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킷사텐 다찌에서
도쿄, 신주쿠. 성찬은 킷사텐 앞에서 간판을 바라봤다. 珈琲 運命, 커피, 운명. 겨우 읽을 줄 아는 건 여행 가기 전 빡세게 공부한 히라가나와 애니메이션, 드라마로 본 익숙한 가타카나 몇 자, 그리고 초등학교 때 나름 급수까지 쳤던 걸로 겨우 연명하는 한자가 전부였다. 카페 간판 하나는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마음에 괜스레 뿌듯한 마음으로 킷사텐을 문을 열었고, 그런 성찬을 반기는 건 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한 내부였다. 아, 동기가 아직까지 흡연이 가능한 카페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가 그런 곳이구나. 비흡연자인 성찬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래도 자신이 언제 킷사텐에 가보겠는가. 성찬은 항상 입버릇으로 할까, 말까 할 때는 하자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역시나 이번에도 성큼성큼 내부로 들어갔다. 안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무언가를 하고 후회하는 게 훨씬 좋으니까.
생글생글 웃는 종업원이 한 명이냐고 묻자 성찬은 눈치껏 검지로 한 명이라는 걸 표시하고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여행 한 달 전부터 < 누구나 할 수 있다, 일본어 여행 회화! > 를 보고 배웠건만 이상하게 현지인한테 말을 하는 건 왜 이리 어려운지. 할 수 있는 말은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같은 정말 기본적인 회화가 끝이었다. 종업원은 성찬을 다찌 석으로 안내했고, 지금부터는 메뉴판과의 싸움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가타카나 전체를 모르지만 대충 눈치는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アイスコーヒー( 아이스 커피 ) 는 전체를 다 읽을 순 없지만 ア (아) 와, ス (스), コ (코) 만 적혀있으면 대충, 아이스 커피구나. 로 눈치껏 번역이 가능한 것처럼. 아이스 커피 주세요. 주문을 깔끔하게 마치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다. 이십 대부터 대충 잡아 육십 대까지,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데이트를 하러 온 연인도, 가만히 작업을 하거 나 손바닥만 한 책을 읽는 사람까지. 성찬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몰래 훔쳐본다. 맨투맨을 입고, 금발 머리를 한 남자. 두꺼운 뿔테 안경에 피어싱. 오밀조밀 귀엽게 생긴 얼굴, 귀여움과 어울리는 파르페까지.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예의상 한 번 웃어 보이자, 성찬은 무언가를 훔쳐봤다는 죄책감에 시선을 빠르게 회피한다. 때마침 아이스 커피가 나온다. 상냥한 종업원의 목소리에 성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꾸벅, 내려간다.
사랑은 킷사텐 다찌에서
아이스 커피를 빨대로 쪽쪽 마시면서도 성찬은 계속 옆자리의 남자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옆자리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울 뿐이었는데. 괜히 훔쳐본 걸 들켜서 그런 걸까. 다시 한번 힐끔, 몰래 훔쳐본다. 남자는 담배를 다 피우곤,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하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계산대로 몸을 이동할 때, 남자는 성찬의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너무 훔쳐봐서 화가 난 건가? 일단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야지, 성찬의 직감과 달리 남자는 손을 쫙 펴곤, またね。( 또 봐요. ) 라고 말을 한다. 한국어 번역 필요 없이, 성찬은 그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들은 문장 중 하나였다. 사요나라도 아니고, 또 보자고? 그럼 내일도 여기서 보자는 건가. 성찬은 머리 속에서 많은 가설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을 한 걸까? 보통 사람 같았으면 별일이 다 있네, 하고 쉽게 넘겼겠지만 정성찬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또 보자는 말이 찝찝했다.
