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못하는 날들
1장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이따금씩 손발이 저렸다. 부어오른 팔과 다리를 잠시간 주무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괜찮아져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자고 있을 때는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에 의사는 옆으로 누워서 자면 조금 낫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영 효과가 있진 않아, 발에 쥐가 나 새벽을 고스란히 뜬 눈으로 지새게 되는 날이 좀처럼 줄지 않았다.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입덧이 시작될 즈음 사보았던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단 걸 상기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챙겨 먹는 영양제와 임신 초기에 의사가 한 말을 차례로 떠올렸다. 흔히들 임산부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평소 먹던 것에서 우유 한 팩 정도만 더 먹으면 충분합니다. 남자 오메가의 경우엔 특히 더 몸이 무거워지는 걸 주의해야 해요. 한창 입덧을 하던 때라면 모를까, 의사의 말 보다 훨씬 잘 챙겨 먹고 있는 터라 영양이 부족할 리는 없었다. 외려 살이 너무 오르지 않아 다행이라 여길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잠을 좀 편하게 잘 수 있을까. 이와이즈미는 뻑뻑한 눈 위에 얼음팩을 올리며 생각했다. 공부하랴 운동하랴 한창 몸이 고단하던 때에도 잠을 많이 자는 편이 아니었는데, 당장 지금은 딱 다섯 시간만이라도 깨지 않고 자고 싶었다. 근래 들어 심해진 손발 저림에 쪽잠 잔 것들을 모두 모아도 매일 여섯 시간을 채우지 못 했다. 얼마 전 마츠카와마저 그에게 한소리 했다. 이와이즈미, 잠 못 자냐? 얼굴이 말이 아니야. 오랜 친구에게 팔자에 없는 임산부 수발을 들게 한 마당에 잠자리 걱정까지 끼칠 수는 없어서 그는 임신하면 원래 다 얼굴이 말이 아니게 돼, 라고 둘러댔다. 그다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마사지기를 하나 사는 게 나을까. 출산 이후에 몸이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길면 1년, 짧아도 반년은 쓸 것 같았다. 만 엔 안쪽에서 사면 괜찮지 않을까. 이와이즈미는 주섬주섬 일어나 식탁 위에 둔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브라우저 창을 띄워 검색창에 다리 마사지기를 입력했다. 화면은 금세 결과를 띄웠다. A사 신제품 23,000엔. 구제품 18,000엔. C사 신제품 32,000엔. 구제품 20,000엔.
“뭐가 이렇게 비싸.”
그는 툴툴대며 다시 검색창에 커서를 띄웠다. ‘다리’를 지워 ‘마사지기’만을 남긴 채 엔터를 누르자 화면은 더 많은 제품을 띄웠다. 가격도 더 천차만별이었다. 개중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5,000이라는 숫자였다. 저주파 마사지기. 상품을 클릭하자 잘 정돈된 상품 설명 이미지가 떴다. 그 하단에는 화사한 얼굴의 홍보모델들이 실려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그 중 한 가운데에 있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현 배구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라 불리는 오이카와 토오루는 명성에 걸맞게 온갖 매체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개중 가장 많이 보이는 곳은 광고였고, 대부분 그가 속한 회사의 브랜드였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기업이라지만 의료기구도 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기업명을 보니 생소한 것이, 새로이 만든 자회사인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새삼스레 오이카와가 그간 찍었던 광고 수를 헤아렸다. 겉은 가벼워 보여도 속은 진중한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벌어둔 돈을 착실히 모아놨을 것이 분명했다.
“…돈 걱정은 평생 없겠네.”
구체적인 숫자는 몰라도 제 통장 잔고 보다는 훨씬 넉넉할 것을 생각하니 어쩐지 속이 따가웠다. 그는 한 번 더 화면 속 오이카와를 응시하다 이내 창을 꺼버렸다.
마츠카와와 하나마키에게 임신 사실을 고백했을 때, 하나마키는 오이카와한테는 말했냐고 물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의 배구부 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자신들에게 중차대한 비밀이라며 털어놓았으니, 언제부터 알고 지낸지도 정확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알아온 소꿉친구가 자리에 없는 것은 그들에게 충분히 의아할 만한 일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아니. 그 녀석한테는 말 안 할 거야. 하나마키가 물었다.
-그럼 언제 말하려고?
-안 말해도 되는 거 아냐? 꼭 말할 필요는 없잖아.
-오이카와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 같은데… 뭣보다 그 녀석이 제일 잘 도와줄 테고.
-그 멍청한 놈 도움은 필요 없어. 게다가 도움이랍시고 난장판만 쳐놓을 거라고. 분명 내가 말하기도 전에 우리 부모님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떠들 거야.
일리가 있다며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어느 알파놈이냐고 온갖 곳을 쑤셔대겠지.
마츠카와가 거들었다.
-그러니까 오이카와는 모르게 내버려 둬.
-근데 애 낳고 돌 될 때까지 잠수 탈 거라며. 오이카와가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 거 같진 않은데.
-특파원으로 나간다고 해놓을 거야. 부모님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릴 거고.
-그럼 회사는 휴직하는 거?
하나마키의 물음에 이와이즈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퇴직금 받아서 애기 키우는데 쓸 거야.
-갑자기 확 와 닿네. 내가 보증은 못 서주지만 애기 기저귀 값은 보탤게, 이와이즈미.
-필요 없거든.
제 손을 꼭 붙잡고 덧붙이는 말에 이와이즈미가 질색했다. 그러자 하나마키는 마츠카와를 가볍게 찌르며 동조할 것을 종용했고, 그에 마츠카와가 나는 분유값, 하고 응해주었다.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나 배 불러오면 가끔 와서 심부름이나 해줘.
-그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되는 거지. 그래서 집은 어디에 구하려고?
-사이타마나 카나가와. 치바도 괜찮고.
약속 장소에 나오기 전에도 이와이즈미는 옮길 집을 찾아보았다. 도쿄에서 너무 멀지는 않지만 사람이 많지는 않은 곳. 어딘가에 숨기에는 도시와 가까우면서 눈에 띄지는 않는 곳이 좋은 법이었다. 사회부 기자로 일한 건 고작 2년이었지만 일하며 보았던 온갖 사건들이 그 정도의 지식을 쌓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 걸 자신이 쓸 날이 올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왜 그렇게 쳐다봐?
마음속으로 정해둔 후보 몇 개를 떠올리다가 이내 낯간지러운 시선이 느껴져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나마키는 애매하게 웃었고, 마츠카와는 어깨를 으쓱였다.
-낯설어서 그런 거지.
-아, 뭐. 나도 내가 임신한 게 낯선데 너네도 그러겠지.
-아니, 그거 말고.
이와이즈미의 수긍에 마츠카와는 평범하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하나마키는 이제 얼굴을 찡그린 것에 가깝게 웃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도통 뜻을 알 수 없어서 입술을 삐죽였다.
-네가 오이카와한테 뭘 숨기는 건 처음이라서. 오이카와한테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것도 우리한테 부탁하는 도움 중 하나지?
물음이었지만 대답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무언가 답하고 싶었다. 오이카와에게 말할 수 없는 이유 같은 것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입에서 제대로 된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기껏해야 좀 전에 말했던 이유를 다시 풀어 설명하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잠시간의 침묵을 깬 건 하나마키였다. 아직 입덧은 안 해? 그럼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이와이즈미는 마침내 입을 열고 그래, 하고 답했다.
“덥냐?”
한 달에 한 번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마츠카와와 하나마키는 매 주말마다 번갈아 이와이즈미의 집을 찾았다. 지난주엔 하나마키였으니 이번 주는 마츠카와의 차례였다.
“조금 뛰었더니. 그래도 도쿄 보단 나아.”
쯔유가 든 봉투를 식탁 위에 올려두며 마츠카와가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조금 늦은 아침에 출발해 내리 한 시간 반을 운전하면 점심때에 도착한다. 고등학교 시절, 매 연습에 늦지 않았던 것처럼 이와이즈미의 두 친구는 언제나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고 이와이즈미는 그런 둘을 위해 도착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점심을 준비했다. 온 지 얼마 안 된 마츠카와를 심부름 보낸 건 순전히 실수 때문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에게 연락해 도착할 시간을 어림잡아 면을 삶았다. 고명이야 김가루와 무순이면 되었고, 쯔유는 지난번에 사둔 게 아직 한참 남아서 부족할 게 없었다. 그가 짐작한 시간에 맞게 마츠카와는 도착했고, 그 땐 면을 얼음물에 담갔다 빼 채반에 받치고 있었다. 쯔유만 작은 그릇에 담으면 식사 준비는 끝인 셈이었다.
