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멸망프로젝트

김시윤 씨는 오늘 수소문 끝에 최하나 씨를 찾았다. 그녀가 최하나 씨를 찾은 이유는 묻고 싶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사기라도 당한 걸까? 헤어진 가족? 원수? 그 무엇도 아니다. 단지 그녀는 인터넷에 올라온 오래된 인류멸망프로젝트 구인 글을 보고 어째서 아직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았는지를 묻기 위해서 최하나 씨를 찾았다. 생각해보면 아주 터무니없는 일이다. 누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인류멸망프로젝트 운운하는 게시글을 보고 작성자를 찾아 진지하게, 인류 멸망이 도래하지 않은 이유 따위를 묻겠는가? 만일 최하나 씨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장난글에 진담으로 찾아왔냐며 어이없어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시윤 씨는 인류멸망프로젝트를 믿었다. 그 글은 분명히 진지했고, 인류멸망을 향한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저 사람만 따라간다면 인류는 멸망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김시윤 씨는 여기서 의문을 느껴 최하나 씨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최하나 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최하나 씨였고, 인류멸망을 진심으로 꿈꾸며 그 글을 작성한 것이 맞았다.

그리하여 도심의 한 카페-인스타그램용으로 아주 인기가 있어서 사람이 무척 붐볐다-에서 그 둘은 만났다. 김시윤 씨는 흘러내리는 단발을 귀 뒤로 넘겼다.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를 제시한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인류멸망프로젝트와 관련된 글을 봤어요. 왜 아직도 인류가 남아있죠?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은 건가요?"

그 말을 듣고도 최하나 씨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녀는 입만 달싹이다가 요새 인기있다는 더티커피를 흉내내어 크림이 접시 위로 흘러내린 채 나온 비엔나 커피를 홀짝였다. 창가라서 그녀의 안경이 빛에 반짝였다. 김시윤 씨가 인내심 있게 한참을 기다려서야 최하나 씨의 입이 열렸다.

"인류는 이미 멸망했어요."

"...뭐라고요?"

"인류는 이미 멸망했다고요."

최하나 씨의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그만큼 단호했다. 그 확신에 찬 어조에 김하나 씨는 잠시 헛웃음을 뱉었다.

"저기요, 개소리는. 나는 이걸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망했으면 나랑 당신은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데요? 이 커피는 뭐고? 사람들 말소리, 티비도 멀쩡해, 인터넷도, 페북도 멀쩡해!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더더군다나 초면에."

김시윤 씨는 게시글을 본 순간 최하나 씨를 자신의 이해자라고 느꼈지만 그건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순간의 희열과 지금의 상황은 잘 이어지지 않았고, 그녀는 불안했다. 자신이 느낀 것은 무엇이었고, 이 사람은 무얼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러나 최하나 씨는 김시윤 씨의 격렬한 반응에도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심지어 조금 웃기까지 했다.

"저는 성공했어요. 믿지 않으면 소용 없겠지만. 사실 모두가 믿지 않죠. ...인류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들 있었나봐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럴리가 없을텐데."

어쩐지 텅빈 어조였다. 그러나 동시에 영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아서 김시윤 씨는 다시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이야기하세요. 이해 못하겠으니까. 멸망한 거랑 안 믿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최하나씨는 검지손가락으로 미간을 문지르다가 다시금 말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멸망했어요. 우리는 성공했죠. 전... 저조차도 성공을 가늠할 수 없었어요. 생각과 다르게 다들 오합지졸이었고, 그런데... 하지만 성공했어요. 그래, 멸망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왜 이러냐고요? 이건 제 탓이 아니에요."

그녀는 조금 화난 듯도 보였다. 아니, 울분? 허망? 김시윤 씨는 짐작할 수 없었다.

"인간은 참 재미있어요. 믿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면 그걸 거부하기도 하고, 마치 잊어버리거나 없는 일로 치부하죠. 그것 뿐일까요? 똑같은 시간을 상대적으로 느끼기도 해요. 특히나 무의식중에서는요. 때로는 초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죠. 아니지, 그게 초능력일까... 글쎄, 정신이 공명하는 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사실 더이상 재미있진 않은데,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아주 나약하고 아이러니하다는 거예요. A를 꿈꾸면서 사실은 B를 원하죠."

