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지 못하는 날들 시리즈
유료

뷰티풀 선셋

잠들지 못하는 날들 외전

흙과 눈(目)

이와이즈미 세이코가 아들의 연락을 받은 것은 이틀 전이었다. 연락을 먼저 하는 일이라곤 도통 없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통화를 한 게 보름 전인데, 그게 신경이 쓰였던 모양인지 아들은 정말로 먼저 전화를 해왔다. 환한 목소리로 어쩐 일이냐며 전화를 받는 그녀에게 하나 뿐인 아들 하지메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자신이 지금 일본에 있고, 이틀 뒤에 미야기로 갈 예정이라고. 그리곤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면서 주소와 시간을 메일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그녀가 뭐라 더 물을 것도 없이 통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금세 도착한 메일을 확인해도 이상의 말은 없었다. 세이코는 황당한 상황에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정신을 놓은 사이 아들은 제 아빠에게도 연락을 넣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하야토도 아는 바라곤 없었다. 느슨한 구석이 있는 그는 그냥 다 같이 오랜만에 밥이라도 먹자는 거 아니겠냐며 웃고 말았지만 세이코는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밀려오는 업무에 찜찜한 기분은 뒷켠으로 밀려났고 결국엔 그녀도 남편의 말대로 단순한 식사 자리겠거니 하고 수상쩍은 기운을 덮어두었다.

그 심상찮은 기분이 다시 몰려온 것은 웨이터가 방을 안내해줬을 때부터였다. 세이코도 세이코지만 하야토도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작 셋이 만날 공간이 지나치게 컸다. 세팅되어 있는 식기도 6세트로 수가 맞지 않았다. 하야토는 멍한 목소리로 누가 더 오는 걸까, 하고 말했다. 세이코가 고개를 가로 눕히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그러지 않고서야 여섯자리가 세팅되어있겠어, 심지어 예약인데. 하야토도 세이코를 따라 미간을 좁혔다. 혹시 자리 안 내가 잘못된 건 아닐까? 그 말에 그럴 지도 모른다고 답하니 그녀의 남편은 곧장 웨이터를 호출하려 했다. 그러나 문이 먼저 열렸고, 부부의 시선은 고스란히 그쪽으로 향했다.

“오이카와 씨?”

세이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야토도 따라 일어났다. 들어오려던 두 사람은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듯 웨이터를 돌아보았지만 웨이터는 사무적인 미소만 일관했다. 그는 어서 들어가라는 듯이 손끝에 꼿꼿이 힘을 주었다. 결국 오이카와 부부는 문 안 쪽으로 들어섰고 웨이터는 좋은 시간되시라며 문을 닫았다.

“여길 어떻게…?”

오이카와의 어머니가 여전히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하지만 세이코와 남편도 답할 수 있진 않았다.

“저흰 하지메가 연락을 해와서요. 여기에 예약을 해뒀다고 해서 왔을 뿐인데…”

“하지메 군이요?”

몰라서 되묻는 것은 아니겠으나 세이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아들의 소꿉친구네 부모가 조금 불편했다. 교류가 없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아주 많았지만 세대차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세이코는 결혼을 일찍 한 편인데다 외동아들 역시 일찌감치 낳아 길렀던 반면, 아들의 소꿉친구는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형을 둔 늦둥이였다. 그러니 그 아이의 부모는 세이코에게 한참 어른일 수밖에 없었고, 그 간극을 좁히기 어려웠기에 그녀는 아들의 소꿉친구와는 제 아들 못지않을 정도로 절친하게 지내면서도 그의 부모와는 거리를 유지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던 중에 다소 어려운 상대와 마주했으니,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은 그녀로선 불가항력이었다.

“저는 토오루 연락을 받고 왔는데요.”

“그럼… 토오루 군과 하지메가 같이 이 자리를 만든 걸까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지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요, 이상하게시리.”

“그러게요, 이상하게.”

