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이 눈이 그치면

이기적 고백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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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 | 3000(+300)자 | 1차 헤테로 페어

(C)떨리고설레다 2023


벌써 일주일째 눈이 왔다. 송이송이 예쁘게 떨어지나 싶다가도 이내 펑펑 쏟아져 세상을 메웠다. 창밖을 내다보면 마른 잔디도, 벤치도 보이지 않고 온통 하얀 눈뿐이었다. 

이에 학생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눈놀이를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사흘이 넘어가면서는 슬슬 질렸다. 그맘때부터는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애초에 나가기가 불가능하기도 했고. 

반강제적 감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탈출에 실패한 어느 2학년생의 중언에 따르면 눈이 무릎까지 쌓여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댔다. 녀석이 키가 엄청 컸는데도 그랬으니, 나머지는 감히 기숙사 밖을 나가 볼 엄두조차 못 냈다. 그냥 건물 안에서 얌전히, 얼른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겨울방학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일어난 비극이었다.

"곧 졸업인데 이게 뭐야!"

룸메이트가 침대에 엎어지며 빽 소리를 질렀다. 시험도 없고, 공부할 것도 없고, 이제 그냥 놀러다닐 일만 남았는데. 사일러스 베넷은 투정을 한 귀로 듣고 반대편으로 흘렸다. 여학생들도 만나지 못한다는 불평에는 조금 공감이 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썩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니콜이 지금 있어 봤자 그에게는 영 좋을 게 없었다. 오히려 정신 사납게 방해만 되면 됐지.

"근데 넌 뭘 자꾸 책상에서 쓰고 자빠졌냐?"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베넷은 연습장을 슬쩍 몸으로 가렸다. 빼곡하게 적은 글씨를 보았나, 룸메이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설마 공부해? 이럴 때일수록 놀아도 줘야 하는 거야."

친구에게는 보이지 않을 각도에서 베넷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한 학년 내내 놀았잖아요, 훅 치고 올라온 신경질은 혀 아래에 숨겨 두었다. 고작 이 정도로 무너뜨리기에는 그간 쌓아 온 이미지가 아까웠다.

"공부 안 합니다."

베넷은 공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냥 심심해서, 낙서나 좀 했어요."

오랜 고민이 한순간에 고작 소일거리로 전락했지만 괜찮았다. 노력을 폄하받는 것은 베넷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 짜증나는 간섭을 피할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어. 누군가와 방을 같이 쓴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베넷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쓰던 건 이따 도서관에나 가서 마무리해야겠다, 생각하며 침대로 향했다.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 뒤로 룸메이트의 목소리가 조르르 따라붙었다.

"심심하면 너도 갈래?"

"…어딜?"

"잰슨이 꿍쳐 놓은 술을 푼다는데."

컬렉션 장난 아니래, 하고 룸메이트가 입맛을 다셨다. 걔네 돈 많잖아. 이어서 알아듣지 못할 술 이름이 몇 가지 나열되었다. 봄베이 사파이어, 블랙 시그널, 30년산 발렌타인…. 쓸데없이 길고 복잡하기만 한 단어들이었다. 저런 걸 외울 시간에 약초학 책을 한 자라도 봤다면 시험에서 두 문제는 더 맞췄을 텐데. 목표 등급까지 딱 그만큼이 모자랐다는 징징거림을 듣느라 저번 기말고사 이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여러모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야, 신랄한 비판은 능숙하게 꿀꺽 삼키고서. 베넷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음주는 교칙에서부터 금지된 행위였다. 만취해 난동을 부린 동급생이 퇴학당한 일도 작년엔가 있었다. 그런데 그 꼴을 다 보고도 술을 마시겠다니. 그런 발상을 하는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었는지 베넷은 궁금했다. 게다가 ‘컬렉션’이라 함은 꽤나 오래전부터 모아 왔다는 뜻이 아닌가. 도대체 기숙사에는 어떻게 들고 들어온 것이며, 방 검사 때마다 사감 선생님에게 걸리지 않는다는 자신감은 또 어디서 나온 것인지….

"왜. 어차피 졸업생이라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래도 안 갑니다. 당신들끼리나 마시세요."

"쳇."

룸메이트는 조금 툴툴거렸으나 더 권하지는 않았다. 제 눈앞의 사일러스 베넷이 원래 규칙을 지독히도 신경 쓰는 인간임을 뒤늦게 상기한 모양이었다.

"재미없기는."

"좀 자겠습니다."

툴툴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베넷은 이불에 파고들었다.

"나갈 때 깨워 주세요."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원래는 끝까지 혀 밑에 넣어 놓으려고만 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척, 그냥 친구로 남고 싶었다. 헨리에타 니콜 에바닉이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인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걸 무시하기에 사일러스 베넷은 눈치가 너무 빨랐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초면이어도 겁내지 않고 스스럼없이. 니콜의 사교성은 특정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걸 느낄 때마다 베넷은 괜스레 우울해졌다. 유독 피부에 크게 와닿는 날이면, 방에 틀어박혀 애꿎은 공책이나 일기장만 벅벅 괴롭히곤 했다.