이야기가 길어지자 다시 참지 못하고 몸을 들썩거리는 김시윤 씨를 최하나 씨는 손으로 제지했다.

"그래서 본론은 그거예요. 인류는 멸망했는데 인간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거예요. 분명히 인지하지도 못하게 멸망시켰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큰 위험을 무의식 중에나마 뇌가 인지한 걸까요. 우리는 멸망했어요. 그리고 여기는."

"멸망이 끝나기 직전의 의식세계라고 하죠. 대충 그래요."

최하나 씨는 조금씩 보이던 감정의 동요도 어느새 가라앉힌채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의 비엔나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김시윤 씨는 말을 고르느라 한참 애써야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지금 내가, 이... 내가! 인간이 망한 걸 못 받아들여서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요? 아니, 그보다 말이 돼요? 그게 가능해요?"

그녀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카페는 붐비는 사람들로 너무 시끄러워서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김시윤 씨는 이제 조금 헐떡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배신감으로 치를 떨며 최하나 씨를 노려보았다.

'감히 어떻게! 내가 당신을 뭐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최하나 씨가 웃었다. 김시윤 씨는 당황하여 노려보던 시선을 비꼈다. 최하나 씨는 이해한다는 눈으로 김시윤 씨를 보았다.

"가능해요.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존재하고 있어요. 동시에 영겁이죠. 인간이 적었다면 금방 끝났을 거예요. 인간이 너무 많은 게 문제네요, 역시."

진작에 멸망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중얼거렸다. 뒤이어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졌다. 김시윤 씨는 정신이 없어서 레몬수를 들이키느라 그녀의 말을 끊지 못했다.

"저도 처음엔 몰랐어요. 실패한 줄 알았거든요.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동료 한명의 존재가 아주 말끔히 지워졌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랬죠. 그 사람은 분명히 존재했어요. 처음엔 내가 이상한 건 줄 알아서, 한참 고민했는데 아니었어요. 프로젝트 진행자들은 모두 그 사람을 기억했고, 내 기억은 정말로 선명하고, 그냥, 우리 빼고는 모두가 그 사람을 잊어버린 거예요! 존재가 사라진 거죠.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다가 최하나 씨는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하긴 이런 일도 있는데 그런 일도 가능할 수 있겠죠. 아무튼 우린 여러 가설을 세웠어요. 그 중에 하나는 인류가 멸망했다는 거였죠. 하지만 그건 거의 신뢰받지 못했어요. 왜냐면... 아시잖아요. 이렇게나 모든 게 멀쩡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인류가 멸망해요. 차라리 다른 게 신빙성 있지."

김시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까까지 최하나 씨가 인류멸망의 대의를 저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정말 믿던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그 사람은 혼자서 버려진 가설을 연구하고, 연구하고, 연구하고, 어느날 숙소에서 그 사람의 방문을 열었는데, 사라졌더라고요. 그래요, 사라졌어요! 지워진 동료처럼 그 사람도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것 말고는 아예 흔적이 없었다고요. 그건, 그러니까... 누군가 그를 지웠거나, 아니면 그만이 무언갈 깨달았거나. 그래서 우리는 그의 연구기록을 찾기 위해 애썼어요. 하지만 그의 흔적은 지워졌고,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죠. 그러다 문득 그가 남긴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빠르게 말하기를 재촉하는 김시윤 씨를 흘긋 보곤 최하나 씨는 여전히 제 속도대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김시윤 씨가 떠놓은 레몬수를 마셨다.

"우리의 기억이죠.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의 발언을 조합하고, 그가 몇 마디 건네서 우리가 적어둔 짧은 사실들을 합치고, 그래요, 그랬더니 윤곽이 보이더라고요. 정신의 공명과 의식이 만들어낸 세계. 시간의 착각. 인류는 멸망했는데 다들 그 사실을 너무나 믿을 수 없었던 거예요. 죽기 직전의 의식세계를 무한히 늘려서, 우리는 지금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서로의 정신을 연결해서,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최하나 씨는 멍하니 말을 잇다가 입을 다물었다. 김시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레몬수를 엎을 뻔했다가, 침음성과 욕설을 뱉었다가, 마침내 말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딨어요? 그럼 그걸, 믿으면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예요? 멸망? 다른 방법은 없어요?"