세이코가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일단 앉으세요. 맞은 편 자리를 정중히 가리키며 세이코가 말하자 부부는 따랐다. 세이코와 그 남편도 따라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빠르게 오고가며 신호를 보냈다. 이게 대체 뭐야? 당신이 하지메한테 전화 좀 해봐. 하야토가 휴대폰을 꺼내려 벗어뒀던 웃옷을 뒤적였다. 그러던 차에 다시 문이 열렸다. 자리에 앉아있던 넷의 고개가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사람은 세이코와 하야토의 아들이었다.

“안녕하세요.”

하지메는 오이카와 부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원래도 인사성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몇 년 만에 만나서인지 이전보다 정중했다. 조심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가 자리에 앉았고 어른 넷의 시선이 고스란히 그의 움직임을 따랐다. 무언가 물어봐야 하는데, 막상 아무렇지 않은 사람을 보고 있자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뭐부터 물어야 하지. 세이코는 결정을 내리지 못 했지만 입부터 열었다.

“뭐니?”

주어가 없어 불분명한 물음이지만 하지메는 다 알아들은 것처럼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다 눈앞에 물잔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곧장 입을 축였다. 세이코는 다시 한 번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보아도 제 아들이 잔뜩 긴장한 것 같았다. 긴장할 이유가 뭐가 있어서? 좀 전의 당황스러움과 석연찮음은 한데 어우러져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손끝에서부터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지메, 왜 이런 자릴 만든 거야?”

세이코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좀 더 정확히 재차 물었다. 하지메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이―, 아니 토오루도 오면 말할게…요.”

마지막 음절은 오이카와 부부를 보며 말했다. 고개를 트는 움직임이 뻣뻣해 보였다.

“하지메 군, 토오루는 어디 있어요?”

“금방 올 거예요. 뭐 좀 챙기느라 앞에서 기다리는 거라…”

세이코는 당장 그녀의 아들을 붙잡고 따지고 싶었다. 뭘 챙기는 건데? 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이러는 거니? 그녀는 소리치는 대신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마주 쥐었다. 이윽고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메의 말대로 금방이었다. 하지메를 제외한 넷의 시선이 한 번 더 문 쪽을 향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얼굴의 절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쓴 채로 토오루는 이와이즈미 부부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제 팔에 안겨있는 아이를 돌려 안으며 한 번 더 인사했다. 캇쨩, 인사해야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야. 그 말에 한 살 하고도 몇 개월이 지난 듯 보이는 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밥이 코로 넘어가는 지, 입으로 넘어가는 지 모를 시간이었다. 이와이즈미는 제게 쏟아지는 시선과 물음들이 괴로웠지만 그보다 제 엄마가 제게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가장 무서웠다. 괜히 결혼 결심을 한 건가, 하고 후회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런 식으로 오이카와와 지낼 순 없었다. 저야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대중의 시선이 곧잘 따라붙는 오이카와에겐 커다란 스캔들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새로 시즌이 시작되었으니 계속 사이타마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도쿄에 올라와 같이 사는 게 오이카와의 생활을 위해 나았다. 언제 꼬리가 밟힐지 모른단 계산도 있다. 안 그래도 지난 시즌부터 오이카와가 자주 여행을 떠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그건 여행이 아니라 제 집에 오는 것이었는데, 이게 계속 반복된다면 분명 몇 해 전의 저와 같은 누군가가 냄새를 맡고 뒤를 밟을 것이 분명했다. 그 누군가가 오이카와와 테츠가 같이 있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14개월이 된 테츠는 더더욱 오이카와를 빼닮아가고 있었으니 답은 뻔했다.

한창 고민 중이던 때에 마침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기 키우는 부모들이 다 그러기 마련이듯 이와이즈미 역시 테츠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지 몇 개월이나 지났단 걸 그제야 깨달았다. 여전히 호주에 있다고 알고 계시는 엄마는 그에게 아무리 외국물이 좋아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니니, 하고 타박을 시작했고 이와이즈미는 뒤늦게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아직도 제 부모님은 테츠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의 계획은 아이가 한 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께 밝히지 않는단 것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공적으로 어그러졌던 그의 계획이 부모님께 말해야 한단 것조차 잊게 만들었다. 이와이즈미는 한참을 끙끙 대다 결론을 지었다. 일단 오이카와와 결혼을 하기로 하고, 양 부모님께 말하자. 아이의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든 오이카와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든 부모님과 만나는 자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이와이즈미는 그때부터 계획을 세웠다.

