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궤도

살아 있다면 침묵하지 말지어다

판도라의 상자

이우는 밤 by 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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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교환 | 18000자 | 1차 헤테로 페어

(자캐 세계관과 크로스오버)

(C)떨리고설레다 2024


지난겨울 강지하 소위가 사망했으므로, 트로이 백주 지부 대(對) 판도라 사관학교 27기의 남은 생존자는 공식적으로 두 명뿐이었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늘 그랬듯, 김철수는 고개를 숙여 짧게 묵념함으로써 심심한 애도를 표했다. 세상을 떠나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다. 강지하에게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스물두 살은 그냥, 한 줌 재로 스러지기에 너무 이른 나이였다. 이곳이 전선 한가운데임을 감안해도 그랬다. 적어도 김철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김철수는 강지하라는 남자를 잘 몰랐다. 물론 강지하는 매우 유명했다. '그' 강소빈의 혈육. 강지하는 사관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늘 화제의 중심을 차지하는 뜨거운 감자였다. 도계영과 같이 다녀서, 도계영의 든든한 방파제 역할 덕분에 수면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뒷담화는 한 학년 아래인 김철수의 귀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김철수가 모르는 것은 강소빈의 동생이자 도계영의 절친이 아니었다. 어떠한 수식어도 붙지 않는, 그냥 하나의 인간 강지하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강소빈과 도계영, 두 영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소년. 멀리서만 바라본 강지하는 조금, 지쳐 보였었는데. 녹색의 빳빳한 사관학교 제복을 걸친 어깨는 꼿꼿이 펴진 날이 손에 꼽게 적었다. 살짝 움츠러든 마른 등을 떠올리며 김철수는 감히 생각했다. 어쩌면 강지하에게 죽음은 축복이었을까.

어쨌든 강지하의 죽음은 세상을 뒤바꿔 놓았다.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끝까지 주목받는 인생이었다. 이것조차도 그 자체가 아니라 주변인 때문이라는 것이 재밌다면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도계영은 불타올랐다. 전해져 온 소식으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장에 뛰어들어 미친 사람처럼 날뛴다 했다. 윗선의 명령조차 통하지 않았다. 도계영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연지원은 애초에 남의 말에 휘둘리는 부류가 아니었다. 연지원이 도계영의 편에 선 이상 아무도 이 화염을 꺼뜨릴 수 없었다.

도계영은 여전히 불꽃이었으나, 어둠을 몰아내고 인류를 구원할 찬란한 등불은 아니었다. 도계영은 화마였다. 집과 산과 들을 태우고 수천이 넘는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더 먹어치울 것을 찾아 게걸스럽게 세상을 헤매는, 굶주린 불의 악마가 되었다.

제 2의 강소빈. 장렬하게 산화한 영웅의 외모와 능력을 그대로 빼다박은 듯한 여자. 무기이자 홍보물이었던 도계영은 더 이상 도구로서의 쓸모를 갖지 못했다. 모든 대(對) 판도라 선전(宣傳) 활동에서 도계영을 제외한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김철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진작에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

사관생도 시절 도계영과 몇 번 말을 섞어 본 적이 있었다. 도계영은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잘 웃었고, 쉽게 즐거워했고, 그저 친구들을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여학생이었다. 도계영은 애초에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었다. 강한 능력이 있어서 군대에 끌려왔다. 그냥 싸우라니 싸우고 죽이라니 죽였다. 도계영의 전쟁은 처음부터 저와 제 주변인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저 분노라는 연료가 조금 추가되었을 뿐, 지금도 그 목적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세계정부의 고위 간부들이 허겁지겁 도계영을 대신할 군대의 얼굴을 찾아 헤맸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오는 공문을 뒤적이면서 김철수는 조용히 비웃었다. 멍청한 일이었다. 인간 위에 군림한다는 놈들이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나 모를까.

애초에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도계영은 강소빈이 아니었다. 누구도 강소빈이 될 수 없었다. 굳이 강소빈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명제였다. 아무도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갈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그 자신뿐이다.

그건 백초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저기 하늘섬에 거하시는 높으신 분들은 아직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이고, 청년이기 이전에 전사이다. 나의 몸과 마음은 모두 인류의 것이므로, 우리가 창과 방패가 되어 세계의 안전을 수호하는 동안. 이 충성을 거름 삼아 위대한 인류는 무궁히 번성하리라.

-트로이 백주 지부, 대(對) 판도라 사관학교 졸업 선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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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부산스러웠다. 탁, 철수는 일부러 큰 소리가 나게 쟁반을 내려놓았다. 침대 밑 서랍을 뒤지던 초연이 몸을 들었다. 철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삐져나온 초연의 옷가지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반응이 의아한 듯 초연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가, 이내 머쓱하게 서랍을 닫았다.

"천천히 챙겨요."

철수가 중얼거렸다. 불퉁하게 묻어나는 언짢음을 읽었을까, 찻잔을 집어들며 초연이 웃었다.

"넌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아."

"무슨 소리에요."

웃음기 어린 눈동자가 철수를 훑었다. 철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김철수는 백초연의 부관이었다. 부관이 상관을 따라가지 않는다니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게다가 철수는 제 인생에서 초연이 빠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철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었다.

"누나랑 같이 있어야지 제가 어딜 가요?"

초연이 다시 웃었다.

"나도 네가 없으면 안 되긴 하지."

담담하고 부드러운 고백. 초연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철수는 옷 위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깜박이도 없이 훅훅 치고 들어오는 습관은 종종 이렇게 철수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저도…. 저도 안 돼요. 철수는 말하고 싶었지만, 혀를 깨물지 않고 똑바로 발음할 자신이 없어 그만두었다. 대신 고개를 숙이고 소매 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사관학교 27기가 도계영 · 연지원 · 강지하의 3인을 제외하고는 전멸했으므로, 26기인 초연은 28기 철수의 직속 선배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전 학년과 진행하는 졸업 직전의 실전 훈련도 철수는 초연과 함께했다. 그 나날을 철수는 아직까지도 두고두고 회상했다. 백초연은 빛나는 사람이었다. 한번 빛을 본 사람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김철수의 인생은 애초에 그닥 어둡지 않았지만, 그것이 불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철수는 초연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아직까지도 돌려받지 못했다. 어차피 뼈를 묻어야 할 군대. 벗어날 수 없다면 백초연의 곁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연이 있는 부대에 배치된 날 철수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곳이 비교적 안전한 전선의 후방이어서 더욱 그랬다. 철수는 만족했다. 27기의 일과 같은 사고는 초연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래서 김철수는 백초연을 가능한 한 오래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번에 진급했잖아."

