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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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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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 일부 공개 | 18000자 | 《 하이큐 》 아카아시 케이지 드림

(C)떨리고설레다 2018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커다란 흉터가 될 상처를 남기고 지나가지만, 아무도 시간을 되돌려 그 상처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오로지 앞으로 올 시간이 그 흉터마저 가져가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비가 내렸다. 그 주 들어 벌써 세 번째 비 오는 날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누님, 정말 안 가실 겁니까? 딱 누님 취향인 애들을 잔뜩 데려왔다고 합니다."

손을 비비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는 남자를 새침하게 한 번 흘겨보며,

"말했잖아, 난 안 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남자가 애처로운 눈길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모치즈키 누님,"

불린 이름이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마시던 와인 잔을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쨍그랑. 화려하게 세공된 유리잔은 아름다운 얼룩을 남기며 날아가 남자의 바로 앞 바닥에서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내 말 벌써 잊었어?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속에 담긴 살기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잔잔했다. 보스의 습관 하나, 언성을 높히지 않을 때가 가장 화난 때다.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며 남자는 몸을 살짝 떨었다.

"아무리 그러셔도 모치즈키가 아카아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녀가 침묵한 건 순전히 그 말에서 대답할 가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긍정으로 이해한 남자는 말을 멈출 줄 몰랐다.

"누님,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분은 이미…."

"닥쳐."

눈치 없는 부하가 슬슬 그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나도 알아. 안다고. 이제 제발 그만 이야기하자.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습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부서진 와인잔이 남긴 흔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피가 흩뿌려진 것 같은 그 모습은 그날의 모습과 비슷했다. 정말 비슷했다.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져 와, 그녀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지,"


 창 밖은 여전히 비가 온다.

"어디 있어?"

아, 결말이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그때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이런 식으로 숨통을 조여올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려고 발버둥 쳐 볼 것을. 

항상 후회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보고 싶다."

애초에 시작이 없었더라면, 끝 또한 없었을 테고 이런 결말 역시도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그녀의 길을, 그는 그의 길을 가서 각자의 인생을 살았을 텐데.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바꾸기를 간절히 바라도 아무도 바꿀 수 없었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니까.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

모치즈키 림이라는 여자와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남자


다리를 꼬고 의자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모치즈키 림의 입에서는, 조그만 체구와 귀여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튀어나왔다.

"그 올빼미 새끼들이 또 우리 구역을 점령했다고?"

의자 옆의 테이블에는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와인과 화려한 잔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잔에 와인을 따라 한 모금 들이켰다. 보스의 습관 둘, 화가 나거나 기분이 언짢으면 와인을 마신다. 처음 그녀의 아래로 들어오길 자청했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라, 그 앞에 꿇어앉아 있던 남자는 땀을 삐질 흘렸다.

"내가 너한테 맡겼잖아. 믿음을 이렇게 져 버리면 어떡하니?"

"…정말 죄송합니다, 누님. 한번만 더 믿고 맏겨 주십쇼."

"널 어떻게 믿고? 넌 한번 실패했잖니?"

림은 와인을 한 모금 더 홀짝이고는 부하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훑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부하는 재빨리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좋아, 그러자. 대신 이번에도 실패하면…"

모치즈키 림은 입에 머금은 와인을 음미하며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목숨을 내게 줘. 좋은 거래지?"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그녀는 한없이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흐뭇하게 부하를 내려다보았다.

"그 망할 올빼미 새끼들의 날개를 꺾어버려."

.

.

.

"아, 고마워요."

'올빼미 새끼' 아카아시 케이지는 부하가 건네는 서류를 기꺼이 받아들었다. 여자의 휘갈긴 글씨체로 '만월파' 라고 쓰여 있는 파일 정가운데에는 화려한 도장 하나가 찍혀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이제 곧 그들이 찾아오겠군요. 가서 철저히 대비하세요."

서류를 뒤적이며 차분히 명령하자, 부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기밀 서류가 있을 줄은 전혀 예상 못했네. 운이 좋았어. 그는 오랜만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죠. 이제 정점에서 내려올 시간입니다."

.

.

.