일정 상 다음 날은 시부야를 구경하기로 했지만, 성찬은 계획을 취소하고 다음 날도 그 킷사텐의 다찌 자리에 앉아있었다. 왜 기다릴까. 스스로에게 하루종일 자문했지만 답이 영 나오지 않는다. 그냥 그 말에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허탕이라고 해도, 할까 말까 할 땐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이 열리더니 어제의 그 남자가 킷사텐에 들어온다. 성찬을 보고 반갑다는 듯 팔을 붕붕 흔들고 자연스럽게 다찌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또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하긴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정성찬은 한국인이고, 제 곁에 앉은 남자는 일본인인데. 그렇게 두 번째 만남도, 아무런 대화 없이 끝이 난다. 똑같이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고, 마시고, 이번엔 성찬이 먼저 일어나서 금발의 남자는 성찬을 가만히 바라본다. 우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굳이 대화를 하고 싶다면 번역기를 돌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성찬은 묘하게 이렇게 대화 없이 곁에 앉아서 각자 할 일을 하는 것도 꽤 나쁘지 않았다. 이번엔 성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またね。( 또 봐요. ) 남자는 방긋 웃는다. バイバイ! ( 바이바이! ) 웃는 모습이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성찬은 모든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킷사텐에서 금발 머리를 한 남자를 만났다. 대화 하나 없이. 옆자리에 앉아서. 도쿄 여행만 이 주 정도를 잡고 왔는데 일주일을 꼬박 그 남자한테 올인했다. 하루는 잠시 킷사텐에 늦게 도착했더니 금발 머리의 남자는 입술을 비죽 내밀곤, 종업원에게 아이스 커피를 대신 주문하기도 했다. 남자는 킷사텐에서 담배를 반 갑 정도 피웠다. 정확히 반갑을 피우면 자리에서 일어났고, 남은 반 갑은 그 다음 날 마저 피웠다. 얼굴을 말랑하게 생겨서, 꽤 많이 피우는구나. 성찬은 담배 냄새를 맡으며 아이스 커피를 마저 마신다.
“한 대 피울래요?“
“뭐야,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웅, 조금.“
열한 번째 만남이 이어지는 날, 그리고 성찬의 귀국이 삼 일 남은 날. 금발 머리의 남자는 처음으로 성찬에게 담배를 권했다. 저 담배 안 피워요. 성찬이 거절하자 아아, 어쩐지이. 말 끝을 늘리며 새 담뱃갑을 꺼내더니, 첫 담배를 꺼내서 궐련 부분이 위로 가게 밀어 넣는다. 며칠 동안 지켜본 남자의 이상한 루틴이었다. 첫 담배는 거꾸로 밀어 넣고, 항상 그 담배를 마지막에 피우는 것. 자신만의 의식일까. 남자는 갑자기 담뱃갑을 성찬에게 쑥 내밀더니, 소원 빌어요. 짤막하게 말한다. 한국어 잘하면서 왜 대화를 안 했을까. 성찬은 남자가 아주 조금은 얄밉게 느껴지지만, 눈을 감고 소원을 빈다. 일단 이 소원은 나중을 위해 킵 하겠습니다. 필요할 때 쓸게요. 속으로 아주 조용히, 반칙을 쓰기로 했다. 소원에 킵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 한 번만큼은 언젠가 필요할 소원을 위해, 나름 수를 쓰기로 한다.
“소원은 왜 빌라고 했어요?“
“이거, 첫 담배.“
“응.“
“빼서 거꾸로 넣어두고, 마지막에 피우면 소원 이루어지거든.“
정말 이상한 남자다. 남자는 헤실헤실 속도 없이 웃으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성찬의 물음에 남자는 눈을 몇 번 예쁘게 깜박거리곤, 오오사키 쇼타로. 라고 대꾸한다. 쇼타로, 쇼타로, 쇼타로. 성찬은 속으로 세 번 정도 이름을 불러보곤, 오오사키, 오오사키, 오오사키. 성도 세 번 정도 불러본다. 제 이름은 성찬이라고 해요, 정성찬. 쇼타로는 성찬의 이름을 듣곤, 서엉- 차안- 길게 늘려 발음한다. 곁에 앉은 시간치곤, 꽤 늦은 통성명이었다. 더 이상 쇼타로라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성찬은 이제 쇼타로를 훔쳐보지 않고, 대놓고 바라보기로 했다. 자신보다 두 살 정도는 더 어려 보이는데. 대학생일까? 궁금증이 하나씩 더 생겼지만, 정작 쇼타로는 성찬에게 궁금증 따윈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성찬은 또 그런 점이 서운했다. 관계가 쌓아질 것 같은데, 쌓이지 않는 어떠한 벽이 존재했다.
