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켄유사] 원고했던거

2020년 발행 료켄유사 트리플지 <인 투 더 스타더스트 배쓰룸!> 원고 파트

덴시티 광장 구석에 세워진 푸드트럭 ‘카페나기’는 아는 사람들에게는 주로 화젯거리가 되는 소소한 명물이었다. 가게의 핫도그가 꽤 일품이라거나, SOL테크놀로지 CEO인 자이젠 아키라가 종종 들리는 가게라던가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단골들에게 무엇이 가장 흥미로운가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알바생을 꼽고는 했다. 벌써 몇개월이나 일을 했음에도 일이 익숙하지 않은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로 소시지를 굽고 있는 것도 볼거리였지만 그들이 가장 기대하는 순간은 백발의 미남이 가게에 방문하는 순간이었다. 남자가 광장에 들어서면 바로 단골들 사이에서 연락이 오갈 정도로 둘의 만남은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주로 어딘가 이상한 대화가 그랬다.

“아, 료켄. 오랜만이야.”

“별 일은 없는 모양이군.”

“링크 브레인즈도 잠잠하니까. 갑작스럽다만 료켄. 나와 친구가 되어주지 않겠어?”

“거절하지. 핫도그는 2개 하나는 소스를 좀 적게해서 주면 좋겠군.”

“그래. 커피도 2잔?”

“아아.”

이후로는 별다른 대화없이 가벼운 신변잡기 후에 남자는 음식을 품에 안고 광장을 떠나는 것이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관계가 된 것인지, 단골들이 직접 본 것만 벌써 두 자릿수에 가까워지는데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알바생의 끈질긴 집념에 대해서라든지 아무 근거 없는 추측만이 난무했지만 당사자들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는 탓에 단골들 사이에서는 덴시티 최고의 미스테리라고 불리고는 했다. 과연 이런 관계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에 대해 소소한 내기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일각의 반응이기에 자신과 유사쿠 사이에 이상한 내기판이 벌어져 있을 것이라 꿈에도 모를 료켄은 언제나처럼 익숙히 보트에 올라탔다. 료켄이 들고 온 핫도그를 자연스레 받아든 스펙터가 뒤를 따랐다. 구울 때 이리저리 표정이 구겨지는 건 여전했지만 유사쿠의 핫도그는 전에 비하면 일취월장해있었다.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소시지를 태우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 사장인 쿠사나기 쇼이치의 것보다 유사쿠의 핫도그가 더 료켄의 입맛에 맞았다. 커피로 목을 축이던 료켄이 자연스레 유사쿠 생각으로 흐른 사고에 멈칫했다. 방금 만나고 온 참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뭔가 신경쓰였다. 평소와 같이 핫도그와 커피를 구매하고, 이제는 반쯤 습관처럼 된 친구 요청을 받고 거절하고, 그 뒤로는 그다지 중요한 대화를 하지는 않았음에도 료켄의 이성은 위화감을 알렸다. 료켄 자신은 특별히 무언가를 한 기억이 없다. 상황이나 대화도 언제나와 같았다. 그렇다면 원인은 후지키 유사쿠일 것이다. 이제는 3분의 1 정도만 남은 핫도그를 마치 유사쿠인 양 노려보며 료켄이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유사쿠의 행동이었다.

처음 친구가 되어달라 요청했던 날 부터 지금까지 유사쿠는 항상 료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고는 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얼핏 가벼워보이는 말로 거절했지만 료켄은 한 번도 유사쿠의 말을 허투로 넘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것이 친구가 되어달라는 요청이라면 더더욱. 커피에 들어있던 얼음이 녹았는지 달각, 하는 소리가 났다.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을 할 때 유사쿠는 처음으로 료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다.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냈음에도 료켄이 유사쿠에게 무언가 태도를 취하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소시지를 굽는 것에 집중한 것일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유사쿠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자신이 불쾌해하거나 간섭하는 것은 퍽 이상한 짓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주일 간 료켄의 머릿속을 차지한 것은 그날 보인 유사쿠의 태도였다. 기어이 꿈에 나올 지경이라 평소 가게를 찾던 기간보다 일찍 찾아간 료켄이 여전히 인상을 쓴 채 소시지를 굽고 있는 유사쿠를 보며 안심했다. 최근에는 쿠사나기 진이 가게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어 어쩌면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익숙한 기척에 고개를 든 유사쿠는 일주일 만에 가게에 들른 료켄의 모습에 놀란듯한 모습이었다.