쨍그랑. 와인잔과 병들이 날아다니며 방 안에 핏빛 와인을 뿌렸다. 날아온 잔은 아슬아슬하게 부하의 발 앞에 떨어졌다.

"다시 말해 봐."

그 쳐 죽일 것들이 뭘 했다고? 모치즈키 림의 차가운 명령에 부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올빼미… 파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또."

"…세 명이 죽었습니다.

"또."

또 보고할 게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잊어버린 거야? 그러면 안 되지. 림은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내가 너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정말 잊어버렸니? 그러나 아까 날아간 와인병은 거기 없었다.

쯧, 림이 혀를 찼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의자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먼저! 먼저 제가 복수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다음에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음. 그녀는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으면서 생긋 웃었다.

"좋아, 그렇게 해."

이래야 내 새끼답지.

 "복수는 확실하게 하렴."


.

.

.

"보스, 만월파에서 기습을…." 

아카아시 케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게 미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침묵에 짓눌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보고해 보세요."

"다섯 명이… 죽었고, 기밀문서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후. 아카아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내 고개를 든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갑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자신의 신조를 다시금 되새기며 올빼미파의 보스 아카아시 케이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리고 두 시간 후, 두 파의 경계 구역을 순찰하고 있던 모치즈키 림은 한 남자를 발견했다.

"어머."

눈치빠른 운전사가 차를 멈추자, 그녀는 생긋 웃으며 얼른 차에서 내렸다. 검은 머리에 검은 양복, 온통 검은색을 두르고 있는 남자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림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너 재미있는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그녀는 깔깔 웃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아, 이 새끼, 만만찮은 놈이다. 남자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림은 생각했다. 남자는 그녀의 독기어린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서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둑놈 대장부엉이 아냐."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남자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나서 반가워,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녀석아. 모치즈키 림이 미소짓자, 아카아시 케이지가 여전히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올빼미입니다."

"같은 새인데 뭐 어때."

아카아시 케이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껏 생각하시길. 설령 대장부엉이라도 그믐달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요."

그믐달? 불쾌해진 모치즈키 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보름달이거든? 조류라 그런지 지능도 딸리나 봐."

아카아시 케이지가 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내뱉었다.

"글쎄, 같은 달인데 뭐 어때요. 요즘 세력도 많이 약해지신 것 같던데."

이런 빌어먹을.

.

.

.

"내가 언젠가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말 테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채로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모치즈키 림이 말했다. 올빼미파의 보스와 만난 건 벌써 일주일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인데도 아직 생각만 하면 화가 났다. 심장에 칼을 박아줄까, 벽에 세워놓고 과녁으로 쓸까. 아니, 그 전에 조직을 산산히 부숴버리자.

대장 부엉이를 엿먹일 갖가지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부엉이가 아니라 올빼미랬나? 같은 새인데 아무렴 어때.

문 앞에 서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부하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또 무슨 일이래?  그녀는 의자로 돌아와 몸을 깊이 파묻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서 물었다.

"그래, 넌 뭐 때문에 왔어?"

주춤거리던 부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림의 와인잔은 다시 한 번 하늘을 나는 기분을 만끽했다. 쨍그랑. 유리창에 머리를 처박고 앞선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백조파가 저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누님…."

림은 탁자에 놓인 차키를 챙겨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도착한 현장은 참담했다. 한때 살아 있었던 사람들과 수많은 핏방울들이 흩어진 서류들을 덮고 있었다. 림은 단검을 고쳐 쥐며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으나 모두 떠난 듯 조용했다.

"서류 없어진 거 있나 찾아봐."

부하에게 명령을 내린 그녀가 몸을 숙여 흩어진 서류들을 쓸어모았다. 중요한 게 뭐가 있었더라? 다행히도 중요한 것들을 여기에 두었던 기억은 없었다.

"누님, 뺏긴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어, 애들 불러서 여기 치워."

모치즈키 림은 운전사에게 남아서 정리를 도우라고 명령하고선 직접 운전석에 올랐다. 이번주에만 몇 번째 공격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아..."

그녀는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아직 수요일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두 번이나 되는 공격을 받았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와 기분이 언짢았다.

"짜증나. 개새끼들 같으니라고."

