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불꽃

오만의 공주

사랑이라는 이름의 놀음에 더는 엮이고 싶지 않거든요.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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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컾 공식 서사 외전

(C)떨리고설레다 2020


◈◇◈

나이아 아카데미의 역사 과목을 담당하는 메이벨 루타는 귀족 출신이었다. 그것도 온 대륙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카르타헤나를 대표하는 고위 귀족. 말만 그렇지 실은 먼 친척 관계에 불과한 허울뿐인 이름이 아니라, 가주의 친누이인 진짜 루타였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 귀족 남자들이 종종 선생 일을 하긴 했지만 여자는 드물었다. 레이디, 그것도 루타의 딸이 아카데미의 교사 직에 있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웠기에 많은 학생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메이벨 루타는 온 학교의 스테디셀러였다. 도저히 제 입으로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추측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르타헤나의 귀족 출신 여선생은 어느새 심심할 때마다 꺼내지는 흥밋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유라 해 봤자 뜯어 보면 별 것 없었다. 루타 영애는 세스의 후계자와 약혼했고, 그 불쌍한 제국 남자는 결혼식을 몇 개월 앞두고 마차 사고로 죽어 버렸다. 제국의 기준으로 메이벨은 루타였다. 그러나 카르타헤나에서는 세스의 과부, 그것도 고지식한 법으로 제약받는 귀족 과부였다. 아카데미의 교사는, 이도저도 아니게 된 신분을 가지고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아비는 겉치레에 신경쓰는 성정이었고 딸은 더 이상 결혼에서 흥밋거리를 찾지 못했다. 법은 고치자면 고칠 수 있으니 무시한 채, 카르타헤나 암흑계를 쥔 가문에 줄을 대고자 청혼서가 들어올 때마다. 메이벨 루타는 아비를 구슬리고, 회유하고, 심지어 반항하면서까지 모조리 거부했다. 그러고는 오로지 교사 자리만을 고집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그렇게 크지 않은 카르타헤나에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서른은 넘긴 지 오래요,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아직 메이벨 루타는 미혼이었다. 그리고 메이벨은 본인의 선택에 만족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

겨울은 연인의 계절이다. 사실 일 년 내내가 그러했다. 십대는 사랑을 위한 나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문지기 두엇이 버티고 선 교문에서부터 가장 구석진 체육관 뒤편 공터까지, 분명 나이아 아카데미의 교칙에는 교내 애정 행각을 금지하는 조항이 존재할 텐데도. 아카데미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온통 사랑, 사랑, 사랑. 캐스티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녹아내리는 얼음 과자마냥 달큰하고 끈적거리는 사랑뿐이었다.

메이벨 루타는 화려한 공작 깃털펜을 빙글, 손가락으로 돌렸다. 막 잉크병에서 빠져나온 터라 덜 마른 잉크가 책상에 몇 방울 튀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대담하게도 교무실 창문 앞에서 입을 맞추는 여학생의 뒷모습은 그녀도 익히 잘 아는 생김새였다. 적갈색 곱슬머리에 단정하게 묶은 고등부의 검은 동복 리본, 레시브의 이자벨 레아체트 공주. 그렇다면 풍성한 머리칼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내애는 에드워드 루타이려나.

 과연, 6촌 조카의 새파란 눈동자와 마주하자 메이벨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당혹스러움을 가득 담은 그 얼굴에 대고 입모양으로 명령했다. 

둘 다, 들어와.

"방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교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메이벨이 엄하게 꾸짖었다. 두 놈 다 겨울방학에 학교에 남아 있겠다길래 뭔가 했더니. 단순히 캐스티아가 따뜻해서인 줄만 알았는데 이럴 속셈이던 모양이었다. 누구의 계획이려나,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메이벨은 생각했다. 평소 하는 짓만 봐서는 아무래도 레시브 공주 같은데. 그녀의 6촌 조카도 용의자에서 제외할 수는 없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너희가 약혼한 사이라는 것이 면죄부가 되지도 않아."

에드워드 루타는 얌전하게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혼나는 사람의 정석적인 자세로,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신발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문제는 이자벨이었다. 레아체트 왕가의 일곱째 공주는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었다. 왼쪽 다리에 무게를 싣고 서서 애꿏은 바닥만 발끝으로 툭툭 걷어찼다. 검은 메리제인 구두의 가죽이 대리석에 살짝씩 벗겨졌다.

"이자벨 레아체트."

메이벨은 눈썹을 모았다.