찬장에 둔 쯔유를 꺼낼 때, 마츠카와는 식탁에 앉아 이와이즈미에게 별 거 아닌 이야기를 꺼냈다. 너 오이카와한테 어디 특파원으로 간다고 했댔지? 이와이즈미는 심드렁히 답했다. 호주 멜버른. 마츠카와가 맞게 대답했네, 하고 중얼거렸고 이와이즈미가 뭐가? 하고 물었다. 마츠카와가 답했다. 오이카와가 한 번 더 물어서. 거기 간다더라, 훈련인지 뭔지로. 그때 이와이즈미의 손에서 쯔유병이 미끄러졌다. 바닥이 산산이 조각난 유리병과 쯔유로 삽시간에 엉망이 되었다.
“면 다시 삶았네?”
얼음물에 담긴 면을 보며 마츠카와가 말했다. 불어서 그냥 버렸다고 이와이즈미가 대꾸했다.
일이 벌어지자마자 마츠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조각을 치웠었다. 부른 배 탓에 마츠카와의 정수리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 이와이즈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대신 바닥을 닦는 건 그가 맡았다. 마저 하겠다는 마츠카와였지만, 쯔유를 사다 달라 부탁하니 군소리 없이 걸레자루를 넘기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나간 뒤, 이와이즈미는 바닥을 얼추 훑고 새로 면을 삶을 물을 올렸다.
자잘한 기포가 올라오는 것을 내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었다. 무슨 의중으로 제 근무처를 마츠카와에게 물은 것일까. 아니 그전에 멜버른에 뭐가 있다고 훈련을 갈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생길까봐 그토록 머리를 굴려 가장 접점이 없어 보이는 곳으로 둘러댔는데, 말짱 헛일이 되었다. 이와이즈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욕지거리를 하고 싶었지만 속으로 삼키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편 오이카와가 가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냔 생각도 들었다. 안일한 마음이란 건 알지만, 오이카와는 제 메일 주소를 제외하곤 아는 것이 하나 없기에-엄밀히 말하면 그 외엔 실존하지 않는 정보지만-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지부를 찾아간다면 이야기는 좀 다르겠지만 훈련이라 했으니 그 정도의 여유는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와이즈미는 조금 전까지의 생각이 다시 떠오르려는 것을 누르며 면을 건져 마는 것에 집중했다. 마츠카와는 쯔유를 담겠다며 옆에서 부시럭댔다.
식탁 위에 널려있던 서류들을 대충 밀어내고 만든 것들을 올렸다. 예기치 않은 일로 늦어졌을 뿐이지 상차림은 간단했다.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는 마주 보고 앉아 바로 젓가락을 들었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보니 젓가락이 부딪치는 소리와, 면에 감긴 쯔유가 빨아 올려지는 힘에 의해 토토톡 공기 중으로 튀는 소리, 그리고 윗니와 아랫니가 마주해 면발이 잘게 끊어지는 소리만이 식탁 위를 채웠다. 하지만 시선에도 소리가 있다면 상황은 좀 다를 것이다. 마츠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밀어뒀던 서류를 가능한 많이 살폈다.
“이와이즈미, 요즘 일해?”
이와이즈미는 입안에 있는 것을 오물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다시 일하려면 완전 논 건 아니라고 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지역신문에 투고를 한다고? 하물며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지금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렇고. 나중엔 계약 할 수 있겠지.”
애매한 말에 마츠카와의 눈썹이 들썩였다.
“글쎄. 커리어로 인정이나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투고여도 ‘사진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들어가.”
사실대로 말했지만 마츠카와가 썩 탐탁지 않아 한단 건 시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마츠카와는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조금도 신경질적이지 않고 조용한 움직임이었으나 그만큼 무거웠다.
“하나마키하곤 너한테 이런 얘기 하지 않기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물어보는 게 나을 거 같다. 이와이즈미, 네 뱃속에 있는 애 아빠 결혼한 알파야?”
“뭐?”
“네 입으로 한 번도 말하질 않으니 사정이 있겠거니 했지만, 아예 존재 자체를 그쪽한테 알리려고 하질 않으니까 그런 쪽으로밖에 생각이 안 들어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반문에 마츠카와는 친절히 답해주었다.
“처음에 그 얘기 할 때부터 그런 거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퇴직금을 타서 애 키우는데 쓸 거라니. 네가 애아빠한테 양육비 받아낼 수 있단 걸 모르지 않을 테고. 알리기 싫거나, 혹은 지금은 알릴 수 없거나, 정도로 생각했지.”
정확한 추측이었다. 스물일곱 살인 지금, 이와이즈미는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이와이즈미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누구든 마땅히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는 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 뱃속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사람은 이와이즈미 혼자가 아니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오롯이 혼자 짊어지고 있는 건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할 수 없단 것도 틀리진 않았다.
“꼭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도 생각해. 내가 알던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를 거 같진 않아서. 하지만 수태고지 성령잉태도 아닐 거잖아. 그러니 그 사람한테 말해, 이와이즈미. 내 생각대로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책임은 같이 져야지.”
고교 3년을 같이 보낸 오랜 친구의 말에는 조금의 비난도 없었다. 그는 괜찮다, 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와이즈미는 들을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도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마찬가지로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제 손에 고개를 묻으며 이와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서로 좋아해서 만난 관계에 생긴 애가 아니야. 어쩌다 사고처럼 생긴 애니까. 그런 책임 요구할 일이 못 돼. 말해봤자 시끄럽기만 할 거고.”
“그럼 너는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고?”
“있어.”
가려진 시야에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문득 오래 전 자신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사람 좋아하거든.”
나는 알파가 싫어.
알파와 오메가가 전체 인구의 5% 내외라고는 하나, 기질적 특징상 운동부에는 알파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렇다보니 이와이즈미는 제 성향을 오인 받을 때가 잦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현내 4강의 배구팀의 에이스였고, 그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파트너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널리 알려진 알파이니, 자연스레 그도 알파일 거란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한 가지 이와이즈미가 답답한 점은 왜 자신을 베타로 생각하지 않느냔 것이지만, 오메가라고 직접 밝혀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게 그의 고충이었으니 문제의 핵심은 아니었다.
알파가 싫다, 라고 말한 건 오이카와에게 한 소리였다. 같이 있던 배구부 선수들 중 일부는 혹시 자신이 알파 페로몬을 실수로 흘린 걸까 싶어 제 행동거지를 다시 생각했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오이카와는 천연덕스레 오이카와상을 좋아한다고 다른 알파들을 싫어할 필욘 없다 말했다. 그에 이와이즈미는 등짝을 한 대 때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와이즈미 오늘 웬일로 고백 받았다며.
하나마키가 킥킥대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알파인 줄 알았단 소릴 들었답니다.
그 말에 마츠카와가 거들었다.
-젠장, 오메가라고 써 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러고 다녀도 아무도 이와쨩이 오메가라고 생각 안 할 걸? 보통 남자오메가들은 여자애들처럼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이와쨩은 못생겼잖아.
이와이즈미는 한 번 더 오이카와의 등짝을 때렸다. 오이카와가 아프다고 꽥꽥 소리를 질렀지만 이와이즈미는 무시한 채 옷을 갈아입었다.
통상적으로 알파와 오메가는 성별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 알파와 오메가의 비율이 남녀 성비와 비슷할 뿐만 아니라 알파는 대부분 남성이었으며, 오메가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5%의 알파와 오메가 중에서도 여성 알파, 남성 오메가는 극소수로, 일종의 규칙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이렇다보니 그들에게 선입견이 따라붙는 것은 얼핏 필연적인 일이었다. 특히 여성 알파는 남성스러울 것이며, 남성 오메가는 여성스러울 것이다 같은 대표적인 편견은 젠더를 구분하는 기준의 불분명함을 논외로 치더라도 많은 이들의 인식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괜찮아, 이와쨩. 언젠가 이와쨩을 좋아해주는 알파도 있을 거야.
아픈 게 금세 나은 모양인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매달려 말했다. 나름 위로한답시고 퍽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병 주고 약 주냐?
-아니, 뭐. 아주 만약의 가능성이란 것도 있잖아?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여자 알파가 이와쨩을 좋아할 수도 있고. 물론 이와쨩이 못생겨서 있다가도 사라질 거 같지만.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반복되는 염장을 지르는 소리에 이와이즈미는 없는 인간인 셈 치기로 작정했단 듯이 중얼댔다. 그는 여전히 제 어깨에 매달려 있는 오이카와의 팔을 떨어뜨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이와쨩, 질투하면 더 못생겨져~ 하는 오이카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못생겨지든지, 말든지. 이와이즈미가 속으로 투덜댔다.