그녀의 세계 속에서, 여러 개의 조직들이 번갈아가면서 하는 공격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총공격. 최고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공격 방법이었다. 누군가, 혹은 어느 조직이 정점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고 느껴질 때 쓰이는 것. 언젠가 그녀가 이끄는 만월파 또한 총공격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정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 총공격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이제 날개를 빼앗기고 추락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

"미쳐버리겠네."

울고 싶은 느낌에 림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빨리 총공격이 이뤄질 줄은 그녀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총공격이 이뤄지는 건 만월파를 물려받을 다음 세대 때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단 돌아가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시동을 걸고 엑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주인의 막막함을 알지 못하는 차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죄송합니다, 보스. 중요한 문서가 하나 사라졌습니다. 

같은 시간, 부하의 이야기를 곱씹던 아카아시 케이지는 이를 갈며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놈들. 우리가 좀 커지니까 바로 견제하는 것 좀 봐.

아카아시가 이끄는 올빼미파가 태어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많이 쳐 줘 봤자 2년이나 됐으려나. 아무리 덩치가 커도 결국 올빼미파는 신생 조직에 불과했다. 탄탄하게 기반이 다져진 다른 조직들에 비해 불리할 수 밖에 없는 게 사실.

신생 조직이기에, 치고 올라오는 듯 싶다가도 또 금방 몰락한다. 다른 조직들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올빼미파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냥 누군가가 제 위에 서 있는 게 싫다는, 지독히도 단순하고 유치한 이유 때문에.

"젠장, 엿이나 먹으라지."

아카아시가 내뱉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절대 몰락하지 않으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어뜯고 짓밟고 할퀴어서 살아남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든든한 조력자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월파도 하루가 멀다 하고 공격받고 있대요. 부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재킷을 걸치고 탁자 위에 있던 차 열쇠를 주머니에 챙겼다.

'조류라 그런지 지능도 딸리나 봐?'

빌어먹을 여자. 분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삐빗, 차 열쇠의 버튼을 누르자 주차장 한구석에서 검은색 세단이 응답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입술을 물어뜯으며 거칠게 차를 몰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 줄게요. 자존심 따윈 기꺼이 버리고서라도. 그가 다짐했다.

.

.

.

모치즈키 림이 아카아시 케이지와 다시 만난 건 고양이파의 공격이 휩쓸고 지나간 잔해들 속이었다. 기밀 서류를 하나 더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굉장히 기분이 나빠져 있던 그녀는 적의 보스와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아카아시 케이지가 검은 세단의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의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단검은 아카아시의 목덜미를 스치고 날아가 운전석 시트에 박혔고, 그는 검이 남긴 상처를 황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거 비싼 찬데요." 

그제서야 그녀는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평소처럼 완벽하게 각 잡힌 모습은 아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재킷 밑단에 진 약간의 주름에 림의 찌푸려진 미간도 살짝 풀어졌다. 그녀가 말했다.

"내 알 바 아니고. 왜 왔냐, 부엉이 새끼야."

여긴 우리 구역이거든?  림의 시선이 경고했다. 매번 말하지만 우리는 올빼미인데요…. 정정하려다가 날카롭게 쏘아보는 그녀의 눈길에 아카아시 케이지는 얕게 한숨을 쉬고,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더니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우리 올빼미파의 동맹이 될 생각이 없습니까?"

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상황에서 동맹은 무엇보다 필요했다. 실제로 그녀도 몇몇 조직들에게 동맹 제안을 해 볼까 고민하던 참이었기에, 아카아시 케이지의 제안은 꽤나 달콤했다.

그러나 림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올빼미파가 왜 동맹을 제안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올빼미파는 강했고, 총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테니 굳건할 터였다. 같이 총공격에 참여해서 새로운 정점과 손을 잡으면 되는 위치에 서 있는데 왜 동맹을 제안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모치즈키 림은 올빼미파 또한 공격받고 있다는 걸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설득하려고 애쓰는 듯한 말투로 아카아시 케이지가 말했다. 

"만월파도 총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쪽만의 힘으로 언제까지 총공격을 방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월파 '도'. 이 말은 올빼미파 또한 총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상황 이해를 마친 림은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받아들여야 할 제안이었다. 이제 생각해야 할 문제는 딱 하나 남았다. 