벙 찐 얼굴의 어른들은 아랑곳 않고 오이카와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와이즈미는 사실을 토로했다. 자기네가 어쩌다보니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 애가 작년에 태어났으며, 아기는 벌써 뛸 줄도 아는데다, 두 사람은 간단히 결혼을 하고 도쿄에서 같이 살 예정이라고. 숨 넘어 갈 듯이 이야기를 끝내자 테츠가 짝짝 박수를 쳤다. 그냥 손장난에 불과하지만 꼭 제게 “와, 정말 훌륭한 연설이네요. 퍽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해 하셨겠어요.” 라고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없었다. 물은 엎질러졌으니 상황 전달만이라도 빨리 끝내는 수밖에. 타이밍 좋게 전채요리가 나왔고 오이카와가 뻔뻔스럽고 호들갑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하니 모두들 따라했다.

처음 반응을 보인 건 오이카와의 어머니 쪽이었다. 그래서 애기 이름을 뭘로 지었다고? 이와이즈미는 분명 테츠의 이름도 말했지만 하도 말이 빨라 못 들으신 모양이었다. 입안에 든 것을 급히 넘기고 테츠카즈요, 하고 답하니 잠시 후에 한자를 물어보셨다. 그에 대해선 오이카와가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오래 전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젠 그도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이후에도 물음이 계속 오고갔지만 대부분 오이카와의 부모님이 건넨 것이었고, 이와이즈미의 부모 쪽에선 아빠로부터 세 번 받은 것이 전부였다. 집은 구했냐, 결혼식은 어떻게 할 거냐, 도쿄엔 언제 갈 거냐. 결혼에 대한 이야기만 이와이즈미가 답했다. 둘은 따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기로 했다. 여태 부모님이 뿌리신 축의금을 생각하면 죄송한 일이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노라고 말했다. 그때 이와이즈미의 바로 옆자리에서 물이 엎질러졌다. 그의 엄마가 잔을 미끄러뜨린 것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알아챈 이와이즈미는 더더욱 죽을 맛이 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오이카와의 부모님이 아이를 안고 얼렀다. 테츠는 낯을 가리지 않는 편인데다, 저와 닮은 외모를 한 조부모라 그런지 금세 그들 품에서 재롱을 부렸다. 그러나 이와이즈미의 부모님은 그런 것이 일절 없었다. 사실 아버지는 원했다. 그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심지어는 안아 보겠다며 한 번 팔을 뻗기도 했다. 아내가 그의 손등을 찰싹 하고 때려 뻗은 즉시 거둬야 했지만. 그러니 아이에게 유일하게 매몰찼던 것은 이와이즈미의 엄마뿐이었다. 그녀는 식사 자리가 어느 정도 파하자 재빨리 저희 부부의 몫을 계산하고 자리를 나섰다. 이와이즈미는 테츠를 오이카와에게 맡기고 곧장 뒤를 쫓았다.

“엄마.”

“누가 네 엄마야?”

“엄마, 제발.”

주차장에 다다라서야 세이코가 고개를 돌렸다. 잔뜩 화가 오른 눈은 시선만으로도 이와이즈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았다.

“호주 특파원도 죄다 거짓말이었지?”

이와이즈미는 뻣뻣하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세이코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황급히 그녀의 남편이자 이와이즈미의 아버지가 그녀를 말렸지만 작은 몸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 그녀는 꿋꿋이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때리고 밀었다.

“여기 우리 왜 불렀니? 어차피 네 맘대로 다 할 거면서. 이제 와서 사실대로 말하고 축하 좀 받아보려고 했어? 그럼 우리가 얼씨구나 좋다고 축하해주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할 줄 알았어?”

“미안해, 엄마.”

“퍽이나 미안하겠네.”

