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좋은 사족
눈이 시리도록 비린 향이 집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바닷내음의 비린내 따위와는 전혀 다른 향취였다. 만물의 창조주인 바다보다도 훨씬 살갗에 와닿는 것. 푸르름과 대조되는 붉음. 의식이 위태로이 흔들리는 꼴을 자각했다. 고작 이런, 값싼 텍스쳐 하나로, 공간이 이렇게나 다르게 보일 수 있다니. 당신이 들었다면 분명 웃었을 이야기였다. 카쿠核 쨩, 드디어 너도 이해해주는 거니? 값싸다는 거 말야. 하면서.
피칠갑이 된 마룻바닥을 굴러다니던 당신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도대체 어느 누가 목이 동강난 채로 웃을 수 있겠니. 당장이라도 그리 말할 것만 같은 평온한 표정으로 당신의 머리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렇다면 머리를 잃은 몸은 어디에 있는가. 문이 반쯤 열린 침실 쪽으로 시선이 움직인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문 앞에도 혈액은 선연하게 괴어있었고, 도저히 발을 옮길 용기가 나지 않아선, 망연히 갈색 문을 바라본다.
질 나쁜 장난 같다고, 카네토鉄人 형...... 그런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
야쿠와 아토무八鍬核는 안경을 벗었다. 금속 재질의 검고 둥근 테. 그리 오래 사용한 안경은 아니었다. 겨우 일이 년 되었을까...... 암벽에서 실수로 손목을 접질렀을 때 바꾸었으니 아마 적확할 것이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두 눈두덩을 가볍게 누른다. 오늘 따라 일이 많다. 아니, 단순히 많다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월요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영 도움이 되지 않는 사고만이 느릿하게 공회전했다.
외부 연구원이 프로젝트에 참가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제 와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필요한 결과값이며 수치는 이미 얻어냈다. 남은 건 재미없는 연산 과정 뿐. 새로 온다는 연구원은 현재 상황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왜 굳이 참여한다고 한 걸까. 팀장이 상황도 얘기 안하고 낚아올 사람은 아닌데.
눈이 여전히 뻐근하다. 커피라도 한 잔 할까...... 탕비실은 바로 옆 방이다.
커피가 말라붙은 머그잔을 들었다. 제 책상에서 들고 온 잔이었다. 곰팡이가 생기지만 않으면 건강에 큰 위협은 없다. 그것이 그의 신조였다. 정수기 물로 딱 한 번 헹구곤 커피메이커의 주전자를 든다. 아침엔 분명 가득 차 있었는데, 지금은 반도 안 남았군. 그만큼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거겠지. 어쩌면 지겨운 단순 노동의 반증일지도 모르겠으나.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있나. 그의 팀은 복도 끝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지리 조건 상 좋지 않은 방임이 분명했다. 엘리베이터는 복도 반대 쪽 끝에 두 대. 계단은 복도 중간에 하나. 화장실은 엘리베이터 맞은 편. 겨우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게 탕비실 하나 뿐이라니. 갑자기 이직이 간절했다.
탕비실 문지방을 밟자 발소리의 주인과 마주쳤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나이는 그보다 좀 많을까. 멍하게 생긴 눈꼬리가 자신과 퍽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개발 3팀입니까?"
무감정한 목소리는 기계음을 연상시킨다. 키 차이로 보면 분명 내가 내려다 보는 포지션인데, 어째서 이렇게 압도당하는지.
과거의 일이 뭉근하게 피어올랐다.
"아, 예."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해요."
간단한 자기소개였다. 뒷말은 당신 책상에서 들어. 그런 내용이 생략된 듯한 담화였다. 꽤나 일방적이다...... 야쿠와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무실에서 남은 소개를 들었다. 한국인이라고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라 잠시 사고회로가 멈췄다. 일본어가 그렇게 유창할 수 있나. 일본에서 산 적이 있었나. 그런 의문을 품고 있으니 동료가 비슷한 요지의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아니오. 20년 전에 프로젝트 차 세 달 정도 머무른 적이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살아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핵심 자료는 모두 수집된 이 시점에 저희 프로젝트에 참여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다른 동료가 질문했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의 얼굴에 미묘한 근육의 움직임이 있었다. 자료의 해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 대답을 했다. 영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옆 자리는 동료가 퇴사한 이후 쭉 빈 자리였다. 그리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동료였는데, 이직을 한다고 했었나. 아마 그런 이유로 퇴사했었을 테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만큼 무의미한 인간관계였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별 말 없이 옆 자리에 와 앉았다. 귀를 덮는 단발은 저와 같은 검은색. 가까이서 보니 푸석한 기가 역력하다. 특별히 관리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돌연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제 시선을 느낀 건지도 모른다.
