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5화. 학교 (4)

리엔세라 : 5-4화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점심시간을 맞아 학생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이어진 길목에 모여들었다. 곧이어 각자 주문할 메뉴를 고르는 긴 줄이 만들어졌다.

오늘 메뉴는 뭘까,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옆 사람과 서로 잡담을 하고 있는 인파 가운데. 작은 머리가 퐁 하고 솟아났다.

“잠깐... 잠깐만. 지나갈게.”

“아, 뭐야?”

“왠 꼬맹이야. 중등부인가?”

검푸른 바탕에 하늘색 장식이 달린 고등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눈에 띄는 행색을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검붉은 제복에 붉은 넥타이를 맨, 회갈색 장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 발데마인 중등부 1학년 교복을 몰래 훔쳐다 입은 세라엘이었다. 본래 머리를 장식해주던 검은 리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세라엘은 흐트러진 교복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재빨리 뛰어 인파가 적은 반대편으로 향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익은 홍당무였다.

길을 잘못 들었다. 식당 쪽으로 오려던 게 아니었는데...

요즈음 리엔시에는 점심을 자주 거른다고 들었다. 이쪽으로 와봤자 얻는 건 없을 텐데,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리엔시에를 보기 위해 교복을 훔쳐 입고 발데마인에 들어온 지 벌써 이틀째였다. 신전은 벌써 난리가 났겠지. 하지만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성녀를 잃어버렸다고 공표할 수는 없으니 아직 쉬쉬하고 있을 테다.

문제는 이 빌어먹게 넓은 학교였다. 어찌나 큰지 고등부 건물을 찾는 데에 만 하루를 소비했다. 리엔시에는 신전에만 오면 날 바로 찾던데, 정작 내가 그녀를 보려고 하면 이렇게나 찾기가 힘들다니.

세라엘은 안타까움보다는 짜증이 치밀었다. 리엔시에는 뭐 이딴 학교에 다닌담? 학교란 원래 다 이런가. 이렇게 무식하게 크고, 사람들도 가득하고, 그 중엔 붉은 머리의 미인도 있고... 어라?

“...?”

고등부 교복임이 틀림없는 검푸른 제복을 입은 학생 하나가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부신 적발을 허리께까지 기른, 녹색 눈동자의 아름다운 소녀. 당당한 걸음걸이로 틀림없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 정체를 들켰나?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는 피하지 않고 다가오는 존재에 맞섰다.

“안녕하세요.”

“...”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계하는 태세를 풀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응시하자, 상대가 물어보지도 않은 신원을 밝혔다.

“베레니체라고 해요. 보아하니 중등부 같은데, 고등부 학관에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그... 사람을... 찾고 있어. 요.”

상대가 누구든 늘 반말하다 보니 존댓말이 어색했다. 세라엘은 입안에 남는 까끌까끌함을 의식하며 표정을 구겼다. 세라엘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던 베레니체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누굴 찾으시는데요?”

“...리엔시에.”

이름을 들은 베레니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걸 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런 반응에 세라엘도 놀랐다. 그건, 리엔시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의 반응이었다. 리엔시에가... 그렇게 유명인이었나?

“리엔시에...양을 찾으시는군요. 글쎄요. 조금 전 같이 식사하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걸 보면, 신전에 가지 않았을까요?”

“신전...?”

“네. 로나지에요. 보나 마나 성녀님을 뵈러 간 것이겠죠.”

“......”

─엇갈렸나. 그럼 지금이라도 신전에 돌아가야 하나? 세라엘이 작은 머리를 핑핑 굴리며 이리저리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저랑 같이 가실래요?”

“? 어딜?...요.”

“리엔시에를 찾으러요. 이제 막 점심시간이 된 참이니까 아직 출발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항상 정오를 반 시진쯤 넘긴 시각에 학교를 나서니까.”

어떻게 베레니체라는 소녀는 리엔시에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 게다가 그녀를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부른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리엔시에를 찾는게 급선무라, 일단은 베레니체를 따라가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앞장서는 미소녀를 졸졸 따라갔다.

*

‘...성녀님.’

리엔시에는 텅 빈 교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교실에 걸린 시계를 흘끗 쳐다보자, 어느새 시침이 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출발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다음 수업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하지만...

‘리엔. 나는 네가 성녀를 만나러 신전에 출입하는 것을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어째서죠?’

‘...너를 위해서 하는 충고야. 너도 이제 고등부인데, 학교를 졸업하면 혼사를 치러야 할 테고. 안 좋은 소문이 따라다니는 건 좋지 않잖나.’

‘...지나친 간섭이세요.’

주제넘게도 그런 말을 했더랬다. 그 한 마디에는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너와 나는 약혼으로 묶인 관계도 아니지 않느냐. 그런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러나 그녀의 직설적인 발언에도 라히안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표했다. 여전히 차갑고 무감정해 보이는 낯이었다.

그래, 그렇군. 그 말만을 남기고 그는 자리를 떠났다. 지난번에 무슨 일인지 학교에 방문했던 황손자와의 우연한 만남. 그 때 이루어졌던 짧은 대화였다.

리엔시에는 라히안이 무슨 의도로 제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가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한 마음이 컸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 약혼녀가 추문을 달고 다니는 게 싫은가 보지.’

부러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그의 의도를 무시하려했다.

결혼? 그런게 다 뭔데. 후계자가, 차기 공작이 반드시 결혼을 해야한다는 법은 이 나라에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해해주실 것이다.

“하아. 이제 일어나야지...”

생각을 마무리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어제는 신전에서 세라엘을 만나지 못했다. 오늘은 꼭 만나야 했다. 의자를 집어넣어 책상 자리를 정돈하고는 교실을 나서기 위해 뒷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거칠게 안쪽으로 열리는 문에 코를 찧고 말았다.

“윽!”

“아. 미안. 못 봤네.”

“야, 아무리 그래도... 공작 영애인데.”

“그게 뭐? 어차피...”

빨게진 코를 문지르며 표정이 담기지 않은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자, 자신을 괴롭히던 주요 무리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키득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오늘은 꼭 성녀님을 뵈어야 하는데. 머리 구석에 비품실의 쾌쾌한 공기와 지저분한 먼지 같은 것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리엔시에는 앞에 선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팡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머릿속으로 마법진의 수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온갖 고대어로 장식된 문장들이 뇌리를 기어 다녔다. 계산을 끝냈을 때는 1분의 시간도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리엔시에는 조용히 언령 한 마디를 띄웠다.

“***──*─*****...”

“? 방금 뭐라고 한 것 같았... 헉!”

맨 앞에 있던 학생의 몸이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뒤이어 다른 학생들의 몸도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영애! 당신 짓이죠?”

“유레이토 영애! 학교 내에서 교수님의 허락 없이 마법을 시전하는 건 학칙에 위반... 꺄악!”

“...들키지만 않으면 될 것을.”

너희들도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내게 이렇게 구는 거 아냐. 리엔시에는 무표한 얼굴로 높은 교실 천장 위까지 올라가 붙어버린 학생들을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을 활짝 열고 교실 밖을 나갔다. 안에서 학생들이 뭐라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늘 그렇듯이 무시했다.

밀빛 머리카락의 소녀는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했다.

이제는 그녀를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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