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 내리는 저택

막간. 엘가의 시간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내 감정은 한 번도 질주를 멈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칠 줄 모르고 속도를 올렸다. 그 끝이 설령 보답받지 못하는 길로 이어진다 해도 나는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건 패배할 결과를 알고도 사랑한 나의 선택이었다.

찰나의 감정이 아닌 걸 알았다. 색감이 옅던 그 갈색 눈동자를 본 순간 깨달았다. 계절이 피어나고 있었다. 제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봄꽃이 개화하던 장면이었다. 그 한 소녀를 중심으로 세상이 빛나고 있었다.

제 세상의 색을 모조리 앗아간 것처럼, 그렇게 3월의 봄 한 자락을 한껏 매달고. 교실 창가 자리에서 자각한 것은 사랑의 열병이었으며 내가 반한 대상은 권여루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첫사랑같이 우스운 감정을 믿지 않았었는데 자신이 첫눈에 반해버렸다.

과거의 다짐을 번복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은 자였다. 사랑에 진 패배자였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을 눈멀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 같은 불신자도 한 사람에게 목 매이게 만들었으니.

제발 부탁이니까 나를 한 번만. 한 번만 봐줘. 그런 아우성의 감정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를 사랑하는 나는 이렇게나 진심인데. 감히 네가 내 사랑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제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 여겼다.

아니, 오히려 내 노력이 부족해서 네가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어도 되었다. 그냥, 한 번만. 한 번만 나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봐줬으면. 그 예전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웃고 있는 너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희망을 가지진 않았지만 어느 미래를 꿈꾸긴 했었다. 네 옆에 서서 미소 짓는 너를 안아주고 네 이마에 다정하게 키스하는 그런 상상. 자정에는 네 옆에서 잠들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네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연하일휘 아래 미소 짓는 네 얼굴을 보며 입을 맞추고...

헛된 상상이었다. 덧없는 꿈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상상하는 건 죄가 아니니까. 꿈을 꾸는 것으로 죄를 물을 사람은 아니니까, 감히 그런 미래를 꿈꾸었다. 거짓된 희망이었지만 행복했다.

어느 날은 네가 내게 말했다.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그 말은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내가 너에게 남긴 나의 흔적들에게 고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그래, 결국은 내게 하는 말이겠지. 나를 보아 달라 아우성치는 이 상흔에게 하는 말인 걸 알았다. 여루를 구속하는 행위가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행동인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넌 나를 돌아보지 않잖아. 떠날 거잖아.

네가 떠나는 것이 싫었다.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 가정조차 하기 싫었다. 졸업 후 언젠가 헤어지게 될 것이 무서웠다. 내 행동을 정당화할 생각은 없으나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사랑 안에 너를 가두었다. 거미줄에 걸린 것 같이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내 둥지 안에서만 살 수 있도록.

그러나 결국 너는 나비가 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을 택했다. 질척한 감정들로 범벅이 된 손아귀에서 벗어나 버렸다. 내 손 안에 남은 것은 네가 남기고 간 빛 한 줌뿐이었다. 허나 그것마저 좋았다. 네가 남긴 빛으로 나는 너와 함께 영원을 살아가고 너는 네 의지로 숨을 쉬는 동안 나를 잊지 못하겠지.

숨결 하나에서도 나와의 추억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3월의 봄이 이른 꽃망울을 터트리는 것처럼 계절이 이르게 바뀌면 제일 먼저 나를 떠올렸으면 했다.

그게 내가 ...하기 전 가진 마지막 소원이었다. 육신은 함께하지 못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영원히 너와 함께하는 것. 나는 네 삶 속에 추억으로 피어나고 싶었다. 영원히 사랑받지 못한다면 네 기억 속에서라도 영원히 살고 싶었다.

언젠가 네가 나를 지나간 계절에 묻어두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시 네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더운 온도와 습기로 가득한 그 여름 안에서. 네가 다시 올 걸 알기에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수천 만 년이 지나도, 수억 만 년이 지나도 나는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네가 너의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추억이 되어 여기에 머무를 거야. 엘가의 세레나데가 흐르는 공간 속에서 고백할게. 언제든 잊지 말고 나를 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 줘, 여루야. 사랑해.

*참고 : Elgar: Serenade for Strings in E Minor, Op. 20 - 2. Largh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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