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1화. 공작가의 혼혈 영애와 후작가의 사생아 성녀 (3)

리엔세라 : 1-3화

“아악─!”

저택에 한 여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침실로부터 터져 나온 그 소리는 듣는 이를 불안에 떨게 할 만큼 고통스럽고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통증을 토해내는 여성의 목소리와 그녀를 둘러싼 한 무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기요메트, 조금만 더 힘내. 우리 로니안의 머리가 보여!”

“어머니...!”

“자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는가?!”

남자가 옆에 있던 노부인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산파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노련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마님,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거의 다 나왔습니다!”

“악... 으흑...”

“다 됐습니다!”

이윽고 갓난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산파가 아이를 받아 잽싸게 포대기에 감싸 품에 안았다.

“아이는... 아이 성별은 어찌 되는가?! 어서!”

“......아가씨입니다.”

“......”

산파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었다. 지친 산모의 헉헉대는 숨소리만이 침실 공기를 덥혔다.

딸이라니. 여자아이라니. 이럴 수는 없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남자─라헤니오 후작은 터져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여자아이라 대를 잇지 못해 절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이미 장남인 카를로가 있었고, 후계자의 위치에 올리는 것에는 애초에 성별이 큰 문제가 될 수 없다. 자신이 이토록 끔찍하고 비참한 심정이 된 이유는...

똑똑.

그때였다. 산실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후작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놀라며 문 쪽으로 고개를 휙 틀었다. 모두가 침을 삼키고 아무 말 없이 문을 바라본 채 얼어 있었다. 대답이 없자 잠시 침묵하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이는 신복을 입은 신관과 수녀 둘이었다.

“후작님.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실례합니다. 작은 주인께서 곧 태어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급한 마음에 찾아왔습니다.”

“......”

“아시다시피, 신전에는 현재 성녀 자리가 공석이라. 작은 주인님이, 아니, 성녀가 되실 분이 태어나셨습니까? 아이의 성별이 어떻게 됩니까?”

“...딸이네.”

후작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단어를 내뱉었다. 그러자 신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수녀들도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아닌가.

후작은 그 모습에 가슴이 타들어 가는 통증을 느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성녀가 되는 것은 축복받아 마지않을 일이다. 하지만.

“내가... 내가 곧 신전에 사람을 보낼 테니 일단은 돌아가게.”

“아...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싱글벙글한 기색의 신관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수녀들과 함께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갔다. 그들이 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비통한 침묵, 그저 침묵뿐이었다. 공간을 잠식한 고요는 내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화상이 되어 심장을 그을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산모는 피로에 지쳐 잠들었는지, 그녀의 색색거리는 숨소리 외에는 침실 내부가 참으로 고요했다. 후작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제 딸은 안 된다. 로니안을 성녀로 신전에 보낼 수는 없었다. 신전에 성녀로 가는 여자아이마다 얼마 안 있어 끔찍하게 죽는 것을 아는데 어찌 자식을 사지로 몰 수 있겠는가. 제정신이 박힌 부모라면 불가능한 짓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정중하고도 묵직한 소음이었다. 후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문을 노려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허락하자 곧 문이 열리고 한 나이 든 사내가 들어왔다. 저택의 집사장이었다.

“주인님,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신성한 장소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오라, 전에 맡기셨던 그 아이의 행적을 찾았습니다.”

“...! 정말인가?! 정말, 정말 그 애가 살아있었단 말인가?”

후작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신관의 얼굴에서 보였던 것과 같은, 어쩌면 더 밝은 기색의 감정이 서렸다. 그것은 안도와 기쁨이었다.

“네. 이름은 세라엘. 현재 한 상인 부부의 자식으로 입양되어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좋아, 당장 그 아이를 데려와서 라헤니오로 입적시키게. 그리고...그 애가 일곱 살이 되면. 그 이후 일은 알겠지?”

“네, 신전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성녀가 ‘적녀’여야 하는 법은 없으니까. 그 애도 라헤니오의 피를 이은 여자아이니까 상관없어.”

어두운 빛이 순간 후작의 눈에 서렸다 사라졌다.

로니안은 안 된다.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와는 달리 로니안은 기요메트와 저의 아이였다. 후작은 안도했다. 이제 다 되었다. 로니안은 라헤니오 후작가에서 사랑받는 영애로 자랄 것이며 신전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성녀의 자리를 채울 수 있어 좋겠지.