가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철수는 눈으로 쫓았다. 침대 옆 행거에 걸린 감청색 제복 상의. 가슴 주머니 위에 달린 뱃지는 금색의 별이었다. 초연이 덧붙였다.

"백초연 소령."

"소령을 달면 뭐 해요."

어째서인지 초연은 들떠 보였다. 그래서 철수는 더 우울해졌다.

"부대를 맡기를 해, 후방에 남아 있기를 해."

초연이 새로이 발령받은 Z부대는 전방 중에서도 최전방이었다. 강지하가 죽었고, 도계영이 남은 곳. 최전방에서 사활을 걸고 싸우는 이가 군대의 얼굴이 되어야 사기가 올라간다는 윗분들의 결정이었다. 원한다면 포기하게 해 주겠다는 마지막 배려를 초연은 담담하게 거절했다. 비교적 후방에서 목숨이나마 보전하던 시기를 제 손으로 끝냈다. 죽이거나 죽임당하거나, 생사를 건 치열한 싸움의 길로 들어섰다.

이에 울고 싶어진 쪽은 오히려 철수였다. 사관학교 27기의 일을 초연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철수는 종종 그 자리에 초연이 대입되는 꿈을 꾸었다. 인생 최악의 악몽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새벽이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을 복도나 바깥을 거닐곤 했다. 그게 현실이 된다면, 글쎄, 철수는 차라리 제가 없어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달깍, 초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속도 모르고 웃는 눈빛이 선선했다.

"집에 돌아가는 돈이 달라지지."

"그게 우리한테 상관이나 있어요?"

철수와 초연은 가장 부유한 계층 출신이었다. 둘은 거주 구역의 가장 안쪽, 겹겹의 성벽이 둘러싼 안전한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러니까 가난한 형편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고 자원한 경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각성자 징병 제도의 희생양 쪽이지. 전장에서 공을 세웠을 때 받는 상금이나 사망 시의 위로금보다 목숨 값이 비싸다는 뜻이었다.

"그건 아니라도."

초연이 후후 웃었다.

"그냥, 기분이 좋잖아."

"그래요…."

철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수긍했다. 콩이 아니라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초연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였다. 초연은 다시 서랍을 열어 짐을 싸는 일로 돌아갔다. 철수는 초연이 마시던 잔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모금쯤 남은 연갈색 액체에 찻잎 조각 몇 알이 동동 떠다녔다. 주전자를 가져왔으니 미리 채워 놓을까 했다가, 차가 식을까 봐 그냥 있었다. 초연이 몸을 일으키면 그때 따라도 늦지 않았다. 철수는 대신 활짝 열린 가방과 바삐 움직이는 하얀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녹색의 벽지, 어두운 색의 가구. 트로이 백주 지부 최후방의 A부대 소속, 백초연 대위의 방에서는 늘 똑같은 냄새가 났다. 한여름의 숲길을 걷는 듯한 맑은 갈색의 향이었다. 철수가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초연은 조금도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라임 바질 앤 만다린. 무슨 이름이 그렇게 길어요? 철수가 투덜거렸고 초연은 그러게, 하고 웃었다.

초연의 디퓨저는 군 지원품 이상의 최상급이었다. 안전 구역의 가족들에게서 전달받은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초연이 상자 포장을 뜯어 내용물을 채울 때 철수도 옆에서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시트러스 계열도 섞인 듯했는데. 상큼함은 금세 사라지고 우디한 잔향만 남았다. 시트러스는 금세 날아가거든, 설명하며 초연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원래 아름다운 것들은 금세 사라져. 그렇게 말할 때의 초연은 꼭 손대면 바스라질 것마냥 투명하고 여리게만 보여서. 철수는 그저 묻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도 그러려는 거야? 우리는 다 사랑하는 것을 일찍 잃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차마 그 공포를 입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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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연의 Z부대 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철수는 그 사실을 지프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깨달았다. 군용 차량이 털털거리며 부대 건물 앞마당으로 들어갈 때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건물 안팎을 장악한 음습하고 우울한 죽음의 분위기 탓이었다. 두꺼운 금속제 차체 안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기운은 짙고 묵직했다. 철수는 불안하게 시동을 끄고 기어를 P에 두었다. 그러나 흘긋 쳐다본 조수석의 초연은 그저 덤덤하게 창밖만 응시했다.

그러니까 실내로 한 발짝 내딛었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하필 도계영인 건 부수적인 요인에 불과했다.

"백초연 소령님 아니세요?"

도계영이 비아냥거렸다. 초연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도계영 중위."

"예, 저는 중위고 그쪽은 소령이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도계영이 날선 태도로 맞받아쳤다. 160 언저리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게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안전한 후방에서 보호받느라 잘 모르셨나 본데, 여기서 계급장 따위는 통하지 않아요."

고리타분해, 진짜. 혼잣말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성량은 모두가 들으란 듯 큼지막했다. 언제적 지위를 아직까지 자랑하고 다니지? 초연이 미간을 모았다. 철수는 마른 입술을 괜히 혀로 적셨다.

철수도 초연도 알았다. 말이 좋아 사관학교지 사실은 그냥 특수부대 양성소에 가까웠다. 사관학교 졸업생들은 병사를 통솔하는 장교라기보다는 벌레에 대응할 하나하나의 무기로 길러졌다. 소위니 중위니 대위니 하는 계급도 과거와는 달리 뜻이 퇴색되었다. 지위는 그냥 있어 보이라고 붙여 준 장신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도계영의 매도가 철수는 더 불쾌했다. 게다가, 초연을 계급에나 집착하는 멍청이로 만들고 있었지만…. 오히려 미련이 남은 쪽은 도계영 같은데.