자존심.

'글쎄, 같은 달인데 뭐 어때요. 요즘 세력도 많이 약해지신 것 같던데.'

이 재수없는 새끼랑 내가 왜? 차라리 혼자 죽고 말지.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자 다시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그냥 거절해버릴까, 하던 참에 아카아시 케이지가 덧붙였다.

"나중에 상황이 좋아지면 파기해도 상관없습니다."

림은 죽어가던 부하들의 모습을, 공격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부서진 것들과 한때 살아 있었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괜찮아질 때까지만 동맹 맺자구요. 서로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마침내 모치즈키 림이 대답했다.

"…좋아.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이어 돌아온 말에 그녀는 안고 있던 서류를 몽땅 내던져버렸다.

"결혼입니다."

모치즈키 림, 아마도 가장 어이없을 방법으로 평생 잊지 못할 프러포즈를 받다.

"…뭡니까,"

졸지에 서류 비를 맞게 된 아카아시 케이지는 얼굴을 구겼다. 여자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카아시가 투덜댔다.

"누군 좋아서 이러는 줄 압니까?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데 어떡해요."

그가 서류를 모두 주워 모으는 동안 모치즈키 림은 멍하니 제 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진짜. 지 일인데 좀 도와 주지. 아카아시는 주워 모은 서류를 그녀에게 안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때까지도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

후.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며 세단으로 걸어가 운전석 시트에 박힌 단검을 뽑았다. 그가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차에서 나오는데, 모치즈키 림의 대답 소리가 들렸다.

"…그래, 좋아. 우리 결혼하자."

그러고는 덧붙였다.

"대신 니가 나 쫒아다닌 걸로 해."

내가 쫒아다닌 걸로 치자고? 그녀의 제안에 아카아시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싫습니다."

"그럼 나 니네랑 동맹 안 해."


동맹이 급한 건 올빼미보다 보름달이란 사실을 아카아시가 잘 알고 있는 이 상황에서, 그녀의 억지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 그러시던가요."

동맹도 파기되는 걸로? 무심하게 내뱉은 말에 모치즈키 림이 얼굴을 구겼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지 궁금해질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아카아시는 그만 피식, 하고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머지않아 찾아가겠습니다."

아카아시는 자동차에 올라타 단검의 흉터가 남은 의자에 앉았다. 백미러로 보이는 화가 나서 새빨개진 모치즈키 림의 얼굴 따위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만월파의 보스를 엿먹이는 일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터져 나오려 하는 비웃음을 꾹꾹 눌러 담으며 시동을 걸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세단이 출발했다.


모치즈키 림이었던 여자와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남자

"누님."

누군가의 부름에 림은 문가를 돌아보았다. 문틀에 기대어 후후 웃고 있는 분홍색 머리의 여자 하나가 림의 눈에 들어왔다.

"깜짝아, 유키에.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림이 말했다.

"네가 목소리 깔고 그렇게 부르면 다른 놈들이랑 헷갈린단 말야."

모치즈키 림보다 네 살 어린 시로후쿠 유키에는 어릴 적 그녀에게 주워져 길러진 여자였다. 그녀는 여자가 드문 이 세계에서 림이 마음을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친구' 였다.

유키에가 대답했다.

"네, 누님."

어릴 적부터 시커먼 남자들의 '누님' 거리는 소리만 들어 와서 그런지, 그녀는 종종 림을 '누님' 이라고 칭하곤 했다. 림이 인상을 팍 썼다.

"아, 진짜!"

"알겠어, 언니. 갑자기 결혼은 왜 결정한 거야?"

시로후쿠 유키에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림은 하루에 있었던 모든 일을 떠올렸다.

아침에 잔뜩 화려하게 꾸미고는 아카아시 케이지를 만났다.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는 차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내려다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던 유키에가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결혼하기로 했냐니까?"

조용히 해, 나도 짜증나니까. 그녀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유키에에게 생긋 웃어 주었다.

"왜, 내가 평생 처녀로 살 줄 알았니?"

"아니, 그게 아니라…. 언니는 그 인간 싫어하잖아?"