쇼타로는 처음 성찬을 만난 날을 정확히 기억했다. 누가 봐도 이방인의 모습. 왜, 동양인들은 누가 어디 사람인지 다 안다고 하지 않는가. 제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다. 쇼타로는 한국어를 할 줄 알았지만, 굳이 먼저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물론 옆자리의 남자가 주문을 할 때 어려움을 느낀다면 당연히 도와줬겠지만, 아이스 커피도 꼬박 잘 주문하는 모습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누가 그랬더라. 담배를 피우기 시작할 때, 첫 담배는 빼내서 거꾸로 밀어 넣고, 가장 마지막에 피우면 소원을 이루어진다고 했었다. 그걸 들은 다음부터 쇼타로는 강박적 루틴처럼 소원을 빌었다. 이루어질 수 있는 현실적인 소원 위주로. 남들이 보면 쇼타로를 꼴초라고 표현을 할 수도 있겠지만, 쇼타로는 마음만 먹으면 당장 담배를 끊을 수도 있었다. 계속 담배를 피우는 건, 그냥 현실적인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걸 직시했을 때, 생기는 도파민과 같았다. 담배 중독이 아닌, 담배 놀음. 현실적인 소원은 모두 이루어지자, 쇼타로는 딱 한 번,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소원을 빌었다. 이 재미 없는 인생에 즐거운 일이 좀 생기게 해주세요. 이 비현실적인 소원의 결괏값이 제 곁에 있었다. 자신을 몰래 훔쳐보는 시선에 쇼타로는 한참 동안 모르는 척을 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다가 아, 이게 그 소원이구나. 생각하니 하나의 콘텐츠 같기도 했다. 어디 한 번 놀라게 해 볼까 문득 장난을 치고 싶은 심보가 생겨서 일부러 눈을 마주쳤고,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아, 뭐야. 되게 재밌다. 쇼타로는 다음 날도 남자가 보고 싶었다. 원래 여행객은 한 번 온 카페는 다신 안 오지 않으니까. 계산을 하러 가기 전, 남자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손을 쫙 펴곤, またね。( 또 봐요. ) 라고 말을 한다. 이 남자가 자신의 소원이라면, 내일도 이 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즐겁게 해 줄 소원은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제 소원이 먼저 またね。( 또 봐요. ) 라고 말을 했고, 그에 대한 답으로 쇼타로는 활짝 웃으며 バイバイ! ( 바이바이! ) 답했다.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고, 인사만 해도 그 하루가 즐거웠다. 누군가와 생긴 반복적인 약속이 그저 좋았다.
“한 대 피울래요?“
“뭐야, 한국어 할 줄 알아요?“
“웅, 조금.“
열한 번째 만남이 이어지는 날, 쇼타로는 새로운 담뱃갑을 꺼내며, 자신의 소원에게 소원을 양보했다. 소원은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미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따라주는 모습이 꽤 다정하고, 귀여웠다. 과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쇼타로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자신의 소원을 꼼꼼하게 뜯어본다. 갈색 머리, 감은 속눈썹이 길고, 예쁘장하게 생긴 미인이다. 표정 없을 땐 꽤 냉하게 생겼는데, 가끔 웃을 때는 약간,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느낌도 있었다. 여자 여럿 울렸겠는데...... 아님 남자도 울렸을 수도. 쇼타로는 사뭇 진지해졌다.
“소원은 왜 빌라고 했어요?“
“이거, 첫 담배.“
“응.“
“빼서 거꾸로 넣어두고, 마지막에 피우면 소원 이루어지거든.”