“료켄? 어쩐 일이야, 일주일만에.”

“근처에 일이 있어 들렸을 뿐이다.”

“그런가.”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근처에 들려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만들었을 뿐이다. 굳이 내색하지 않고 전과 똑같은 메뉴를 주문한 료켄이 광장을 보는 척 슬핏 유사쿠의 기색을 살폈다. 평소와 같은 모습에 너무 성급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아무리 유사쿠라도 일주일만에 다시 친구가 되자는 말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제야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음을 눈치챈 료켄이 미간을 찌푸렸다. 초조할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유사쿠가 완성된 음식들을 건네며 “료켄”라고 운을 뗐을 때 저도 모르게 안심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해.”

평소라면 금방 대답이 돌아왔을 텐데 웬일로 조용한 모습에 유사쿠가 일말의 기대와 함께 료켄을 바라보았다. 유사쿠의 생각과는 다르게 료켄의 기분은 상당히 저조한 상태였다. 짧은 텀을 두고 찾아와서인지 이번에는 위화감이 확실히 느껴진 탓이었다. 그것은...생각보다 더 기분이 나쁜 일이었다. 스스로도 당황스러울만큼 죄여오는 가슴에 혹여 분풀이를 할까 빠르게 음식을 낚아채며 료켄이 일갈했다.

“언제나 말하지만, 너와 내가 친구가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최대한 갈무리한다고 했는데도 어조가 강하게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유사쿠를 뒤로하고 료켄이 빠르게 광장을 벗어났다. 마지막으로 본 유사쿠의 손등이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 떠올라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격한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크루즈의 갑판은 오늘따라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간단한 흥밋거리로 대화의 물꼬를 열곤하던 스펙터도 오늘은 조용했다. 3기사는 네트워크 감시를 위해 실내에 들어가있고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스펙터 뿐이라 그제야 료켄은 머리를 식히며 고민에 빠질 수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차의 향기 덕분인지 불쾌감은 남았지만 순간적으로 끓어올랐던 분노는 가라앉았다. 격한 감정변화에 대한 문제도 알아내야 했지만 우선은 유사쿠의 태도였다. 맹세코 료켄은 그런 태도를 보이는 유사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굳게 믿었다. 몇 번이고 서로의 신념을 부딪쳐온 듀얼리스트로서 갖는 확신이었다. 오로지 료켄에게만 유사쿠가 가질 목적. 친구가 되고자 하는 마음 이면에 숨겨진 속내. 일반적으로는 재력이 목적이겠지만(료켄은 스스로를 잘 알았다. 본인의 자산 역시.) 유사쿠가 돈을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다는 선택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속물적인 이유로 자신과 친해지려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장 그럴싸 한 것은…

“복수인가.”

“후지키 유사쿠의 일인가요?”

한 마디만 꺼냈을 뿐인데 스펙터가 눈치빠르게 주제를 짚었다. 별로 숨기고자 한 것은 아니었기에 료켄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엔 또 뭘 했길래 그런 반응이시죠?”

스펙터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없어보였다. 유사쿠의 끈질김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스펙터의 관심을 끈 모양인지 그는 료켄이 카페나기에 다녀온 날이면 간혹 이러한 질문을 하곤 했다.

“사람이 타인과 관계를 맺고자 할 때 다른 속셈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지?”

“그야 돈일까요. 인간인 이상 물욕은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다만...그의 경우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군요.”

“동감이다.”

“하지만 왜 거기서 복수가 나오는 거죠?”

