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잡글

소꿉친구, 징검다리, 짝사랑

네가 자른 내 사랑, 내가 자른 네 사랑.

소꿉친구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를 뜻한다. 이은솔과 강성호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며 친구로 지낸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이은솔은 강성호를 남자로 보기 시작했다. 강성호는 여전히 이은솔을 친구로 본다. 둘은 여전히 소꿉친구일까?

“손.”

“어? 어엉.”

첫 번째 돌 위에 먼저 올라선 강성호가 이은솔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내밀자, 은솔은 냉큼 손을 잡는다. 서로의 체온이 겹쳐진다. 맴— 맴— 맴— 제 짝을 찾아 우는 매미가 질투하는 듯이 소리를 높고 길게 낸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물이 징검다리의 돌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려가고, 두 명의 고등학생은 징검다리 위를 껑충껑충 뛰어간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 은솔이 작게 웃자, 성호가 작게 꿍얼거린다. 뭐 그리 좋다고.

“응? 뭐라고 했어?”

“느려 터졌다고.”

“아이 씨, 누가 그렇게 빨리 가래? 천천히 가라고!”

아랫입술을 삐죽인 은솔은 곁눈질로 제 옆을 힐끔거린다. 오늘따라 더 심하게 틱틱대네. 징검다리를 성큼성큼 건너가는 성호를 바라보다 괜히 찝찝한 느낌에 맞잡은 손을 꽉 잡아본다. 성호는 슬쩍 은솔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강성호. 한 달 전에 생일이 지나 올해 나이 17세. 특징은 소꿉친구의 짝사랑 상대. 강성호는 이은솔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야 중학교에서 하사해준 마지막 겨울방학 때 놀러 간 은솔의 집에서 잔뜩 구겨진 채로 휴지통에 처박힌 러브레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봉투도, 편지지도, 글 내용도 전부 강성호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봉투 뒷면에 이름이 쓰여있었기에 굳이 내용을 보지 않아도 됐다. 그래도 봉투를 열어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To. 강성호. 좋아해. 4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좋아했어. 팔락. 무심코 편지지를 뒤집었다. 걔도 좋아할지 모르겠다. 6년 중 4년을 좋아했으면서도 모르겠네. 그래도 이걸 주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는 건 알겠다. 앞면은 온갖 사랑이란 사랑은 전부 담으려고 했으면서 뒷면은 자신감 없는 낙서만 가득했다. 못 박힌 듯이 서있던 성호는 편지를 원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고 제자리에 두었다. 모른 척 넘어가다 보면 나아질 수도 있다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지. 성호는 아무것도 잡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다.

첨벙.

소꿉친구가 된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날. 당시 4학년 초등학생이던 이은솔이 개울가의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목이 꺾여 물에 빠진 모습을 강성호가 발견한 적이 있었다.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은솔에게 성호가 급히 뛰어와 제 손을 내밀었다. 야, 잡아. 은솔은 햇빛에 가려진 성호의 얼굴을 바라보다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물에 젖어서 그런가 잡은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날부터 둘은 항상 손잡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징검다리를 건너 은솔의 집에 도착하면, 성호는 그제야 제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은 이은솔의 부모님이 저녁 먹고 가라고, 아니면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괜찮아요. 정중히 거절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한 성호는 징검다리를 다시 건너고, 어둑한 길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한 채로 걸어갔다.

“야야, 둘이 진짜로 사귀냐?”

“저 새끼 진짜로 말했어!”

“아하하!! 미친 새끼!”

둘은 중학교로 진학해도 변함없었다. 질 나쁜 동급생들이 키득거리며 던진 질문에도 성호는 항상 은솔과 손잡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그런 애가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말투도 행동도 전부 묘하게 딱딱해졌다. 예전의 강성호는 이은솔이 한 번에 하나씩 건널 수 있도록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지만, 지금의 강성호는 돌 하나에 발 하나만 대며 쌩 가버린다. 덕분에 이은솔은 개구리처럼 폴짝폴짝 돌 위로 뛰어오르며 황급히 건너야 했다. 그리고 원래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면 요즘은 징검다리만 건너자마자 곧바로 다시 건너 제 집으로 홀랑 가버린다. 둘이서 함께 보던 주홍빛 노을은 이제 이은솔 혼자 보게 되었다. 둘이서 장난치며 걸어갔던 길을 이은솔 혼자 걸어간다. 한 번은 혼자 걷던 은솔이 길 위의 돌을 걷어차며 크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강성호…. 이, 개새끼야!!!

씩씩거리는 은솔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며 붉어진다. 그러나 관계는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법. 이은솔은 강성호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은솔은 땅이 꺼져라 깊게 한숨을 내쉰다. 강성호, 이 등신아. 바다 같이 넓고 깊은 마음을 가진 나 이은솔이 널 용서하마. 발이 땅으로 꺼지며 시야도 순식간에 낮아진다. 첨벙. 시리듯이 차가운 감각이 뼈를 타고 올라온다. 여름의 더위가 개울에 담가진 발 하나로 달아난다. 순식간에 낮아진 시야가 순식간에 높아진다.

악!