세이코가 쏘아붙이듯 대꾸했고 이와이즈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야 진심이지만 지금 그녀가 느끼기엔 속 빈 강정 같을 것이 지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아는 것과 별개로 화는 가라앉지 않고, 또한 모든 사과를 받아줄 필요도 없기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숨기지 않았다. 세이코가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은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쉽진 않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수 있는 날카롭게 벼린 말들을 애써 삼켰다.

“그래, 잘 해봐. 아주 잘 해봐, 이와이즈미 하지메. 나는 앞으로도 아무 상관 안 할 테니까.”

그녀는 남편이 붙잡은 제 팔을 빼내고 몸을 돌렸다. 다시 빠르게 내딛는 걸음마다 미처 다 터트리지 못한 분노와 속상함이 매정함으로 포장 되어 바닥을 두드렸다.

지난 며칠 간 걱정했던 주말 저녁은 생각보다 낙관적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기분이 썩 좋진 못했다. 오이카와는 연습 내내 심란해 하는 이와이즈미가 아른 거렸다. 사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네 부모님보단 제 부모님의 반응을 걱정했다. 이제 곧 장년층에 들어설 분들인 만큼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려와 달리 부모님은 상황을 빠르게 인정하고 수긍하였다. 그러나 타박을 피할 순 없었다. 이와이즈미가 그의 부모님을 뒤쫓아 갔을 때, 오이카와도 나름대로 부모님과의 시간을 보냈다.

-토오루, 네 탓이지?

오이카와에게 아이를 넘겨받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물어서 뭘 해요, 뻔한 걸. 어머니가 건조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아이를 얼렀다. 표정과 상반된 목소리에 오이카와는 얼떨떨해 뭐가 자신 탓이냐며 되묻지도 못했다.

-하지메 군이 오메가란 소릴 들었을 때부터 너희 둘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했지만 솔직히 이건 경우가 없는 짓 아니냐?

-그건 그렇지만 저희한테도 사정이 좀 있었거든요. 이렇게 말씀 드리긴 좀 그래서 많이 생략했지만.

-안다, 토오루.

-뭘 아시는데요?

아버지의 단호한 말에 오이카와는 조금 따지듯 되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그 사정 말이야. 네가 잘못한 거고 하지메 군이 엮인 거잖아. 그래서 해결하는데 이만큼 시간이 걸린 거고. 뭐 틀린 거 있니?

오이카와는 참담한 표정으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이 동시에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라는 의미를 내포한 소리였다. 오이카와의 미간에 조금 힘이 실렸다. 그에 어머니가 대번에 찌푸리지 마, 하더니 이와이즈미 앞에서도 이러느냐며 기껏 받아줬더니 후회하게 만들 셈이냐, 네가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앞으로가 달려있다, 네 아버지 나이 되었을 때에도 사랑 받고 싶으면 지금부터 잘해둬야 한다 등등 온갖 말이 한참 이어졌다. 오이카와는 별 수 없이 고개를 주억 거리며 알고 있다 대꾸해야 했고 그에 아버지마저 거들어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보다 이와이즈미 씨가 걱정이네.

-아무래도 그렇죠? 아이한테 눈길 한 번 주지도 않는 게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인데.

-그러니까요. 새댁이던 시절부터 봤지만 그런 얼굴 한 건 처음 봤어요.

부부가 동시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다시 사이에 있는 자신들의 늦둥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기어코 오이카와의 등을 찰싹 하고 때렸다. 따끔한 통증에 그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오이카와는 한참 등과 어깨를 꿈틀대다 겨우 몸을 바로 하고 왜 그래요, 정말. 하고 불퉁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안고 있던 테츠를 아내 품에 안기곤 오이카와의 눈앞에 오른손 검지를 치켜세웠다. 왼손으론 오이카와의 뒷목을 붙잡고 끌어 당겼다.

-하지메 군한테만 맡기지 말고 네가 해결해야 한다, 토오루.

그는 몹시 비장하게 말했다. 해내지 못하면 결코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지 못 할 것처럼. 아버지는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분명 그 뜻이 맞을 것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라는 건지. 당장 이와이즈미는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몇 번이나 물었지만 알 필요 없단 말로 잘라 내거나 일하러 안 가냐, 쿠소카와 하고 피할 뿐이었다. 직접 연락이라도 드려야 할까. 오이카와는 덜 말라 물기가 남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오이카와, 누구 오셨는데.”

