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4


타로, 당신이 울지 못할 때 내가 대신 울어줄게요. 성찬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꼬박꼬박 형이라고 붙이던 호칭은 어디로 갔는지, 쇼타로는 속으로 조용히 웃으며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준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준 건 처음이라서. 그게 또 속도 없이 좋아서. 선을 긋는 건 쇼타로의 영역이었는데, 이렇게 또 한 번 욕심으로 여지를 내어준다. 거절 대신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며. 성찬, 얼굴 완전 부었어.​

​십 분의 정차 시간 동안 쇼타로는 담배를 피우러 열차에서 내렸고, 그사이 성찬은 퉁퉁 부은 눈으로 식당 칸에 들어갔다. 식당 칸에는 졸린 눈으로 토스트를 씹고 있는 찬영이 있었다. 성찬은 자연스럽게 찬영의 맞은편에 앉았다. 퉁퉁 부은 눈을 보더니 찬영은 작게 속삭였다. 울었어요? 성찬은 그냥. 가볍게 대꾸하고 턱을 괸 상태로 토스트를 먹는 찬영을 가만히 바라본다. 찬영도 여기서 더 묻지 않았다. 한참 토스트를 씹다가 문득 한마디를 뱉을 뿐이다.


"타로 형, 좋아하죠."

"......."

"티 완전 나요."


그러니까 저 견제하지 마요. 찬영은 왼손을 보여준다. 약지엔 반지가 있었다. 아, 성찬은 바보 같은 탄식을 뱉는다. 찬영은 큭큭, 소리 내어 웃더니 주위의 눈치를 살피곤 몸을 성찬에게 기울인다. 근데 타로 형.... 

​무슨 말이 나올지 뻔했다. 찬영은 그저 쇼타로는 명문가 자제라는 말과 그래서 연애가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할 것이다. 성찬은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곤 찬영의 머리를 괜히 한번 손으로 헝클어트린다. 아, 형.... 머리가 헝클어지자 울적한 소리를 내는 찬영의 모습이 꼭 어린애 같다. 그리고 어린애 같다고 생각한 그의 말에 한 번 붙잡힌다. 고백은 했어요?

고백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런 감정을 쏟는 것조차 오오사키 쇼타로에겐 엄청난 부담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부담감을 품에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는 그가 속해져 있던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아마 타로 형도 알걸요. 찬영의 말에 성찬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가 모르길 바라면서도, 그가 눈치채길 바랐다. 그리고 물론, 오오사키 쇼타로는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똑똑하니까. 눈치가 빠르고, 다정하고, 선한 사람이니까.

여기 있었구나. 식당 칸에 들어온 쇼타로는 성찬의 옆에 앉았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담배 냄새. 그새 토스트를 다 먹은 찬영은 타로 형, 잘 잤어요? 새초롬하게 물었고, 쇼타로는 응, 잘 잤어? 유연하게 대꾸한다. 우린 어제 분명 밤을 샜는데. 성찬은 픽, 웃음을 흘린다. 하여튼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때마침 커피 두 잔이 나오자, 성찬은 익숙하게 커피 한 잔을 쇼타로 앞에 놔둔다. 고마워. 쇼타로가 작게 속삭인다. 왁자지껄한 식당 칸에서도 나름의 질서와 규칙이 있었다. 연인들의 대화, 친구들의 대화, 낯선 이방인들의 대화.

"타로 형,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일본은 졸업식 때 좋아하는 사람에게 교복 두 번째 단추 줘요?"

응.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갑자기? 되묻는다. 다름이 아니라 열차여행 중 무료함에 대비하기 위해서 일본 드라마를 다운받아 왔단다. 나라의 문화권이 다르다 보니 찬영은 신기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미국은 프롬파티잖아. 진짜 왈츠 추고 그래? 찬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엔 했는데 요즘엔 안 해요.

