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혼혈 영애의 49번째 회귀

1화. 공작가의 혼혈 영애와 후작가의 사생아 성녀 (2)

리엔세라 : 1-2화

여기 또 다른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세라엘 슈안 데 카에토 라헤니오. 이전 이름은 세라엘 로트너. 라헤니오 후작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바깥으로 입양 보내졌다. 후작가에서 사람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귀족의 사생아인 줄도 모르고 평민으로 자랐다.

그러나 라헤니오 가문에 여아가 태어나고 신전에 대신 보낼 여식이 필요하던 찰나. 세라엘의 존재를 뒤늦게 깨달은 후작에 의해 다시 재입양, 성녀로서 신전에 보내진다. 마흔아홉 번째 성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맑고 청명한 창공이 머리 위를 장식한 어느 날. 바깥이 훤히 보이도록 양쪽 벽을 일련의 아치형으로 모양을 낸 복도가 쭉 뻗어 있는 곳. 라흐벤시아의 국교 로나르힘의 대신전, 로나지에.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던 성녀는 무감한 얼굴로 문득 옆에 걸린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파도가 치는 바다가 보였다. 절벽 위에 위치한 신전의 아래는 끝없는 바다였다. 저 푸른 바다에 떨어져 삼켜지면 또 한 번 ‘추락한 성녀’라는 별명에 걸맞은 존재가 되겠네. 그런 시시한 생각을 했더랬다.

세라엘은 푸른 바다가 일궈낸 하얀 포말이 해변에 이는 상상을 하며 지평선 너머를 잠시 응시했다. 그러곤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향한다.

아, 오늘도 신께 기도를 드리러 기도실로 가야 했다. 짜증 나네.

로나르힘 유일 성녀의 하루는 아침 기도로 시작한다. 경멸하는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일이란 늘 역하다. 그녀는 최고 종교직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신의 건사함을 믿지 않았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내가 사생아로 태어났을 리 없잖아. 안 그래? 설령 존재한다 해도 굉장한 악취미를 가진 신임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아무튼 이런 고약한 일을 아침부터 묵묵히 치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과 중 유일하게 그녀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그 자그마한 기도실 안이기 때문이다.

성녀는 낡은 기도실에 들어갔다. 오래된 나무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매일 기름칠하는 수녀들이 자기 일을 열심히 한 결과였다.

그녀는 방 정면에 위치한 스테인드글라스와 그 앞에 놓인 십자가, 그리고 성녀의 조형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최초의 성녀. 그녀의 상앗빛 조각이 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조각상이 해를 등지고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무릎을 꿇고 창을 올려다봤다. 멍하니 스테인드글라스의 찬연한 색채를 감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애는 오늘도 신전 주위를 기웃거리며 나를 탐색할까. 굉장히 신경 쓰였다.

성녀는 자신에게 스토커가 생겼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새의 모습을 한 다양한 정령들이 아침마다 속삭여주고 가는걸. 성녀라면 무릇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법. 그들이 전해주는 소식 중에는 발칙한 스토커에 관한 것도 껴있었다. 언제나 정령들이 내게 일러준다.

─그 애, 오늘은 성녀님이 들렸던 의상 가게에 갔더라.

거기서 당신이 만졌던 드레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갔어.

그 소녀, 아까 네 식단을 책임지는 수녀와 우연한 사고인 척 부딪혔더라.

그리고선 미안하다고 사과하던데.

어제는 학교 점심시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

같이 먹을 친구가 없나 봐?

아니야, 괴롭힘당하는 걸 수도 있어.

비품실에 청소 도구랑 같이 갇혀있던데, 좀 웃기고 귀엽더라.

어쩌다 보니 그녀에 대한 모든 걸 늘 보고 받는다. 이거 완전 내가 스토커의 스토커가 된 기분이네. 웃긴 건 저래 놓고 내 앞에는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다 이거지. 뭐, 괜찮아. 어차피 언젠간 만나게 될 테니.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저렇게 신전을 들락날락하는데 어떻게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가 있겠어. 무엇보다 내가 그 아이의 동선을 훤히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자신만의 스토커 소녀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했다. 성스러운 성녀의 조형물에 이름 모를 소녀의 모습을 덧씌워 상상한다. 긴장으로 온몸이 떨렸다. 자신을 스토킹하는 소녀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감히, 성녀인 나를.