막 탈의실을 나가려던 차에 코칭 스태프 한 명이 오이카와를 불렀다.

“누구요?” 오이카와가 물으니 스태프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이 조금 있으신 여자분인데, 너 곧 나올 거라 하니까 앞에서 기다리신 댔어.”

정보는 고작 두 개였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빠르게 체육관 밖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리문 너머에 이와이즈미의 어머니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종종 대는 폼이 이와이즈미를 연상시켰다. 오이카와는 빠르게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도 같았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하루 이틀 뵌 것도 아닌데 처음 뵙는 것 마냥 초조했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자기객관화가 뛰어난 만큼 제 외모에 자신이 있는 오이카와였지만 지금만큼은 확신이 없었다.

“이와이즈미상!”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걱정과 달리 그녀는 전처럼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조금은 희망을 가져도 될까. 오이카와도 이전처럼 웃는 얼굴을 내보였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오시느라 힘드셨죠. 저녁은 드셨어요? 괜찮으시면 저 아는 곳으로 모셔도 될까요? 여기서 차로 조금만 가면 괜찮은 곳 있거든요. 제가 운전하면 되니까 어떻게…?”

그러나 입 사이로 나오는 말과 몸가짐은 확실히 전과 달랐다. 물론 이전에도 오이카와는 예의가 바랐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허리 숙여 인사했고 조금은 능글맞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이전의 그는 선을 그을 줄 알았다. 지금처럼 숨넘어갈 듯이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이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이냐. 오이카와는 제 숱많은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다행히 그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저녁은 괜찮고. 우리 차 마시는 건 어떠니?”

“차요? 괜찮죠! 괜찮고 말고요.”

다시 오이카와는 과장되게 반응했다. 그리곤 언제 그랬냔 듯이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만 맞춘 채 서 있었다. 결국 연인의 어머니가 턱짓을 했다. 안내 좀 해줄래? 그 말을 듣고서야 오이카와는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이제 그는 건물 벽에 머리를 쾅쾅 부딪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이카와가 먼저 옆 건물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훈련장이 도쿄 시내 한복판에 있단 것이 새삼 다행이었다. 커피숍은 건물 입구 바로 옆쪽에 있었고, 유리문을 통해 들여다보니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쪽으로 향하자마자 직원이 문 앞으로 와 두 사람을 안내했다. 안내 받은 자리는 대로변이 보이지 않는 창가 쪽이었다. 아무래도 오이카와가 알려진 얼굴인 걸 고려한 것 같았다. 자리에 앉으니 메뉴판과 물이 든 글라스가 세팅 되었다. 세이코는 적혀 있는 것을 흘끗 보고 곧장 커피 종류의 무언가를 말했고, 이어 오이카와에게 같은 걸로 하겠냐고 물었다. 어차피 마시는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상황이라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주문 확인까지 마친 직원이 자리를 떴고 세이코가 물을 마셨다.

“이제 생각해보니 네가 배가 고프겠네. 훈련도 막 끝났을 텐데.”

“아뇨, 괜찮아요. 원래 밤늦게 잘 안 먹기도 해서.”

“아직 여덟시도 안 되었는데?”

그야 거짓말이니까요. 오이카와는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또 입을 열었다가 뭔 헛소리를 하려고. 통제가 되지 않은 채 멋대로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입을 가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이코는 그런 오이카와를 잠시 바라보다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조용하지만 빠르게 직원이 다가오자 그녀가 간단한 샌드위치를 부탁했다. 오이카와는 말리지 않았다. 이 역시 제 입이 무슨 말을 뱉을지 몰라서였다.

그렇게 오이카와가 입을 다문 동안 세이코 역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유리창 밖에 시선을 둔 채 미동이 없었다. 바깥에 볼만한 것은 없었다. 그저 호텔 건물 외벽과 바람에 뒹구는 낙엽뿐이었다.

“하지메는 잘 있니?”