스펙터가 그 일은 이미 옛적에 끝난게 아니었냐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와 유사쿠는 과거 몇 번의 듀얼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미래로 나아갔다. 유사쿠가 자신이 ‘그 아이’라는 것을 안 뒤 복수는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료켄은 지금도 간간이 그 말의 진위를 생각하곤 했다.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료켄님. 점점 자신을 검열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사고를 눈치챈 모양인지 차를 즐기던 스펙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생각을 끊었다.

“...알고 있다.”

“지금까지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없으니 갑자기 태도가 변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최근에 그에게 무슨 변화가 있던 건 아니겠습니까?”

“과연…”

확실히 유사쿠의 태도 변화는 갑작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것이 최근 유사쿠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금 료켄이 아무리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결국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사쿠를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그 얼굴을 봤다가는 어떤식으로 감정이 술렁일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썩 내키지는 않지만...아무래도 유사쿠의 지인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이다. 결론을 내린 료켄이 찻잔을 들었다.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차는 그 사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유사쿠? 미안, 모르겠는데. 그보다 유사쿠가 요즘 기분이 안좋아 보이던데 혹시 싸우기라도 한거야?”

일부러 유사쿠가 알바를 하지 않는 날을 골라 카페나기를 찾아 쿠사나기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본 결과가 이것이다. 파트너인 Ai를 제외하면 유사쿠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 외였다.

“그런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둬. 그녀석은 너와 무슨 일이 생기면 뻔히 보인단 말이지.”

“쓸데없는 첨언이군. 아, 커피를 한 잔 부탁하지.”

오늘 하루는 카페나기에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어차피 후지키 유사쿠의 지인이라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았고, 그들 대부분은 카페나기에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이 더운 날에 굳이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한몫했다. 료켄의 생각은 틀리지 않아서 그는 하루동안 자이젠 남매나 어째서인지 홀로 돌아다니는 Ai를 만날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이 모두 유사쿠에게 무슨 일이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모르겠다며 난색을 표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Ai의 대답은 영 미심쩍은 면이 있었지만 녀석이 역으로 유사쿠가 시무룩해졌다며 과장된 모양새로 울상을 짓는 것에 추궁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호무라 타케루는 애초에 고향으로 내려간지 오래였으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덴시티에 있을 적에는 특별한 일이 없기도 했다. 결국 료켄은 별다른 소득없이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을 시간에 들렸는데 어느덧 주변이 어둑어둑해져있었다. 예상한 일이었기에 처음부터 본가에 갈 것이라 말해두었던 료켄이 오래간만에 언덕 위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린 집은 먼지가 조금 쌓인 것을 제외하면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가구가 몇개 놓이지 않아 텅 비어보이는 집안을 가만히 보고있으면 괜한 상념에 휩싸일 것 같아 료켄은 그대로 욕실로 향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절로 땀이 나는 날씨였던 탓에 씻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간만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배에서는 힘들다보니 욕조를 쓸까 싶어 기분전환으로 물을 받으며 간단히 집안을 청소했다. 다행히 치울 것도 별로 없어 적당히 먼지만 털어낸 뒤 몸을 씻은 후 욕조에 몸을 담궜다. 기분을 내려 거품까지 올리니 몽글몽글한 것이 절로 기분을 풀어주는 것에 료켄이 편안한 자세로 몸을 기댔다. 그러고보면 최근에는 네트워크를 감시하는 일이 바빠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날 후지키 유사쿠에게 격렬한 반응을 보인 것은 피로가 쌓인 탓일지도 몰랐다. 고민없이 그저 쉬기만 하는 것이 퍽 오래간만의 일로 느껴졌다. 그나마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코우가미 료켄은 그 냉철한 두뇌를 아낌없이 쓰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고를 멈추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욕실 내에 가득한 증기로 나른해진 와중에도 그의 사고는 후지키 유사쿠에게로 흘렀다가, 유사쿠의 지인들에게로 흘렀다가, 다시 유사쿠가 보인 태도로 흘렀다. 사실 요 몇 주간 료켄의 사고는 줄곧 유사쿠에게 머물러있는 격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니 얼마 전 링크 브레인즈에서 떠돌던 소문 하나가 떠올랐다. Dr. 게놈이 재미있는 소문이 있다며 가져온 소문은 네트워크 공간에서나 떠돌만한 실로 시답잖은 얘기였다. 그럼에도… 료켄은 욕조를 바라봤다. 언제나 보던 것이다 보니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꽤나 큰 욕조였다. 자신이 떠올린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듯 홀로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올리는 등 어수선하게 행동하던 료켄이 마침내 결의를 다진듯 단말기를 꺼내들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승낙을 받아낸 료켄이 욕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스펙터에게 하루 더 집에 머무를 것이라 연락해야 할 것 같다.