직급이 여러 번 강조되었던지라 처음에 철수는 강등에 대한 반발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연을 노려보는 또렷하게 푸른 눈동자와 그 안에서 이글거리는 감정은….

도계영이 바싹 다가섰고 철수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초연을 가렸다. 슬쩍 넘겨다본 도계영의 어깨 너머에는 연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도계영을 말리리라는 것은 너무 큰 기대인 듯싶었다. 연지원은 몇 걸음 뒤에서 팔짱을 끼고,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양 지켜만 보았다. 초연이 슬쩍 철수의 팔을 치웠다. 철수는 불안하게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다행히도 도계영은 거리를 더 좁히지는 않았다.

"아직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아가."

도계영이 말했다. 그런 거 당신들 잘하잖아. 윗선에 돈이나 좀 찔러 주고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아. 철수는 눈썹을 찡그렸다. 초연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잠자코 도계영이 입을 다물기를 기다렸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살아. 왜,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영웅 놀이가 하고 싶어진 거야?

"내 말대로 해."

"도계영."

초연이 조용히 불렀다. 도계영은 눈을 한껏 치켜뜨고 초연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미친년 같지?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독기가 가득했다. 철수는 도움을 요청하듯 연지원을 쳐다보았지만, 무덤덤한 관조자의 태도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이게 지금 밥그릇 뺏길까 봐 경계하는 꼬라지 같냐고. 도계영이 계속 말했다. 멋대로 생각해. 그리고 하나만 알아 둬.

"내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여?"

초연이 멈칫했다. 도계영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모든 것을 지켜낼 수 있다는 오만은 버려."

강지하가 죽고 도계영이 남은 이곳은 잿빛 비극이 한차례 훑고 지나간 현장. 철수는 제 기억을 의심해야만 했다. 회색 얼굴로 텁텁하게 웃는 저 여자는 사관학교 시절의 맑고 깨끗하던 소녀와 같은 사람이 맞을까.

"언젠가 그 오만이 당신도 죽일 테니까."

도계영은 제 할 말만 하고 홱 돌아섰다. 제멋대로이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연지원은 조금 오래 자리에 남았다. 녹색 눈동자가 어떠한 감정도 담지 않은 채 철수를 위아래로 훑었다. 철수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연지원은 짧게 목례했다. 철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 도계영에게 합류했다. 철수는 초연을 흘긋 넘겨다보았다. 백초연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서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멀어지는 도계영을 노려보았다.

트로이 백주 지부 대(對) 판도라 사관학교 27기 졸업생, 백주 지부의 프론트 라인 Z부대 소속의 전투원. 강지하 소위가 사망한 이후로, 최전선의 주 전력이던 도계영 대위는 군의 통제를 벗어났다. 팀 리더에 대한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이 숨쉬듯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군인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강등은 당연했다. 핵심은 그 이상이었다. 모든 대(對) 판도라 선전(宣傳) 활동에서 도계영을 제외하자. 해당 사안은 짧은 논의 끝에 결정되었다. 보기 드문 만장일치랬다. 각종 군 홍보물에서 도계영의 사진은 빠르게 삭제되었다.

그녀를 대신하여 새로운 군대의 얼굴이 되기에 필요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하나, 일정 수준 이상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 둘, 타인에게 호감을 사는 외모를 가졌을 것. 마지막은 도계영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셋, 군에 순종적일 것.

백초연은 그 자리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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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연 소령. 인류의 새로운 영웅. 초연은 제 얼굴이 찍힌 전단지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번의 샘플 회의를 거쳐 마침내 완성된 최종 시안이었다. 초연이 최전방에서 도계영과 등을 맞대고 싸우는 동안 안전 지대에는 이 선전물이 배포될 것이었다. 밤마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전쟁 방송에 겁먹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줄 것이었다. 군대가 우리를 지키고 있구나. 백초연이 저곳에서 싸우는 한 우리는 안전하겠구나. 십여 년 전의 초연이 강소빈을 보며 느낀 감정을 그대로. 강소빈의 자리에 선 백초연이 인류에게 돌려줄 것이었다.

회색 전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녹색 머리칼의 여자. 좌우로 펼친 팔의 모양대로 지반이 솟아오른다. 초연은 제 초상의 과장되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아가. 도계영이 말했다. 초연은 눈을 꾹 감아,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음성을 끊으려 노력했다. 점점 격해지는 발언에 섞여 들리던 처절한 마음의 소리. 당신까지 여기 있을 필요는 없어. 아니야, 초연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죽을 거야. 진작에 그랬어야 할 일이었어.

이곳은 트로이 백주 지부의 Z부대, 벌레와 맞서 싸우는 인류의 최전선. 초연은 이 땅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했다. 백초연과 김철수를 대신하여 이곳에 보내진 자들. 백초연이 도망치지 않았다면 숨쉬고 있었을지 모를 목숨들.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다는 오만 따위가 아니었다. 이것은 초연이 지은 죄의 대가였다.

초연은 최초의 굴복을 기억했다. 26기 졸업생 배치 목록이 발표된 날의 일이었다. 큼지막한 공고가 붙은 게시판 앞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안도했다. 온갖 감정이 어지러이 뒤섞인 틈을 파고들어 초연은 제 이름을 찾았다. A부대 항목의 맨 위, 단정한 바탕체로 쓰인 '소위 백초연'. 어절이 눈에 들어온 순간 다리가 풀렸다. 까딱하면 제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아 초연은 게시판을 부여잡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왔다.