"말했잖아요. 인간이 너무 많다고. 너무 많은 사람이 믿지 못해서 여길 혼자 힘으로 부술 방법이 없어요. 우리는 모든 걸 다했어요. 그리고... 네, 믿으면 빠져나가요. 사실 말예요, 이제 인류멸망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사람은 나 밖에 없어요. 다들 사라졌거든요. ...나만 진심이 아니었던 거예요."

최하나 씨의 자기고백에 김시윤 씨는 다시금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런 말 마요! 젠장! 난 당신 글 읽고 진심인 거 알았어요. 알았다고! 내 안목 무시해요, 지금?"

이번에는 상당히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그녀와 최하나 씨를 쳐다보았다. 김시윤 씨는 그들에게 거세게 눈을 부라렸고 그들은 수군대며 눈을 돌렸다.

"하지만 사실인 걸요. 당신도, 나도, 마음 속 어딘가에선 인류가 멸망하지 않기를 바랐던 거예요. 차마 그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지 못했거나."

하지만 당신은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최하나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코트에서 떨어지는 먼지가 햇빛을 받아 빛났다. 최하나 씨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김시윤 씨도 엉거주춤 일어났으나, 그녀가 채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최하나 씨는 곧장 나가버렸다. 김시윤 씨는 줄곧 온화한 태도였던 최하나 씨가 그렇게 아무말도 없이 나가버릴 줄은 추호도 몰랐고, 그 탓에 무척 당황했다. 그는 급하게 최하나 씨를 쫓아가려던 와중에도 빈 컵과 먹은 자리를 정리했다. 빠르게 달려나가자 다행히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최하나 씨를 잡을 수 있었다.

김시윤 씨는 덥썩 최하나 씨의 팔을 잡았다. 최하나 씨가 김시윤 씨를 빤히 보자 김시윤 씨는 잠시 더듬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저기, 그냥, 그렇게 가버리니까... 에이! 저기요! 그런 식으로 말을 끝내놓고 가면 어떡해요?"

최하나 씨는 계속해서 말없이 김시윤 씨를 보았다. 김시윤 씨는 슬며시 잡았던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최하나 씨는 걸음을 옮겼다. 김시윤 씨는 재빨리 따라붙었다. 횡단보도 중간 쯤 왔을 때 최하나 씨가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당신처럼 내 게시글을 열심히 믿어줬어요. 나도 믿어줬고요. 나조차 반신반의하던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줬죠. 별볼일 없는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나보다 대단했어요. 그리고 아마,"

최하나 씨가 걸음을 멈췄다. 신호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당신도 그렇겠죠."

가만히 서있는 최하나 씨를 다들 바라보았다. 김시윤 씨는 불안하게 최하나 씨 곁에 서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죽음에 도전하지 않아도 인류가 멸망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떠날 수 있겠죠. 나는... 알아요. 난 영원히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그렇다고 죽음에 도전하지도 못하겠죠. 의식이 여기 묶여있는데 다시금 죽는다고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니,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믿지 못하는 걸지도 몰라요."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었다. 그들은 중앙선에 서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탓에 머리칼이 날렸다. 문득 김시윤 씨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정면인 탓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최하나 씨를 보고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왠지 멍한 정신으로 그녀는 말했다.

"내가 진짜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진짜로?"

최하나 씨는 이번엔 말없이 끄덕이기만 했다.

"그럼 기다려줄게요."

"네?"

"기다려준다고요. 난 성공한다면서요. 불안해요? 못 떠날까봐? 이 세상의 비밀을 아는 게 혼자일까봐? 침착한 척은 다 하시더니, 여려서 어떡하나 몰라. 에이, 봐줬다. 봐줬어. 시이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모은 돈이 없어."

순간 신호등이 초록불이 되었다. 김시윤 씨는 최하나 씨의 등을 툭 밀어 나아가게 했다. 옆에서 걸으며 그녀는 이어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성공한다면, 좀 늦게 가도 상관없겠죠. 당신이 어떻게든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그럼 나는 그 이후에 떠나고. 그럼 되겠죠?"

최하나 씨가 제정신이냐는 얼굴로 김시윤 씨를 보았다.

"내가 영영 성공하지 못하면요?"

김시윤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힘차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인도 위에 올라서서 최하나 씨를 보고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김시윤 씨는 처음 최하나 씨를 보았을 때 그녀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에도 그 사실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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