집을 청소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크루즈에 있을 때는 주로 스펙터가 청소를 도맡아 했기에 스스로 공간을 정돈하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적당히 만족할 만큼 먼지를 닦아낸 료켄이 소파에 앉았다 금방 일어나 이유없이 집안을 돌아다니는 등 긴장을 내비쳤다. 손님을 집안에 들이는 일은 어릴 적부터 많았으니 이제와 새삼스레 긴장할 이유는 없었지만 오늘 올 손님이 특별하다는 점이 료켄의 속을 바짝바짝 태웠다. 설마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할 것이었다...

띵, 동.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초인종을 천천히 눌러 소리가 끊기듯이 났다. 띵동. 이번에는 명쾌한 소리였다. 긴장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발걸음이 절로 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손님이다. 반쯤 뛰듯이 문에 다가가 벌컥 문을 열자 마찬가지로 뛰어온 것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땀을 흘리는 손님이 있었다.

후지키 유사쿠다.

"...안녕, 료켄."

명백히 긴장한듯한 목소리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몇번이나 얼굴을 마주쳐왔기에 료켄은 지금 유사쿠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들키고 싶지 않은지 나름대로 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엽지 않나.

"어서 와라, 후지키 유사쿠."

본인이 듣기에도 명백히 웃음기 가득한 인삿말이었다. 유사쿠는 조금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별 다른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료켄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유사쿠로서는 벌써 두 번째였다. 다만 첫 번째는 일방적으로 처들어간 것이어서 정식으로 초대받은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처음 봤을 때도 그랬지만 넓고 황량한 집이다. 에어컨이 틀어져있는지 집안은 쾌적했다. 자신의 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유사쿠가 쭈볏쭈볏하고 있는 것을 료켄이 소파로 이끌었다. 푹신푹신한 소파였다. 이런게 있으면 아이도 좋아하려나,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주방으로 들어간 료켄이 컵 두 개와 음료를 가져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컵에 따르니 금방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히는 것이 방금전 까지 냉장고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더운 날 언덕을 오르느라 목이 말랐던 탓에 유사쿠는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렌지 맛이 강하게 퍼지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다.

"무슨 말을 좋아할지 몰라서 적당히 사뒀다."

"이거면 충분해. 고마워."

목이 많이 말랐는지 유사쿠는 한 컵을 빠르게 비우더니 양해를 구하고는 주스를 더 따랐다. 료켄이 재빨리 손등을 바라보면 당연하게도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그게 언제적 일인데 지금껏 남아있을까. 그럼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가만히 유사쿠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의식이 되어 료켄도 목이 바짝 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목을 조금 축이고 그가 최대한 말을 골랐다.

"후지키 유사쿠. 다름이 아니라 오늘 너를 부른 것은..."

기껏 입을 열었건만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고 도중에 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도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상당히 불편했다. 저절로 유사쿠의 얼굴에서 떨어지려는 시선을 최대한 고정하고 료켄이 뒷말을 이었다.

"...함께 목욕이라도 할까 해서다."

"그렇군, 료켄. 너무 더워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가."

"아니, 난 지금 지극히 이성적이다."