"이름이?"
흐릿한 동공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검고 깊은 눈동자였을 터인데.
"야쿠와 아토무라고 합니다. 아까 뵈었죠?"
"재밌는 이름이네요."
"많이 듣습니다."
그런 실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딱히 의미 있는 대화는 아니군. 애초에 의미 있는 대화란 뭘까...... 살면서 그런 대화를 해 본 적이 있었나. 반사적으로 적당한 대답을 뱉는 자기 자신을 자각했다. 적은 정보값을 싣은 대답이었다. 가벼운 랠리와 비슷하다.
아까의 일방적인 모습과는 또 다른 얼굴이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성 연구원. 이런 사람이라면 옆 자리라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평범한 인상. 복도에서 보였던 모습이 실 성격이라도, 이런 겉치레라면 잘 지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라이덴 카네토雷電鉄人라고, 그보다 세 살 많은 같은 과 선배가 있었다. 학년은 두 칸 차이가 났다. 일 년 휴학을 했어. 여행을 했지. 그렇게 얼버무리곤 했는데, 그 말의 진위여부는 끝끝내 알지 못했다. 그의 직감은 라이덴의 말이 거짓이라고 했다. 저런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게 뭐가 있어, 싶었지만 선배의 표정은 명백하게 흔들리고 있던 탓이다.
숨겨야 할 이유가 있었겠지. 그 얼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솔직히 말하면 애정과도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니, 애정의 차원을 넘어, 라이덴은 지극히 불안정한 사내였다. 곁에서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분명 어딘가의 선을 넘고야 말 것이다. 그런 확신에 가까운 예상이 들 정도로 아슬아슬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옆에 있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슬프게도 라이덴은 실로 고독한 축에 속했다. 그는, 입학한 이래로 라이덴이 다른 이와 어울리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다른 선배한테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이라는 것이 쟤는 원래 그렇다, 라니. 대학이라는 곳은 개인주의가 이리도 만연한 사회인가.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사람이랑 대체 어떻게 친해졌더라. 분명 우연한 계기였을 테다. 하지만 베스트프렌드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그 계기라는 것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술 덕분이었던 것 같은데. 라이덴이 술자리에 나오는 타입은 아니지 않나. 그런 애매모호한 기억만이 뇌리를 부유한다.
라이덴은 그리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얀 피부는 그가 활동적인 성격이 아님을 대변하고 있었다. 허나 라이덴의 신념 하나는 독특한 편이었는데, 그는 선배의 기묘한 신념에 매료되고 만 것이었다.
허무주의, 그 중에서도 페시미즘. 그는 철학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한 분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라이덴이 허무를 추종하는 비관론자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카쿠 쨩, 인간이란 본래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유기물이란다. 너도 천체물리학 전공이면 알 테지. 이 우주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는 걸. 우리는 결국 무한에 가까운 공허 안에서 살고 있단다. 먼지 따위가 발버둥 쳐 봐야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광활한 어둠에서…… 어쩜 이렇게 허무할 수 있는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애초에 우주는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걸까…… 고대에는 철학자 이퀄 과학자였대지. 그 마음을 천 번 이해하고도 남겠어. 그렇지 않니? 카쿠 쨩.
라이덴은 그를 카쿠 쨩이라고 불렀다. 이름이 아토무이기 때문에, 카쿠 쨩이라고. 꽤나 직관적인 네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우주소년 아톰이라고 불리는 것보단 훨씬 나은 별명임이 틀림없었다.
천문학자들이 우울증에 잘 걸린다는 가십은 들은 적 있다. 무한한 우주 안에서 겨우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살한 천문학자의 이야기도 들었다. 아토무는 그들을 이해했다.
사람은 본래 1인칭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주의 중심은 그들 각각인 것이다. 허나 우주는 코웃음을 친다. 평범한 사람은 태양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대단히 큰 숫자로 이루어진 킬로미터를 보아도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지각할 수 없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해하고 만다. 태양계와 같은 행성계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깨닫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드넓은 우주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한 의문과 공포가 혼재하며 부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 지점에서 경외감을 느낀다면 성공이다. 경외감을 느낀 이는 분명 좋은 천문학자로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몇몇은 공포심에 압도된다. 깜깜한 밤하늘마저 무한히 공허한 암흑으로 느껴진다. 중력에 발을 잡히고 있어도 공허 저 너머로 추락할 것만 같다. 우주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순간, 도망칠 곳은 연옥 뿐이라.
라이덴 카네토는 추락 직전의 천문학도로 보였다. 어쩌면 그의 아슬아슬함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아토무는 본래 그런 이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부끄러운 사실임에 틀림없다.