"이의라도 있니?"

"아니요, 루타 선생님."

이자벨이 퉁명스럽게 웅얼거렸다. 삐죽 내민 입술에 짓눌려 발음이 부정확했다. 그 모습이 아니꼬워 몇 마디 더 하려다가, 메이벨은 제 앞에 쌓인 서류가 아직 많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그만두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대강 손을 저었다. 그래도 방학 중이니까, 적당히 훈계만 하고 끝내자. 어차피 아무리 말해 봤자 그대로일 사람은 그대로일 테니까.

"자제해라. 앞으로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제서야 이자벨은 짝다리를 풀고 바르게 섰다. 메이벨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책상을 굴러다니던 깃털펜을 다시 잉크병에 넣었다. 교무실 문으로 향하면서도 레시브 공주는 제 약혼자의 팔짱을 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걸을 때마다 좌우로 찰랑이는 그녀의 반묶음머리를 메이벨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이자벨의 메리제인이 막 문턱을 밟았을 때, 문득 생각난 질문을 메이벨 루타는 입 밖에 내길 주저하지 않았다.

"너희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사랑, 특히 성애(性愛)로 구분되는 종류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흔 해에 가까운 삶을 살아오면서 메이벨 루타가 단 한 번도 완벽히 이해해 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그 질문의 답이 너무나 궁금해, 아직 루타의 딸이던 시절 그녀는 온갖 로맨스 소설을 모조리 섭렵했다. 영애들 사이에서 유명한 작가의 책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더 진한 이야기까지도.

무엇인지 머리로는 알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이의 행동이 어떤지 자세히 묘사할 수도 있었다. 다만 메이벨 루타가 아직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걸 행하게 만든 원동력. 사랑-그러니까 충성심과 애정과 집착이 적당히 버무려진 어떤 것, 상처입고, 울부짖고, 아파서 죽으려 들면서도 붙잡게 하는 지독히도 맹목적인 감정이었다.

어떤 기사는 자신의 레이디를 위해 명예를 버렸다. 어떤 공주님은 연인을 사랑해 왕좌를 포기했다. 어떤 요정은 영생을, 어떤 하녀는 목숨을, 어떤 왕은 어찌 했고 또 어떤 여인은….

모든 책에는 어김없이 같은 내용이 등장했다. 거기까지 읽으면 메이벨 루타는 표지를 그대로 덮어 버렸다. 사랑에 대해 무엇보다 잘 알고 있단 듯 떠벌리더니 하나같이 과장된 거짓이다. 사랑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등장인물들은 다들 쓸개라도 빼어 줄 것처럼 구는가. 돈, 명예, 자유, 심지어 삶까지도 기꺼이 내어줄 만큼의 가치가 그에 있는가?

그런 감정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

편지가 왔다.

메이벨 루타는 봉투를 받아들고는 익숙하지 않은 문장에 수신인의 이름을 두 번 확인했다. 낯익게 고풍스러운 글씨체로 적힌 두 어절은 분명 제 것이 맞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를 봉인한 세스의 보라색 인장을 뜯었다. 이사도라 세스, 세스의 현 가주이자 하마터면 그녀의 시누이가 될 뻔했던 여자. 오랜 벗이자 질기게도 엮인 적과는 연락이 끊긴 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어째서 갑작스레 먼저 말을 걸어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캐스티아로 출발했습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오랜만에 겨울 휴가를 가 보려고 해요. 겨울 휴가. 메이벨은 그 단어를 메운 잉크를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십여 년 만이었다. 이사도라는 겨울마다 제국의 살을 에는 추위와, 함께 얼어붙은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줄곧 수도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었다.

지독한 고집이었다. 메이벨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의 수많은 행동 중 하나이기도 했다. 죽은 자리에 갇힌 지박령처럼, 사냥당해 박제된 사슴 대가리처럼. 이사도라 세스는 숨이 멎을 듯 아파하면서도 목숨 바쳐 사랑하던 남편의 그림자를 떠나지 못했다.

