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막간. 축복받은 소녀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한창 바쁜 활동 시기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 하루 주어졌다. 활동 주에는 정말 드문 일이었는데, 매니저의 배려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주현은 생각했다. 그의 성과가 아닌 내 성과다. 어쨌든 내가 잡아낸 휴식의 기회니까. 아직 2월이라 날이 추웠다. 항상 차가운 음료만을 고집하는 소녀를 떠올리며 나는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포장해주세요.”

“네, 적립과 할인은...”

테이크아웃으로 두 잔 챙기고는 서둘러 숙소로 복귀했다. 지금 숙소에는 그녀밖에 없을 터였다. 다들 수도권이나 그 주변에 본가가 있는 터라 일찍이 숙소보다는 집으로 돌아간 참이었다. 고급 오피스텔형 아파트의 복잡하고 널찍한 로비로 들어서 여섯 대 있는 엘리베이터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곳의 버튼을 눌렀다.

한시가 급했다. 금방 숙소에 가서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도 초조한 감정이 느껴졌다. 같이 있지 않으면 늘 그랬다. 너는 사람을 애타게 했다. 그거 하나만큼은 네가 유일하게 나한테 잘하는 거였다.

빠르고 고요하게 올라가 고층에 안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단 한 개 있는 현관문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도어락을 풀고 바스락대는 테이크아웃 봉지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여루야, 나 왔어.”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익숙한 무시에 당연하다는 듯 신발을 벗어 현관에 가지런히 두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그러자 낮은 볼륨으로 틀어진 TV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흐린 날씨로 인해 어두운 거실을 TV만이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TV에서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여름 특유의 밀도 높은 채색으로 흘러가듯 상영되고 있었다.

- ‘한 손으로 치는 걸 좋아하나 봐.’

- ‘다른 손으로 네 손을 잡아야 하니까.’

하필이면 그 장면이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모습이 꼭 나와 너 같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학교 음악실, 낡은 그랜드 피아노 앞. 너는 *드뷔시의 축복 받은 소녀를 연주하고. 나는 그 옆에 앉아 네 더운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더랬다.

여름 바람과 함께 네가 빚어낸 여름의 색채를 감상했다. 동시에 TV에서 피아노 소리가 기억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이윽고 소리가 흘러내려 내가 지금 서 있는 현실을 가득 채웠다. 소리가 다다른 끝에는 담요와 함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소녀가 소파 위에 누워있었다.

“여루야. 또 이거 보고 있었어?”

“...”

색채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방안은 여전히 무채색이었다. 밖은 밝았지만 동시에 어두웠다. 흐린 날씨 탓이다. 하늘은 새하얀 구름으로 덮여 밝게 빛났거늘 지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TV 불빛 하나에 의지한 거실은 잿빛 거실을 그저 희게 물들일 뿐이었다. 화면 속 여름의 찬연한 빛깔은 현실의 겨울이 만들어낸 어둠을 이겨내지 못하고 브라운관 안에 머물렀다.

- ‘무슨 고민 있니?’

- ‘모르겠어. 언젠간 말해 줄지도...’

-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자.’

- ‘...그럼 가자.’

- ‘어디?’

- ‘이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러.’

팔걸이에 머리를 기대고 소파에 가로로 누워있는 소녀의 시선은 TV 속 여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계절을 좇기라도 하는 마냥 필사적이면서도 무감정한, 이상한 눈빛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래도 그저 좋았다. 소파에 가까이 다가가 담요를 끌어 내렸다.

툭.

부드러운 천이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사뿐히 들려오고. 여전히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소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루야.”

“...”

“오늘 하루는 어땠어?”

그 말 한마디에. 저 어딘가 여름을 갈구하던 시선이 내려앉았다.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서로 얽혔다.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그뿐이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마냥 좋았다. 나는 그녀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리다 기쁘게 웃으며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 ...너한테서는 항상 여름 냄새가 나.”

“...응.”

“빨리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고.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

“장마가 지나가면 엄청나게 더워질 텐데. 그러면 또 추억할만한 과거가 생기겠지.”

“...”

- ‘다신 사라지지 마.’

- ‘응.’

영화 속 두 남녀가 서로를 껴안는다. 영원을 약속하는 장면과 맞물려 현실에서도 시간이 흘러갔다. 아주 천천히, 느리게.