성호가 은솔의 왼팔을 뽑을 듯이 앞으로 잡아당기자, 어깨가 빠질 듯한 고통이 이은솔을 관통했다. 다시 돌 위로 올려진 은솔의 오른발이 개울에 푹 젖었다. 작년 생일선물로 강성호에게 받은 흰 다이키 운동화도, 어제 새로 산 회색 양말도, 아킬레스건 부근에 붙여두었던 밴드도. 따끔. 젖어서 한쪽이 달랑거리는 밴드에 가려졌던 상처가 물과 만나 따갑다. 머리 위로 성호의 핀잔이 머리를 쿡쿡 찌르고, 눈앞에는 성호의 손가락이 심장 부근을 쿡쿡 찌른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리냐?

“초딩 때 건너다 자빠진 실력 어디 안 가네.”

“….”

핀잔을 들어 느낀 수치심 때문일까, 한 여름의 따가운 햇빛을 받았기 때문일까. 얼굴이 불처럼 뜨겁다. 귀도, 뺨도, 목도. 물에 젖어 차가웠던 운동화가 미지근하다. 따끔따끔따끔. 발에 있는 상처가 아픈 걸까, 손가락에 찔린 가슴이 아픈 걸까. 달랑이던 밴드가 툭 떨어져 개울에 몸을 실고 유유히 흘러간다. 하. 헛웃음이 적막을 깬다.

“야.”

“….”

“이은솔.”

“...왜.”

“나 좋아하는 거 티 나.”

“어?”

휙, 하고 들어 올린 고개. 동그랗게 뜨고 올려보는 눈과 당황해 어버버 거리는 입. 붉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죽은 사람처럼 허옇게 질린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성호가 낮고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정말 모를 줄 알았어?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싸늘해진다. 사납게 으르렁대는 강성호가 내뱉은 말은 거대한 망치가 되었고 곧장 이은솔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만들었다. 머릿속 사이렌이 미친 듯이 울린다. 4년 동안 들키지 않았다 생각했던 짝사랑이 알고 보니 진즉 들켰었고, 상대가 여태껏 모른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빨간 비상버튼을 누른 것이다. 언제부터? 감추다 보면 언젠가 들킬 거라는 예상은 진작에 했다. 하지만 그게 지금 여기서 까발려질 줄은 몰랐다. 강성호는 여전히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귓가에 맴도는 단어는 희미했다. 늘 뚱하거나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던 얼굴이 무표정에 미간만 좁혀 찡그린다. 6년 동안 같이 다니면서 오늘 처음 보는 표정이다. 성호의 가시같은 말이 귀에 박힌다.

“네가 애도 아니고.”

“….”

“이은솔.”

“….”

이은솔이 꼭꼭 숨겨오던 마음을 강제로 들추어 쑤셔댄 강성호는 어딘가 기분이 더러웠다. 가려웠던 곳을 긁은 것처럼 후련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불쾌한 느낌에 짜증 난 성호는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시발.

“앞으로 돌 정도는 혼자 건너자. 알았지?”

툭툭, 강성호가 은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지나친다. 이제 징검다리 위에는 이은솔 혼자 있다. 맴— 맴— 맴— 제 짝을 찾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다. 한없이 작아지고 비참한 기분에 한참을 멍하니 흐르는 개울을 바라본다. 코 끝이 찡해지고 목이 멘다. 항상 둘이서 건넜던 징검다리 중간에 쭈그려 앉고 하복 밑단을 끌어올려 눈가를 문지르니 천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오른쪽 신발 뒷축이 붉게 물든다.

오늘 찝찝했던 기분이 젖은 신발과 양말을 뜻하는 것 같아서, 발 뒤꿈치에 있는 상처의 따끔거림이 가슴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상처 위에 붙여둔 밴드가 떨어진 이유가 우리 사이를 뜻하는 것 같아서, 상처에서 새어나온 피에 물들어버린 신발 뒷축이 눈물로 젖은 하복 같아서.

은솔이 차게 식어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닦을 때, 주홍빛으로 노을 지는 태양이 손을 뻗어 안아주듯 여름 치고는 따뜻한 햇빛이 은솔을 감싸주었다. 그 따뜻함에 더 서러워서, 일어나다 다리에 쥐가 났을 정도로 계속 쭈그려 앉아 울었다. 띠롱. 은솔의 엄마가 메세지를 보냈다. 오늘 늦어? 아니. 금방 갈게. 촉촉한 두 눈을 벅벅 문질러 닦고 겨우 일어나 돌 하나를 밟으니 발목이 꺾여버렸다.

첨벙. 따끔, 따끔따끔, 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따끔.

등줄기에 소름이 돋으며 햇빛의 따뜻함이 사라졌다. 이번엔 배꼽 아래로 몽땅 젖었다. 발목에서 느껴지는 아픔에 또다시 눈물이 찔끔 나온다. 은솔은 강성호가 걸어갔던 길을 매섭게 노려 보았다. 개새끼….

고등학교 1학년. 폭염주의보가 뜰 정도로 더운 어느 날. 이은솔이 4년 간 숨겨 키우던 짝사랑이 끝났다. 강성호가 등 뒤로 쥐던 가위로 싹둑,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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