러트가 아주 드문 여성 알파와 마찬가지로 남성 오메가는 히트가 드물었다. 주기 또한 불규칙했으며, 페로몬 향도 옅은 편이었다. 이 말은 본딩이 이뤄질 확률 또한 낮단 의미였다. 알파들이 베타 보다 오메가를 제 파트너로 선호하는 것은 본딩 때문이 컸다. 러트를 견디지 못할 것은 아니나, 또한 러트가 오메가의 히트처럼 잦은 것도 아니나, 히트보다 월등히 오래 지속 된다는 점에서 그들은 본딩을 통해 러트 주기를 안정화 하는 것이다. 그러니 본딩이 어려운 남성 오메가는 일종의 이등 기질로 차별 받는 경향이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속한 사회는 그러했다.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알파들에게 선택 받을 수 없단 것으로 제게 향하는 온갖 종류의 시선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 말은 좋았다. 현실은 그들만의 평등이지만. 알파가 싫단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남자 알파든, 여자 알파든. 이와이즈미는 모두 사절이었다. 어차피 그에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당장은 전국으로 가는 것이 그의 전부였다.
마츠카와는 솔직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면서도 결코 무례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말을 듣고 즉각 사과했던 그는 집을 나서기 전에도 한 번 더 사과했다. 내가 주제넘었어. 이와이즈미는 손을 설레설레 저어 그의 사과를 마무리 지었다. 조심히 가기나 해라.
임신사실을 알고 있는 두 친구가 수상하게 여길 것이라곤 생각했지만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마츠카와의 말대로 이와이즈미는 그런 짓을 벌일 인간이 못 되었다. 애초에 기질 덕에 사람을 몇 번 만나보지도 않았던 그는 대체로 연애와는 거리가 멀었고, 스포츠연예부에서 사회부로 옮긴 이후론 일에 치이느라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와 현장에서 보냈고, 휴일엔 집에서 쉬기만 했다. 간간히 밖을 나섰던 건 오이카와를 비롯해 그의 옛 친구들이 찾아서였다. 그 중 대부분은 오이카와였다.
오이카와와 가장 최근에 만났던 날은 특파원으로 가게 되었단 이야길 할 때였다. 하필 그 날이 4월 1일이었는데,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이와쨩, 그런 거짓말은 너무 쉽잖아.”라고 말을 하고나서야 만우절이란 걸 깨달았다.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은 뒤로 꼬박 한 달하고 보름을 준비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으니 미처 몰랐던 게 당연했다. 이와이즈미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며 다시 한 번 특파원으로 간단 소릴 했다. 2년은 있어야 하니 그간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라고도 덧붙였다.
문득 낮에 마츠카와가 한 말이 생각나 이와이즈미는 쇼파에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식탁 앞에 앉아 서류를 밀어내고 노트북을 열었다. 그는 메일 계정에 접속했다. 마츠카와가 오이카와를 언제 만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주 전엔 그런 말이 없었으니 그 안에 만난 것 같았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으나, 혹 절 만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쯤 메일 한 통 쯤은 와야 했다. 이와이즈미에게 온 새로운 메일은 열 개였다. 그 중 절반은 광고였고, 세 개는 청구서였으며, 두 개는 전 직장에서 온 것이었다. 어디에도 발신인 오이카와 토오루는 없었다.
“대체 뭘 하겠단 건지.”
이와이즈미가 중얼댔다. 혹시 모르니 전 직장에 연락을 해두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어 무슨 말을 하느냔 생각이 따라붙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라고, 그 유명한 걔가 제 친군데, 얘가 멜버른 지부에 들이닥칠 지도 모릅니다. 그럼 가만히 붙잡고 인터뷰를 하세요. 대신 저는 휴가중이라고 해주시고요. 이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끙, 하고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오이카와의 멜버른 일정은 2박 3일로, 관광은커녕 눈 붙이기도 힘든 일정이었다. 온갖 광고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있어도 진짜로 연예인인 것도 아닌데 몸이 생명인 국보급 선수에게 너무 하드한 일정인 거 아니냐며 에이전시에게 따졌지만, 에이전시는 그 선수로서의 일정을 맞추느라 이렇게 되었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결국 오이카와는 조만간 에이전시에 제대로 일거리를 터트려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촬영에 임했다. 그는 글자 그대로 열심히 임했다. 덕분에 마지막 날, 반나절이란 귀중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된 것이었다.
시간이 필요했던 건 이와이즈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틀 뒤, 그것도 제 경기가 있는 날에 출국일정을 잡았던 소꿉친구는 매정하게도 연락 한 번이 없었다. 메일 주소로 짧게 안부를 물었을 때 답을 받긴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명색이 사진기자인데 집 사진 한 장 찍어 보내지 않았다. 자기를 찍는 일은 본 적이 없으니 얼굴까진 기대 안 했다지만 ‘잘 지냄. 일이 바쁨.’이 내용의 전부인 것은 누가 보아도 너무한 일이었다. 누가 보아도 이와이즈미 하지메다웠지만. 그래서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기습하려고 했다. 그가 멜버른으로 간다고 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지만 혹시 자기한테 그마저도 제대로 알려준 게 아닐까봐 마츠카와에게 확인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뜻밖의 말을 들어야 했다.
“맛키, 이와쨩 어디 갔는지 알지?”
오이카와는 귀국을 하자마자 에이전시를 찾았다. 웃는 얼굴로 나타난 그에게 담당인 오카다가 기겁을 했지만, 정작 오이카와는 그가 아닌 하나마키의 사무실에 난입했다. 마침 점심시간에 겹쳐 부재중인 사무실은 그가 난장판을 피우기 딱 좋았다. 친구라는 직함을 마구 써 먹겠다 마음먹고 하나마키의 데스크를 뒤졌다. 단서는 쉽게 나왔다. 다이어리 맨 뒤에 주소가 써져있었다. 그 밑에는 하지메, 라고 적혀 있었다.
멜버른 지부를 찾았을 때 오이카와가 들은 말은 이와이즈미가 그곳에 없단 것이었다. 지난 달 초에 온 특파원이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한 달 전에 오신 분은 있지만 그 분의 성함이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아니라고 답했다. 혹시 몰라서 오이카와는 그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겠느냐 청했다. 안내 데스크에선 기꺼이 응해주었고, 두 눈으로 확인한 상대는 정말로 이와이즈미가 아니었다. 황당함에 말문을 잃은 오이카와에게 신입 특파원은 기운을 차리란 듯이 정보를 주었다. 이와이즈미가 4월 초에 사직했단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본래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른 편이다. 근래 묘하게 자주 만나는 것 같던 하나마키와 마츠카와였다. 마츠카와가 제게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와이즈미가 마츠카와마저 속인 것인지는 하나마키를 파보면 알 수 있을 거란 판단이 섰다. 전자가 답이라면 둘이 자주 만나는 이유에 이와이즈미가 있을 것이다.
디저트까지 먹으며 점심시간을 즐기다 온 하나마키는 제 다이어리를 들고 흔드는 오이카와가 흡사 야차와 같아 보였다. 도망치는 것이 일신상에 제일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저는 운동을 쉰지 벌써 팔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고 상대는 현역이었다. 튀어봤자 손바닥 안이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다면 후일 전직 에이스에게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멜버른에 있는 거 아니던가?”
하나마키는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으려 애썼다. 노력은 성공적이었지만 그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에는 기여하는 바가 없는 듯했다.
“사이타마 현 가와지마 정인 거 같은데.”
오이카와가 다이어리 안쪽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정확히 하지메, 라고 적힌 부분을 가리켰다. 하나마키는 애를 써서 웃었다.
“그건 하나마키 하지메라고 사촌동생이 하나 있는데, 거기로 시집을 갔다고 해서.”
웃는 하나마키에 오이카와 역시 마주 웃어주었다. 이미 처음부터 웃고 있던 얼굴이 한껏 근육이 이완되면서 더 깊이 웃음이 드러났다. 그게 경고라는 것을 하나마키는 잘 알고 있었다.
며칠째 아침마다 메일을 확인하고 있지만 오이카와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마츠카와에게 연락해 그때 무슨 얘길 했는지 물어볼까 싶었지만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몰라 생각 선에서 그쳤다. 설령 물어본다 해도 가끔 만나 소식 듣는 게 전부인 마츠카와 보단 오이카와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하나마키 쪽이 정보를 얻기엔 나았다. 역시 신경을 끄는 게 답일까. 이와이즈미는 읽지 않아도 되는 메일만 들어오는 수신함을 바라보다 이내 창을 껐다. 대신에 일간지 페이지를 화면에 띄웠다.