역시 이런 반응인가. 한치의 망설임 없이 받아쳐진 탓에 얼굴이 붉어졌다. 유사쿠는 대체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긴 갑작스레 이런 말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당황할 터였다. 밀려오는 쪽팔림에 괜스레 목을 축이며 평정을 가장했다. 자세히 설명하려니 더 부끄러웠지만 이대로는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에 링크 브레인즈에서 이런 소문이 돌더군."

"소문?"

"그래.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면 함께 목욕하는 것이 좋다는 소문이다. 아무래도 솔직해지는 법이라던가."

유사쿠는 그제야 료켄의 말을 이해한 듯했다. 어쩐지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면 챙기라 하던 것이 이를 위함이었나. 단순히 날이 덥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유사쿠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무엇보다도 료켄이 이런 수법을 택한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굳이 목욕을 하지 않아도 네가 물어보면 대답해줄거야, 료켄."

그랬다. 유사쿠는 료켄에게는 상당히 순순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으니 그것이 그의 원칙과 충돌하지 않는다면 간단히 응해줄 것이었다. 그것은 료켄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료켄이 꽤나 궁지에 몰려있다는 것이 작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유사쿠가 솔직해지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료켄 본인이 솔직해질 필요가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검열하면서 살아온 탓인지 완전히 습관이 되어 스스로 긴장을 푸는 것이 힘들어진 탓이었다. 료켄이 의견을 무를 것 같지 않자 유사쿠는 조금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승낙의사를 밝혔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아보였다. 뭐든 가장 큰 난관은 넘었다. 집주인인 료켄이 먼저 일어나 준비하겠다며 욕실로 향했다.

물을 틀었는지 욕실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별 생각 없이 료켄을 기다리던 유사쿠는 그제서야 얼어붙었다. 료켄이 자신을 집에 초대한데다 혼욕을 권하길래 드디어 그가 자신을 조금 받아들여준 것인지, 이런 관계는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과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만족감에 별로 의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혼욕을 위해서는 료켄도 자신도 옷을 벗어야 했다. 갑자기 찾아온 불안감에 얼어붙은 유사쿠가 애꿎은 컵만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남과 함께 욕조에 들어가본 적이 여태까지 있었던가. 적어도 유사쿠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경험했을지도 모르나 로스트 사건 이전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그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경험이 있었어도 불안했을 것이다. 제 몸은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은 탓에 플레이메이커와는 달리 볼품없이 말라 있어 볼만한 것은 아니었다. 료켄이 실망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러고보니 아침에 씻었던가. 체감상으로는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려니 료켄이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함께 들어가는 사람이 료켄이라는 점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와 육체적으로 가까워질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그것도 알몸으로. 고민이 끝나지 않는 머리와는 반대로 몸은 착실히 료켄의 말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 있도록.”

욕실은 넓은 집 만큼이나 컸다. 솔직히 말해 유사쿠는 이 욕실 하나가 자신의 집과 별반 크기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료켄이 무언가 말하는 것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유사쿠는 눈앞의 광경에 눈을 빼앗겼다. 성인 남성 두 명은 거뜬히 들어갈 법한 욕조에 거품이 몽실몽실 차올라 있었다. 불렀는데도 유사쿠가 별 반응이 없자 의아해진 료켄은 유사쿠가 어린아이처럼 거품에 집중하는 것을 보곤 말없이 어깨만 툭툭치고 욕실을 나섰다. 타인의 집에서 욕실을 사용하는 것이니 나름 배려한 것이었다. 옷을 탈의하고 가져온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있자 드디어 입욕한 것인지 첨벙, 하고 물이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간다.”

“그래.”

