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5화. 균열 (5)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태초에 이름 붙이길, 나는 그것을 거미의 입이라 하였고. 그것을 다시 거미의 집이라 하였네. 다양한 생명을 품은 둥지는 내 안식처 되어, 나는 지난 과거를 묻고 새 우주를 맞이하며 노래 부르네. 아아, 드디어 여기 알리노라. 옅은 봄 향기는 수런거리며 짙어지고 여름. 아름다움을 새기는(麗鏤) 계절이 진정 도래했음을.

***

여루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러자 눈앞에 담기는 것은 어느새 상영이 끝난 영화관의 그윽한 내부였다. 그녀는 제 손을 자연스럽게 깍지 껴 잡고는 재촉하듯 잡아당기는 소년에게 이끌려 계단을 내려왔다. 미련이 남은 듯 눈동자가 한순간 거대한 스크린 속 까만 엔딩 크레딧에 머물렀으나, 곧 피아노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영화를 보기 전 같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같이 영화를 보고. 같이 좋아하는 북 카페를 가고, 이른 저녁 근처 공원을 거닐며 산책하고. 좋아하는 일을 같이하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보람찬 하루였다. 그래야 했다.

여루의 기분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속이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느낌이 넉넉했다. 균열이 간 무의식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에서 검은 것이 기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여루는 생각했다. 지금 이 모든 행위가, 자신과 맞지 않는 듯하다고. 저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그야말로 자신이 늘 되새기던 ‘일상’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 현재 그녀의 모습이었다.

한 소녀의 정신은 지금 무언가의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우주. 시간. 과거. 현재. 미래. 공간. 그 어딘가. 호박빛 영혼은 모든 곳을 넘나들며 여름의 향기를 좇았다. 어느새 주현의 곁은 여루에게 있어서 둥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 거미의 둥지. 검은 소년의 거미줄에 걸린 남루한 나비가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주현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아직 퇴근하지 않으셨고, 동생은 분명 아직 PC방에 있겠지. 텅 비어 사람의 온기를 그리고 있는 이 안식처에서 여루는 언제나 혼자였다. 평범한 가정, 평범한 부모님, 평범한 형제. 어디 하나 모나거나 덜한 구석이 없는 평범한 가족. 내부의 평온을 갖췄으니 남은 것은 외부의 평범함 뿐인데. 이렇게 사람 운이 따라주지를 않는 인생이라니.

반쯤 열려있는 제 방의 문을 발로 밀어 들어갔다.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베개에 얼굴이 파묻혀 숨이 조금 막혔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희미하게 환청이 들려왔다. 우울감이 유영하는 공중에서 쇼팽의 녹턴 제20번이 흐른다.

주현과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일상이 비틀어지는 느낌이다. 이 감각을 무시하면 안 됐다. 이것이 비일상으로 들어가는 초입부라는 것을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남들과 같은 ‘평범한 일상’… 아니. 정말로? 정말 권여루가 원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일까?

“……”

여루는 두 팔을 머리 양옆으로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 침대 끝에 걸쳐 앉았다. 침대가 높은 편인데다 밑이 텅 비어있는 탓에 습관처럼 발을 앞뒤로 흔들거리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린 소녀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정확히는 크림색의 벽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보일 리가 없는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버릇처럼, 또다시. 여루는 의식하지 못한 채 방안을 눈길로 더듬었다. 그러다 이내 깨닫고 마는 것이다. 그림자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저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자라버린 지 오래이며, 무엇보다도 제 여름은 이미 죽었다.

“...난 대체 너한테 있어서 뭘까.”

내 그림자가 되길 자처하는 너는, 언젠가 그 옛날의 그림자들처럼 나를 집어삼키려 들까.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그리고 지금까지 죽여온 수많은 ‘나’의 시체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어서 와, 인사하며 제일 앞에 서 있는 ‘내’가 손짓한다.

아, 역시. 무의식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 것은 눅진한 여름을 뒤집어쓴 누군가의 그림자였다. 빛바랜 추억 속 녹턴이 난무(亂舞)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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