백주 지부의 A부대는 후방 중에서도 최후방이었다. 거주 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물자의 준비를 담당했다. 보급품 수송은 다른 부대의 몫이었으므로 A부대는 벌레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전투라 해 봤자 간혹 거주 지역 외곽에 나타나는 벌레를 퇴치하는 정도인데, 인간의 땅까지 흘러들 정도라면 무리에서 도태된 나약한 개체라 크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거주 구역 근처라 가족으로부터 생활품을 전달받을 수도 있고. 군대가 아무리 폐쇄된 공간이라 해도, 일부 고위층 출신 군인들은 외부와 교류했고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부모님의 신분과 돈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초연은 꽤 강한 각성자였고, 이를 놀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손해겠지만 높으신 분들이야 알 바가 무엇이랴. 세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거금을 쥐여 줬을 것이다. 군의 인사 담당자가 아무리 융통성 없대 봤자 사람이다. 너무 큰 액수의 돈은 없던 유도리도 만드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A부대에서 초연은 평안하고 안전할 것이다. 군대 밖이나 학교에서와 다름없이 안온한 일상을 유지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의 부고가 들려오는데. 그 자리에는 백초연의 이름이 들어갈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초연은 안심했다. 동시에 그것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제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가. 비루한 목숨 하나 아끼자고 타인을 대신 바치는 짓이었다. 행위의 타당성을 초연은 쉬이 저울질하기가 어려웠다. 백초연이라는 여자의 삶에 과연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어쩔 수 없어. 넌 인간이니까. 마음의 소리가 속삭였다. 원래 살아 있는 것은 다 그래. 생은 본디 다른 것의 숨을 태워서 유지된다고.

그러니까 당연한 일이야.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을 활용하며 살아.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다음부터는 쉬웠다. 살아 있다면 침묵하지 말아야 할 정도로 사회는 부조리한데. 정말 부끄럽게도, 백초연은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사실을 잊고 지냈다.

열 살 때였던가, 하여튼 그 언저리에. 길을 걷다가 떨어진 지폐를 주운 적이 있었다. 당연히 학교에서 배운 대로 원래 주인을 찾아 주어야지 했다. 가장 가까운 경찰서를 방문해 맡기려는데, 복병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그만한 돈을 누가 찾아. 엄마가 웃었다. 그냥 초연이가 가지렴. 아빠가 말했다. 초연은 부모님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든 열 살짜리 계집애에게는 크게 느껴지는 돈이었으므로. 하지만 일단 그러라니 그렇게 했다. 주머니에 잘 넣어 뒀다가 돼지 저금통에 먹였다. 어느 정도 경제 관념이 생겼을 즈음 초연은 그 일을 회상하며 웃었다. 정말 그러네요, 이런 돈을 누가 찾는다고.

그게 객관적으로도 그렇게 작은 돈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에게는 한 달을 살아가는 데 쓰일 전 재산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초연은 고작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오빠는 군대에서 죽었어요. Z부대에 있었대요. 초연의 품에서 거주 지역 외곽의 소녀는 그렇게 말했다. 보상금은 엄마가 도박으로 날렸어요. 초연이 방금 으깬 벌레의 체액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지만 소름끼칠 정도로 무덤덤한 태도였다. 초연은 뒤늦게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푸석해진 피부, 살이 없어 뼈가 툭 튀어나온 어깨. 지식이 없는 초연의 눈에도 정상보다 한참은 말랐다.

생기 없는 눈동자가 위아래로 초연을 훑었다. 언니는 왜 저를 구했어요?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졌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투였다. 돌려줄 말이 없어 초연은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기대조차 않았다는 듯 천천히 초연에게서 벗어났다. 빠르게 멀어지는 갈색 뒤통수를 초연은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눈에 담았다.

그날 저녁 부대로 복귀해 확인한 사망 보상금은, 열 살의 초연이 주운 돈의 정확히 세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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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부대의 아침은 낯설었다. 당번을 정해 식사를 준비한다. 오손도손 모여서 밥을 먹으며 잡담을 나눈다. 기계적이고 딱딱한 인간관계가 주를 이루는 A부대의 풍경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Z부대가 소규모 정예 팀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초연은 연지원이 만들었다는 프렌치토스트를 포크로 잘랐다. 화목해 보이는 이들은 가족이다. 그러면 기분이 착잡해졌다. 한 사람이 사라질 때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로 염했을까.

초연은 흘긋 도계영을 쳐다보았다. 도계영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초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관생도 시절의 도계영은 그리도 살갑게 초연을 맞아 주던 소녀였는데. 언니, 언니 부르며 따라다니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서 도계영이 으르렁거릴 때 더 놀랐던 것도 있었다. 저 애도 이렇게 날선 태도로 사람을 대할 수 있구나, 하고. 그 대상이 하필이면 저라는 사실이 초연은 어쩐지 서운했다.

언젠가 그 오만이 당신도 죽일 테니까. 도계영이 쏘아붙였다. 초연은 지난겨울 들려온 강지하의 부고를 떠올렸다. 도계영과 연지원, 강지하는 사관학교에 입학하고서부터 줄곧 붙어 다녔다. 다른 Z부대 군인들보다도 유독 가까웠을 사이. 가족 중에서도 유달리 친밀했을 가족. 당신도 나처럼 될 거야. 강지하가 사라진 여기서 도계영은 죽어 있는 걸까. 잔뜩 찌푸린 얼굴 위로, 어쩐지 초연이 구해낸 거주 지역 외곽의 소녀가 겹쳐졌다. 초연을 위아래로 훑던 텁텁하니 생기 없는 눈동자.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은 저렇게 되는 걸까.

연지원이 테이블을 돌며 커피를 나눠주었다. 초연과 눈이 마주치자 짧은 눈인사를 건네왔다. 초연은 마주 목례하고는 한 모금 마셨다. 싸구려 커피의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에 찝찝하게 맴돌았다. 도계영과는 반대로, 연지원은 Z부대에서 가장 초연에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방인이다. 이곳에서 내 가족은. 초연은 식탁 아래로 철수의 손을 잡았다. 철수가 움찔했다. 마주 손가락에 감겨 오는 체온이 따뜻했다. 네가 사라지면 나도 저렇게 되는 걸까. 그건 어쩐지 조금 두려웠다. 따뜻한 손을 힘주어 감싸며 초연은 강소빈을 생각했다. 2세대의 불꽃, 완전무결한 영웅. 군의 부조리를 뜯어고치고 최전방에서 몸 바쳐 싸우다 결국 장렬하게 전사한, 당장 위인전에 올려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사람.

당신은 사랑하는 것이 있었나요. 그래서 그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나요. 강지하가 없어진 도계영은 망가졌고 나는 철수가 사라진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겁이 나는데, 당신은 이 공포를 어떻게 버텼나요.