성찬은 의외로 한국은 낭만이 크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곧 생각이 다른 한쪽으로 쏠린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두 번째 교복 단추. 미디어에서 본 적 있었다. 심장과 가까워서 준다고 했나. 그럼 쇼타로도 누군가에게 줬을까? 번역가라는 꿈을 심어준 한국인? 혹은 미국인? 아님 그가 이야기하지 않은 인물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물어봐야 질투처럼 느껴지지 않게 잘 물어볼 수 있을까. 유연하게. 성찬은 천천히 말을 고른다. 그 점을 눈치챈 찬영은 웃음을 겨우 참고 먼저 입을 열기로 한다. 타로 형은 누구한테 줬어요?

역시 사심이 없는 자의 질문은 자연스럽다. 쇼타로는 아무런 의심 없이 골똘하게 생각하곤 머쓱하게 답했다. 그냥 달라고 한 사람 줬어. 내가 사람도, 이름도 잘 안 외워서.

에이, 재미없어. 찬영은 입술을 비죽 내밀곤 다운받아 온 드라마를 마저 봐야 한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성찬은 커피잔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다. 찬영의 공백에 맞은편 자리가 비워져도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옆자리에 앉는 게 당연한 사람들처럼.

"형한테 번역가가 어울린다고 한 사람 있잖아요."

"응."

"이름 기억해요?"

쇼타로에게 평범한 꿈을 심어준 친구. 보통 꿈을 심어준 사람의 이름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쇼타로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외울 노력도 안 했어. 오오사키 쇼타로의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한 사람도 쇼타로는 기꺼이 잊었다. 아니, 자리를 내주지도 않았다.

쇼타로는 특별한 삶을 살았고, 그 특별함에서 선한 다정이 유독 빛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모든 걸 포기한 것이다. 자신의 인간관계, 외워야 하는 것, 사랑해야 하는 것, 평범한 삶. 눈이 소복하게 쌓인 허허벌판을 사흘째 달리고 있었다. 발자국 하나 남지 않는 눈밭을 바라보며, 공허한 쇼타로의 세계 같다고 성찬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성찬은 다시 묻고 싶었다. 나도 금방 잊힐 사람이냐고. 아님, 외울 노력을 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냐고. 우리는 결국 아무런 사이도 아니냐고. 연애를 하지 않아도, 고백을 하지 않아도 어떤 사이는 될 수 있는 법이니까. 성찬은 욕심을 내고 싶었다. 내 이름은 기억해 달라고. 당신의 삶에, 이름 세 글자를 외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뻔뻔하고 이기적으로 굴고 싶었다. 왜냐하면.... 정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라는 이름을 평생 기억할 테니까. 잊고 싶어도 절대 잊지 못할 테니까.

눈이 쌓여서 이름이 묻힌다고 해도, 성찬은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님 눈 위에 오오사키 쇼타로라는 이름을 또 쓰고 싶었다.

"당신 잘못 아니야."

하지만 성찬의 입술에선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온다. 우선 욕심보단 사랑을 하고 싶었다. 성찬은 쇼타로의 손을 잡았다. 이젠 익숙하게 마주 잡는 두 손. 그 개새끼... 아니, 하나코의 남자친구도, 형이 죽인 거 아니야.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마음이 고맙고도 귀해서.

그러니까 잊지 마요. 형은 아무 잘못 없어.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 어쩌면 쇼타로는 누군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염치없지만, 모든 죄가 자신의 탓은 아닐 거라고. 그리고 괜찮을 거라고. 마주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4

커피를 마셨지만 카페인의 효과를 영 받지 못했는지 그들은 오후 내내 잠을 청했다. 날이 밝았지만 성찬은 뻔뻔하게 손을 내밀었다. 쇼타로는 꽤 사랑스러운 뻔뻔함이라고 생각하며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성찬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시차가 밀리는 것도 모자라서 밤 한 번 새웠다고 엉망으로 뒤집어진 시차가 꽤 웃겼다. 성찬은 잠든 쇼타로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봤다. 몸을 숙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색색 쉬는 숨결이 뭐가 좋다고 소리를 죽여 웃기도 했다.