출산 이후에 다시 일을 하려면 흐름을 꾸준히 잡고 있어야 한다. 이와이즈미가 꼬박 5년을 몸담은 회사는 사실 그에게 조금 과분한 곳이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성적에 맞춰 고른 인문학부와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배구를 하기 위해 선택한 학교이니 전공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이카와처럼 지명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은 필수적이었다. 그래도 특유의 성실한 성격이 눈 뜨고 봐줄만한 성적은 만들었다. 그의 전 직장이 선호하는 선에는 모자랐지만. 전세계적으로 언론출판계의 불황이 지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성인들이 신문을 구독하는 일본에선 상황이 조금 달랐다. 게다가 어느 나라든 주요 일간지를 지망하는 예비 언론인들은 많으니, 3대 일간지로 꼽히는 전 직장의 인기야 두 말 할 것도 없었으며 그만큼 우수한 지망자 또한 많았다. 이와이즈미가 그들을 제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인맥이었다. 청탁을 한 것은 아니고, 이와이즈미의 3년 위 대학 선배가 이와이즈미의 사진을 몇 번 가져다 쓴 것이었다. 당시 이와이즈미가 찍었던 사진은 대부분 학교 배구부 사진이었다. 연습 때의 사진도 있었고, 경기 때의 사진도 있었고, 간간히 기념사진도 있었다. 그 중 경기 때의 사진이 몇 개 마음에 든다며 가지고 간 선배는 어느 날 학생 인턴 자리가 있다며 지원을 해보라 권했고, 순순히 따랐던 게 덜컥 붙어 이와이즈미는 1년간 간단한 취재를 도왔다. 그 경험이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그를 회사에 속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본의 아니게 투고했던 사진들은 모조리 스포츠연예부의 것이었고, 인턴 생활 역시 스포츠연예부여서 이와이즈미의 부서 배치는 자연스럽게 이뤄졌었다. 그곳에선 딱히 공부가 필요하지 않았다. 스포츠 쪽이야 본인도 선수로 뛴 전적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고, 연예 쪽은 모르는 것 투성이어도 취재기자가 다 알아서 하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가 익혀야 할 것은 기껏해야 수많은 사진기자들과 치열한 몸싸움 끝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이라거나, 설령 뒤로 밀려나는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가장 피사체를 잘 담는 법 정도였다.
하지만 사회부는 달랐다. 업무의 강도부터 살인적인 그곳은 사진기자라고 취재와 관련된 일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제보의 검토부터 시작해 기사를 기획하고 재차 방향의 옳고 그름을 확인하며 일을 꾸려나간다는 것이 이와이즈미에겐 너무나 생소했고, 그만큼 그가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는 거의 반년을 망망대해에서 헤엄치는 기분으로 일했지만 결국은 적응해내 새로 구성된 장기기획팀에 꼽히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론 그걸 박차고 나온 상황이지만. 딱히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모든 사람이 좋았던 것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사회부에서 했던 일 또한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이와이즈미는 기왕 일한다면 그곳이 좋았다. 아마도 아이가 유치원은 입학해야 돌아갈 수 있을 테지만 그때라도 기회가 된다면 가고 싶었다.
손이 가는 대로 기사를 읽다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뻐근한 눈을 한 손으로 비비며 켜놨던 창을 하나씩 닫았다. 다섯번째 창을 닫을 때, 귀퉁이에 박혀 있는 문장 하나가 그를 사로잡았다. [편집실에서] 스포츠연예부에서의 시작. 오롯이 편집부 사람들의 영향 하에 있는 칼럼란에는 매주 편집 기자들의 칼럼이 실렸다. 그들은 대체로 다른 부서에서 몇 년 경력을 쌓다가 편집부로 간 사람들인데, 보통 경제부나 정치부에 있었고 간간히 사회부나 문화부 출신들도 있었다. 그 외 다른 부서에서도 그쪽으로 가곤 하지만 스포츠연예부는 조금 예외였다. 이들은 대체로 부서를 바꾸기 보단 자회사인 잡지사 등 타 회사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이즈미 역시 특이한 케이스 중 하나인데, 사진기자인데다 옮긴 부서가 사회부란 점에서 편집부로 옮겨진 것만큼 특이하진 않았다.
이와이즈미는 기사를 클릭했다. 페이지가 넘어가자 커다란 제목 바로 아래에 기자의 이름과 프로필 사진이 실렸다. 새로이 부서를 배치 받았다는 말로 서두를 시작한 얼굴은 이와이즈미가 아는 사람이었다.
사나다 준은 이와이즈미의 대학 선배인 동시에 첫 사수였다. 그리고 이와이즈미에게 처음 카메라를 쥐어준 사람이기도 했다. 배구부에서 만년 2군 선수였던 사나다는 같은 학부 후배이기도 한 이와이즈미를 자신의 뒤를 이어 배구부 촬영기사 노릇을 할 인물로 처음부터 점찍어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특별히 아끼는 척 하며 카메라를 만지게 했고, 때로는 그걸로 찍게도 했으며, 로드워크를 핑계로 출사를 끌고 갔다고. 사나다는 대단한 비밀을 숨겨왔던 냥 고백했지만 정작 이와이즈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사실 그대로 답하자 사나다는 눈이 휘둥그레져선 어떻게 알았느냐 되물었는데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노골적인 걸 모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냐며 답했었다. 그렇게 이야길 나누던 때가 이와이즈미가 입사 1년을 꽉 채웠던 날이니, 벌써 4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처음이야 검은 속이었어도 사나다가 절 꽤 아껴 했단 건 이와이즈미도 잘 알고 있었다. 3년 전 일로 중간에 사이가 좀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퇴사 전에 사나다에게 짧게 인사할 정도는 됐었다. 그 사이에 부서를 옮길 줄이야. 이와이즈미가 기억하는 사나다는 편집부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는 스포츠가 좋아서 기자가 된 사람이었다. 역시 직접 하는 게 제일 좋지만, 아무래도 그걸로 밥 먹고 살긴 그른 것 같으니 이야기라도 해보자. 이것이 사나다의 기자로서의 신념이었다. 그런 사람이 펜대를 내려놓고 컨텐츠 구성만 하겠다는 것은 좀체 이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에 혹시나 싶은 가정이 이와이즈미 속에서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안 그래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제게 물었던 말이 심심찮게 걸렸던 차였다. 거기에 연결 지을 수 있는 일까지 생기니 불편한 마음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안부메일이라도 써볼까. 은근히 속내를 떠보는 짓은 그의 성미에 영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혹시 그거 저 때문이에요? 하고 묻기에는 뭐했다. 대답은 그래, 아니 둘 중 하나일 테고, 그 중 이와이즈미가 걱정하는 대답은 그래였다. 아니란 말을 듣는다면 조금 무안해질 테지만 그쪽이 훨씬 나았다.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이유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큼 무거운 게 어디 있을까. 좋은 방향이라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나마 웃으며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정반대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의심이 시작된 이상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이와이즈미는 결국 자리에 앉아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하지만 바로 글을 써내려가진 못 해 입술을 내민 채로 한참 모니터의 깜박이는 커서만을 바라보았다. 직구를 던질 것이냐, 변화구를 던질 것이냐. 오래 전 배구를 할 때 얘기지만, 그는 에이스였고 코트 한 가운데를 시원하게 가르는 스파이크가 좋았다. 야구로 치자면 직구. 이와이즈미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주 번갈아 가면서 이와쨩한테 갔다고?”
오이카와가 재차 확인하듯 말하자 하나마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츠카와는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동의의 의미였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정은 이와쨩 사생활이라 말은 못 해주겠지만, 나한테 숨긴 건 이와쨩의 뜻이었으니 두 사람한테 잘못이 없고?”
“맞아.”
“맛층, 나랑 지금 장난해?”
오이카와의 미간은 처참할 정도로 구겨졌다. 내막을 모두 알았으니 더 이상 앞뒤 재가며 압박할 것도 없는데다, 들은 말들도 황당하기 그지없으니 있는 대로 치솟은 짜증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며칠 전, 하나마키의 사무실을 털면서 실마리를 잡은 오이카와는 곧장 하나마키를 추궁했다. 처음엔 갖은 대로 거짓 해명을 늘어놓았지만 하나마키는 끝내 실토했다. 이와이즈미 하지메는 일본에 있으며, 심지어 당장 차로 한 시간 좀 넘게 운전하면 그가 사는 집까지 갈 수 있다고. 하나마키는 속여서 미안하다고 오이카와에게 사과했다. 아무리 이와이즈미의 부탁이었다지만 혼자 모르게 한 게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니 용서를 구하는 게 맞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비밀을 간직한 자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니 제겐 잘못이 없고, 굳이 잘잘못을 따지려거든 이와이즈미한테 하라는 것이다.