주문한 커피와 샌드위치가 나오고 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그럼요. 아이랑 같이 잘 있어요.”

잠시 침묵한 게 효과가 있었다. 오이카와는 머리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로 옮겼다. 이와이즈미는 별다른 이상 없이 잘 지내고 있었고, 그래서 잘 있다고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이 통상적인 의미에서 조금 달라진다면 답은 달라질 것이었다. 가령 하던 것을 멈추고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다, 같은 의미라면 답은 정반대가 되어야 했다. 오이카와는 연습 내내 떠올렸던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그는 처음으로 찻잔에 입을 대었다.

“하지메가 나에 대해서 뭐라 말 한 건 없고?”

“네, 없어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표면적인 사실만 말하자면 그랬다. 오이카와는 크게 숨을 들이 쉬고 내쉰 뒤 한 가지를 덧붙였다.

“제가 물었는데도 말 안 하더라구요.”

세이코의 미간이 좁아들었다.

“내 아들이지만 걔도 참 속을 알 수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말도 안 하고, 멀쩡한 척 하려고 하고. 안 그렇게 생겨서 거짓말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잘하고.”

한숨이 잔뜩 섞인 한탄에 오이카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와이즈미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자신한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만 해도 그렇다. 아니, 그것까진 그럴 수 있다. 테츠가 태어나기 전까지 계속 자신이 아빠란 걸 부정하던 것이 그랬다. 어차피 누구의 아이이든 상관없었고, 결과가 좋으니 오이카와는 가타부타 관련해 말을 하지 않았지만-아이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도 있고- 종종 그때를 생각하면 서운한 구석이 있었다. 약간의 불안감 또한 있었다. 그에게 자신이 그만큼 의지가 되지 못하나, 같은.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초절신뢰관계라는 말을 스스로 입에 담을 수 있었는데, 그때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 지금이 어째선지 조금 더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 그래도 짐작이 안 간 건 아닐 테지. 그치?”

“그렇죠. 저도 가신 뒤에 부모님한테 몰래 혼났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부모님께 죄송해서 어쩌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미처 생각을 못 했어.”

곱게 그린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다. 오이카와는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좌우로 작게 흔들었다.

“걱정 마세요. 기분 상해하지 않으셨으니까. 오히려 저한테 잘해야 한다고 혼만 내신 걸요.”

“그래도 죄송해서. 다음에 뵈면 죄송했다고 인사드려야겠다.”

단순히 한 동네에 사는 이웃사촌으로서의 다음일까, 아니면 바뀐 상황이 반영된 관계에서의 다음일까. 오이카와는 다시 창밖에 시선을 두며 침묵 하는 세이코를 보면서 후자에 대한 기대를 조금 걸어도 될 것 같단 직감을 받았다. 사실 미야기에서 도쿄까지 찾아왔단 점만 생각해도 희망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 굳이 찾아올 필요가 있을까. 잘 해보고자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처음에야 뜻밖의 일이라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이카와의 판단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약간의 긴장이 그의 어깨에 남아있지만, 오이카와는 조금은 편하게 세이코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더 흐르고 나서 세이코의 두 눈이 다시 오이카와와 마주했다.

“그때는 하지메가 일 년을 넘게 속였단 게 화가 나서 그랬는데 막상 집에 돌아오니 어른대던 거 있지. 나한테 말 못 할 사정도 있었을 텐데 말이라도 들어볼 걸 싶기도 하고. 그러고 가만히 생각하다보니 작년에 네 기사도 떠오르더라. 그거 하지메 얘기 맞았던 거지?”

오이카와가 작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역시 맞구나.”

탄식과 같은 말의 끝을 붙잡고 세이코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도로 채우려는듯이 두 눈을 질끈 감고 크게 공기를 들이켰다. 가슴이 천천히 부풀어 오르고 다시 가라앉으면서 그녀는 눈을 떴다. 그러나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이코는 어쩔 수 없이 제 오른손에 이마를 얕게 묻었다.