우울의 프레임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허무감이 베일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아토무는 그에게서 순례자의 얼굴을 보았다.
라이덴은 그를 아꼈다. 얼마 안 되는 인간관계에서 꽤나 큰 부분을 차지했었는 지도 모른다. 자취방 보조 열쇠까지 건넨 걸 보면 분명했다. 어차피 드나들 지인도 없으니까, 심심하면 언제든 놀러오렴. 다정한 어조였다.
그 즈음 뒤숭숭한 소문이 학교 안을 맴돌았다. 요즘 학교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토막살인사건의 범인이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근거 없는 가십이었다. 아니, 실제로 경찰을 자처하는 사람이 캠퍼스 안으로 들어왔을 정도니 신빙성은 어느 정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아토무는 그 뜬소문을 믿지 않았다. 소문 퍼뜨리기 좋아하는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거짓말이겠지.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곤 넘겼다.
라이덴 역시 소문을 들은 듯 했다. 학생식당에서 마주앉아 같이 점심을 먹을 때의 일이었다.
"카쿠 쨩. 소문 들었니? 토막살인사건 범인이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소문."
밥 먹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의대생들에게는 일상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시한 생각을 했다. 아토무와 라이덴은 천문학 전공이다.
"네. 정말이면 오싹하겠네요. 어쩌면 광장 분수대에 교수 머리가 전시될 지도 모르고."
"아...... 그건 좀 재미있네."
"재미있어요?"
오늘의 정식을 우물대며 물었다. 고등어 구이에 된장국이라는 조촐한 식단이다. 라이덴은 언제나 오야코동을 주문했다. 그는 닭고기를 좋아했다.
"단두대로 처형된 왕 같아서 재미있지 않니."
"대학의 왕은 총장 아닌가."
"총장 목이 잘렸으면 좋겠니?"
"그건 아니에요."
"그렇구나."
라이덴은 빙글 웃었다. 올라간 편인 눈꼬리가 살풋 휘었다.
"얼마 전엔 잘린 오른손이 대학 정문에 있었지."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몸을 자르고 보여주는 심리는 뭐라고 생각하니?"
된장국을 마셨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간이 세다. 국그릇을 놓는 동시에 무심코 물잔을 들었다.
"자기과시 아닌가요? 벌써 몇 번이나 그랬으니까. 경찰에 대한 도발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라이덴의 안경이 반짝였다. 우연찮게 천장의 형광등과 각도가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사람을 토막내는 이유가 뭘까...... 거기서부터 출발해야한다고 생각해."
역시 점심 먹으면서 할 얘기는 아니다. 아토무는 화상으로 본 잘린 손을 떠올리지 않도록 무던히 애써야 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만한 건 무게를 줄이기 위해. 시체를 운반하고 싶은데 너무 무거워서 옮길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몸을 조각냈다. 그치만 지금까지 발견된 토막은 손이나 발, 제일 큰 게 다리였지, 아마...... 겨우 그 정도 줄이려고 토막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네."
처음으로 생각난 게 저런 이유란 말인가. 새삼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고등어를 입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그럼 그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몸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빼내기 위해. 어쩌면 삼키다 목에 걸린 보석일 수도 있고. 팔에 꽉 맞는 팔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몸 안에 존재하는 혈액이나 뼈, 그 외 부산물이 목적일지도...... 왜, 예전에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장기를 빼 먹기도 하지 않았니. 이런 경우엔 취하고 남은 사람의 신체는 그저 쓰레기일 뿐......"
"......그, 선배."
"응?"
주변의 시선이 퍽 따가웠다. 점심시간의 학생식당이니 붐비는 것은 필연에 가까운데, 그런 인파의 한가운데서 사람을 토막내는 이야기를 하는 건...... 선배니까 가능하려나.
"다 먹었으면 나가서 커피라도 마셔요."
"응, 그래."
라이덴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선배가 떠올린 발상은, 뭐랄까......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데."
"카쿠 쨩, 다른 사람의 신체를 토막내는 사람은 이미 사회가 일컫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겠니."
"......그건 그렇지만."
"카쿠 쨩의 생각은?"
자리를 옮긴 곳은 학교 안 편의점 근처의 벤치. 붉은색을 머금은 나무엔 가을 티가 역력했다. 벌써 입학한 지 반 년이나 지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토무는 빨대를 물었다. 차가운 콜라가 입천장을 때렸다. 청량한 탄산이 혈관에 녹아드는 감각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범인은 자기과시욕이 높은 사람일 거예요. 선배 말마따나 이동에 방해가 되어 잘라냈다면 굳이 사람들이 잔뜩 드나드는 대학 정문에 놔둘 필요는 없잖아요. 몸 안의 무언가를 취하기 위해서 토막냈다고 해도 결론은 같고요."