강소빈은 아마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가장 완벽한 영웅이었으니까. 강소빈은 인류를, 정의를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초연은 그렇게 믿으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야, 그래야 그런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어떤 영웅은 영웅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영웅이 처음부터 영웅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종종 잊어버리는데, 우리는 어떤 존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강소빈 같은, 몇몇의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면 이 명제는 대체로 유효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오직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수만 있을 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곧 영웅이었다.

백초연은 영웅이고 싶었다.

초연은 철수의 손을 놓았다.

사이렌이 침묵을 찢으며 울었다. 건물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요란했다. 벽에 이마를 붙이고 자다가 철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씨발것들, 하고 옆 침대에서 연지원이 욕을 뱉었다. 철수는 눈을 비볐다. 며칠째 깊게 잠들지 못했지만 아드레날린 탓인지 피곤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벌레의 출몰을 알리는 소리였다. 한밤중의 사이렌, 한밤중의 침공. 벌레는 대부분 주행성(晝行性)이었으므로 꽤 드문 경우였다. 그러나 아예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머리맡에 꼭 보호복과 무기를 두어야 한댔다. 철수는 주춤주춤 일어나 제 것을 챙겼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손이 자꾸 헛나갔다. 연지원이 흘긋 철수를 넘겨다보았다.

"보고 따라해."

철수는 연지원이 시범을 보이는 대로 보호대의 끈을 어깨 너머로 넘겼다. 버클을 조여 심장 부근을 잘 가리도록 하고 부츠의 끈을 단단하게 묶었다. 마지막으로는 총의 잠금장치를 풀면서 복도로 달려나갔다. 나머지 부대원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위치는요?"

초연이 물었다.

"북동쪽으로 10킬로미터. 포실 서른에 판도라 다섯."

철수는 습관적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강에 발이 묶인 상태이나 15분 안팎으로 도착할 듯 보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벌레의 움직임을 체크하고 보고하는 일은 돌아가면서 맡는다고 했는데. 오늘 당번의 일을 가로챈 셈이 되어 버렸다. 가뜩이나 서먹서먹한 사이, 더 밉보일까 불안해졌다. 저야 괜찮다지만 초연에게 민폐였다.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철수는 흘긋 초연을 살폈다.

"김철수 소위, 뭘 할 수 있다고?"

연지원이 흐름을 끊었다. 철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투시와 천리안입니다."

"좋아."

연지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앞으로도 종종 부탁해."

연지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도계영이 조수석에 오르고, 철수는 초연을 따라 뒷좌석에 앉았다. 창가 초연의 너머로, 마치 그림의 배경처럼 지나가는 잿빛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너진 건물, 부서진 도로 파편.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하도 오래되어 녹이 슨 채 나뒹구는 망가진 자동차. 도시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형편없는 폐허였다. 그러나 초연은 이 땅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처절한 생존 투쟁의 흔적이지 않니. Z부대에 오기 직전, 벌레와 인간의 경계에 위치한 회색 지대를 사진으로 받았을 즈음의 일이었다. 살고자 하는 몸부림은 누구의 것이든 아름다운 법이라고…. 철수는 머쓱하게 사진을 다시 보았다. 볼품없는 현장이라고만 생각했던 제가 부끄러워졌다.

그 장면이 제 눈앞에 바로 펼쳐져 있었다. 철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실제로 보니 보잘것없다는 인상만 더욱 강해지는데. 이 땅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시선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을까. 그러나 창밖을 내다보는 초연의 선 고운 옆모습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연지원이 차를 세웠다. 도계영이 못 기다리겠다는 듯 훌쩍 뛰어내렸다. 철수는 느릿하게 맨땅을 밟았다. 거무스름한 흙바닥은 습기를 머금어 축축했다. 뒤이어 초연의 군화가 지면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철수는 흘긋 뒤를 넘겨다보았다. 초연이 차에서 내리고 옷의 주름을 펴고 문을 닫는 모든 일에 제 손을 빌려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약속한 탓에 참았다.

"철수야."

초연이 말했다. 철수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래도 초연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는 남아서 다행이었다.

"풀어 줄래?"

철수는 초연의 목으로 손을 올렸다. 초커라고 하기에는 느슨하고 목걸이라 부르기에는 짧은 굵직한 금속제 사슬. 전투계 각성자가 기적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채워 놓은 물건이었다. 폭주하여 통제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유사시에는 폭발 기능도 포함했다.

가운데의 보석을 네 바퀴 돌리고 일정 시간 압력을 가하면 초연에게 심어진 자폭 장치가 터진다. 불안한 상상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철수는 목걸이를 잘 갈무리해 안주머니에 넣었다. 어떤 부대에서는 통제자의 실수로 전투원이 폭사하는 사고가 있었다는데. 혹시나 제가 잘못하여 같은 일이 벌어질까 철수는 늘 두려웠다.

정작 목숨줄을 내어준 초연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탁탁 몸을 풀었다. 철수는 쓰게 웃으며 주머니의 지퍼를 잠갔다. 초연은 때로 철수 본인보다도 더 철수를 믿었다. 그리고 철수는 그런 초연의 판단을 신뢰했다.

부대의 가장 큰 전력이 벌레를 대면하여 싸우는 동안 그들을 엄호하는 것이 주 임무랬다. 연지원이 폐허 안쪽으로 기어들어갔다. 철수는 총을 어깨에서 내리며 뒤를 따랐다. 거대한 날개가 바람을 찢고 날카로운 발톱이 부서진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연지원이 고개를 돌렸다. 철수는 본능적으로 연지원의 눈이 향하는 방향을 보았다. 서른 마리의 나는 벌레와 다섯 마리의 기는 종류가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채 전장으로 돌진했다.

연지원은 저격총의 스코프에 바싹 얼굴을 대고서, 철수는 머리를 들고 맨눈으로. 벌레와 인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사람의 흔적만이 남은 폐허, 등불이랄 것 없이 달만이 유일한 광원인지라. 어둠 속에서 형체를 뚜렷이 구분하기가 까다로웠다. 연지원이 톡톡 가슴 앞주머니를 두드렸다. 제 것을 짚어 보니 무언가 만져졌다. 철수는 적외선 투시경을 안경 위에 겹쳐 썼다.