들어가자 잔뜩 차오른 거품에 파묻힌 유사쿠가 어디서 찾았는지 고무오리까지 띄워두고있었다. 료켄조차 이제는 저런게 있었는지 가물가물한 물건인데 어떻게 찾은 것인지 자연스레 만지작거리는 표정이 꼭 어린아이마냥 보여서 하마터면 그대로 집을 빠져나갈 뻔했다. 힘겹게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료켄도 욕조에 들어가자 물이 한층 더 넘쳐흘렀다. 조금 평정을 되찾고 나니 한참을 오리며 거품을 만지작대는 유사쿠가 조금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들어가기 전에는 꽤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몸을 담구고 나니 긴장이 풀린 것일까, 언제나 무표정하던 얼굴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진 것인지 긴장이 풀리는 것에 그도 몸을 편안히 욕조에 기댔다.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유사쿠가 고개를 번쩍 들며 오리를 멀리 치우고 멋쩍음에 큼, 큼 헛기침을 했다. 잔뜩 부풀어 있던 거품이 살짝 가라앉은 탓에 료켄의 상체가 꽤 드러나있었다. 자신도 그럴 것이다. 부끄러움에 거품을 끌어당겨 목 위만 간신히 보이게 하고 있자 료켄이 의아해했다. 료켄은 링크 브레인즈에선 플레이메이커로 내내 쫄쫄이만 입고다니던 유사쿠가 설마하니 몸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당장 탄탄히 단련된 듯한 몸을 가진 사람이 그러고있으니 유사쿠는 조금 억울해졌다.

물은 따뜻하고 욕실에는 증기가 가득차 저절로 몸이 나른해졌다. 어쩌면 료켄이 말한 그 소문은 나름의 신빙성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열기로 숨이 차 절로 나른한 숨이 났다. 료켄도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함께 있는것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기분좋은 만족감에 유사쿠는 어제 료켄이 자신에게 연락했을 때부터 줄곧 갖고 있던 의문을 꺼내들었다.

“그러면 료켄. 우리는 친구가 된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반문하면서도 료켄은 왜 유사쿠가 이러한 말을 했는지 눈치챈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아무리봐도… 유사쿠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가며 질문에 답했다.

“이유는 3가지 있어. 첫째, 네가 나를 피하고 있었다는 것. 네가 그런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날, 너와 나 사이에 특별한 일이라고는 내가 너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요청한 것 뿐이지. 따라서 원인은 그것이라 할 수 있어. 둘째, 네가 나를 집으로 불렀다는 것. 계속해서 나를 피하던 네가 직접 나를 불렀다는 건 네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지. 무엇보다도 네가 나를 부른 장소가 집이라는 것도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고 있어. 셋째,”

세번째 손가락을 피며 유사쿠가 쐐기를 박았다.

“사람은 보통 아무 관계도 아닌 사람과 혼욕을 하자고 권하지 않아.”

“과연. 그럴듯 하군.”

유사쿠의 말은 타당했다. 실제로 료켄은 유사쿠가 말한 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네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후지키 유사쿠. ...결론을 빼면 말이지.”

“그럼 아니란건가?”

이번에야 말로 친구가 될 것임을 확신했는지 유사쿠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그래봐야 거품을 잔뜩 쌓아놔 별로 티가 나지도 않았지만.

“내가 너를 피한 것은, 그래. 그날 있던 대화가 원인인 것이 맞다. 다만 아까도 말했지만 너를 부른 것은 링크 브레인즈의 소문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목욕탕에서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던가. 그날의 일을 논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후지키 유사쿠,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이. 그런 하찮은 소문에 의지해서라도.”

“그렇군. 이해했어.”

이해는 했지만 꽤 타격이었는지 유사쿠는 한동안 별다른 말없이 거품만 만지작거렸다. 언제나 거절하고는 있지만 상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료켄으로서도 꽤 마음 불편한 일이다. 욕실에 들어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난 탓에 거품은 그 몸뚱이를 움츠리고 가득 찬 증기가 절로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언제까지고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것은 료켄의 취향이 아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지금이라면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료켄이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 이상으로 단어를 심사숙고해 고른다. 네트워크에서의 일이나 로스트 사건 외의 일로 후지키 유사쿠를 상처 입히는 것은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다.

"네가 처음 나에게 친구가 되자고 말했던 때를 기억하나?"

"그래."