“장난일리가 있냐.”
“나한텐 완전 말장난처럼 들리는데.”
“어차피 주소도 알았으니 이와이즈미한테 직접 찾아가면 되잖아.”
“누가 그걸 몰라? 이와쨩이 뭐라 했든 간에 나한테까지 숨기지 말았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거잖아.”
“그거야 네 입장에서 그런 거고. 이와이즈미 입장에선 너한테 말 안 하는 게 옳은 일이었어.”
“그만해, 마츠카와. 왜 괜히 긁어.”
오고가는 말들에 점점 날이 서는 게 느껴지자 하나마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평소대로라면 오이카와부터 말렸겠으나 지은 죄가 있으니 마츠카와만 붙잡았다. 다행히 마츠카와는 순순히 하나마키의 뜻을 따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오이카와는 마츠카와와 달리 찡그린 낯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않아서 한숨을 크게 쉬었다.
마츠카와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일단 신경질부터 내고 보았지만 오이카와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당장이라도 이와이즈미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캐묻는 게 두 사람을 대낮 도심의 카페에 붙잡아 놓는 것보다 빠르고 나았다는 것을. 그러나 뒤틀린 속은 며칠간 하나마키를 들볶았고, 결국은 마츠카와까지 긁고 싶게 만들었다.
이와이즈미에 대해 오이카와가 모르는 것은 결코 전혀 없다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남들보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맞았다. 특히 이와이즈미의 삶 속에서 중요한 일들은 오이카와의 기억 속에도 존재했다. 그것은 둘이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덕이 크지만, 그만큼 두 사람의 신뢰 관계 덕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이카와는 나름대로 이와이즈미에게 저란 존재를 조금은 특별한 위치로 생각하고 있었고, 한 치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 며칠간 벌어진 일들이 적어도 조금은 주제 파악을 했어야 했다고 그를 비웃었다.
결국 지금 저지르고 있는 짓들은 모두 일종의 질투이자 엉뚱한 곳에 하는 화풀이였다. 오이카와는 도로 인상을 찡그렸다.
“좋아. 그럼 내가 가서 물으면 된다 이거지.”
“진짜 가게?”
하나마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오이카와가 빈정대듯 말했다.
“맛층 말대로 직접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곧장 하나마키는 머리를 싸맸다. 옆에서 마츠카와가 살짝 미간을 구긴 채 콧등을 쓸었다.
“그러니까 이번 주엔 이와쨩한테 가지마, 맛키. 아무래도 단 둘이 시간을 보내야 할 거 같거든.”
“야, 오이카와. 꼭 가야겠냐. 그러지 말고 좀만 시간을 주면 안 될까? 내가 이와이즈미한테 가서 먼저 설명할 테니까, 응?”
몹시 절박한 부탁이었으나 오이카와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이 나한테 먼저 한 말이야. 직접 가서 물어보라고.”
“나는 안 말했어. 마츠카와 쟤 혼자 말했지.”
머리를 싸맨 채로 하나마키가 구시렁댔다. 그거나, 저거나. 오이카와는 일축했고 마츠카와는 양손을 들어 항복 선언을 했다. 이거 봐라. 손가락으로 마츠카와를 가리키니 하나마키는 제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손에 힘을 주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와쨩한테 내가 갈 거라는 둥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단단히 계획해 실행에 옮긴 일이었다.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제게 말하지 말라 했으니 찾아간단 소리를 들으면 금세 날라버릴 지도 모른다. 오이카와는 두 친구를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뭐가 틀리면 이번엔 정말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알겠지?”
이와이즈미는 오랜만에 아침이 즐거웠다.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여섯 시간을 잔 것이다. 어제 정기검진으로 갔다 오는 길에 들린 대형마트에서 무료 시연용 안마의자를 이용한 덕이었다. 걷느라 다리가 붓기도 했거니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용했던 것인데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회사에 다닐 적, 몇몇 사람들이 회사 휴게실에 안마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부르짖었던 게 새삼 공감이 갈 정도였다. 집에 하나 들여놓았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지만 좁은 집에 놓을 공간도 없거니와 가격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대신 일만 잘 풀린다면 지난주에 봐두었던 마사지기 중 하나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트 바로 옆에는 현 내 규모가 가장 큰 실내체육관이 있는데, 그 앞에 시외버스 정류장이 위치해있다. 30분의 안마로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정류장에 섰던 이와이즈미는 버스가 올 때까지 체육관을 바라보았었다. 의미 없이 공간을 떠돌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문 옆 게시판에 닿았다. 전국고등학교종합체육대회 사이타마 예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와이즈미는 잠자코 생각했다. 스포츠 경기는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선수를 포착해야 되어 다소 전문성이 필요했다. 이와이즈미는 첫 시작이 배구 경기 촬영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익혔지만 대개 작은 신문사의 경우 이런 쪽의 기자가 없었다. 사이타마는 도쿄와 가깝다 보니 지역 신문사가 다른 곳들에 비해 작은 편이다. 분명 이런 행사에 쓸 인력이 충분치 않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와이즈미는 오래 전 사진 파일을 뒤졌다. 대학 때 찍었던 것들을 메인으로 전 직장에서 찍었던 사진 너댓장을 포함해 추린 뒤 편집을 하고 곧장 신문사에 보낼 메일을 작성했다. 그게 어제 저녁 전의 일인데, 오늘 아침 답신이 도착해 있었다. 사이타마로 온지 두 달 동안 몇 번이고 메일을 보낸 것 중 처음으로 받은 답이었다.
신문사에서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토요일 오전 중으로 사무실로 와 달라 말했다. 아마도 페이 얘길 해보려는 것 같았다. 혹은, 경력을 뭉뚱그려 적어놓았으니 그에 대해 물어보려는 것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이와이즈미는 간만에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받을 수 있는 돈은 적겠지만 물꼬를 트는 게 중요했기에 성사만 된다면 큰 수확이었다.
이와이즈미는 11시 즈음에 가도록 하겠다고, 혹 더 이른 시간을 원하신다면 연락을 달라고 연락처를 함께 적어 답장을 보냈다. 이어 그는 휴대전화를 들었다. 하나마키에게 연락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토요일은 그가 내려오기로 한 날이다.
[이와이즈미?]
신호가 평소보다 짧게 끊겼다고 느낄 새도 없이 들린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어, 난데. 너 무슨 일 있냐? 왜 그렇게 급해.”
바쁘면 끊고 이따 하고. 이와이즈미의 말에 하나마키가 황급히 부정했다.
[안 바빠. 그냥… 어… 뭔 일 있나 해서.]
“나한테 일 있을 게 뭐가 있어. 한적한 시골 동네서 빈둥대는데.”
[아니, 뭐… 일단은 임산부니까….]
“그런 일 생기면 119를 불러야지, 도쿄에 있는 놈한테 전활 해서 뭐하냐.”
[아무튼 간에. 그럼 별 일 없는 거지?]
재차 확인 하는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묵묵히 옆에서 도와달라고 해야 돕는 마츠카와와 달리 하나마키는 조금 유난을 떠는 구석이 있긴 했다. 하지만 오늘 따라 유독 심했다. 이와이즈미는 의아함과 동시에 웃음이 날 지경이었지만 전해야 할 말이 우선이었다.
“그래, 일은 없어. 전화 한 건 너 토요일에 오지 말라고 하려던 거였고.”
[왜?!]
전화기 건너에서 소리가 크게 터졌다. 아오, 귀청이야. 이와이즈미는 순간적으로 멀찌감치 전화기를 떨어뜨렸다가 다시 가까이 했다.
“뭔 소리를 그렇게 크게 질러.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아니, 미안. 그… 왜? 왜 갑자기 오지 말라고 하는 건데?]
“밖에 일이 좀 있어. 약속이 잡혀가지고.”
[누구? 누구랑 만나는데?]
어쩐지 추궁을 받는 꼴이었다.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이와이즈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잠자코 물음에는 답했다.
“신문사 사람.”
[신문사?]
“지역 신문사에 사진이 좀 필요한 거 같아서 소일거리 좀 해보려고. 근데 너 나 취조 하냐?”
이와이즈미는 왜 이렇게 과민반응이냐는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냥 걱정 돼서.]