"응, 그렇네."
캔커피 따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덴은 달달한 캔커피를 좋아했다.
"범인은 토막을 내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이런 해석이 보편적이지 않을까요? 보편적이랄까, 보통 토막살인자들은 그렇지 않나요. 특히나 지금 같은 연쇄살인이라면."
토막살인은 세 번 일어났다. 범인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몇 차례나 이어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차례대로 왼발, 오른다리, 오른손이 발견되었는데, DNA검사 결과 모두 다른 사람의 신체임이 확인되었다. 절단면의 생활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세 사람 전부 죽은 후 토막난 것으로 밝혀졌다.
하하, 산 채로 잘린 게 아니네. 다행인가. 라이덴은 연하게 웃는 얼굴로 그런 말을 했었다.
"글쎄. 그런 건 자료들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천문학 전공이잖니. 주변에 범죄학과 친구가 있으면 손쉽게 알 수 있을텐데."
그래도 카쿠 쨩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덧붙이곤 캔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으신 것 같은데요, 선배."
"카쿠 쨩 눈은 못 속이겠다니까."
"들어는 드리죠. 저, 선배가 토막살인범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어요?"
"하하, 농담이었으면 좋겠다."
서로 마주본 채 웃었다. 그 때였다. 라이덴의 어깨 너머로 수상한 그림자가 보인 것은. 왜 나무 뒤에 숨어있지? 이 쪽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범인은...... 사람을 죽이고 지독한 허무감을 느낀 게 아닐까."
"허무감이요?"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수상한 그림자를 응시했다. 상대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벤치에 놓아 둔 커피 컵을 들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분명 삼 초도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림자는 사라져 있었다.
......뭔갈 잘못 본 건가? 저쪽에 있는 동상을 사람으로 착각했나?
"사람을 너무 죽이고 싶어서 결국엔 죽였어. 죽이려고 이런저런 계획을 다 세웠을 테지. 죽이기 직전엔 분명 기대감과 고양감이 가득했을 거야...... 그런데 막상 죽여버리니 돌아오는 거라곤 생각했던 쾌감이 아니라 뭐야,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는 건가, 하는 허무감. 인간이란 대체 뭐야. 길고양이만도 못한 생물인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을 지도 몰라."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어딘가엔 있지 않을까...... 그렇지, 인간은 무언가를 죽이지 않고선 살아가지 못하는 생물이잖니."
"그건 어느 동물한테나 해당되는 이야기 아닌가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이건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 벤치 뒤에서 돌연 날아왔다. 퍽 듣기 좋은 중저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화들짝 고개를 돌리니 역시 모르는 얼굴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가오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라이덴 역시 당황스런 표정이다. 아는 사람이니, 시선으로 묻기에 아토무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식당에서 나오는데 재미있는 얘기가 들리길래 따라왔단다. 사람을 토막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좀 더 얘기해줬으면 하는데."
짙은 갈색의 코트를 걸친 중년 남자였다. 둥근 안경 너머의 매서운 눈초리는 아마 태생적인 특징인 듯 했다. 일자로 다문 입과의 시너지로 보아하니 날카로운 인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지 않을까. 나이는 40을 좀 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 교수님일까. 일단 아토무가 얼굴을 아는 교수는 아니었다.
누구세요, 라고 묻기도 전에 라이덴이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건 이게 다예요."
"사람을 죽였을 때의 허무감?"
"또...... 운반의 용이함을 위해서라든가, 부산물을 위해서라든가."
"으음, 괜찮은 생각인데. 혹시 범죄학과?"
"아뇨, 천문학."
"그래? 의외군."
남자는 턱을 짚은 채 고개를 주억였다.
"저기,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아토무의 말이었다.
"음, 뭐지?"
"누구세요?"
남자의 이름은 샤라쿠 나츠히코写楽夏彦. 사립 탐정이라고 했다. 이 근처에서 일어난 토막살인사건을 독자적으로 조사 중이라고도 했다. 우리 애들이 이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거든. 물론 그 애라면 순순히 당하지는 않을 듯 싶지만. 부모 마음이 원래 그런 거 아니겠니...... 갈색빛이 도는 검은 머리칼을 긁적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아토무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이라면, 원래는 의뢰를 받으시는 건가요."
라이덴이 평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절도부터 살인까지 웬만한 의뢰는 다 받는단다."
"드라마에서 보니까 탐정은 불륜 조사나 하고 다니던데요."