손끝으로 뺨을 간지럽히자 반듯한 미간이 약간 좁아지더니 쇼타로가 눈을 떴다. 몇 시야? 잠에 취한 목소리에 성찬은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일곱 시요. 꽤 오래 잠들었구나. 쇼타로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몸을 아예 성찬 쪽으로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사랑과 비슷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지금 보면 그냥 사랑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왜냐하면 그의 손길은 다정하니까. 뺨을 간지럽히는 조심스러움도, 손을 잡을 때 느껴지는 단단한 애정도 모두 다정과 결이 비슷했으니까.

"성찬, 나는 좋은 사람 아니야."

"착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뭔데?"

"전 좋은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에요."

오오사키 쇼타로와 정성찬. 비슷한 점 하나 없는 삶 같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유일한 교집합. 인생의 사랑을 해 보지 못한 것. 가문에 숨이 막혀서 자신을 희생했던 쇼타로와 앞만 보고 자신의 길을 달려간다고 인생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 정성찬. 사랑은 필수 요건이 아닌 선택적 요건이었다. 하면 좋지만 안 해도 상관없는 것. 가장 먼저 버릴 수 있는 것.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많았다. 자신에게만 좋은 사람도 있었고, 태생이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사람, 앞으로 이 사람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성찬은 모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결국 삼키고 만다.

쇼타로는 자신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며 계속 부정했지만, 성찬은 그 전제부터 고치고 싶었다. 모든 짐을 다 지고 있는 자가 어떻게 좋은 사람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지독하게 자기희생적인 사람. 쇼타로,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야. 언제든지 내가 증명할 수 있어. 그 말에 쇼타로는 어디 한번 증명이라도 해 보라고 요구하고 싶었다. 나를 안 지 겨우 나흘째 되는 사람. 예쁜 눈을 가지고, 잘 우는 겁 많은 이방인.

그러다가 덜컥, 정말로 증명을 할 것 같아서 쇼타로는 몸을 반쯤 일으키곤 팔을 뻗어 성찬을 끌어안았다. 미친 척 하나 해도 되냐고 묻곤 새해부터 입을 맞추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또 어젯밤 입술이 예쁘다며 입꼬리에 여러 번 입을 맞추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먼저 끌어안으니 당황해서 마주 안지도 못하고 팔을 붕 띄운 상태로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한다.

나 추워. 이상한 핑계를 대니 그제야 성찬은 쇼타로를 마주 안아주었다. 악몽 꾸지 않았어요? 다정하게 반문하며.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차라리 악몽이라도 꾸면 좋을 텐데. 잊고 싶지 않은 기억이 계속 늘어난다. 불행해서 불행하고, 행복해서 불행하다. 참 이기적인 성격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다음 목적지는 어디예요?"

"없어."

아직 안 정했어. 도 아니고, 몰라. 도 아니고 없다니. 성찬은 그 말이 괜히 불안했다. 그게 뭐야. 괜히 투정 섞인 말을 하며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자, 쇼타로는 숨이 막힌다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어디 갈 거야? 쇼타로가 묻자, 성찬은 모르겠어요. 라고 답했다. 사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느긋하게 모스크바를 구경하고, 유럽으로 잠시 넘어갈까. 아님 한국으로 돌아갈까. 그때 정해도 되는 거니까. 그리고 아무런 계획을 하지 않은 자신이 처음으로 기특해졌다. 그가 허락만 한다면, 아주 잠시, 찰나의 시간이라고 해도 곁에 더 있을 수 있었으니까.

성찬은 쇼타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담배 냄새와 은은하게 섞여 있는 포근한 향. 쇠 냄새와 비슷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누구 하나 놓지 않는 포옹. 꼭, 서로가 목숨줄이라도 된 것처럼. 침묵을 깨는 건 쇼타로였다. 나 카메라 챙겨서 나갈 건데, 같이 나갈래?