“별 걸 다 걱정한다. 나 말고 네 일이나 신경 써.”
말끝에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떠올렸다. 연락할 것처럼 굴었다던 오이카와에게선 여전히 메일이 없었다. 신경을 끄기로 했지만 막상 하나마키와 얘기하고 있으니 한 번 물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러기엔 하나마키의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뒤숭숭한 꿈이라도 꿨나 싶을 정도로 유난을 떠는 게, 모든 것이 평온하단 신호를 보내고 나중에 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 말고, 토요일에 집에서 푹 쉬기나 해라.”
응, 하고 하나마키가 수긍하는 것을 듣고 이와이즈미는 전화를 끊으려 휴대전화를 귀에서 떨어뜨렸다. 그때 뒤늦게 하나마키가 말하는 게 들렸다. 이와이즈미는 도로 전화기에 귀를 대고 뭐라고 했느냐 되물었다.
[마츠카와나 나 아닌 사람이 오면 문 절대 열어주지 마.]
어린 애한테나 할 법한 말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인상을 쓴 채로 짧게 말했다. 끊자.
임신… 했네요?
이와이즈미를 본 기자가 처음 한 말이었다. 생경한 것을 보았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괴상한 것을 보았을 때의 거부감이 반반 섞인 시선. 절 위 아래로 살피는 두 눈이 이와이즈미에겐 익숙했다. 그의 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길거리에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와이즈미는 마치 인사말을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가지고 온 카메라 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기자는 뒤늦게야 자기가 실수했단 걸 알아차리고 허둥지둥 했으나 끝까지 사과는 없었다. 대신에 면접 내내 그는 나름대로 친절히 이와이즈미를 대했다.
신문사와의 이야기는 이와이즈미의 예상대로 흘렀다. 그들은 우선 이와이즈미의 경력을 확인했다. 이와이즈미는 사실 대로 말했다. 대학 때부터 사진을 찍었고, 졸업 후 A일간지에서 3년간 스포츠연예부 사진기자로 활동하다 개인사정으로 퇴직했다고. 보통 개인사정이라 하면 의뭉스럽게 생각할 테지만 이와이즈미의 몸을 본 이상 귀결 될 수 있는 답이 한 가지 뿐이라 그들은 더 이상의 것을 묻진 않았다. 대신 바로 페이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장황하게 에둘러 말했지만 결론은 자기네들은 규모가 작아서 전 직장과 같은 대우는 어렵단 말이었다. 이 역시 생각대로 여서 이와이즈미는 대번에 흥정을 했다. 인터하이에서의 사진값을 낮게 받는 대신 추후 두 달간 다른 일거리를 맡겨달라고.
거래는 수월히 성사되었다. 카메라를 꺼내 볼 필요도 없었다. 가방에 넣어진 채로 돌아오는 길에서 마저 고스란히 제 어깨에 달려있는 것에 이와이즈미는 약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십 분을 좀 넘게 걷고 있었다. 동네 입구에서 조금 외진 곳에 집이 위치하고 있긴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선 멀지 않았다. 기껏해야 칠 분 남짓 거리. 그 이상을 걷고 있는 건 부러 마을 입구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일을 해야 한단 생각밖에 없었는데 막상 성사되고 나니 조금 이상했다. 들떴다고 하기에는 무거웠고, 그렇다고 가라앉았다고 하기에는 기분이 좋았다. 호르몬 탓일까. 의사 선생은 임산부답지 않게 감정기복이 없다고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게 걱정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호기심에서 오는 것인지 이와이즈미로선 알 수 없지만 선생의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랬던 것이 어쩌면 뒤늦게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꼭 십 여 년 전의 자신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제 클라이언트가 된 지역 신문사의 기자는 이와이즈미가 제출한 사진 한 장을 콕 집어 말했었다.
-이 사진, 되게 좋네요. 오이카와 선수 팬이었어요, 혹시?
그 사진은 대학 3년 당시에 찍은 사진이었다. 오이카와가 전일본 국가대표 팀에 갓 합류했을 때, 그리고 두 번째 전국 우승을 했을 때. 고교 때까지 한 번도 전국에 가지 못 했던 그는 대학에선 매 대회마다 본선 코트를 밟았었다.
이와이즈미는 동창이라 답했고, 물어본 기자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확실히 이와이즈미는 그의 팬이 아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런 담백한 명칭으로 표현하기엔 이와이즈미가 가진 감정이 너무 달랐다. 형태부터 성질까지 모두.
뜨뜻한 바람이 머리칼을 가르고 지나간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웠다. 기분이 이상한 것은 호르몬 탓이 아니라, 괜히 과거 일이 생각나서 일 테다. 인터하이와 대학 시절의 사진. 하나하나가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요소였다. 얽매여 있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는 가방을 고쳐 메고 걸음을 빨리 했다. 정류장을 지나쳤으니 집까지 이제 멀지 않았다.
블럭 하나를 직진하고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집 대문이 조금 멀지만 정면으로 보인다. 앞으로 세 블럭을 더 걸으면 된다. 하늘 중앙에서 살짝 꺾인 햇빛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것을 밟으며 시선도 따라 옮겼다. 점점 나가야 할 길이 줄어들었다. 그 앞에 못 보던 차가 서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발을 멈췄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어느 집을 찾아온 차량인지 생각했다. 그러다 엊그제 하나마키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진짜 내가 애도 아니고.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소리에 이와이즈미는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는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다섯 발자국을 옮기고 여섯째를 떼었을 때, 차의 문이 열렸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감싸인 길고 탄탄한 다리를 시작으로 다부진 몸이 이와이즈미 앞에 섰다. 이와이즈미의 눈이 커졌다 가늘어지더니 도로 커졌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2장
일간지 기자로 생활하기 힘든 점은 여러 가지 꼽을 수 있는데, 명절과 공휴일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어 있단 점도 그 중 하나였다. 문화부 같이 일정한 사이클이 있는 부서라면 조금은 휴일을 누릴 수 있겠지만 언제나 일거리가 넘쳐나는 사회부는 주5일제의 환경마저 보장 받지 못했다. 물론 사측에서는 나라의 명령대로 연차, 월차 모두 꼬박꼬박 쓰라 압박을 주었다. 하지만 기자들 대부분이 택한 건 휴일 대신 돈이었다. 이와이즈미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이와이즈미는 한 해의 마지막 날마저 야근으로 보냈다. 오전에는 요코하마 출장도 있었다. 마지막 날이든, 첫 날이든 그의 직장에선 똑같이 근무일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분위기마저 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당장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니면 되도록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걸 권했고, 새해 복 많이 받으란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타지에 혼자 나와 사는 청년인 이와이즈미는 단지 빨리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어서 그가 가장 늦게 퇴근을 한 것이었다. 대신 내일은 오후에 얼굴만 비춰도 되었다. 물론 평소의 그라면 오후는커녕 오전부터 나와 일을 하겠지만, 이번은 남들 말대로 출석체크만 할 계획이었다.
오후에 짬을 내어 장 본 것들을 들고 이와이즈미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숫자가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그는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다.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느라 며칠간 계속 된 야근으로 피로가 조금 쌓였는지 목과 어깨가 무거웠다. 이와이즈미는 두어 번 어깨를 으쓱여 이완시키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열 시 반. 준비를 다 끝내면 대강 열 한 시는 되겠구나 하고 혼자 중얼댔다. 계기판의 숫자가 점차 느리게 바뀌다 곧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고 드러나는 복도로 이와이즈미는 발을 옮겼다.
깔끔하단 것을 제외하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외관이지만 도심지에 가깝고 철통같은 보안시스템이 작동중인 맨션은 실상 좀 무서운 몸값을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아마도 이와이즈미와 같은 일개 회사원들은 평생 살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곳에 이와이즈미가 비밀번호까지 당당히 누르고 들어온 것은 순전히 오이카와 토오루 때문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신발이 널부러진 것을 제외하곤 온통 휑했다. 이와이즈미는 발로 밀어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안으로 향했다. 그는 우선 장본 것부터 풀었다. 냄비에 부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전골 세트는 식탁 위에, 사온 술은 냉장고로 향했다.
-자냐, 오이카와.
침실 방문을 열며 이와이즈미가 말했다. 널찍한 침대 위에 길고 커다란 것이 이불을 둘둘 말고 있었다.
-늦어, 이와쨩.
오이카와가 부스럭 대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일찍 오라고 했잖아. 이 오이카와상이 연말에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늦을 수 있어.
-여친한테 안 차였으면 부르지도 않았을 놈이 말은 잘한다.
