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으로 가는 열차
6호선 봉화산행 열차의 두 번째 칸은 적막했다. 다른 붐비는 노선에 비하면 6호선은 사람이 적은 편이기도 했지만, 오늘 유독 그랬다. 김은 그 가운데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덜컹거리는 열차소리가 한쪽 귀로 들어왔다 반대쪽으로 나가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고서야 그는 간신히 생각의 끄트머리 를 잡았다. 오늘은 아주 힘든 날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한다면 별 다른 일은 없었다. 그저 조금 더 일이 많았고, 평소처럼 돈이 없었고, 앞날이 조금 캄캄했다. 아주 평범한 날이었다. 그래서 더 힘든 것일지도 몰랐다. 아, 특별한 것이 하나 있다. 그렇게 특별하다기보단 비교하자면이지만. 그는 회식을 했다. 부서 전체가 다같이 한우를 먹는 큰 회식이었다. 팀장 옆에서 열심히 술을 마시며 웃느라 그는 입꼬리가 당겼다. 이후에 노래방에서 열심히 시키는대로 노래를 부르느라 목도 아팠다. 그는 술에 묵직해져 감기는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다간 내릴 곳을 놓칠지도 몰랐다. 방금도 열차가 역에 정차했다는 것을 열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지만 아무도 타지 않았는데.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이야 늘 그렇듯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흘러가는 법이니. 퍼뜩퍼뜩 정신이 들 때마다 보이는 빈 열차는 조금 오싹했다. 세상에 저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차라리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건 오싹하면서도 기대되는 일이다. 나 혼자! 사실 외로울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꿈꾸는 것이 있는 법이다. 김은 괜히 혼자 웃었다가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술에 한참 취한 모양이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집에 가는 길은 정말로 길었다. 내일도 그는 출근을 해야한다. 이대로라면 도착하자마자 씻고 곯아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헐레벌떡 집을 나서겠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늘 그렇듯이. 한탄을 하기엔 너무 익숙했고 그냥 받아들이기엔 힘들었다. 차라리 지금 졸면 집에 가선 조금 더 늦게 잠들 수 있지 않을까, 김은 변덕스럽게 열차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혼자서는 술에 취해 영영 잠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문역에서 깨워주세요, 하고 말을 해둔다거나 그런 문구를 적어서 들고 있으면 조금 마음 편히 졸 수 있을지도 모르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사람이 있는 쪽이 나은 것이다. 그러나 열차엔 여전히 사람이 없었다. 방금도, 아, 김은 화들짝 놀라서 열차의 차창을 기웃거렸다. 열차가 정차해있었다. 뒤늦게야 귀로 "열차 출발합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이번에도- 아니, 이번에도 인가? 그는 잠시 생각한 끝에 자신이 한강진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면 앞으로는 도착할 역을 알리는 방송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술과 잠을 깨기 위해 좀 더 애쓰기로 했다.
잠을 깨는 데에는 아무래도 스마트폰을 하거나 여러가지를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 술도 좀 깰지도. 물론 아까까지도 열심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생각에 너무 집중하면 조는 것 같은 상태와 비슷해지는 것 같다고 그는 느꼈다. 그래서 김은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카카오톡에 있는 아주 간단한 게임이다. 그러나 그는 카카오톡을 켜자마자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넣어버렸다. 거기엔 퇴근과 회식 이후로 온 업무메시지들이 가득했다! '내일 뵐게요, 팀장님!' 지긋지긋하고 끔찍해서 김은 으! 하고 발을 굴렀다. 어차피 열차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이제는 눈치도 보지 않았다. 사실 사람이 있었어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취한 자란 용기가 넘치니까.
종종 그는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가 죽었으면 좋을지는 콕 집어서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여럿의 죽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도 포함해서. 아무튼 거기엔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지금 당장 내가 죽어버리면 뭐든 괜찮아지지 않을까?' 사고가 난다면 나쁘지 않겠다. 물론 지금은 안 된다. 이건 열차니까. 그는 평범하게 죽음이 두려웠으므로 이러한 생각들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내일도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다시 돌아올 사람이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동시에 오랜 휴식을 꿈꾸는 것도 사실이었다. 문득 그는 몽롱한 정신으로 이 열차가 저승이나 천국에 가는 열차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차를 탈 때 들었던 선명한 '봉화산행' 안내를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왜, 있잖은가. 저승에 갈 때 지하철을 타는 만화같은 것이.
그는 사후세계도 환생도 꿈꾸지 않았지만 그래도 있다면 기왕에 천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면은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도 그럴것이 그는 그저 소시민이다. 평범하게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소소한 악행도 했다는 뜻이고, 소소한 선행도 했다는 뜻이다. 지옥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천국에 갈 정도로 착하지는 않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로 갈까? 연옥? 그는 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으므로 그쯤에서 그 생각을 멈췄다. 그저 간다면 천국이면 좋겠다. 죽은 뒤에 사후세계가 또 있는데 그마저도 힘들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그가 또 안내방송에 귀기울이는 것을 잊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이번 안내방송은 아직 나오지 않은 듯했다. 그는 가만히 곧 나올 방송에 귀 기울였다. 몇 초가 지났을까, 드디어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번 역은 천국, 천국 역입니다. 내리실 쪽은-"
그는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천국? 천국? 지금 너무 졸려서 안내방송을 제대로 들을 정신조차 없는 것인가? 취한 정신이 눈 뜬 채로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방송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영어로 헤븐, 은 아니었으나 그 발음은 마찬가지로 천국이었다. 김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천장의 안내전광판을 올려다보았으나 그것은 고장난 채라 아무런 글자도 떠있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번째 칸을 마구 돌아다녔다. 그는 마침내, 마침내 도달했단 말인가? 이곳은 천국이란 말인가?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크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뒤쪽 칸으로 마구 달려갔다. 그러나 방송은 이미 끝나 아무리 달려도 전광판에는 역 안내가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앉아있는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존재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막 1m 가량을 남겨둔 마라톤 선수처럼 달렸을 뿐이다. 여덟 번째 칸쯤 왔을까. 열차가 천천히 멈추고, 오른쪽 문이 열렸다.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망연하게 여덟 번째 칸 가운데에 서있었다. 창 밖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방이 뱅그르르 돌아갔다. 그는 두려웠다. 여기는 천국인가? 내리지 않으면, 또 내리면 어떻게 되는가? 앉아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결국 두 번째 칸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귓가에 '출입문 닫겠습니다.'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만 것이다.
천국! '이번역은 천국역입니다.', '이번역은 천국역입니다.' 하는 소리가 머리를 뱅뱅 돌고 카카오톡의 메시지가 갑작스레 머리를 뒤덮고 방금 열린 문이 오른쪽 문인지 이 열차가 봉화산행은 맞는지 오늘 회식을 했던건지 내 정신은 멀쩡한지, 하지만 그는 자신이 아주 멀쩡하다고 생각했고, 아, 오늘은 집에 가면 씻고 그대로 잠에 들어야 하고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그 순간 그는 닫히는 문 사이로 뛰어들어 열차에서 내리고야 말았다. 그는 천국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옷자락 끝을 스크린도어가 스치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슬아슬하게 뛰어내린 탓에 헐떡이며 엎어진 김은 스크린도어 뒤로 열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몸이 추웠다. 이상하게 천국의 풍경이 익숙했다. 늘 보던 6호선 전철역. 김은 차가운 손끝을 손톱으로 꾹 눌렀다. 고개를 들어올린 그곳에 역명이 적힌 안내판이 보였다.
'청구'.
다음 열차는 5분 뒤에 도착한다. 끝.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