맞아! 진짜 싫어! 끔찍해! 림은 맞장구치려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니, 아니. 제발 닥쳐, 모치즈키 림. 이 새끼는 눈치를 챙기는 법이 없어!

유키에가 덧붙였다.

"그리고 '처녀'라는 단어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언니."

알 바야? 그녀가 인상을 팍 썼다.

"그리고 앞으로는 말조심해. 그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시로후쿠 유키에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어갔다. 그 믿을 수 없다는 시선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아. 안다고. 체념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으… 미안. 사실 나도 그 인간 싫어."

유키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나한테 말해 줄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림은 자신의 신념이 깨지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

.

.

모치즈키 림은 제 몸을 감싸고 있는 드레스의 화려한 치맛자락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았다. 레이스를 얼마나 채웠는지, 연한 코랄 핑크빛 드레스의 풍성한 치마는 폭 들어갔다가 금세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움직이지 마세요!"

꾸며주는 손길이 분주했다. 림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던 손길을 거두고 여자들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여자들은 그녀가 만진 치맛자락을 바로잡더니, 다시 원래 하던 일에 몰두했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를 깨끗해 보이게 만들고, 아이라인을 그리더니 섀도우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림의 입술을 붉게 물들인 여자들이 거울을 건넸다. 한없이 화사하고 예쁜 모습이었지만, 이 순간이 맘에 들지 않는 그녀는 웃을 수 없었다. 찡그려진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녀가 찡그리는 이유를 알 리 없는 여자들이 초조해하며 물었다. 림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에게 거울을 돌려주었다.

"아니, 아냐. 그냥…."

무슨 말을 할까 조금 고민하다 딱 맞는 핑계를 찾아냈다.

"…옷이 좀 불편해서."

그녀들은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딱 치고는 합창하듯 말했다.

"아하! 저희는 또, 저희 솜씨가 맘에 안 드시는 줄 알았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셔요. 아카아시 님은 그런 드레스를 좋아하신답니다."

그 자식이 이런 옷을 좋아한다고? 드는 의문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자식, 생긴 것만 봐서는 딱 달라붙는 섹시한 드레스나, 아찔한 미니드레스 같은 걸 좋아할 것 같았는데. 분명 이 옷이 아주아주아주 불편하다는 걸 알고 그녀를 엿먹이기 위해 입힌 게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녀석, 언젠가 복수해줄 테다.

"음…. 그렇다면 참아야겠네."

그녀는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지금은 연기를 해야 할 때라고. 여자들을 돌아본 그녀는 지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미소를 지었다.

"어쩔 수 없지, 그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니."

'그이' 라니. 세상에, 그이라니!

"알려줘서 고마워, 앞으로 자주 입어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런 옷은 절대로 안 입을게.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을 내뱉으며 림은 조신하게 호호 웃었다.

"앗, 아카아시 님…!"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보니 검은색 턱시도를 차려입은 아카아시 케이지가 문가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왜 이제 왔어?"

일부러 콧소리를 더 내며 팔짱을 꼈다. 팔에 닿는 그의 체온이 따뜻했다. 당장이라도 화장실로 달려가 비누로 여러 번 씻어내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에 자제했다. 아카아시의 표정이 그대로 썩어들어가는 게 보여 그녀는 팔꿈치로 그의 허리께를 쿡 찔렀다. 새끼야, 연기해, 연기.

"아…. 미안해요. 일이 너무 많아서."

림이 발까지 밟아 가며 눈치를 줬을 때에야 알아차린 아카아시가 애써 부드러운 눈길을 유지하며 말했다.

"어떻게 오늘 같은 날에도 일이 많아…."

애교를 조금씩 섞으며 그의 시선을 읽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살짝 불편한 눈치였지만 다행히도 그렇게 티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 예쁘네요."

그래, 이제야 조금 자연스럽네. 림이 생긋 웃었다.

"그래? 고마워. 자기도 오늘 멋져."

 자기? 웩. 만약 아무도 없는 곳이었다면,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입가를 여러 번 씻어냈을 터였다. 사실 림은 아직도 조금 고민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하고 빠져나가 도망쳐 버릴까, 하고.

"음, 다들 기다리니까 어서 가요."

