있다면 그는 미친놈임이 분명했다.

"뭐 마시고 싶은 건 없어? 나가기 싫으면 사다 줄까?"

"괜찮아."

"그럼 이따가."

"그러든지…."

멘트를 바꾸어 다시 한 도전은 이번에도 대차게 까였다. 어떻게든 여지를 받아내려고 물고 늘어지면서 박민재는 제가 구질구질해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사랑은…. 박민재는 최근 읽은 책의 대사를 기억해 냈다. 윤서령이 보고 있길래, 그걸 핑계로 한 번이라도 더 말을 걸어 보려고 산 소설이었다. 보통의 대한민국 남고생의 감성에는 여러모로 맞지 않았지만, 건질 부분이 이렇게 하나쯤은 있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기꺼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감내하는 것이다.

턱없이 짧아 대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말 주고받기가 끝나자, 서령은 다시 방정식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반대로 박민재는 책을 덮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얹은 채 턱을 괴고, 지금까지는 흘끔흘끔 곁눈질했던 서령을 아예 대놓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시선을 견디지 못한 서령이 고개를 들라치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재빨리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행동이 스스로도 우스워 박민재는 웃음 섞인 한숨을 흘렸다.

서령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얼마만큼이냐면, 내색하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야 할 정도였다. 박민재, 그냥 '인싸'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사람이다. 같은 학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발이 넓다. 당연히 친구도 많다. 박민재는 남자애들뿐 아니라 여자애들도 섞인 커다란 무리에 속했다. 언젠가 서령이 살았던 삶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고등학생 윤서령은? 조용하고, 남들 앞에 나서지 않고, 극소수의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노는, 반에 한두 명쯤 늘 있는 그냥저냥 평범한(여기서 서령은 어떤 단어-쌍지읒으로 시작하는-를 떠올렸지만, 스스로 상처받고 그만두었다) 학생이다. 지금은 그저 눈에 띄지 않게 학교생활을 끝내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박민재가 계속 그걸 방해했다. 서령은 소리치고 싶었다. 너 친구 많잖아. 그러니까 가서 네 친구들이랑 놀란 말이야. 괜히 나한테 시선 쏠리게 하지 말고!

물론 인기 많은 아이랑 친해지는 꿈을 아예 꾸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서령은 철없던 자신을 지독히도 원망했다. 꼭 잠깐이나마 바랐기 때문에 이뤄진 것만 같았다. 그냥 살갑고, 친화력 좋고, 제법 귀여운, 그리고 반 대항 축구 경기에서 눈에 좀 띄는, 그냥 그 정도의 적당히 모르는 사이 정도면 족했는데.

앞머리가 흘러내려 눈을 찔렀고, 서령은 더는 불편하지 않도록(사실 박민재를 시야에서 치우려는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은 채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박민재는 앞머리에 반쯤 덮인 하얀 손을, 정확하게는 가늘고 선이 고운 손가락과 가지런히 정리된 손톱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기분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모두에게 완벽히 이해시킬 수 있을까.

행복하면서도 슬펐다. 우울하면서도 기분 좋았다. 둘 중 어느 쪽이 우세한지 박민재는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서령과 같이 있는 시간이 좋았지만, 서령에게서 불편한 기색을 감지하면 곧장 비참해졌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감정 기복이 심한 건 사춘기의 특징이라는데. 박민재는 제 사춘기가 진작에 지나간 줄 알았는데, 글쎄, 요즘에는 그마저도 헷갈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박민재는 문득 제가 아직도 창밖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려 확인한 윤서령은 어느새 책상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문제집 위로 겹쳐 쌓은 팔은 꼭 높은 성벽 같았다. 외부인의 접근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펼쳐져 박민재의 자리까지 넘어왔다. 박민재는 상해서 갈라진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아 들었다. 여전히 좁혀질 줄 모르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박민재는 앞머리를 고정해 둔 앙증맞은 당근 핀을 빼내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내일모레면 스물이 되는 새끼가 그딴 걸 쓰냐는, 친구들의 (비웃음 섞인) 경악을 견뎌내면서 꿋꿋이 하고 다녔던 것이다. 서령은 여전히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그러리라고 박민재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박민재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잠든 윤서령의 의자 옆에 섰다. 허리를 숙이자 고른 숨소리가 들릴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리고 한참 전부터 귓가에 맴돌던 둥둥 울리는 소리도 따라서 커졌다. 정말 아까부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하는 거야, 박민재는 홱 고개를 들었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윤서령이 기억하지 못한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설레는데!

방금 떠올린 생각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귀가 뜨거워졌다. 부끄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함만이 남았다. 박민재는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도서관을 재빨리 벗어나 카페로 향했다. 마치 원래 목적지가 거기였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만 있다가, 그래 머리 좀 식히고, 마실 걸 사서 얼른 들어가야겠다. 

그래서 윤서령이 짧은 선잠에서 눈을 떴을 때쯤엔, 눈 앞에 딸기 쉐이크가 가득 담긴 테이크아웃 컵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박민재가, 머리에는 예의 그 당근 머리핀을 꽂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빙긋이 웃었다.

"바람도 쐴 겸, 가서 사 왔어. 졸리지 말라고."

"…고마워."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어, 여린 나뭇가지가 후두둑후두둑 유리를 때렸다.

순간 세상이 조용해졌고, 둥둥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에 머물다 사라진 것도 같았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