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1화. 공작가의 혼혈 영애와 후작가의 사생아 성녀 (4)

리엔세라 : 1-4화

공작 저의 후원은 라일락 나무로 가득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풍경은 신록 가운데 피어난 보랏빛 기적이었다. 알알이 맺힌 기적이 바람에 흔들려 파도같이 너울 쳤다.

세라엘은 그 죄악의 색으로 물든 파도에 홀린 듯 몸을 맡겼다. 한들한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퍼지는 향에 꼭 취할 것 같았다.

신은 라일락 나무 위에 사신다던데, 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신을 배알할 수 있을까. 아니, 혹시 이 나무는 천국을 지키는 수문장이 지상에 현현한 모습일 수도.

낮게 내려온 가지로 손을 뻗었다. 뭉치듯 피어난 꽃들을 부드러이 감싸 쥔다. 손에 감기는 꽃 뭉치의 느낌이 기분 좋았다.

한껏 피어난 봄의 결정들이 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모습을, 소녀는 그저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파도가 일었던 마음이 점차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라엘은 라일락이 좋았다. 그저 겉모습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 앞다투어 피어나는 작은 꽃잎들을 사랑했다. 첫사랑, 사랑의 시작이라는 꽃말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가 사랑하게 될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와서는 안 되겠지만─성녀가 사랑하는 것은 금기였다─감히 꽃을 사랑하는 사치 정도는 누려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

잔디에 털썩 주저앉는다. 하늘이 더없이 맑다. 이제 곧 6월이 된다. 6월이 되면 자신은 신전으로 떠날 것이다. 본래는 이른 봄에 갈 예정이었지만 억지를 부려 여름에 가겠다고 했다. 후작은 자기 말을 들어주었다. 6월에 성녀가 갈 것이니 그때 맞춰서 준비해 달라고 신전에 전달한 것이다.

굳이 여름에 가겠다고 한 이유라. 바로 생일 때문이었다. 세라엘의 생일은 5월 31일. 적어도 이 저택에서 생일을 맞이한 후에 가고 싶었다. 후작은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제가 떠나기 싫은가 보다 하며 걱정하는 기색이었지만, 저는 떠날 것이다.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라일락의 짙은 향이 풍겨와 코 밑을 간질였다. 세라엘은 눈을 감았다. 신전에 가면 성녀로서 교육받는다고 들었다. 행동 가짐부터 다시 배워야 하고 교리 공부도 해야 한다고. 이것저것 새로 익힐 것이 많을 것이다.

그것이 싫지는 않았다. 새로운 것은 늘 좋았다. 세라엘은 배움의 기쁨을 알았다. 물론, 이 배움이 제가 원하던 배움이었는 가는 둘째치고. 어쨌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롭고 정제된 삶이 시작될 것이다.

저택에서처럼 자유롭게 살지는 못해도 더 이상 저를 천한 사생아로 멸시하는 눈빛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아니면 내가 자유를 포기하고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신전으로 갈 이유가 없잖아.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이리도 쉽게 뒤바뀌는 것이다. 로니안이 태어나고 자신이 후작저에 입적하고. 그리고 성녀로서 신전에 보내지고.

세라엘은 저택에 들어오기 전의 삶을 기억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때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저를 길러주었다는 상인 부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그 부부의 자식으로서 살았다면 지금 이렇게 천대받으면서 살지는 않았을 텐데. 태어나버린 로니안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는 처지가 짜증 났다.

“어휴, 애가 뭘 알겠냐. 다 후작이 나쁜 놈인 거지.”

저도 아직 애면서 소녀는 그런 말을 내뱉었다. 로니안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태어나보니 성녀로 보내질 거라는 언니가 밖에서 들어와 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라고 있고, 저는 아버지한테 엄하게 교육받으며 단속된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이 억울했겠지. 이해한다.

그래도 미운 건 미운 거였다. 세라엘은 로니안의 얄미운 얼굴을 한 번 떠올려 보고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내 방에나 돌아갈까.”

저택의 제일 후미진 곳에 있는 제 방에서는 그나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니까. 가끔 후작 부인이 제가 살아있나 얼굴이나 한번 보러 왔다가 폭언을 퍼붓고 돌아가기는 해도, 그 작은 방은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세라엘은 잔디밭에서 일어났다. 궁둥이에 붙은 풀잎을 손으로 툭툭 털어내고 라일락 나무가 우거진 정경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눈짓으로 꽃들에 인사하고 다시 저택 안으로 총총거려 들어갔다.

머리에 미처 떼어내지 못한 꽃잎 한 장이 붙어있다는 것도 모르고 팔랑팔랑 걷는 걸음에는 어린아이다운 발랄함이 서려 있었다.

*

“로니안. 네가 창문을 깨트렸니?”

“...아니요. 세라엘이 그랬어요.”

“......”

집무실 탁자에 앉아있던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는 로니안이 벌을 받는 아이처럼 어색한 자세로 서 있었다. 후작 옆에 대기하던 집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후작이 부루퉁한 표정의 로니안을 달래기 시작했다.

“세라엘은 성녀로 신전에 보내질 아이다. 네가 이해하련. 귀한 분이시니...”

“왜요?”