중간에 아무데도 들르지 않을 테니,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글자를 메이벨은 계속 읽어내려갔다. 이게 도착할 때쯤이면 난 카타사에 있겠지요. 카타사는 대륙 남단, 나이아 아카데미가 위치한 캐스티아의 수도였다. 그러니 시간 되면 바로 답장 주시길, 찾아뵙겠습니다…. 밑의 주소를 확인하자마자 메이벨은 종이와 펜을 꺼내는 대신 외출복을 넣어 둔 벽장을 열었다. 방학에는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에도 이사도라 세스는 그닥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런 것쯤은 예상했다는 듯, 그녀는 까딱 목례로 인사하며 앞에 놓인 찻잔만 가볍게 들었다. 메이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바로 앞자리 의자에 앉았다. 귀족의 번거로운 예법 따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이사도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밤하늘같이 새까만 속눈썹이 눈가에 사뿐 앉았다. 여전히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유명했던 세스 여공의 미모는 나이를 먹을수록 색이 바래기는커녕 오히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전신을 휘감은 우울도, 잔잔한 애수를 덧씌워 더 우아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했다. 목과 소매의 레이스 장식을 제외하면 수수하기 그지없는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고, 높게 틀어 올린 머리칼에는 어떤 장식도 달리지 않았지만 이사도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사도라 세스의 검은 옷은 상복이었다. 메이벨은 짙은 장미향이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찻잔 너머로 그녀를 살폈다. 이사도라는 제 잔을 내려놓고 장갑의 검은 레이스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차림에서 새하얀 피부만 홀로 눈에 띄었다. 

늘 발그레하던 뺨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보라에 휩싸인 듯 차가웠다. 요즘 아카데미의 귀족 영애들을 중심으로 다시 유행하는 병약 미인 따위가 아니었다. 이사도라는 여전히 그날의 춥고 서늘한 바람 속을 유령마냥 떠돌고 있었다.

메이벨이 물었다.

"아드님들은 잘 계신가요?"

다소 뒤늦게 이사도라가 대답했다.

"유모가 데리고 있답니다. 새로운 사람을 구했어요, 소테이르 출신이라는데 단정하고 참해요…."

"요즘에도 얼굴 못 보는 건 아니겠죠?"

말을 돌리길래 메이벨은 바로 본문을 꺼냈다. 이사도라가 움찔했다. 그럴 줄 알았어, 메이벨은 한숨을 내쉬며 도자기 손잡이의 금박을 문질렀다. 쌍둥이 공자가 아직 태 속에 있을 때 그녀는 남편과 사별했다. 그 이후, 두 아들이 죽은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세스 여공은 공자님들을 유모에게만 맡긴 채 잘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사도라가 침묵했다.

"……."

"이사도라."

메이벨은 찻잔을 가볍게 내려놓고선, 학생들을 다루듯 짐짓 엄하게 불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메이벨."

이사도라 세스는 손을 뻗어 차와 함께 준비된 다과를 집었다. 오도독, 아몬드 슬라이스가 박힌 어두운 색의 쿠키 조각이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져갔다. 메이벨은 이사도라가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며 따라서 하나를 베어물었다. 얹어져 있던 크랜베리는 새콤하고 달았다.

"음."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걸요."

그리고 흐른 것은 약간의 정적. 잠잠한 공기 속에 미처 나오지 못한 말을 메이벨은 어렴풋이 들은 것도 같았다. 십수 년간 쌓여 온 그리움과 애절함, 뭐라고 감히 형용할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들…. 이사도라가 살풋 눈매를 접으며 초연한 미소를 지었다. 

선이 그어졌다.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러죠."

어느 순간부터 접점조차 없어진 사람의 속사정을 굳이 파헤치는 취미는 없었다. 메이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올렸다. 이사도라가 사부작사부작, 입고 있던 모직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그래, 메이벨은 만나는 사람은 있는가요?"

그래도 이건 치사하지 않나. 메이벨은 꿈틀거리는 미간을 잠재우느라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했다. 이사도라 세스의 사고방식은 상당히 보수적이었기에 언젠가는 나올 질문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 뭐라고 말하지, 그녀가 고민했다. 지금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그냥 있다고 할까, 없지만 곧 생길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는 어떨까?

하지만 메이벨은 고작 잠깐의 곤란함을 피해 보겠다고 유일한 친구에게까지 거짓을 고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요."

"적당한 사람을 소개해 줄까요."

이사도라가 물었다.

"아카데미에 계속 머무르려면 캐스티아 귀족인 편이 좋으려나요. 카타사에 집을 가지고 있으면 출퇴근도 할 수 있겠지요…."

마른 나뭇가지를 스치는 한겨울의 산들바람처럼 차분하고도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 말투에 담긴 가냘픈 애정과 걱정이 느껴졌다. 메이벨이 웃었다.

"이사도라. 매번 말하지만 난 정말 괜찮아요."

