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 대마법사

김철수씨는 마법사다. 여기서 마법사라는 것은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여기는 2018년 대한민국이고, 김철수 씨는 평범한 한국인이며, 이제 서른 살 생일을 보낸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뜻이다. 그는 아직까지 동정이다!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바로 그 마법사, 김철수 씨는 우울했다. 그가 동정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이미 오래 지속된 일이고 더이상 별 감흥을 느낄 것도 없었다.

그는 쥐꼬리만한 일급이 담긴 현금봉투-그에겐 마땅한 직업이 없었다. 이렇다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구한 일자리의 사장은 그의 일급을 현금으로 주기를 고집했다-를 손에 꼭 쥐고 귀가하고 있었다. 얼마되지 않는 돈과 수많은 지출들은 당연하게도 기분을 좋지 못하게 했다. 늘 있는 일이지만 늘 있는 일이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거기다 마침 어제와 그제 일급이 나왔을 때 친한 친구가 급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김철수 씨는 쌈짓돈을 꺼내 건네주었던 것이다... 오늘 일급부터는 정말로 아껴야했다.

그런 탓일까, 김철수 씨는 말도 안 되는 짓을 실행했다. 가끔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도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고 있고, 이상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혹시나 이런 일을 하면 뭔가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 아무튼 김철수 씨가 행한 그것은 좀 부끄러운 짓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본인의 입으로 "헬 파이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헬 파이어! 그래, 그는 소싯적에 판타지 소설 좀 읽은 남자였다. 익히 듣는 우스갯소리도 알고 있었고. 삶이 우중충하니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해보자고-

대마법사는 헬파이어를 쓸 수 있다고 하니까, 뭐, 이해는 한다. 아무튼간에 그는 귀갓길에 위치한 텅빈 공터에서 헬파이어를 외쳤, 아니, 외친 건 아니고 스스로의 부끄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냐고 하면, 왜냐면, 정말로 지옥불이 타올랐거든. 지옥불이 타오르는 광경은 좀, 엄청났다. 검붉은 불꽃이 가까이 있는 건 무엇이라도 집어삼킬듯이 타오르는데, 마치 그 움직임이 살아있는 것만 같아 보였다.

불행하게도 김철수 씨는 라이터나 라면을 위한 뜨거운 물이 아니면 뜨거운 것과는 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그는 놀랐다. 아니 세상에! 그는 진짜로 마법사가 되었다! 거기다가 지금 지옥불이 타고 있다! 놀라서 펄쩍 뛰어오르는 그와 함께 일급 봉투도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화르륵. 지옥불은 아주 세다. 그제서야 김철수 씨는 불을 끄고자 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다행히 텅 빈 공터는 넓어서 지옥불이 무언가를 더 태우지는 않았으나, 김철수 씨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이러다간 방화범으로 잡혀갈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마력을 차단하려고 했으나 16년 한국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할 줄을 몰랐다. 판타지 소설에서는 주문을 외우는 법만 알려줬지 마법을 멈추는 법은 안 알려줬다. 거기다 그는 2000년대 이후 판타지 소설 세대였다.

사실 방화범으로 잡혀가기 전에 타죽을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그는 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일급봉투가 타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아주 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갑자기 그런 기분과 함께 쓰러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고작 평소처럼 뒤질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인데... 난 이제 생각만으로도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대마법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그냥 마력이 다 떨어진 것이었다. 물론 김철수 씨는 30년 동정의 대마법사였으나, 헬 파이어는, 어디보자, 그 뭐냐 양판소에서 말하길  9서클인가 8서클 마법이다. 존나 세다는 뜻이다. 센 것은 마력을 존나 많이 먹는다. 대마법사도 얄짤없다. 그래서 김철수 씨는 마력고갈로 엎어졌고, 헬파이어는 꺼졌다. 황량한 공터는 더욱 황량해졌지만 다행히 헬파이어는 김철수 씨의 일급봉투 말고는 아무것도 태우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낡은 김철수 씨는 비척비척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그에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간신히 일주일을 버티는 수밖에 없다. 헬 파이어? 그딴 걸 대체 어디다 쓸까! 여러분! 화력이 필요할 땐 연료 대신 저를 부르십시오! 말도 안되는 소리다. 김철수 씨는 막막해졌다. 21세기에 능력의 각성이란 의미없는 것이었다. 21세기에 헬 파이어는 쓸모 없다. 다른 마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글쎄, 이런 상태로는 아주 한참 걸리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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