소원의 이름은 정성찬이라고 했다. 서엉- 차안- 발음하기엔 조금 어려운 이름이었지만, 꽤 말랑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길게 발음을 늘리면 'ㅇ' 느낌이 크게 나서 그런 걸까. 쇼타로는 사실 성찬의 이름을 알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알면 좋지만, 그는 여행객 아닌가. 서로의 추억에 남는 건, 이름이 없어도 충분했다. 십 년 뒤, 문득 길을 걷다가 아, 그런 사람도 있었지. 하고 충분히 추억할 수 있는. 이름을 알게 된다면 추억이 더 깊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 애 이름이 뭐더라. 아, 성찬이었지. 이런 식으로. 이름은 기억하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날 테니까. 성찬이라는 애는 갈색 머리를 했고, 웃을 땐 솜사탕 같았고....... 그리고 인생에 즐거운 일이 생기게 해 달라는 소원이었다고. 하지만 통성명까진 괜찮았다. 더 이상은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추억하기엔 모든 것이 과했다. 과연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 줄까? 아님,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질까? 쇼타로는 킷사텐에 올 때마다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またね。( 또 봐요. ) 라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런 약속은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니. 그리고 거짓말처럼 킷사텐엔 성찬이 앉아있었고, 자신이 기다릴 땐, 어김없이 성찬은 킷사텐 문을 열었다. 정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꿈 같았다. 오늘은 없겠지, 하는 순간마다 정성찬은 존재했다.
영원은 끝이 있으니, 영원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 아니겠는가. 성찬은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쇼타로는 활짝 웃었다. 이런 친절한 이별 통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이 주 동안, 정말, 즐거웠으니 미련은 없었다. 으응, 그렇구나. 성찬은 그 웃음을 보자 괜히 속이 한 번 뒤집혔다. 자신만 아쉬운 건가. 이 주동안 아무런 여행도 못하고, 킷사텐에서 오오사키 쇼타로만 만났다. 여행을 못했다는 점에 후회는 없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호기심이 가득하고, 묘하고, 관짝에 눕기 전 주마등에 꼭 보여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래서 쇼타로에게 궁금증도 생기고, 정이 생길 이유도 충분한데, 이상하게 정은 자신만 생긴 게 분명했다. 호텔에 누워서 자기 전 오오사키 쇼타로를 매일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묘했다. 대뜸 소원을 빌라고 하는 것도, 처음 본 순간에 내일 또 보자고 말한 모습도. 그들은 한 번도 킷사텐에서 같이 밖으로 나간 적 없었다. 같이 들어온 적도 없었고. 쇼타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성찬은 따라서 일어난다. 마지막이니까 같이 나가요.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 남자 좋아해요?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고개를 젓는다. 너는? 쇼타로가 질문을 그대로 반납하자 성찬도 고개를 젓는다. 여자 좋아했어요. 대답과 달리 성찬은 지금 이 순간, 키스를 하면 안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물론 안 할 수 있지만, 이대로 넘어가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 말이다. 담배가 뻑뻑한 킷사텐에 들어갈까, 말까 할 때 일단 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시부야에 가는 걸 취소하고 킷사텐에서 기다릴까 말까 하다가 일단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오오사키 쇼타로를 무작정 기다린 것처럼.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는 최악이었다. 뺨 때려도 돼요. 성찬은 고개를 숙여 쇼타로에게 입을 맞추려고 하자, 쇼타로는 성찬의 어깨를 무의식적으로 밀어낸다. 키스는 별로야. 거절이라고 생각한 성찬은 아, 미안해요. 냉큼 사과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남자가 남자한테 키스 하려고 했는데, 뺨을 안 때린 점이 용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담배 냄새와 아이스 커피만 마셨는데, 이상하게 취기가 오른 것 같다. 담배에 취한 걸까.