“걔가 사람들 시선을 좀 신경 쓰잖아, 안 그래 보여도. 남자 오메가 하면 사람들이 좀 괴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게 꽤 신경 쓰였을 거야. 그러니만큼 너한테 피해가는 건 하고 싶지 않았을 테고, 그렇게 하자니 완벽하게 하고 싶어서 우리 가족한테 말도 안 하려 했을 테고.”

며칠간 세이코의 머릿속을 휘저은 것은 자신의 아들이 제 형질에 대해 가지고 있던 태도였다. 남성 오메가란 점에서 이미 아들은 소수계층에 속해 있는데, 하필이면 부모가 모두 베타였다. 말도 안 되는 확률 하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인 부모 아래에서도 자랑스럽게 자라주었지만, 그가 살아온 세상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다. 과연 개인 한 명이 다수를 상대로 얼마나 강하게 버틸 수 있을까. 그녀의 아들 혼자였다면 어쩌면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메에겐 오이카와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아이였다. 그리고 세이코와 남편 역시 아이를 그렇게 길렀다. 그러니 그가 아이와 오이카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는 것이 그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 결국 그녀를 도쿄에 오게 만들었고, 오이카와의 대답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오이카와가 그녀의 생각을 모두 다 알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토오루 너도 마음고생 심했겠네. 하지메 고집이 만만치 않으니.”

“저보단 이와쨩이 그랬죠. 저야 이와쨩한테 늘 미안할 뿐이고…”

제 볼을 손끝으로 긁으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말끝을 늘리면서 그는 1년 하고 조금 넘는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이와이즈미가 제게 거짓말을 한 것을 깨닫고, 그의 집을 찾아가고, 괜한 자신의 오해로 그를 힘들게 하였다가 겨우 그를 붙잡은 일들과 아이가 태어나고 정신없이 지나간 순간들. 새삼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오이카와는 한 번 코를 훌쩍였다.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올랐다.

“그래도 미리 눈치 채서 다행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정말 몰랐을 텐데. 이와쨩이랑 캇쨩이랑 같이 지내지도 못 했을 거고, 아니 캇쨩이 제 애인 줄도 몰랐을 거예요. 아예 태어난 것도 몰랐을 거고.”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감격이 묻어났다. 표정도 여태까지와 다르게 밝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세이코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매 역시 전과 다르게 날카로워졌다. 지난 주말 그녀의 아들을 정조준한 눈빛과 조금 흡사했다.

“왜 몰라?”

“예?”

세이코의 물음에 오이카와가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세이코는 더욱 매섭게 눈을 뜨며 물었다.

“너희 만나다 애가 생긴 게 아니야?”

“저희가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건 7개월 때 였는데요…”

“그럼 아이는 어떻게…?”

오이카와는 입을 벌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 모습에 세이코는 지난 며칠간 제가 생각한 것들이 모두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무너진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까맣게 생겨났다.

“내가 상상하는 그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지?”

알파와 오메가의 비극은 항상 그들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알파라고 발정이 나 아무와 흘레붙는 것이 좋을 리 없지만, 그들은 늘 책임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비극은 오메가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피상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하나뿐인 아들이다.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기계처럼 외웠다. 러트에 의한 임신에 대해 주류 사회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었고, 또한 그래서 그녀는 쉽게 아이들의 관계에서 러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이카와는 어떤 대답도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세이코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해놓고 감히. 차가운 목소리가 오이카와의 귀를 타고 들어와 숨통과 등골을 가로질렀다. 꿈쩍도 못하는 그를 두고 세이코는 빠르게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이카와 씨. 하지메 집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지금 내가 당장 우리 애 좀 봐야겠는데.”

늘 편하게 말을 놓았던 사람이 낯선 사람을 대하듯 정중히 말을 높인다. 오이카와가 겨우 엉망이 된 제 속을 정리하고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어머니, 지금 이렇게 늦었는데 주말 중에 다시—”

“우리 애 어디 사냐구요. 말 못 하겠어요? 아까 차 가지고 왔다고 했죠. 그럼 알려주는 대신에 거기까지 좀 데려다 주시겠어요?”

말 그 자체는 부탁이었지만 절대적으로 윽박에 가까웠다. 오이카와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음에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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