잊을 턱이 없다. 유사쿠가 아주 오랜 세월을, 10년을 기다려왔던 순간이었으니. 그 날을 떠올리고 있는지 유사쿠의 표정이 유순하게 풀어졌다.

"그때의 너에게서는 어떤 사심도 엿보이지 않았다. 오직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일념만으로 가득차서, 그 날것의 진심에 나는 답해줄 수 없어서 그대로 네 요청을 거부하고 피했지."

"기억하고 있어."

"그 뒤로도 마찬가지로 너는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 나와 친구가 되고자 했다. ...내가 너와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음을 몇 번이고 주장했음에도. 그렇군, 솔직해지자고 한 사람은 나이니 나부터 솔직해져볼까. 솔직히 말해, 가끔, 아주 가끔은. 너와 친구가 된 나를 상상해 본 적도 있다. 염치도 없는 일이지."

"그렇지 않아!"

자조하듯이 던져진 말에 유사쿠가 격하게 반응했다. 몸을 바짝 앞으로 당긴 탓에 물이 크게 출렁여 욕조 밖으로 넘쳤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유사쿠는 이렇게 솔직해진 료켄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말한 '숨길 수 없어진다'는 것은 이런 뜻이었을까. 그가 진심을 내비치는 것은 상당히 기쁜 일이었지만 그것이 자학적인 것이라면 듣지 않아도 좋았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나만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거다.”

“료켄…”

유사쿠의 말이 안타까움을 담고 흩어졌다. 료켄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러한 점이 그들을 친구라는 선을 넘도록 하지 않는다. 다시 대화가 평행선을 그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말이 료켄이 진정으로 묻고 싶은 말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굳이 그를 집에, 욕실에까지 들여보내며 묻고 싶어한 말.

“그럼에도…너의 말이 다른 의도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은 것이 신경 쓰였다.”

“다른 의도?”

“친구는 되지 않겠다면서, 언제나 너의 진심을 거부했으면서 네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친구가 되자고 말해온 것이…썩 기분 좋지는 않더군.”

유사쿠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짐작가는 것이 있는 걸까. 끝까지 말하지 못할 것 같던 진심을 모두 토해낸 료켄이 눈을 감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앞으로는 유사쿠의 말을 듣는 것뿐이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이토록 떨리는 일이었던가. 피부에 닿아오는 물의 촉감까지 예민하게 느껴졌다. 무엇을 바라는 지도 모르면서 료켄은 긴장하며 저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기도했다.

“일단, 사과하도록 할 게 료켄.”

눈을 감았음에도 유사쿠의 행동을 뻔히 알 수 있었다. 흔들리는 물의 움직임이라던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떨림이라거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신은 생각보다 유사쿠를 잘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친구가 되자고 한 건 나면서, 마치 다른 의도가 있어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 건 분명히 내 잘못이야.”

“…그래. 그래서, 대체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거지?”

“그건…”

과연 얼마나 대단한 의도였길래. 눈을 뜨고 유사쿠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자니 드물게 그가 눈을 피했다. ‘그’ 후지키 유사쿠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디까지가나 집요하게 시선을 좇았더니 결국 항복선언을 한 유사쿠가 몸을 욕조에 푹 파묻었다. 어딘가 미묘하게 볼까지 붉히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새였다. 이것은, 꽤나…

“……했다.”

“음?”

“…너의 집에서는, 거품 목욕이 가능하다고 들어서, 언젠가 너와 친구가 된다면 경험해 볼 수 있을까 했어.”

쾅!

그대로 힘이 풀린 료켄이 미끄러져 욕조에 머리를 박았다. 유사쿠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것을 손짓으로 저지한 료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신을 다잡았다. 대체 누가 그런걸 말해줬다는 말인가! 범인이야 뻔했다. 돌아가면 오랜만에 스펙터와 듀얼이라도 나눠봐야 할 것이다. 대체 무슨 의도인가 했는데 겨우 거품 목욕이었다니. 지금까지의 고민은 대체 뭐였냐는 말이다. 한편으로는 유사쿠가 숨긴 것이 하찮은 것이라 다행이었다. 그날 료켄의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던 격한 감정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거라면 그냥 말해라!”