“바보, 싫다는 뜻 아니고.“
쇼타로는 팔을 뻗어, 성찬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키스는 별로야. 입술 닿기 전, 그 묘한 분위기를 좋아해. 작게 속삭인다. 아, 역시 이상한 사람이다. 성찬은 수긍한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성찬은 눈을 감는다. 정말, 오오사키 쇼타로는 제 평생 가장 기묘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애틋하고, 가장 제멋대로인. 키스는 정말 많이 해 보겠지만, 이렇게 입술이 닿기 전의 묘한 기류는 언제 느껴보겠는가. 성찬은 쇼타로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저, 남자 안 좋아해요. 닿지도 않은 입술이 떨어지며, 해명하자 쇼타로는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쇼타로는 좋아요. 당장 내일 떠나는 이방인 여행객이 남자는 싫지만 자신은 좋다고 고백을 한다. 이게 어떤 무게감이 든 고백인지는 알까. 쇼타로는 고개를 기울이며, 그냥 가볍게 여기기로 한다. 여행지에서 짧게 빠지는 사랑은 아주 흔했으니까. 好き?(좋아해?) 쇼타로의 질문에, 성찬은 아기 새처럼 답한다. 好き。(좋아해.) 이것 또한 성찬이 보던 일본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사랑 고백할 때 하는 대사였다. 좋아한다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성찬의 모습에 참, 값진 소원이라고 생각하며 쇼타로는 씩씩하게 골목길에서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またね。( 또 봐요. ) 가 아닌, さようなら! (안녕!) 를 외치며.
성찬의 귀국 날엔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와, 비행기 안 뜨는 거 아니야? 쇼타로는 킷사텐에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몇 년째 꼬박 오는 단골 킷사텐 다찌 자리에서 겨우 이 주를 만난 남자 하나 없다고 이렇게 허전하다니. 종업원은 성찬에 대해서 물었고, 쇼타로는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 올릴 뿐이었다. 이젠 정말 끝이다. 그리움만 남는 거지. 가장 좋은 추억으로. 누군가가 인생 최고의 추억을 물으면 이 추억을 꺼내서 소매로 반짝반짝 닦아서 보여줄 수 있도록. 헤어짐이 슬프진 않았다. 종종 그립겠지만, 여기 남은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몫이었다. 그리고, 그 무게는 기꺼이 가져갈 수 있었다. 언젠가 성찬의 얼굴도 잊겠지? 그냥 갈색 머리, 긴 속눈썹, 냉하지만 웃을 때 솜사탕 같은, 이런 무용한 표현만 남을 것이다. 사진도, 무엇도 없으니. 항상 파르페나 라테를 먹던 쇼타로는 처음으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한다. 아이스 커피가 나올 때쯤 킷사텐 문이 열린다. 쇼타로는 본능적으로 문을 바라보고, 그 문엔 자신의 소원인 성찬이 비를 쫄딱 맞은 상태로 캐리어를 들고 있었다.
“저, 소원 빌었어요.“
“응?“
“소원 빌었다고요.“
무슨 소원?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에 쇼타로는 다찌에서 벌떡 일어나 성찬에게 달려간다. 제가 그 소원 킵했는데, 지금 쓰려고요. 덜덜 떨면서 말하는 성찬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비행기 안 탔어요. 그냥 자신의 할 말만 하는 성찬의 모습에 쇼타로는 응, 응. 그랬어? 다정하게 물으며 우산을 씌워준다. 쇼타로, 우리 만나요. 내 소원, 그걸로 할래요.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언젠가의 미래에 꺼내 볼 수 있는 보석 같은 추억으로 묻어두려고 했더니, 성찬은 소원으로 같이 추억을 쌓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얼굴도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서 있게 되는 것.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모든 부분이 서로의 추억이 되는. 쇼타로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소원은 다 이루어졌다. 현실적인 것만 빌었고, 그나마 비현실적인 소원이었던, 자신의 재미 없는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다음 날이 궁금해지는, 즐거워지는 소원의 결괏값이 정성찬이었기에. 쇼타로는 젖은 성찬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기며 속삭인다. 많이 젖었는데, 우리 집 갈래? 한동안 담배 생각은 나지 않을 것이다. 심심풀이 땅콩으로 소원이나 빌던 담배놀음도, 오늘로 당분간 끝이었다.
- 카테고리
- #기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