도계영이 일어섰다.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건물 파편이 날아가 바스라졌다. 반격은 초연이 팔을 뻗어 막았다. 손이 올라가는 대로 지반이 일어나 아군을 보호했다. 몸을 움직이는 모양새가 꼭 무희의 몸짓, 혹은 음악을 이끄는 지휘자의 손놀림 같았다.

두 여자가 함께 춤을 춘다. 철수는 넋을 잃고 그 장면을 응시했다. 휘두르는 것은 신에 필적하는 힘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저런 기적을 손에 쥐고도 고작 한 사람을 지킬 수 없을 때 얼마나 무기력할까.

벽돌과 시멘트가 뭉친 덩어리 하나가 날아가 철근에 부딪혔다. 벌레 하나가 이를 피하지 못하고 처참히 뭉개졌다. 도계영이 손을 털며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초연이 산 채로 땅 아래에 묻어 버린 포실 한 마리가 최후의 날갯짓을 퍼덕였다. 도계영이 그 위를 꾹, 강하게 내리눌렀다. 연지원이 쯧, 혀를 찼다.

"저 미친년이 진짜."

"왜요?"

"쟤 지금 일부러 겉멋 내는 거야, 저거."

철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연지원이 설명하듯 덧붙였다.

"니들 보라고."

철수는 입을 다물었다.

"무리하지 마, 병신아."

"좀 닥쳐, 내가 알아서 해."

톡톡, 귓가를 두드려 전하는 말에 도계영이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연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건물 부스러기가 올라갔다 내리꽂히기를 반복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벌레의 시체를 짓이기고 또 짓이겼다. 본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곤죽이 되어, 검고 끈적이는 액체로 흙바닥을 물들이는데. 도계영은 도저히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떡할까요."

"조금만 더 놔 둬."

줄곧 도계영과 호흡을 맞춘 초연은 조금 지쳐 보였다. A부대에서는 이렇게 힘을 쓸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마에 묻은 흙먼지와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주고 싶어서, 철수는 습관적으로 팔을 반쯤 올렸다 내렸다. 그러나 초연은 철수의 팔이 닿는 거리에 없었고, 설령 있었더라도 유난히 친밀한 거리감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철수는 머쓱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초연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에 손을 짚었다. 숨을 거세게 몰아쉬는 것은 도계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뺨에는 생기가 돌았고 눈에는 이채가 번뜩였다. 돌겠네, 하고 연지원이 한숨을 쉬었다. 철수는 눈을 깜박였다. 도계영은 그제서야 겨우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부대로 복귀하는 길에도 연지원이 운전대를 잡았다. 슬쩍 건네 본 철수의 교대 제안은 운전이 좋다는 말로 거절당했다. 결국 자리 배치는 나올 때와 같았다. 도계영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붙였다. 초연의 고개가 자꾸 떨어지길래 철수는 제 어깨를 빌려주었다. 목덜미에 와닿는 고른 숨결을 느끼며 똑같은 회색 풍경을 바라보았다.

.

.

.

"하나 줄까?"

"담배 안 핍니다."

연지원이 주머니에서 네모난 상자를 꺼냈다. 철수는 재빠르게 거절했다. 애초에 예의상 던진 물음인 모양이었다. 추가로 이어질 권유를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연지원은 별말 없이 한 개비만을 집어들었다.

탁, 탁. 기름을 좀 채워야겠군, 중얼거리며 연지원이 라이터를 흔들었다. 탁. 몇 번의 마찰음이 더 울리고서야 불이 붙었다. 연지원은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다. 연기를 내뱉을 때 비흡연자를 위해 살짝 고개를 돌려 주는 매너는 있었으나, 철수가 담배 냄새에 아예 면역이 없었단 건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철수가 기침했다. 연지원은 힐끔 눈동자만 굴려 그쪽을 넘겨다보았다.

"익숙해져."

두 번째 숨을 내쉬며 연지원이 중얼거렸다.

"너희가 좋아하는 값비싼 시가 따위는 여기 없으니까."

초연은 가끔 담배를 피웠다. 철수의 앞에서는 한번도 꺼내든 적 없었지만, 옷과 머리칼에 은은하게 배인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철수는 초연의 손에 두꺼운 엽궐련이 아닌 싸구려 연초가 들린 장면을 상상했다. 군복에 뿌옇게 밸 담배 연기. 비누 냄새와 섞여, Z부대의 나머지 인원과 마찬가지로 텁텁하고 투박한 체향이 될 것이다. A부대에서 사용하던 섬유유연제의 발그레한 오렌지 꽃 내음은 더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이야."

연지원이 담배를 꼬나물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철수는 연지원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으로 쫓았다. 회색 지대가 있는 방향이었다. 인류의 생존 의지가 쌓여 만들어진 흔적. 철수는 궁금했다. 저곳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을까. 연지원의 녹색 눈동자에 투영되는 장면은 복잡했다. 저 눈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보았을까.

"이곳에서 우리는 인간일까?"

연지원이 물었고 철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자니 아닐 텐데, 하고 조용한 웅얼거림이 돌아왔다. 우리가 인간이기 이전에 군인이라는 사관학교의 선서를 너는 기억하니. 바싹 마른 흙바닥에 담배꽁초가 문질러졌다. 연지원은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끝을 꾹 구둣발로 짓밟아 껐다. 발아래에 그대로 내버려 두고선 한 개비를 더 꺼내서 불을 붙였다.

"멍청한 짓을 했어."

여기는 막다른 길이야. 연지원이 말했다. 더 나아갈 수도, 그렇다고 몸을 돌려 도망칠 수도 없지. 가족의 안전과 부를 약속받는 대가로, 모든 군인은 젊음과 자유를 국가에 바친다. 그러니 한번 군인이 된 자는 영원히 군인이어야 했다. 군인으로서의 맹세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남은 생을 군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이었으므로.

