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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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iality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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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일부 공개 | 5000(+900)자 | 《 살육의 천사 》 아이작 포스터 드림

(C)떨리고설레다 2020



레이첼 가드너가 돌아왔다.

 창 너머 떠오르던 달이 유난히도 크게 보이던 밤이었다. 잭에게 안겨 내려오던 여자애는 작았다. 그녀 자신이 정말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탁 치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은 모습에 V는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첼의 잿빛 금발과 탁한 벽안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많이 달랐다.

날카롭게 선명한 윤곽을 지닌, 어리지만 강인한 소녀를 상상했다. 이야기 속의 레이 가드너는 영리하고, 또 나름대로 용감한. 아무것도 아닌 제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위에 군림하는 천사였던, 그런 사람으로 들렸기에. 그에 비해 지금 눈 앞의 소녀는 마치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될 작고 여린 아기새 같은걸.

하지만 잭의 표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는지, 레이첼은 발을 땅에 대자마자 다시 그에게 매달렸다. 평범한 여자아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V가 완성해 놓은 희대의 역작, 주변의 멋진 난장판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상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습에 안도하는 게 맞을 텐데. 잭의 목에 감긴 가늘고 하얀 팔에 시선이 닿자 왠지 기분이 나빠져, V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Veniality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V가 아이작 포스터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언젠지조차 기억할 수 없는 비 오던 날이었다. 분명 아무도 없는 것 같았던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발에 채이는 말캉함에, 괜히 깜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던 기억이 난다. 분명 사람의 감촉이었다.

 기대어 앉은 이는 남자였다. 얼굴부터 드러난 손끝까지를 칭칭 감고 있는 붕대가 인상적이었다. 죽었나? V는 몸을 숙여 확인하려다가 멈췄다. 배에 난 구멍은 생각보다 컸다.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벽 그림자에 반쯤 덮여 뉘어진 사람. 죽었든, 살았든 늘상 있어 온 일이었고 이번의 최초 발견자일 V라는 여자는 경찰에 신고할 만큼 정직하지 못했다. 양심도, 삶도. 

 그냥 그러려니, 지나치려는 그녀를 붙잡은 건 시체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손가락이었다. 붕대를 칭칭 감은 손가락이 상처 위를 꽉 덮고서, 한 방울이라도 덜 잃으려 꿈틀대고 있었다. 순간 V는 마음을 바꿨다. 다시 생각해 보니 돈만 충분하면 살릴 수 있겠는걸? 단순한 변덕이었다.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마음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재미있었으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왔다갔다하는 것 같긴 한데, 어쩌면 가볍게 걸치고 온 보드카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고 V는 생각했다.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는 걸 하나 꼽으라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돈이라고 대답할 테니까.

"안녕."

 조용히 있어도 될 것을 굳이 입을 연 까닭 또한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날따라 기분이 더럽게 나빠서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마 모퉁이에 그가 없었더라면 쓰레기통을 뒤지던 시궁쥐에게라도 말을 걸었을 터였다. 적어도 V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비록 그 쥐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도망갔지만.

"너, 혹시."

 그런데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다.  V는 허리를 숙여 제 우산을 그의 머리 위로 내밀었다. 축축하게 등을 적시는 빗방울이 불쾌했지만 그보다는 호기심이 조금 더 강했다.

"유명한 사람이야?"

 홀딱 젖은 주제에 꼴에 고양이라고. 그는 눈을 힘겹게 밀어뜨고는 톡 쏘아붙였다.

"꺼져."

 당장이라도 너를 찢어 버리겠다고 말하는 듯한 맹수 같은 눈빛으로, 어디서 봤는지 V는 드디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아, 아니면 혹시. V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분명 오래 전 조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사진과 똑같이 생겼다. 열악한 시설에서 살다가 원장 부부를 죽이고 사라진 어린 살인마. 하도 자극적인 내용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이름이 아마도 아이작 포스터랬나. 그때의 사진은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말랐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V가 말했다.

"너, 포스터지."

"뭐?"

 몸을 숙이고 있으려니 허리가 아파서 이제는 아예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신문에서 봤어. 예전에."

 남에게 말을 거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말하는 법을 까먹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필요도 없었다. V는 시선에 조금 더 관심을 실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구한 사람이 살인마라니. 남을 수없이 죽인 주제에 저는 살고 싶어 한다니. 욕심이 많네. 재미있었다. 

"너."

 훨씬 쉬워지겠는걸.

"살고 싶지 않아?"

 V는 재촉하듯 말을 걸었다. 살고 싶지. 이 미친 여자가, 뭐라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 짓는 표정에 담긴 욕은 가볍게 무시하며 몸을 조금 더 앞으로 기울였다. 살고 싶잖아. 살려 줄까? 안달난 물음에 그는 고개를 희미하게 저었다.

"딱히."

 거짓말. 그녀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는 아이작의 팔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얼굴에 다 써 있는걸? 그의 손가락은 아직도 상처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하아, 아이작은 길게 숨을 한 번 뱉어냈다. 그래, 젠장. 쉴 대로 쉰 목소리였다.

"살고 싶다. 뒤지게 살고 싶어."

 마침내 기다렸던 대답이 나오자 V는 픽 미소지었다.

"됐냐?"

"좋아."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주소록에 저장된 단 하나의 번호를 눌렀다.

"살려 줄게."

.

.

.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없다고 들었어."

 아이작 포스터가 깨어날 때까지 줄곧 옆을 지키다가, V가 처음 내뱉은 질문이었다. 여전히 쉬어 있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아진 목소리로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살려 준 건 고마운데, 뭔 헛소리야?"

V가 다시 물었다.

"왜 나는 죽이지 않아?"

"뭐?"

 아이작은 손님방의 화려한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다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렸다. V는 재빨리 소파에서 쿠션을 가져왔다.

"미친 거냐, 아님 멍청한 거냐."

 그녀가 대 준 쿠션에 등을 푹 기대며, 그는 턱짓으로 제 상처를 가리켰다.

"아, 나는 또. 붕대 때문에 까먹었잖아."

 제 자리에 도로 주저앉으며 V가 중얼거렸다.

"다 나으면, 나를 죽일 거야?"

 그 물음에 아이작은 썩었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진짜 요즘엔 만나는 사람마다 다 왜 이러냐?"

 어깻죽지를 꾹 미는 손가락에는 체중이 실려 있었지만, 확실히 환자라 그런지 오랜 기간 단련해 온 V가 밀려날 정도는 아니었다. 살짝 당황했는지 그는 금세 손을 내렸다.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면 정말 죽이고 싶지 않아진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생각할 틈도 없이 내뱉은 질문에 그는 곤란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일단 그 눈부터 어떻게 좀 해."

"그렇게 하면, 네가 날 죽이고 싶어져?"

 아니, 천천히 돌아온 대답에 이번에는 V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왜?"

"먼저 죽여 주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그녀의 표정이 굳는 걸 눈치챘는지 아이작은 황급히 방금 뱉은 말을 수습했다.

"대신 다음에는 널 죽여 줄게."

 원하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V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여기부터 유료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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