식당 칸은 여전히 북적였다. 빈자리가 없어서 성찬과 쇼타로는 그저 사람들을 구경하고, 커다란 창문 앞에서 지나치는 바다를 구경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몇 장 남기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투덜거리는 쇼타로를 성찬은 그저 바라보며 웃었다.

커피나 차 마실래요? 성찬의 물음에 쇼타로는 필름 카메라만 쳐다보더니 차 마실래. 짧게 대꾸한다. 하나에 몰두하면 주위를 챙기는 타입은 아니구나. 성찬은 그런 모습조차 좋았다. 분명 쇼타로는 주위를 챙긴다고 많은 것을 놓았을 터인데, 지금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쇼타로가 문득, 아, 미안. 부탁할게. 고개를 들며 눈을 마주하더니 눈썹을 八자 모양으로 축 늘어뜨린다.

"괜찮아요, 좋았으니까."

"뭐가?"

"비밀. 여기 있어요, 금방 다녀올게."

쇼타로가 고개를 기울인다. 영리한 사람, 속을 숨기고 오는 사람, 흑심이 있는 사람, 무례한 사람의 속은 투명한 유리처럼 보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러나 제 앞의 사람, 정성찬만큼은 알 수 없었다. 집중 하나 못 했는데 뭐가 좋은지. 퉁명스럽게 답을 했는데 뭐가 비밀인지. 속이 보이지 않는 건, 자신에게 처음 보는 인간의 유형이라서 그럴 것이다.

멀어지는 성찬의 발걸음을 쇼타로는 묵묵히 바라본다. 우리의 관계는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속해져 있던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그들은 결국 다시 자신을 찾을 것이다. 돌아오라고. 네 자리는 자유가 아닌, 가문을 보존하는 의무를 지키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완벽하게 사라져야 했다.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그걸 알면서도 괴상한 운명은 자신에게 정성찬이라는 인간을 선물해 줬다. 사라지지 말라는 뜻일까. 아님, 사라지기 전 고생했다고 주는 선물일까. 어느 쪽이 답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에게 참 가혹한 처사였다.

'아, 그리고 일본인도 좀 있었어요.' 성찬의 말처럼 뒤에서 웅성거리는 일본어가 들린다. 저 사람 쇼타로 아니야? 근데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어느 세상을 가도 자신 혼자서 살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저번에 본 것처럼 허허벌판에 있던 집 한 채, 딱 그런 곳이 아닌 이상 편하게 숨쉴 수 있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 게 뻔했다.

자신에게 말을 걸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쇼타로는 괜히 고개를 숙인다. 그냥 지나가라, 그냥 지나가라....... 바닥만 보고 있는 자신이 꽤 비참했다. 곧 쇼타로의 시야에 성찬의 운동화가 보인다. 형, 나 봐요. 쇼타로가 고개를 들자, 성찬은 그의 어깨를 감싸 쥐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쇼타로의 목에 자신의 목도리를 둘러준다. 잘못 봤나? 일본인들의 웅성거림이 멀어진다.

"형, 진짜 유명하구나."

"너 일본어 할 줄 알아?"

"아뇨, 근데 형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급하게 둘러준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내린다. 푸하, 이게 뭐야. 쇼타로는 목도리를 풀어내곤, 다시 단정하게 목도리를 둘렀다. 아니, 급해서.... 성찬의 머쓱한 말이 이상하게 좋았다. 참 서툴다. 그래서 더 다정한 거겠지.

고마워.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헛기침을 하곤 찻잔을 건넨다. 가부키 화장을 지워도 알아보는구나. 성찬은 쇼타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분장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이 말간 모습만 보니 감이 잡히지도 않는다. 분장을 한 모습도 아름답겠지만, 성찬은 이 모습이 더 좋았다. 자유를 찾은 것 같은 얼굴.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아, 뜨거워. 울상을 짓는 얼굴. 차가운 물 좀 받아 올까요? 자신이 필요한 이 모든 순간이 좋았다.