하나 곧 여루의 숨결마저도 멈춘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묻고 있던 얼굴을 조심히 들어 올려 표정을 확인한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영화 속 장면을 좇고 있었다.

─언젠가의 여름. 둘이서 장난처럼 영원을 약속하던 때가 있었다. 겉으로는 친구로서의 우정이었지만 그건 서로의 시간을 서로에게 가두는, 시공간을 초월해 세월을 묶어두는 약속이었다.

‘붉은 실은 연인 간에만 이어져 있는 게 아니래.’

‘누가 그래?’

‘어떤 사람이. 그러니까, 여루야. 인연은 쉽게 끊을 수가 없는 거라고. 우리 하나만 약속하자.’

‘뭘...?’

여름이 기억하는 너와 나만의 약속.

‘내 앞에서 말도 없이 사라지지 마.’

‘...알겠어.’

‘먼저 떠나지 마.’

‘...응.’

‘나도 널 먼저 떠나지 않을게. ...세상이 끝난다 해도.’

그러자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너는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뭐야, 진짜 바보 같애. 이 세상이 끝날 리가 있어?’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라고 했다. 당시의 너와 나는 몰랐겠지만 우리의 세상은 한 번 끝이 났고, 다시 시작되었다. 인연의 붉은 실은 우리를 과거로 묶었다. 그건 어느 여름에 갇힌 추억, 그러니까...

“주현아.”

“응.”

“아직도 너한테는 우리한테 우정으로 이어진 붉은 실이 보여?”

“응. 우리는... 그 붉은 연으로 묶여있는 사이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

갑작스레 여루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주저앉은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어딘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친구 맞아, 우리?”

“...”

“이런 게 친구야?”

“...”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의 차가운 호박색 눈동자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너랑 나는 이제 친구가 아니야, 주현아.”

“...여루야.”

“...그걸 알아야지, 아직도... 친구 놀이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

그 말에 상처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상처를 받아선 안 되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관계를 끊어내고 다시 억지로 이어 붙인 건 제 의지였다.

“저건 뭐야. 커피 사 온 거야?”

“...응.”

“잘 마실게. 나 잘 거니까 저녁까지 네 방에 들어오지 마.”

“...알겠어.”

그렇게 말하고는 스르륵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소녀를 애타게 시선으로 좇는다. 그러나 여루는 아쉬운 태도 하나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 사라졌다. 우두커니 소파 앞에 주저앉아있는 인영이 어두운 거실에, TV 속 불빛을 받으며 존재하고 있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오늘은 바쁜 날 가운데 얻은 유일한 휴일이었다. 너와 함께할 수 있는 그런 날. 거부당하는 건 익숙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왜? 왜 너는. 나는 이렇게나 너를 **하는데───...

─사랑하는데. 사랑하는데 감정이 어째서 같지 않을까? 내 사랑에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지만 네 거절에 익숙해지는 것도 반갑지는 않았다.

한 번쯤은 돌아봐 주길 원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태도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선택한 건 내 몫이었고, 네 감정은 온연히 네 것이지 내가 강요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그저, 이 자리에서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너를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언젠가 한 번쯤은 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겨울의 끝자락이 다가왔다. 결국 흐린 하늘이 빗방울을 조금씩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3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리는 빗소리는 곧 봄이 오는 소리였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리는 누군가의 노랫소리였다.

하늘이 열렸다.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치고는 드문 일이었다. 거실 베란다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바지로 향하기 시작한 영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소녀가 들어간 후 굳게 닫힌 자신의 방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감정이 가라앉았다. 곧 차분해진 머릿속에서 드뷔시의 서곡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축복받은 한 소녀가 이리저리 튀는 빗방울을 따라 춤을 추었다. 그 소녀는 긴 갈색 머리에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이였다.

내게서 도망치지 말아줘
나의 세계는 너로 세워지고 무너진다
모른 척 하고 있잖아
아무래도 좋을 결말 따위
내게 상처 주게 허락 할 테니
다시 걸어보게 해줘 사랑에
난 이미 손 쓸 수 없게 돼버렸지만
멋대로 그대를 원하고 있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냐
난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지만
나는 자꾸만 더 야위고 깊어만 지네
날카로운 달빛에
달빛에 비친 유리창도

- 심규선, 『달과 6펜스』 가사 中

*Debussy: La damoiselle élue, L. 62 - Pré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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