“친구가 아니어도 가능한 건가?”

“그래, 우리는…!”

거침없이 말을 잇던 료켄이 일순 얼어붙었다. 우리는? 그보다 과연 자신은 후지키 유사쿠가 솔직히 의도를 밝혔어도 순순히 그걸 들어줄 위인이었던가? 유사쿠가 이렇게 말을 돌리게 된 원인은 자신의 태도가 원인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정도는 후지키 유사쿠에게 해 줄 수 있다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현실에서는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니지만 집에 초대할 수 있고 링크 브레인즈에서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이렇듯 혼욕까지 할 수 있는 관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료켄이 머뭇거리는 틈을 유사쿠가 놓치지 않고 재빨리 파고들었다.

“네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나 우리의 운명을 떠나서, 지금 네가 생각하고 바라는 관계를 말해줘, 료켄.”

“그건...”

“네가 스스로에게 채운 사슬을 벗어 던진다면 우리의 관계는 분명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우리 둘이라면 분명 더 나은 미래를 붙잡을 수 있을 거야!”

“나는… 우리는…”

료켄은 한동안 대답이 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유사쿠가 자신에게 의도를 숨기려 했을 때의 격한 감정과, 그것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안 후의 안도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그와 친구가 되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염치가 없는 일이다. 어린 시절처럼 귀를 막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유사쿠의 말은 한 마디, 한 단어, 억양 하나까지 빠짐없이 료켄에게 스며들었다. 그랬다. 그가 기억하는 유사쿠의 진심은 언제나 지금처럼 한치의 사심도 없는 것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료켄이 눈을 떴다. 마침내 각오를 다졌다.

“아니,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료켄!”

유사쿠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어도 그의 신뢰를 저버린 것은 자신이다. 아마 조금 뒤면 축객령이 떨어지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자니 갑자기 료켄이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붙잡았다.

“무슨…?”

“후지키 유사쿠. 우리는 연인이 될 거다. 물론, 네가 허락한다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꿈에서조차 상상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유사쿠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것이 퍽 귀여워 보여 료켄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자리잡았다. 한 번 인정하고 나니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다.

“네가 말하는 ‘연인’은 친구와는 다른 거겠지?”

“그래. 그렇지만 이제까지 ‘아무 관계도 아니’던 것과는 달라지겠지.”

친구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받아들일거냐?”

유사쿠는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얼굴을 붙잡힌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그는 마침내 료켄의 말을 온전히 이해한 듯 했다. 별다른 첨언은 필요 없었다. 료켄이 유사쿠를 잘 아는 만큼 유사쿠도 료켄을 잘 알았다. 아마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터였다. 남은 것은 대답이었다. 유사쿠가 과연 자신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료켄은 이미 그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알 수 있었다. 한층 밝아진 얼굴과 빛나는 눈동자 만으로 충분했다.

“좋아. 연인이 되자 료켄.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으니 하는 말이 아니야. 온전히 내 감정을 말하고 있는 거야.”

정답이다. 차오르는 충만감에 료켄이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끌어당겨 가볍게 입술을 문댔다. 조금 놀란 듯이 보이던 유사쿠는 이내 승부욕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싼 팔을 끌어내렸다. 맞은 편에서 삽시간에 코앞까지 맞닿은 두 사람이 이내 겹쳐진다. 료켄에게 기대앉은 유사쿠가 그의 팔로 몸을 감쌌다. 대범하게 다가오는 유사쿠의 모습에 료켄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물은 살짝 서늘하게 느껴지고 거품은 상당히 날아가 드문드문 출렁이는 물의 표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거품을 다시 채우도록 할까.”

“이왕이면 처음처럼 잔뜩 채워줬으면 해.”

욕심도 많은 녀석. 유사쿠가 더 편한 자세로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친 료켄이 다시 한번 거품을 채웠다. 입욕이 끝나면, 내일도 돌아가지 못하겠노라 연락을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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