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바다, 바람, 불꽃

우리는 검은색 양말을 신어야 한다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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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 | 2000자 | 1차 논커플링

(C)떨리고설레다 2024


바다,

바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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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테는 그들이 검은색 양말을 신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건네지는 양말 한 켤레를 쿠지사와는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스포츠 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검정의 중목 양말. 축구 할 때 신으려고 사물함에 처박아 두었던 거랬다. 언뜻 쳐다본 이시다테의 발에도 같은 것이 이미 신겨 있었다.

쿠지사와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시다테가 발을 들어 보이며 뿌듯하게 웃었다. 마냥 해맑아 보이는 얼굴이다. 쿠지사와는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왜? 쿠지사와가 물었다. 왜 검은 양말을 신어야 해? 이시다테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쿠지사와를 바라보았다. 마치 쿠지사와가 하늘은 왜 파랗냐는 질문을 하기라도 한 듯, 물음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흰 양말은 금방 더러워지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근히 설명해 주는 마음은, 몇 번을 거듭하여도 결코 변하지 않을 상냥이었다. 말투에 고집스럽게 묻어나는, 이번에도 쿠지사와가 제 손을 잡고 함께 달아나 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처럼. 과연 그럴까. 흐릿한 눈을 깜박이면서 쿠지사와는 생각했다. 저것은 수천 번의 풍파에도 무뎌지지 않을 다정일까. 쿠지사와 헤이타는 이제 메마르고 지쳐 모든 것을 그냥 놓아 버리고만 싶은데. 이시다테 카논은 저렇게 언제까지고 그대로일까.

"왜?"

쿠지사와가 힘없이 다시 물었다. 이시다테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냐니? 물에 젖어야 하잖아."

물. 한 음절의 짧은 단어를 발음할 때 살짝 경직되는 몸을 눈치채었다. 직후에 몸짓이 조금 과장되는 것도 쿠지사와의 눈에는 보였다. 저렇게 두려움에 떨면서도 대상과 맞서 싸우려 든다. 이시다테가 뿜어내는, 꿋꿋이 생을 이어 나가려는 굳은 의지가 부담스러웠다. 쿠지사와는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에너지 낭비이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우리가 굳이 공포를 마주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패배한 채 흘러가게 두면 편할 일인데.

"난 안 가."

쿠지사와가 말했다. 왜? 이번의 질문은 이시다테의 것이었다. 뱉어야 하는 마음의 무게를 느끼며, 쿠지사와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만하고 싶어."

난 조금이라도 편하게 있을래. 그러면서 흘긋 살핀 이시다테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짝 좁아진 미간, 크게 뜬 눈동자, 멍하니 벌어진 입술. 왜, 왜…. 하고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에 쿠지사와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생각을 바꿀 의향은 없었다.

쿠지사와도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시다테와 같이, 저 쓰나미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보려고 몸부림친 적도 있었다. 저번 루프까지만 해도 쿠지사와 헤이타는 그런 소년이었다.

이 길 끝에는 빛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악착같이 나아갔다. 그러나 어둠은 끝나지 않고, 구원의 빛이라 믿었던 것은 실은 지옥의 불길. 파도에 삼켜진다. 세상이 점멸한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세 번….

우리는 몇 번이나 더, 이 지옥에서.

이제 쿠지사와는 알았다. 희망은 멍청이들이나 품는 것이다. 지금까지 쿠지사와 헤이타와 이시다테 카논은 멍청이였다.

"그만하자."

쿠지사와는 더는 멍청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

"난 그만할래."

이시다테가 쿠지사와의 팔을 붙잡았다. 쿠지사와는 슬쩍 이시다테의 손을 밀어냈다. 이제 인정해야 했다.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다. 방법을 찾아냈다 해도, 그래서 일상으로 복귀했다 해도 그것대로 문제였다.

삶이란 몸에 낫지 않을 상처를 새기는 행위였다. 그리하여 그 고통을 끌어안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었다. 남은 인생에서 이 기억을 결코 떼어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두려움이 되었다. 계속 이 시간을 되먹으며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그냥 끝내 버리는 편이 나을 텐데.

"난 힘들어."

"쿠지사와…."

이시다테가 중얼거렸다. 거절당한 마음을 들고 이시다테는 이제 무엇을 할까. 맥없이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보며 쿠지사와는 생각했다. 네가 그렇다면 알겠어, 하고, 돌아서서 홀로 나아가려나. 그럼 양말을 돌려주어야겠다. 희고 검은 두 겹의 양말 위에 덧신도록, 그래서 발을 스치고 지나갈 날카로운 풍랑에서 이시다테가 조금이나마 덜 상처받도록….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예상을 살짝 비켜가 있었다. 이시다테가 고개를 들었다. 똑바로 쿠지사와를 쳐다보았다.

"…나는 살아남을 거야."

몇 번이든 다시 해야 한대도 상관없어. 이시다테가 말했다. 이런 건 게임에서 많이 겪어 봤어, 하면서 통통, 제 가슴을 두드렸다. 나 노가다 잘해! 93번 도전해서 깬 보스전도 있어. 그런데 우린 아직 네 번째잖아. 쿠지사와를 향하는 옅은 색소의 눈동자가 희미한 물기로 반짝였다. 쿠지사와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우리는 어려. 나는 내가 아직 누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까워. 연애라거나, 대학이라거나…. 술 마시고 담배도 피워 보고 싶고. 마지막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자 덧붙인 말 같았지만, 말한 이도 들은 이도 웃지 않았다. 이시다테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돌아갈 거야. 원래의 삶을 되찾을 거야.

근데 내가 얻어낸 내일에 네가 없으면, 나는 너무 슬플 것 같아.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 안쪽을 긁으며 올라왔다. 쿠지사와는 그걸 혀 아래에 한참 담아 두었다가 꿀꺽, 도로 넘겼다. 침이 삼켜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죽을 각오로 죽음과 맞서 싸우는 인간. 쿠지사와는 바지 자락을 움켜쥐었다. 거대하게 모순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인간은 타고나길 멍청한 족속이라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똑같은 믿음에 똑같이 속으면서도 한번만 더, 하고. 제가 걸어가는 길 끝이 막혀 있음을 알면서도 뛰어든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그것이 인간이었다.

이시다테가 못을 박았다.

"그러니까 함께 가자."

쿠지사와는 천천히 검은 양말을 덧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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