“...”

“왜 저만 이해해야 해요? 왜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세라엘한테만 다정한 거예요? 저는 맨날 혼나는 역할이고 세라엘은 잘못해도 성녀가 될 몸이니까 그냥 넘어가도 되는 거예요?”

“로니안, 그건...”

“세라엘은 어차피 ‘진짜’ 가족도 아니잖아요!”

“......”

그 말에 라헤니오 후작이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집사가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로니안은 지금 세라엘이 사생아인 것에 대해 지적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후작의 과오에 대해 말을 얹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 물론 아직 어린 로니안이 그걸 알고 말했을 리는 없다. 그러니 후작도 뭐라 혼내기가 애매한 상황.

“...로니안, 알겠으니 일단은 돌아가거라.”

“아버지...!”

“세라엘은 곧 떠날 아이니 네가 이해하거라. 너도 크면 알게 될 것이야.”

“왜...! 흐윽, 미워요! 세라엘만 예뻐하고! 나한테는 한 번도 웃어주신 적 없으면서!”

악악 소리를 지르던 로니안이 울면서 집무실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런 그녀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집사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는 후작. 이어진 것은 일말의 죄책감이 어린 자책이었다.

“세라엘이 불쌍하긴 하지만 어떡하겠느냐, 나에게는 로니안 네가 우선인 것을... 네가 크면 다 이해할 테지...”

아직 화창한 오전이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 너머로 라일락 향이 물씬 풍기는 바람이 불어와 집무실 내부를 채웠다. 사랑이라는 뜻을 담은 죄악의 향기였다.

***

유레이토 공작저. 나라에서 황제 다음으로 귀한 분들이 거주하는 광활한 곳. 한 여자아이가 잘 관리된 후원의 잔디밭에 앉아 동생을 돌보고 있었다. 올해로 열두 살 난 리엔시에의 남동생 레니발렌은 누나를 아주 잘 따르는 기특한 동생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리엔시에는 동생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리엔시에, 나랑 놀아줘.”

“...”

“리엔시에.”

“...응?”

“나랑 마차놀이 하자. 넌 마법을 쓸 줄 알잖아. 마법으로 이거 띄워줘.”

“...그러던가.”

리엔시에가 짧은 언령과 함께 손을 공중에 휘적이자 가문의 문양을 단 검은 마차와 반원 모양의 돌길이 공중에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본 레니발렌이 리엔시에에게 무어라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귀찮음이 역력한 기색으로, 그러나 부탁받은 대로 하늘 길 위에 마차를 올려 움직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차가 천천히 바퀴를 굴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와! 역시 넌 대단해!”

“...나 먼저 가볼게. 마차놀이 하고 있어.”

“어디 가?”

“예배당.”

그렇게 말한 리엔시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풀잎을 툭툭 털어내고 곧 떠날 듯 휙 등을 돌린다. 그 모습을 본 레니발렌은 급한 마음에 엉거주춤 일어나 소녀의 팔을 붙잡았다.

“나도... 나도 갈래.”

“미안. 넌 따라오지 마.”

“...흐엉.”

거절당한 레니발렌이 누나의 무심한 태도에 결국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엔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후원에 위치한 작은 교회로 향했다.

“왜 맨날 나만 두고 가. 흐엉엉.”

“이따가 다시 올게.”

“거기에 뭐가 있다고 맨날 가. 흐윽, 아무것도 없는데... 나랑 놀아 줘어.”

레니발렌이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리엔시에를 따라잡으려다 공중에 떠 있는 마차에 부딪혀 넘어졌다. 부딪힘과 동시에 마차와 돌길은 땅에 툭 떨어졌고 직후 레니발렌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리엔시에는 슬쩍 뒤를 확인했지만 걷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는 동생을 내버려 두고 그녀는 저 앞에 보이는 예배당 안으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교회 내부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오전의 화사한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화려한 색채를 입은 채 반사되고 있었다. 길게 만들어져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검붉은 의자들 위로 성스러운 빛이 내려앉았다.

리엔시에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제일 앞쪽에 앉았다. 최초의 성녀, 시에레인의 상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였다.

최초의 성녀.

그 영혼을 품은 채 환생한 소녀는 전생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을 말 없이 바라보다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성스러운 자기 자신에게 기도라도 올리는 것처럼.

실은 존재하는지도 모를 신─예리안나에게 드리는 기도일테지만. 단 하나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신에게 제 원죄를 고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바랐다. 제가 태초부터 지닌 이 공허함과 타인의 경멸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과 운명을 찾을 수 있기를.

리엔시에는 알고 있었다. 사랑만이 저를 구원할 것임을. 제 운명이 언젠가 여상히 찾아와 저를 구원해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하고 싶었다. 사랑받기 힘들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최초의 성녀였던 것은 또다시 죄업을 저지르고 있었다. 성녀에게 있어서 사랑이라는 희대의 죄업을. 지금의 그녀는 성녀가 아니지만 영혼마저 변질되지는 않았으니까. 핏줄은 여전했다. ──리엔시에는 본래 성녀를 배출하던 가문이었던 유레이토 가문의 장녀였기에.

...성녀의 영혼은 금기를 범할 수 있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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