"내가 한 살 때 아버지랑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때 기자가 나한테 꿈을 물었거든?"

"한 살 때요?"

"응, 그때 내가 왕자님이 되고 싶었대."

그때 꿈을 괜히 왕자라고 답을 했나 봐. 다른 걸 답할걸. 쇼타로는 빠르게 지나가는 창가를 응시하며 답했다. 도련님의 삶과 왕자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새해 첫 곡에 한 해의 운세라는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처럼 혹여나 자신이 첫 꿈으로 다른 걸 말했다면 뭐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희망이었다.

쇼타로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성찬은 자신이 다가가지 못할 벽이 하나씩 세워지는 것 같았다. 자신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그들의 세계. 누군가는 동경하겠지만, 누군가는 억압으로 발버둥 칠 수도 있는 그런 세계.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알아보는구나. 어릴 때부터 기자회견을 열었다면 매스컴에서도 쉽게 얼굴이 비쳐졌을 테다.

성찬은 조심스럽게 쇼타로의 팔을 붙잡는다. 응? 쇼타로가 고개를 들자 성찬은 사랑을 고백해야 할 것만 같았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 그런 희미한 고백. 오오사키 쇼타로가 부담을 가지지 않고,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는 고백.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까지, 제가 숨겨줄게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그러니 내 뒤에 숨어요. 성찬의 호흡이 떨린다. 쇼타로의 손을 붙잡고 잠에 들 만큼 겁이 많지만, 그가 허락만 한다면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그를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숨겨주고 싶었다. 바보 같은 고백이지만, 그만큼 쇼타로가 크게 웃을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그는 웃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아서 예쁜 호선을 그리던 그 입술이 예쁘게 올라가지 않았다.

쇼타로는 절대로 남들이 보는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그런데 정성찬이라는 인간은 계속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울지 않을 수 있냐고 몰아세우는 것처럼. 사람 울리는 것에 능숙한 사람처럼. 입술이 덜덜 떨린다. 너는 결국 나를 울리는구나. 너는 결국.......

".....추워."

목도리를 두르고,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으면서도 온기가 필요했다. 쇼타로는 성찬의 목도리에 코와 입술을 묻었다. 은은하게 나는 정성찬의 냄새. 달달한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방으로 돌아갈까요?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속눈썹에 눈물이 엉켜서 눈을 뜨는 것도 힘겨웠다. 목도리가 젖으면 안 되는데.....

덜컹, 문이 열리자 성찬은 바로 쇼타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쇼타로의 얼굴이 보고 싶었으나, 보지 않는 걸 택했다.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을 거 같아서. 지금도 눈물을 참고 있는 거 같았으니까. 안 볼 테니까 울어도 돼요. 마음껏 울어요.

성찬의 말에 쇼타로의 몸이 떨린다. 울어도 된다라는 말을 언제 들었더라. 그 누구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하나코의 무릎을 털어주며 했던 말, 언젠가 켄토에게도 했던 말. 그러나 자신에겐 금기와도 같았던 말. 절대 보지마, 나 우는 모습 못생겼어. 쇼타로의 축축한 목소리에 성찬은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

"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요."

열차가 소등된다. 곧 시간은 절반을 넘어, 닷새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분명 납작하고 지루한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그걸 비웃기라도 하는 듯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응, 너무 빠르다. 쇼타로의 다정한 목소리에, 성찬은 서글퍼진다.

쇼타로가 바라는 건 이제 단 한 가지였다. 정성찬이 자신을 잊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이 미련한 사람이, 자신만을 사랑하지 않길. 그러면서도 쇼타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허허벌판에 있는 집 한 채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문을 열고 나오는... 자신 혼자가 아닌, 정성찬과 오오사키 쇼타로를 생각한다. 눈을 치우면서 실없는 농담을 하고, 언제까지 나를 숨겨줄 거냐고 물으면 기꺼이 평생이라고 답을 해주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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