그래.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만날 수 있어.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우연을 가장해 만나는 건 그날이어야 했다. 그래, 하늘이 밝게 열리고 라일락 나무에 꽃잎이 우거지는 계절. 첫사랑이 시작되는 때.

너라는 존재를 내가 처음으로 의식한 그날. 마흔아홉 번째 성녀가 탄생할 바로 그 날, 성인식(聖人式) 당일.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렴.

이제 곧 너를 만나러 갈 테니.

***

시간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다. 눈 부신 빛의 파편 한 가운데에 서서 나는 말한다. 미래에서 만나자. 너와 내가 약속한 그 장소에서.

...

시간은 다시 절벽 끝 그때로 돌아간다.

수십번이 넘는 반복의 횟수를 세기 포기할 무렵, 나는 더 이상 죽음의 이유조차 찾지 않았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삶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리엔시에, 너만은 회귀하는 삶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인 것을, 이제야 나는 알았다.

지금이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깨달았어. 내 삶이 너로 인해 회귀하고 있다는걸. 자연히 반복되는 상황에 대한 기시감이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반복을 알아챈 순간부터 결말이 바뀌었다. 타의가 아닌 자의에 의한 엔딩이었다. 나는 사고사가 아닌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면 무언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헛된 생각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신전의 내 침실 안이었고, 하늘은 여전히 청명했으며, 새들은 시끄럽기 그지없었으니까.

무언가 변했으나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내 의식이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세상 그 자체였다.

그래서 어느 날은 리엔시에를 신전의 후원으로 불러냈다. 라일락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만나자는 약속. 약속한 장소에 리엔시에는 어김없이 나타났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 더 이상 기원(祈願)을 사용하지 마.

최초의 성녀가 가진 고유 능력을 리엔시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언제 눈치챘느냐고.

─아니지. 리엔시에가 최초의 성녀의 환생인 것을 언제부터 알았느냐고?

로나르힘의 마흔아홉 번째 성녀인 내가, 그 정도 조사력도 갖추지 못했을 리가. 발데마인과 로나르힘의 장서관에는 꽤 많은 자료가 남아있었다.

- 싫어요.

...당연하게도 리엔시에는 거부했다. 불 보듯 훤히 보이는 속내였다. 반복이 끊어지면 나와의 인연도 끝이 나니까. 나는 정해진 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너는 네 삶에서 나를 잃게 되겠지.

하지만 그것이 섭리라면. 정해진 인과율이 그러하다면.

수많은 성녀가 반복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간을 위한 일이라면. 나는...

……아니, 역시 나는 세상을 위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살고 싶었다. 인간의 죄를 대신 사하여 주기 위해 성녀가 신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싶었다.

결국 내가 기원을 사용하지 말라 청한 것은 단 하나의 이유에서였다.

리엔시에, 나는 네가 미웠다. 동시에 그리웠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진 네가, 별것 아닌 이유로 약자인 척 외로움에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너의 삶에서 나라는 존재를 빼앗고 싶었다.

그래, 나 또한 별것 아닌 이유였다. 언젠가 네가 말했었지. 세상에서 성녀라는 존재를 없애버리는 것이, 공작이 되고 난 다음의 목표라고. 이유를 물으니 그리 대답했었다.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죄 없는 어린 소녀를 희생시키는 행위는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만약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면, 그 신은 악신임이 분명하고 인간들은 원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성녀가 사라지면, 더 이상 성녀가 아니게 된 나와 맺어지고 싶다고 작게 중얼거리던 네 모습 또한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그녀와 성녀인 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했다. 그녀는 그것을 메우고 싶었다. 그리고 나 또한 동의했다. 나도 리엔시에를 사랑했기에.

하나 사랑만을 갈구하는 리엔시에와는 달리 나는 너를 그만큼 증오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추락사. 나는 약소한 장소─후원의 끝에 존재하는 절벽에서 몇 번이고 몸을 던졌다. 네 인생에 비극을 더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반복될 삶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끝맺어도 되는 거잖아?

네가 나를 사랑한 만큼 고통받기를 원했다. 그래야 확신할 수 있으니까. 리엔시에,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나는 이번에도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있었고, 다음이 있을 걸 알았기에 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오늘도 나는 약속한 장소에서 자의적 비극을 택했다.

───시간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린다. 눈 부신 빛의 파편 한 가운데에 서서 나는 말한다. 미래에서 만나자. 너와 내가 약속한 그 장소에서.

......모든 것은 항상 한 소녀의 죽음으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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