제 말이 너무 단호하게 들리지 않기를, 그래서 그녀의 여린 진심을 상처입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메이벨이 거절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놀음에 더는 엮이고 싶진 않거든요."

"놀음이요?"

이사도라가 미간을 모았다.

"메이벨, 사랑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에요…."

◈◇◈

한 남자가 있었다. 친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았다. 억지로 끌려가다시피 한 제국의 무도회에서 몇 마디나마 말을 섞어 본 적이 있었다. 세스를 상징하는 어두운 보라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이사도라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훤칠하게 키가 크고 선이 고운 사람이었다. 이전에는 쌍둥이 누이와 함께 몰락 귀족의 양자였으며 세스 여공의 비서 일을 했었다고 들었다.

꼭두각시 황제가 폐위되고 이종 사촌이 새로운 태양이 된 이후, 그의 가문도 백작위를 얻으며 부흥했다지만. 모두들 그가 반반한 얼굴로 세스를 유혹하여 여공의 남편 자리를 꿰찼다고 수군거렸다. 소문, 특히 남을 까내리는 루머를 메이벨은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만큼은 어느 정도 사실이 가미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말을 나눠 보기 이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오랜만이에요, 세스 공작."

루타라는 이름 때문인지, 사교계를 떠난 지 오래되었음에도 주위에 머물던 사람들이 황급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메이벨은 휑하니 뚫린 통로로 기꺼이 발을 내딛었다. 이사도라의 앞까지 도달하자 은회색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갈무리하고 섰다.

앞장서서 말을 걸고, 사람을 판단하여 편을 가르는 일은 지금보다는 수 년 전, 루타의 공녀이자 애덤 세스의 약혼자로서 유행을 선도하던 때의 메이벨에게나 잘 어울렸다. 사교계에서 점차 멀어짐에 따라 관심을 버렸던 취미를 이제 와서 다시 꺼낸 것은 대상인 이사도라 세스가 그녀의 오랜 경쟁자인 까닭이요. 소문만 무성한 아름다운 남편에 대해서도 조금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황실에 여자들이 없는 지금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인 이사도라는, 제국 사교계의 꽃답게 노련히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러네요. 이게 얼마만인가요, 루타 공녀."

메이벨은 이사도라의 반 걸음쯤 뒤에 서서 차분히 속눈썹을 내리깐 남자를, 해가 완전히 넘어간 밤하늘의 검정 같은 남색 머리카락을 올려다보았다. 고집스러움이 어린 입꼬리에서부터, 가만가만 이사도라의 손가락을 헤집는 장갑 낀 손짓의 귀족다움까지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감탄했다. 꿀을 그대로 굳혀 놓은 것 같은 부드러운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소름까지 돋았다. 어찌하여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알 만도 했다.

"아, 서로 초면이겠군요."

뒤늦게 이사도라가 상기했다.

"내 남편입니다. 이쪽은 내 오랜 친구…."

메이벨이 말을 받았다.

"루타의 메이벨입니다."

"바루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가 따라서 인사했다. 탁한 저음이 기분 좋게 귓가를 헤집고 울렸다. 세스의, 하고 이사도라가 정정했다. 당신은 세스 사람이야, 그걸 잊지 말아야지. 하하, 그가 웃었다.

"알았어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세스의 바루입니다."

겸손했다. 그리고 정중했다. 무도회 내내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메이벨은 소문이 거짓되었음을 확신했다. 설령 그런 불순한 의도가 처음에는 있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세스 여공의 남편, 이사도라의 남자. 제가 세스 사람임에 아직 익숙해지지 못한 세스의 바루는 아름다웠고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약혼자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이사도라가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쩌면 그래서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메이벨이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던 걸지도 몰랐다.

겨울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춥기로 유명한 제국의 추위였다. 창이 굳게 닫힌 실내였음에도 공기는 서늘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온통 검었다. 장식이고, 사람들의 복장이고.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고 수수했다. 귀족들의 최신 유행답게 화려한 상복을 입은 이들은 모조리 문가에서 돌려보내졌다. 잘 한 일이라고 메이벨은 생각했다. 분위기도 못 읽고 그런 차림을 하고 온 인간들은 문전박대당해야 마땅했다.

메이벨 루타가 세스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두 번째였다. 처음 것은 10년보다는 조금 덜 전이었다. 세스의 공작과 부인과 아들을 앗아간 끔찍한 마차 사고 때, 메이벨은 약혼자의 죽음을 추모하러 세스의 홀을 방문했었다.