군대는 집을 지키는 문지기견이었다. 나라는 목숨 바친 충정을 요구하지만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식량, 의복, 하다못해 비누나 치약 같은 저가의 소모품마저 개나 쓸 하급품을 받았다. 최고급 섬유유연제, 최고급 수건, 최고급 침구. 연지원이 읊었다. 그곳에서 쓰던 아름다운 무엇도 여기엔 없을 텐데.

"그런데 너희는 왜 여기 있어?"

"…그러게요."

초연은 왜 여기 왔을까. 모든 편안하고 고귀한 방식을 다 버리고 왜 가장 낮고 비참한 이곳을 택했을까. 철수는 초연의 선택이 싫었다. 강소빈과 도계영이 만들어 놓은 틀에 제 삶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는 것만 같았다. 그 과정에서 맞지 않는 부분, 세계를 위한 완벽한 영웅에는 부적합한 조각은 도려내어 버려진다. 그렇게 백초연의 인생은 지워진다. 철수는 그것이 못내 슬펐다.

누나는 강소빈이 아니에요. 초연의 담담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철수는 몇 번이고 거듭 생각했다. 아무도 그 사람을 대신할 순 없어요. 그러나 괜히 심란하게만 할까 겁이 났던 탓에 목구멍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강소빈이 되는 것은 백초연에게 불가능했다. 강소빈이 특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백초연과 강소빈이 다른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그 자신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철수는 그냥 초연이 초연의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강소빈의 거울, 도계영의 대체제가 아니라, 그냥 백초연이라는 이름의 한 여자로. 누구와도 다른 그녀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초연은 그러기 싫다고 했다.

"누나는 이곳에서 뭘 하고 싶은 걸까요…."

철수는 발끝으로 애꿎은 바닥만 꾹꾹 눌렀다. 담뱃재가 하도 섞여서 거무스름한 흙이 신발의 움직임대로 푹 파였다.

연지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죽지 마."

잘못 들었나 싶어 철수는 고개를 들었다. 슬쩍 확인한 시선은 여전히 먼 곳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철수는 어쩐지 연지원과 눈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 연지원이 중얼거렸다. 네가 이제 백초연의 목숨이야. 음절이 딱딱 끊기는 특유의 억양에서 숨길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나왔다.

"항상 네가 먼저야. 너부터 지켜야 해."

연지원이 충고했다. 철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설명하듯 덧붙는 말에 도로 내렸다. 모든 생은 반복되는 비극을 예방할 의무를 진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연지원은 거듭 조언했고 철수는 잠자코 받아들였다.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어. 나까지 없어지면 도계영은 정말 움직이는 시체나 마찬가지니까.

어떤 씨발새끼가 도계영의 심장 반절을 가지고 뒤졌어. 천박한 욕설이 강지하 소위를 칭하는 단어임은 조금 늦게 깨달았다. 연지원이 고개를 떨구었다. 덕분에 도계영은 저 꼬라지가 됐잖아.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저것이 한숨인지 담배 연기인지 철수는 구분할 수 없었다.

걔는 그나마 나머지 절반이 나한테 있어서 이 정도인 건데. 누군가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달콤한 사랑 고백을 닮은 언어도 연지원이 말하니 그저 처절한 비통으로만 들렸다. 근데 백초연은 아니잖아. 연지원이 고개를 돌려 철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 꽁초를 군화 바닥이 거침없이 짓밟았다.

백초연은 너뿐이야.

백초연을 도계영처럼 되게 하지 마….

.

.

.

철수가 초연의 방을 찾았을 때 안에는 선객이 있었다.

초연이 문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반쯤 열린 문틈으로 철수가 볼 수 있는 얼굴은 도계영뿐이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짝다리를 짚은 채 삐딱하게 초연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전장의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모습이,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은 초연과 대비되었다.

"어때?"

"뭐가?"

못 알아들은 척, 초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계영이 미간을 모았다.

"무섭지 않아?"

예전으로 돌아가야겠다,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마구 들지 않아? 변함없이 날선 목소리로,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와다다 쏘아붙였다. 도계영이 숨을 골랐다. 초연도 잠시 침묵했다.

"계영아."

어떠한 적의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부름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했다. 도계영이 움찔했고, 철수도 따라서 숨을 죽였다.

"내가 돌아갔으면 좋겠어?"

"어."

"왜? 내가 미워?"

도계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앞니에 짓눌린 입술에서 엷게 피가 배어나왔다. 초연은 슬쩍 손을 내밀려다가 도로 거두었다.

초연이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지 않아."

"…후회하게 될걸."

그럴까, 초연이 희게 웃었다.

"하지만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순간 도계영의 눈동자에 확, 불길이 일었다. 동공이 확대되고 눈꺼풀이 올라가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미세한 변화를 철수는 누구보다도 쉽게 잡아채었다. 도계영이 짝다리를 풀고 몸을 바로 했다. 성큼성큼 발을 내딛어 초연에게 몸을 바싹 들이밀었다. 성난 맹수처럼, 눈앞의 초연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지랄하지 마!"

철수는 당장이라도 방안에 뛰쳐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사실 거의 그러려고 했다. 문고리까지 올라간 손을 도계영의 이어지는 말이 멈추었다. 그래서 여기서 목숨 걸고 싸우다 말라 뒤지겠다고? 철수는 손잡이를 붙잡은 채로 대화를 마저 엿들었다.

"그래야 마땅한 삶이라고? 그딴 게 어딨어."

도계영이 씹어뱉었다. 아무도 당신에게 그런 의무를 부여하지 않았어. 처절한 외침은 어쩐지 초연에게만 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누구도 우리에게 그딴 운명을 쥐여 줄 자격은 없어.

철수는 문고리를 놓았다. 도계영의 푸른 눈동자에서 늘 이글거리던 감정을 그제서야 알 것도 같았다. 도계영은 초연에게서 아직 망가지지 않은 자신을 보았을까. 연지원이 저를 투영하여 철수를 대한 것처럼. 모든 살아 있는 자는 제 불행이 반복되지 않게 할 책임이 있다. 연지원은 김철수에게, 도계영은 백초연에게 각자의 방식대로 그 사명을 다했다.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그래서 당신이 여기를 벗어났으면 좋겠어. 도계영이 줄곧 백초연에게 하려던 말은 그것이었다. 당신은 내 불행을 반복하지 않아도 돼.