-불렀을 거거든? 오이카와상은 마음이 너그러워서 늘 혼자라 외로운 이와쨩을 항상 신경 쓰고 있었다구.
-아, 그래. 그래서 지난주 새벽에 전화해서 울고불고 난리를 친 거겠지.
밤새 오이카와의 하소연-그렇게 잘해줬는데 도대체 왜 차는 거야, 다들?-을 들어주느라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일을 떠올리니 이와이즈미는 새삼스럽게 짜증이 솟았다. 그는 치솟은 짜증을 숨기지 않고 발에 실어 오이카와의 등을 찼다. 아퍼! 하고 오이카와가 소리지르니 조금 속이 풀리는 것 같아서 외투를 벗어 놓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이와이즈미는 손을 씻은 뒤 익숙하게 냄비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 소담히 전골재료를 담았다. 뒤늦게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를 따라 나왔다.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 쓴 채로 그는 비척비척 걸어 이와이즈미의 등에 매달렸다.
-아픈 사람 막 때리고. 이와쨩 폭력적인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좀 심한 거 아냐?
-너 아파?
국물을 붓던 것을 내려놓고 이와이즈미는 몸을 돌렸다. 그에 응하듯 오이카와가 고개를 비스듬히 내밀며 말했다.
-머리도 무겁고 몸도 무거워. 열도 나는 거 같고.
곧장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는 잠자코 손등을 타고 올라오는 체온을 쟀다. 하지만 조금도 뜨겁지 않았다. 열 없는데? 조금 심각하던 눈이 금세 한심한 꼴을 봤단 듯이 가늘어졌다.
-꾀병 부리지 마라.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이마를 손등으로 가볍게 치고 도로 냄비에 집중했다. 오이카와가 툴툴댔다. 진짜로 아프다니까. 이와이즈미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그 망할 이불 네 침대 위에 곱게 펴서 올려놓고 오기나 해. 하는 김에 방도 좀 치우고. 잠만 자는 집이라고 치우지도 않냐?
결국 백기를 든 것은 오이카와였다. 그는 다시 이불을 질질 끌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돌려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오래 가는 줄 알았더니. 불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이와이즈미는 얼마 전 오이카와를 찬 여자를 떠올렸다. 베타에 가느다란 몸, 고운 피부와 오목조목 조화로운 얼굴. 여태껏 오이카와가 만나왔던 여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애인들과 끝이 좋지 못 했다. 그들은 연락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거나, 대뜸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고 만나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 등 항상 먼저 오이카와에게 이별을 얘기했다. 성격이 좀 더럽긴 해도 겉으로 봤을 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있는 녀석인데 도대체 뭐가 문제라서 매번 차이기만 하는지 이와이즈미 역시 의문이었다. 물론 오이카와에겐 네가 잘못한 게 있겠지, 멍청아. 라고 말했지만, 이와이즈미 역시 이해가 되진 않았다. 그래도 이번은 확실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오이카와가 여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오래 만났고, 나이가 나이니 만큼 결혼 생각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결국 이전 사람들과 같은 결말이었다. 외모가 비슷했듯이.
아주 오래 전, 오이카와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신경을 끊을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관심 없는 척 했지만 그녀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나마 이와이즈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은 오이카와의 연애주기가 짧다는 것이었고, 반면에 저는 기억도 정확히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왔단 것이었다. 큰 변화가 없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될 관계란 것은 이와이즈미에게 잠깐의 우월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 가는 감정은 되지 못 했다. 이와이즈미가 원하는 관계는 지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우월감은 열등감으로 배가 되어 돌아왔다. 오이카와의 애인들이 신경 쓰던 것은 정확히 그 열등감에서 왔다. 저와는 하나도 공통된 부분이 없는 여자들.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마음은 절대 이뤄질 수 없단 걸 알 수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아무렇지 않게 오이카와의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런 일이 있을 때에만 간간히 생각할 수 있게 된 건 시간이 그만큼 지나서였다. 이와이즈미는 더 이상 17살의 어린 애가 아니었고, 감정은 그렇게 영원하지 못 했다.
냄비 전체가 바글바글 끓어올랐다. 이와이즈미는 불을 끄고 냄비를 거실 테이블 위로 옮겼다. 계속 불 앞에 서 있어서 그런지 이마가 뜨거웠다. 그는 얼굴을 한 번 쓸고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식기를 챙기고, 술을 꺼냈다. 냉장고의 한기가 어깨를 시리게 했다. 방을 얼추 정리한 오이카와도 밖으로 나왔다. 그는 꺼내놓은 술을 한 번에 옮겼고 그 뒤를 따라 이와이즈미가 식기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자리에 앉았다. 의미 없는 연말 특집 방송만 할 테지만 이왕이면 시끄러운 것이 좋아 텔레비전의 전원도 켰다. 이와이즈미가 먼저 맥주를 따랐다.
-마시고 내년엔 제발 그만 차여라.
-제발이라고 할 만큼 많이 안 차였거든?
오이카와는 발끈 했지만 이와이즈미가 건네는 잔은 고이 받았다. 이와이즈미가 킬킬 대면서 오이카와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술이 줄어들수록 이야기는 더 꽃을 피웠다. 내용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둘은 연신 웃었다. 얼굴이 점차 붉어지고 이마와 목덜미에 열이 올랐다. 어느새 테이블 한 켠을 가득 채웠던 술이 바닥에 뒹굴었다.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둘은 흐트러진 자세로 의미 없이 웃어댔다.
-야, 오이카와. 너…
이와이즈미는 제멋대로 되지 않는 혀에 애써 힘을 주며 말을 시작했다. 너, 향수병 엎었냐. 생뚱맞은 소리였지만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와이즈미가 코를 킁킁대며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서 냄새가 엄청 나는데.
-뭔 소리야.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이와쨩 몸에서 나는 게 아니고?
오이카와가 딸꾹질을 하며 맞받았다. 이와이즈미는 다시 또 고개를 저었다.
-나 아니야. 너야, 너.
-아니래도. 됐어. 내가 확인해보면 돼.
땅을 짚고 오이카와가 일어섰다. 적잖이 취했지만 다행히 몸을 가눌 정도는 되었다. 그는 금세 이와이즈미가 반쯤 누운 자리로 가 앉았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를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이와이즈미가 여전히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안 나지?
오이카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미동도 않고 숨만 들이 쉬고 내 쉬었다.
-야, 망할카와. 자냐?
오래토록 오이카와가 움직이지 않자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아니.
오이카와가 답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이와이즈미와 눈을 마주했다. 순간 이와이즈미는 제 코에 닿는 진한 향기에 숨을 멈춰야 했다. 그는 콜록 대며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너 향수 쏟은 거 맞는 거 같은데.
오이카와는 잔 기침을 그치지 못하는 이와이즈미의 턱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따끈한 볼이 손바닥을 데웠다. 오이카와는 열에 이끌려 이와이즈미의 고개를 제게 가까이 끌어왔다. 코끝과 코끝이 마주했다. 그는 이와이즈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이와쨩.
그리고 단숨에 입술이 맞닿았다.
이와이즈미는 하나마키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마츠카와나 나 아닌 사람.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닌 사람’. 거기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상태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하느라 일종의 경고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 했다. 이제야 명백히 파악이 되는 앞뒤에 이와이즈미는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도망갈 방법을 강구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오이카와에게 아니라고 말해야 한단 것이다.
제 배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것을 보아 하나마키는 집 주소는 말해줬을지언정 제 사정은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못이 박힌 듯 서 있는 오이카와 옆을 지나 문을 열었다.
“들어와.”
문을 열어둔 채로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오이카와는 말없이 뒤따랐다.
“앉아있어. 물 가져다줄게.”
이와이즈미는 식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는 동안 오이카와는 좁은 거실 바닥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책장에 자리한 세 권의 책이었다. 그것들은 공통적으로 아주 두꺼웠으며, 제목에 “육아”가 들어갔다. 오이카와는 팔을 뻗어 그 중 가장 두꺼운 것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 팔에 유리잔이 닿았다. 이와이즈미가 내민 것이다. 오이카와는 손끝에 닿았던 것 대신에 제게 내밀어진 잔을 받아들었다. 새삼스럽게 목이 말랐다.
“이와쨩. 배 말이야.”
“네 애 아니야."
먼저 운을 띄운 오이카와를 가로막듯이 이와이즈미가 말했다. 오이카와의 얼굴은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너 내가 바로 다음 날에 했던 말 잊었어?”