그녀의 심정을 알기는 하는지 아카아시 케이지가 재촉했다. 림은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고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응.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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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끼고, 여전히 다정한 연인을 연기하면서 둘은 복도를 걸었다. 림은 그의 팔짱을 끼지 않은 손으로 치맛자락을 치켜올렸다. 걸을 때마다 발에 착착 감기는 게, 아주 기분이 나빴다.

"아, 씨발. 연기 드럽게 못하네." 

혹시 누군가와 마주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생글생글 웃으면서 림이 속삭였다. 뜬금없이 욕을 들은 아카아시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는 그쪽은 연기 잘합니까?"

"너보다야 낫지."

아카아시가 코웃음쳤다.

"하, 지나가던 개가 웃겠네."

모치즈키 림은 치렁치렁한 드레스 아래로 그의 발을 밟았다. 체중을 힘껏 실은 발길질에 아카아시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째려보았다.

"씨발.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림은 재빨리 드레스 자락 아래로 발을 숨겼다. 그녀에게 되돌려 줄 수 없게 된 아카아시는 아까보다 더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았다.

"아, 욕 좀 그만 써. 누가 그딴 말 하라고 가르치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태연한 태도로 그녀는 말을 돌렸다. 옆에서 아카아시 케이지의 어이없다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도착했어, 자기야. 이제 들어가자."

림은 남편이 될 남자의 팔짱을 더욱 꼭 끼고는 다른 쪽 손으로 문을 밀어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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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치즈키 림의 시선이 내부를 훑고 지나갔다. 부엉이파의 상징인 하얀색과 검은색, 노란색으로 꾸며진 파티장은 화려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꽤 예쁜 편이었다.

"부엉이파와 만월파가 동맹을 맺었다던 게 사실이었네요."

"둘은 절대 안 맺어질 것 같았는데, 신기하군."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그녀는 도도한 눈길로 그쪽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그대로 받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신기한 게 아니라 아쉬운 거겠지. 더 이상 우리를 집어삼키려 할 수 없으니까. 그녀는 조용히 그들을 비웃었다.

검은 드레스로 몸을 감싼 여자 하나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옷만큼이나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몸매를 부드럽게 드러내는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목선이 그다지 깊이 파이지 않았음에도 섹시한 매력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옷 예쁘네요. 모치즈키 씨에게 잘 어울려요. 아, 이젠 아카아시 씨라고 불러야 하려나요?"

까마귀파의 시미즈 키요코가 말했다. 왜 뜬금없이 말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까마귀파는 중립이었지만, 그녀의 만월파와 친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림은 제 허리께에 둘러진 아카아시의 손을 느끼며 조용히 답했다.

"아뇨, 아직은요. 고마워요. 시미즈 씨도 오늘 예뻐요."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은색 꽃 장식이 달린 핀으로 고정한 그녀는 림의 칭찬에 부드럽게 후후 웃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결혼 축하해요."

순간 그녀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시미즈 키요코가 왜 굳이 말을 걸었는지 알아차렸다. 애매한 중립의 위치에 있다곤 해도 결국 까마귀파는 그녀의 적이었다. 시미즈는 분명 그녀를 떠보기 위해 온 게 틀림없었다. 림은 환하게 웃으며 아카아시의 가슴에 몸을 기댔다.

아카아시와 닿아 있는 등이 참을 수 없이 뜨거웠다. 진짜 짜증나. 림에게는 죽고 싶을 만큼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억지로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시미즈에게 답했다.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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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이라고 해 봤자 별 것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증명하는 반지를 주고받은 뒤 파티에 파트너로써 참석해 내내 함께 보내다가 키스 타임이 되면 키스하고. 그 다음에는 둘 중 하나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모치즈키 림이 사는 이곳은 만남과 헤어짐이 잦은 세계였기에, 결혼이라는 큰 행사 또한 평범한 커플들의 화려한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익숙한 잔잔한 음악이 흐르자 파티장의 조명들이 반쯤 꺼졌다. 아카아시 케이지가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고, 피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키스했다. 그저 보여주기 식에 불과했지만 아주 진한 키스였다. 하아, 아카아시가 그녀에게서 떨어지자 림은 깊게 숨을 쉬었다.

그렇게 모치즈키 림은 아카아시 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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