─대륙력 995년 3월 12일. 로니안 레일라 라헤니오가 태어났다. 그리고 세라엘─훗날 세라엘 슈안 데 카에토 라헤니오가 될 소녀─의 운명이 뒤바뀌었다.

여동생이 태어남으로써 어느 소녀가 평범한 삶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꾼 것 치고는 너무나도 쉽게, 순식간에 결정된 일이었다.

*

대륙력 1006년, 봄이 막 피어나던 때. 5월의 어느 아침, 라헤니오 저택에 여성의 비명이 다시 울려 퍼졌다.

“꺄악─! 아가씨, 안 돼요!”

“흥.”

휙─ 쨍그랑─.

유리로 된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연이은 여성의 비명. 후작저 하녀의 것이었다. 복도의 유리창이 깨졌다. 범인은 물이 빠진 듯 희멀건 회갈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세라엘 아가씨, 이제 주인님께 혼나시게 생겼어요. 그렇게 사고를 치지 말라고 당부드렸는데 또 이러심...”

“내가 뭘? 나는 화도 내면 안 돼? 저게 자꾸 날 약 올리잖아.”

“...흐아앙.”

겁을 먹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난장판이었다. 소란을 일으킨 주인공인 세라엘은 여전히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 당당한 표정이었다. 소녀는 제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내려다봤다.

저보고 더러운 사생아랬다. 여덟 살짜리가 한 말이다. 올해로 13살이 된 세라엘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사생아가 무엇인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란 뜻이다. 자신은 라헤니오 후작가의 ‘진짜’ 가족이 아니라며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악악 소리를 질러대는데 그 꼴을 도저히 보고 넘길 수가 없었다.

세라엘은 알고 있었다. 로니안이 한 말은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질투를 느껴 나온 것이라는 걸. 제게는 엄히 대하면서 사생아인 자신에게는 살살 기는 후작의 그 모습이 부러웠겠지.

그야 당연하다. 나는 성녀로 신전에 바쳐질 몸인걸. 귀한 제물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되니 제 앞에서 꼬리를 치는 거겠지. 세라엘은 속으로 라헤니오 후작을 실컷 비웃고 내려 깠다. 그가 제게 잘 대해주는 이유를, 세라엘은 이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양부모와 억지로 헤어지고 라헤니오 가문에 입적한 이후로 일곱 살이 되면 성녀로서 신전에 가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신을 데려온 집사 하이트가 말했다. 아가씨는 로니안 아가씨의 대신으로 성녀 자리에 오르실 귀한 분이시니 그것에 그저 감사하시면 됩니다.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관용의 처우를 결정한 후작에게 또한 감사하라고.

─개소리였다.

그녀는 이 ‘관용’에 얽힌 비사를 알았다. 저도 귀라는 게 있었다. 주워들은 소문에 의하면 신전에 성녀로 보내지는 아이들마다 족족 잔인하게 살해당한다고 했다. 아니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어버리거나.

그러니까 저는 로니안 대신 죽으러 갈 희생양이었다. 그에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자신에게 거부할 권리가 없다면, 이왕 신전에 가게 될 거 누릴 걸 전부 누리고 가자는 심보였다.

그런데 그마저 질투하고 뻗대는 꼬락서니 하고는. 자기는 이 저택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면서. 세라엘은 로니안이 얄미웠다. 계속 미운 말만 해대는 그 입이 싫었다.

“시끄러워 죽겠네. 난 갈 거야. 아버지한테는 로니안이 실수로 창문을 깨트렸다고 해.”

“어떻게 그런...!”

“뭐, 아니면 어쩔 건데? 로니안이 나한테 한 말을 그대로 아버지한테 전해 줘?”

“...아니요, 알겠습니다... 로니안 아가씨, 어서 일어나세요. 이런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흐엉엉엉.”

아직도 빽빽 울어 재끼는 로니안의 얼빠진 면상을 한 번 째려봐줬다. 그리고 세라엘은 그녀들을 지나쳐 복도를 걸어갔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정원에서 혼자 산책이나 하면서 기분을 풀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소녀는 방향을 바꿔 뒤뜰에 위치한 보랏빛 별세계로 향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