추락한 청춘을 끌어안고 우는 건 나만으로 충분한데.

"하지만, 계영아."

그렇게 고개를 저을 때 초연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침묵이 도대체 어떤 말을 전했길래 도계영이 그리도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보였을까. 저를 등진 이의 안색을 읽는 것은, 애석하게도 철수가 일으킬 수 있는 기적의 범위가 아니었다.

문이 거칠게 활짝 열렸다. 철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도계영이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비켜."

죄송합…. 철수는 습관적으로 내뱉으려다가 말을 멈췄다. 목소리에 묻어난 습기를 뒤늦게 읽어낸 탓이었다. 도계영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갈 때 흘긋 내려다본 눈시울이 새빨갰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철수는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A부대의 고풍스러움과는 정반대인, 철 지난 미감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초연은 덩그러니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나."

철수는 도계영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리도 못되게 구는 사람을 이해할 남자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도계영이 맞다고 생각했다. 초연은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 남아 무소용한 비극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전단지가 배포되기 직전인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같이 돌아가요. 몇십 번이고 혼자 연습해 온 마음이 혀 아래에서 우글거렸다. 다른 사람의 대체품이 되지 말아요. 그냥 백초연의 인생을 살아요. 부디 그렇게 해 줘요.

"철수구나."

그러나 초연의 얼굴을 마주보았을 때 하고자 준비한 말은 전부 녹아 사라지고, 출처를 알 수 없는 합리화만이 남았다.

애초에 자기 의지란 게 참 애매했다. 초연이 원하는 백초연의 삶이 강소빈의 거울이나 도계영의 대체제라면, 아마 철수가 틀리고 초연이 맞는 거겠지.

그리고 철수는 초연이 어떤 삶을 택하든 그녀를 사랑하기로 했다.

초연이 젖은 눈동자로 웃었다. 철수는 초연을 끌어안았다. 초연은 철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둥둥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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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

초연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초연의 작은 손에도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얼떨결에 받아든 것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의 투박한 유리병. 어떠한 세공도 없이, 목에 달린 녹색 리본이 장식의 전부였다. 철수는 손가락으로 매끈한 표면을 이리저리 쓸었다. 고급지고 화려한 초연의 취향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이게 뭐에요?"

"디퓨저. 남은 전부야."

그러고 보니 방에서 늘 나던 특유의 향기가 없었다. 철수는 슬쩍 내부를 둘러보았다. 스틱이 서너 개씩 꽂혀 있던 방향제 병은 깨끗이 씻겨 책상 위에 거꾸로 엎어진 채였다. 철수는 초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초연이 턱짓했다.

"네가 가져 줘."

"제가요?"

"응, 그래 주면 좋겠어."

뚜껑을 열지 않으면 시트러스는 날아가지 않을 거야. 초연이 웃었다. 내가 옮겨 담은 그대로, 영영 그 안에 남아 있을 거야. 철수는 문득 시트러스와 우디 향의 방향제가 초연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순수하고 아름답던 어린 날의 백초연. 열정은 모두 날아가 버리고 현실과의 타협을 마친 백초연. 초연은 강소빈의 자리를 대신하기로 결정하면서 모든 제 과거를 긁어모아 향수병에 담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철수에게 맡긴 것이다. 철수는 유리병을 깨지지 않게 손으로 꼭 감쌌다.

잠이 오지 않아 초연은 조금 걸었다. 날이 거의 풀려서 이제는 밤에도 쌀쌀하지 않았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는 점점이 별이 박혀 있었다. 초연은 하늘로 손을 뻗어 두터운 별무리를 슬쩍 받쳐 보았다. 손가락 틈새에서 별빛이 흘러내릴 듯 반짝였다.

도계영은 도망쳐도 좋다고 말했다. 정확하게는, 초연이 그래야 한다고 했다.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초연은 벌레를 으스러뜨릴 때의 감촉이 싫었다. 단단한 외피에 금이 가면 비어져 나오는 내장과 살의 색깔이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겁나는 것은 벌레의 숨통을 끊으면서 도계영이 짓는 표정이었다. 날개 한 겹, 다리 하나, 나아가 모가지를 뜯어낼 때마다 광기에 가까운 황홀이 떠올랐다. 도계영은 웃었다. 그러면서 울었다. 꼭 잃어버린 마음의 조각을 하나씩 되찾아오는 듯한 그 기묘한 얼굴 위로, 미래의 제 모습이 겹쳐져서 초연은 힘들었다.

초연은 저를 잠들기 두렵게 만든 악몽, 철수의 손을 눈앞에서 놓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강지하 소위는 도계영과 연지원의 눈앞에서 사망했다 들었다. 그러니 언젠가 그 꿈도 현실이 될 것이었다. 그날 초연이 철수의 손을 놓치면 세계가 무너질 것이었다. 도계영처럼, 도계영에게는 연지원이 남았으나 초연에게는 아무도 없을 테니 어쩌면 그보다 더, 미쳐서 벌레를 도륙하고 다니다가.

초연은 강소빈이 아니었으므로 언젠가는 지금의 선택을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마저 초연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계영은 초연이 이 운명을 짊어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초연은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는 자는 반복되는 비극을 막을 책임이 있다. 가진 능력이 클수록 더 그랬다. 힘이 있는 자는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초연이 걷기로 한 이 길은 기적을 쥐고 태어난 이가 마땅히 이고 가야 할 숙명이었다.

초연은 하늘로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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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장수할래, 명예롭게 단명할래?

대부분의 사람은 전자를 택할 것이다. 딱히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은 모든 유기체의 기본적인 본능이니까. 비열하고 치졸하게, 필요하다면 다른 생명을 바쳐서라도 이룩해 내는 생의 연장. 이 시대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려해 봤고, 일부는 실제로 시행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간혹 가다 그 본성을 저버리고, 나는 기꺼이 후자로 살아가겠노라 말하는 이가 있다. 선택에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갈등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고, 결국 실천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인류는 그들을 영웅이라고 불렀다.

백초연은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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