베넷은 니콜을 좋아했고, 짝사랑하는 여자애의 친절이 저만을 향해 있지 않음을 깨닫는 일은 제법 비참했다.

좋아해요.

헨리에타 니콜 에바닉, 당신을 좋아합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침대에 누워 양을 세는 대신 베넷은 듣는 이 없는 고백을 건넸다. 전해지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미안해, 하지만 나는 널 친구로밖에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러면 베넷은 손으로 꾹 얼굴을 덮었다. 그래야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니콜의 얼굴을 지울 수 있어서였다.

베넷은 알았다. 헨리에타 니콜 에바닉이라는 소녀에게 사일러스 베넷이라는 소년이 친구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니콜은 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예쁜 녹색 눈을 크게 뜨고, 특유의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웃음을 웃으며 거절할 것이다. 그냥 친구로 남아 주면 안 될까…. 그러고는 방에 돌아가서 홀로 슬퍼하겠지. 사일러스 베넷이라는 편하게 마음을 터놓을 만한 친구를 하나 잃어버렸으니까. 베넷이 니콜에게서 자신을 빼앗았으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이기적인 고백이었다.

하지만 베넷으로서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 필연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상대에게 해를 끼지지 않고자 하여 뭐든 감내하려 드는 욕구가 사랑이라지만. 그래서 입을 다물기에는 남은 인생이 너무 비극이라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마음도 있는 법이다. 이것이 접자고 해서 접히는 감정이라면, 그리하여 친구로 남아 니콜과의 관계를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베넷도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베넷은 그냥, 요즘이 너무 괴로웠다. 아무렇지 않게 학교생활을 하다가도 니콜만 등장하면 모든 게 꼬였다. 복도를 걷는데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면 슬쩍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반응이 늦어 니콜이 먼저 알아차렸다면,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힘들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이야기했다. 니콜은 대화할 때 상대의 눈을 보는 습관 때문에 그걸 또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어디 아파, 얼굴이 빨간데. 다정한 걱정이 들려올 때마다 베넷은 죄책감을 느끼며 얼버무렸다. 으응, 감기 기운이 좀 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덜 불행할 것 같았다. 대차게 차여서 관계가 끝나더라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 좋아한다고 느껴 본 사람을 잃어버려도…. 베넷이 느끼는 이 답답함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베넷은 말해야만 했다.

.

.

.

룸메이트는 부탁받은 대로 베넷을 깨우고 나갔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면서, 베넷은 그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약속만큼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좀 멍청할지는 몰라도… 이 정도면 함께 지내기에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아까는 제가 좀 예민하게 반응한 점도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요즘 계속 마음이 힘들었던 터라.

베넷은 기다시피 침대를 나와 도서관에 갈 준비를 했다. 귀찮은데 그냥 방에 있을까, 머릿속을 파고드는 망설임은 고개를 흔들어 지워 버렸다. 지금이야 괜찮아 보여도 언제 룸메이트가 만취한 친구들을 끌고 들이닥칠지 몰랐다. 가능성은 미약하지만, 어쨌든 위험을 남겨 두는 것은 베넷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문득 책상 위 달력에 시선이 가 닿았다. 다음 주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흐릿한 녹색으로 칠해진 4개의 숫자가 보였다. 축제, 밤에 시끄럽겠군, 하면서 대충 그어 둔 흔적이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에 베넷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저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베넷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녹색 표지의 연습장을 꺼냈다. 뒷표지를 펼치고 세 장을 넘기면 아까 룸메이트에게 들킬 뻔했던 페이지가 있었다. 언제, 어디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니콜의 얼굴을 그리면서 끼적인 낙서로 가득했다. 베넷은 펜을 집어들고 녹색 잉크병의 뚜껑을 돌려 열었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잉크가 너무 많이 묻었지만 괜찮았다. 수십 가지의 빼곡한 계획 맨 아래에 큼지막하게 적었다.

겨울 축제.

이 눈이 그치면 가장 먼저 니콜을 만나서 말해야지.

함께 축제를 보러 가지 않겠냐고. 이벤트 부스를 구경하고, 길거리 간식과 달달한 음료로 배를 채우고. 상품과 먹을거리를 가득 안고 늦게까지 공원을 걷자고. 그러다 불꽃놀이가 시작될 즈음에는 밤하늘이 가장 잘 보일 곳에 자리를 잡아야지. 색색의 불빛이 머리 위를 수놓으면 붉어진 얼굴은 별로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어 조용히 건네야지.

미안하다고.

내가 감히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러면 모든 게 끝나겠지만, 마음만큼은 비로소 자유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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