그 때와는 달랐다. 정말이지, 완전히 달랐다. 홀은 역시 검었지만, 유행을 좇아 정신없는 리본과 보석과 장미송이로 가득해 있었다. 이사도라의 옷차림 또한 비슷했다. 레이스와 프릴이 둘려 어지럽기까지 한 벨 라인의 드레스. 신경 쓴 듯 보였지만 사실 얼마나 그녀가 손을 놓고 있었는지, 이제 와서야 메이벨은 깨달았다. 서녀로서 가족에 섞이지 못했던 이사도라에게 세스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날의 죽음은.

그에 비해 오늘은…. 메이벨은 눈만 움직여 이사도라를 쳐다보았다. 넓은 홀의 한가운데에 그녀가 있었다. 흑단나무로 튼튼하게 짜여진 관 앞에서,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섰다. 이사도라는 울지 않았다. 손수건은 들고 있었지만 쓰지 않았다. 대신 몸을 떨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그러나 저래도 괜찮은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지독한 슬픔에 겨워, 그렇게 하면 모든 게 지워지기라도 하는 듯 애절했다.

충격으로 아이를 조산하고 몸도 완전히 추스르지 못한 채 자리에 나온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이사도라가 되어 본 적 없기에 메이벨은 이해하지 못했다. 괴로움에 지쳐 비틀거리는 이사도라를 시녀들이 부축할 때, 뺨을 타고 흘러 검은 베일 아래에서 반짝이는 눈물 방울을 보았을 때. 그러나 조금은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스 공작이 자기 저택에 틀어박혀 십수 년째 기계처럼 일만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갈망은 더욱 커졌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저렇게 사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감정인가.

한 남자가 있었다. 세스 공작의 남편 되는 사람이었다. 인형마냥 지독히도 아름다워, 변변치 않은 신분이 싫어 그녀를 홀려낸 게 아니냐는 소문에도 휩싸였던. 그러나 겸손하고, 정중하고, 소문의 거짓됨을 증명할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럽던. 십수 년 전 제국에는 그런 사람이 살았다.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십수 년 전에 열병에 걸려 죽었지만, 이사도라 세스는 그를 사랑했다. 아직까지도.

◈◇◈

"이런."

시계를 무심코 쳐다보았다 메이벨은 화들짝 놀랐다. 오후의 중요한 약속을 깜박 잊고 있었다. 그녀가 총 책임자였기에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자리였다. 서둘러 가면 간신히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메이벨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미안하지만 이만 일어나 봐도 될까요."

그러고는 짐짓 불편한 주제를 피하려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어 몇 마디 덧붙였다.

"언제까지 카타사에 머무르나요? 적당한 때에 다시 찾아뵐게요."

"그래요. 이번 겨울은 온종일 여기 있을 것 같답니다."

이제는 아마도 식어 버렸을 장미차를, 이사도라가 천천히 입에 머금었다. 그녀의 이해에 감사하며 메이벨은 시녀가 건네주는 겉옷을 꿰어 입었다.

"도라."

문턱에 반쯤 발을 걸쳤다 문득,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메이벨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경쟁자를 견제하느라, 조금 나이를 먹어서는 귀족의 품위를 세우느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러 본 적 없었던 친구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하나만 물을게."

귀족이든 평민이든 신분의 격차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아카데미 시절, 아무것도 몰랐고 언젠가는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던. 여느 소녀들처럼 눈 앞의 일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 때로 돌아간 기분을 메이벨은 느꼈다.

"그래서 너는, 사랑을 해서, 행복했니?"

이사도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더니 웃었다. 턱을 살짝 들고, 고운 눈을 반쯤 접으며,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순수한 소녀마냥 입을 벌리고 환하게. 그렇게 아름다운 얼굴을 메이벨 루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착잡해졌다. 그리고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이사도라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메이벨 루타는 여전히 이사도라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성애를 모르는 삶을 살았다. 태양에 타들어가듯, 살점이 저며지듯. 때로는 괴로우나 그걸 기꺼이 감내할 가치가 있다는 감정을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사랑은 가치 없고 허무한, 금방 타오르다 꺼져 버릴 불꽃에 불과했다. 그리고 메이벨은 그런 제 인생관에 만족했다. 그러나 가끔씩은, 아주 가끔씩은.

이사도라 세스가 말했다.

"나는, 수백 번을 반복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

메이벨은 방을 나왔다. 결국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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