신년 첫 날, 같은 침대에서 일어난 심경은 아수라장에 가까웠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의 히트 주기가 찼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 했는지 의아했고 동시에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감상에만 빠져있기엔 닥친 현실이 더 컸다. 이와이즈미는 깨지 못한 오이카와를 내버려두고 황급히 그의 집을 나왔었다. 씻지도 못해 겨우 체액만 닦아낸 몸에선 오이카와의 냄새가 진동했다. 알파나 혹은 오메가의 형질을 가진 낯선이가 그를 봤다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봤을 터였다. 어쩌면 제정신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이와이즈미는 응급실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야 한단 생각뿐이었다. 사후피임약은 가능한 빨리 먹어야 실패하지 않는다.
“그때 약 먹었고, 그걸로 그 일은 끝난 거야.”
약을 먹고 집에 들러 씻은 뒤 곧장 회사에 갔다. 그는 그날도 또 야근을 했다. 아예 집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일에 매달리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제게 오는 연락을 받았다. 밤새 전화를 울리게 하고, 그 다음날마저 계속 그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물론 오이카와였다. 이와이즈미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하루간 있었던 일을 말했다. 병원에 다녀왔고 약을 먹었으며, 바로 먹었으니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지난밤의 사고는 거기서 끝이라고. 어디 하나 오이카와가 말을 붙일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때 한 말 이제는 못 믿어. 당장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믿어, 내가.”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손을 잡고 그를 1인용 쇼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았다. 손은 여전히 놓지 않은 채였다.
“내가 다 책임질게. 정말이야. 모른 체 하지 않아. 다 책임질 수 있어.”
마주잡은 손에 힘이 실려 있었고 연한 갈색의 눈에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이와이즈미는 정확히 이런 얼굴을 생각했었다. 한없이 가벼워 보여도 속은 그렇지 않은 오이카와라서 그의 반응을 생각하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이와이즈미는 이런 오이카와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조금 내려 오이카와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밀어냈다.
“말 좀 들어라, 망할카와. 네 애 아니라니까?”
“이와쨩이야말로 거짓말 그만해.”
“아니, 거짓말이 아닌데 어쩌라고.”
“그럼 왜 숨겼는데?”
“네가 이럴 것 같아서.”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맞췄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들어. 이 애 아빠는 오이카와 네가 아니야. 너하고는 전혀 다르게 생겼고,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니까 엉뚱한 짓 하지 말고 돌아가. 그때 그 일은 정말 그걸로 끝이야. 정 못 믿겠으면 말해. 응급실 가서 처방전이라도 떼어다 줄 테니까. 증인도 세울 수 있어. 받자마자 먹었으니까 거기 데스크에 있던 사람들은 다 봤을 거야. 그렇게 해줄까?”
오이카와는 시선만 마주한 채로 답하지 않았다. 조금도 제 말을 믿지 않는단 걸 곧은 눈에서 읽을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한탄하듯 말했다.
“아닌 말로 설령 내가 네 애를 가진 거였으면 미쳤다고 이러고 있겠냐? 너랑 나랑 그런 걸로 묶일 수 있는 사인 아니잖아.”
다행히 또 한 번의 부정은 효과가 있었다. 오이카와의 시선이 이와이즈미를 벗어났다. 그는 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눈을 질끈 감고 미간을 좁혔다.
“그렇지. 나랑 이와쨩이 이렇게 묶일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
마침내 오이카와가 수긍했다. 이와이즈미는 안도의 한숨이 터지려는 것을 제 주먹을 꼭 쥐는 것으로 간신히 막았다.
오이카와는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를 내려다보았다. 까만 정수리와 볼록하니 튀어나온 배. 배에 조금 더 시선을 주던 그는 기지개를 키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침실 어디야? 아, 저긴가?”
부엌을 마주보는 곳에 있는 방문을 가리키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그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집이 작아 몇 걸음 채 떼지 않아 바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와이즈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지만 몸이 무거워 방문 앞에 섰을 땐 이미 오이카와가 침대를 파고들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냉큼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러자 오이카와의 손이 이와이즈미의 손목을 붙잡았다. 오이카와는 힘을 주어 이와이즈미를 끌어 당겼다. 배가 눌리지 않도록 등이 침대에 바로 닿게 한 뒤, 어깨를 감싸 안아 눌렀다. 이와이즈미가 발버둥 쳤다.
“뭐하는 건데? 야!”
“자자, 이와쨩.”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바투 잡으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망할카와 이게 뭔 짓거리―”
“자자.”
그리고 한 번 더 말했다. 이와이즈미는 귓가에 닿는 숨에 움직이던 것을 멈추었다. 그러자 어깨를 누르던 힘이 빠지고 자연스럽게 무게감만이 남았다. 오래 운전해서 피곤해. 고개를 코앞에 마주한 채로 오이카와가 낮게 말했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그의 두 눈은 조금 벌갰고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뜨길 반복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를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잘래. 한 번 더 같은 말이 나왔다.
스케쥴 외에 멀리 다닐 일이 없는 오이카와였다. 한 시간하고 그 반이 걸리는 시간의 운전은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는 내내 들었던 많은 생각들, 아마도 화에 가까웠을 감정들이 한 순간에 풀렸으니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와이즈미는 결국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익숙한 체온이 등을 통해 오이카와에게 전달되었다. 그때 오이카와는 눈을 감고 최대한 고른 숨소리를 내며 결코 이와이즈미에게 속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오이카와!”
뒤에서 절 부르는 소리에 오이카와가 걸음을 멈추었다. 포즈가 제법 경박한 것이 잔뜩 흥이 난 모양으로,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뛰어온 하나마키는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이 방금 들은 소리가 사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너 결혼한다며.”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니 하나마키의 회사는 반쯤 초토화 되어 있는 상태였다. 무슨 스캔들이라도 터졌어? 하고 곧장 지나가던 동료를 붙잡아 물으니, 상대는 곧 터질 지도 몰라요. 라는 답을 했다. 그리곤 오카다를 콕 집어 가리켰다. 저 친구가 잘 알려줄 거예요. 그 말대로 사색이 된 오카다는 하나마키에게 방금 일어난 일을 털어놓았다. 오이카와 씨가 결혼한대요.
“아, 그거. 응, 그렇게 됐어. 안 그래도 맛키한테 직접 말하려고 찾아갔는데 없다 해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손에 쥔 차키를 보이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줘야 알 거 아냐.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날 죽일 것 같이 굴어놓고서 갑자기 새신랑 모드야?”
“설명할 게 뭐 있어? 맛키도 어차피 다 알잖아.”
“아뇨, 전혀 모르겠거든요.”
“왜 몰라. 이와쨩 임신한 거 알고 있잖아.”
하나마키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윗니에 부딪쳤을 때, 머리에서 빠르게 인과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오이카와를 바라보았다. 오이카와의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그니까 내가 이와이즈미가 임신한 걸 알고 있으니 다 안 거다?”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 너? 너야?!”
이번에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오이카와상이 아빠가 된답니다.”
“말도 안 돼!”
하나마키는 머릿속으로 눈앞의 오이카와와 사이타마에 있을 이와이즈미를 붙여놓았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이질적이었다. 부른 배가 걸렸다. 그것은 너댓 달 뒤면 갓 태어난 아이가 될 것이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지웠다. 이게 아니라 다른 게 답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답을 앞에 두고 엉뚱한 답을 궁리해냈다.
“아니, 너 지금 그냥 이와이즈미가 안쓰러워서 그런 거지? 야, 아무리 너네 둘이 둘도 없는 소꿉친구 사이라지만 네 애도 아닌 애를 두고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하나마키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오이카와는 단숨에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맛키, 내 아이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실례지 않아?”
하나마키는 웃음을 그쳤다.
“갑작스러워서 그럴 수 있단 거 이해하는데 오이카와상이 바보도 아니고,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역시 답은 명백했다. 하나마키는 발을 쾅쾅 구르고 싶었다. 대신에 그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오이카와는 그런 하나마키를 바라보다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선 하나마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맛키도 좀 고생해줘야겠어. 오카다 씨한테 말했더니 자기는 아직 초짜라 이런 거대한 스캔들 다루는 능력이 없다고 울상이더라고. 그냥 이와쨩이 임신해서 결혼할 거라고 한 건데 뭘 그렇게 겁을 먹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니 어쩌겠어. 맛키가 나랑 이와쨩을 위해서 오카다 씨 좀 도와야 않겠어? 저번에 호주 스케쥴도 맛키가 빡빡하게 잡으라고 손 대줬던 거라며. 그니까 부탁 좀 할게. 아이 태어나고 결혼식 할 때까지 이야기 안 새나가게 조심해줘.”
충격적인 소식을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일거리가 잔뜩 하나마키 앞으로 쌓였다. 하나마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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