"우리 집안은 그런 건 안 해."
단정 짓는 말투였다. 탐정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있는 건가. 그런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으면 차라리 경찰에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소소한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너희, 그 사건에 관심이 있니?"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요. 아무래도 이것저것 소문이 많이 들리다 보니......"
아토무가 말끝을 흐렸다. 샤라쿠는 흐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럼 잘 됐구나. 하고 중얼댔다.
"혹시 나한테 정보를 공유해 줄 수 있을까? 이 학교 관계자가 아니다 보니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더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토막살인사건과 이 학교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아토무는 눈 앞의 남자에게 미묘한 경계심을 품었다. 상대 역시 그것을 눈치채었는지, 다시금 안개보다 흐릿한 미소를 품고는,
"보수라면 충분히 줄 수 있어."
"아이를 아끼시나 보네요."
"장차 내 뒤를 이을 아이니까. 어떠니? 흥미가 생기니?"
솔직히 말하자면, 흥미는 충분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이렇게 굴러들어올 줄이야. 이런 비일상이라면 충분히 즐길 가치가 있지 않나...... 그런 안일한 생각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라이덴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다.
"범인이 우리 학교 학생이기라도 한가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친하지 않은 상대에게 말꼬리를 올리는 일이 별로 없다.
"협약을 맺으면 적당한 선까지는 말해줄게."
"협약."
라이덴은 아토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맞받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요. 소문 정도면 공유하지 못할 것도 없죠."
흐릿했던 표정이 일변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빼어들었다. 다시 보니 제 머리칼과 퍽 어울리는 색의 코트다. 샤라쿠 나츠히코 탐정 사무소. 필기체로 그리 쓰여있는 밑에는 전화번호가 두 개. 위의 번호는 사무소 번호니 아래 번호로 연락하는 게 빠를 것이라 했다. 개인 휴대전화가 있는 건가.
"잘린 손의 손톱에 농학부 정원 흙이 끼어있었다. 꽤 미세해서 알아내기 어려웠다는군. 조사해봤더니 그 정원에서 혈액이 검출되었어. 물론, 손목 주인의 혈액과 일치했고."
농학과 건물은 자대 건물과 꽤 멀리 떨어져있다. 아토무도, 라이덴도 딱히 친분 있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때문에 그 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지 못한다. 나중에서야 안 거지만, 이름만 정원이지 사실상 밭에 가까운 실험장이었던 모양이다.
"단순히 피해자가 농학부 학생이라는 거 아닌가요."
"모르나? 농학부 정원은 보안이 엄중해. 등록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런가요."
"등록이라고 해 봤자 입구에서 이름과 소속을 적고 들어가는 것 뿐이지만. CCTV도 달려 있어서 그리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곳이 아냐."
"그런 것까지 밝혀졌나요? 학교 안에서 경찰이 돌아다니는 건 못 봤는데요."
아토무가 물었다. 샤라쿠는 미묘한 각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왜인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내가 독자적으로 밝혀낸 사실이지."
"......유능하시네요."
방금 자기 입으로 침입이 어렵다고 단언한 건 이걸 위함이었나.
"그럼 CCTV만 확인하면 끝나는 일 아닌가요? 입구에서 적은 이름으로 확인할 수도 있고."
"그래서 고민 중이란다. 어떻게 경비원들을 꼬드길까...... 하고."
탐정이란 고된 직업이구만. 경찰이랑 손을 잡을 생각은 없는 건가. 의기양양한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당분간은 혼자서 들쑤시고 다닐 생각인 듯 보였다.
"아무튼 새로운 얘기가 들리면 연락 줘."
탐정은 금세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어쩐지 여우에 홀린 기분이 들어선, 무심코 라이덴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일이네."
"그런가요?"
"우주광학 강의보단 재미있지 않니?"
"그건 그래요."
그래도, 아무리 재미있더라도, 천체관측보다는 덜 재미있을 테다...... 아토무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여전히 피곤한 몸을 부추기며 액정에 코를 박았다. 하지만 귀는 열려있는 터라. 팀원들의 이야기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스무스하게 들려왔다.
새로 온 연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그 분, 머리가 엄청 좋으시던데. 하나를 설명하면 백 가지를 이해하시는 것 같아. 맞아 맞아. 내가 그래서 몰래 찾아봤거든. 주 연구 분야 같은 거. 그래? 뭘 연구하시는 분인데? ......잘 모르겠어. 학위가 스무 개도 넘던데. 논문도 너무 많아. 연구 범위도 지나치게 넓어.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질 모르겠다니까. 힉, 그게 뭐야...... 교수직도 몇 개 있던데? 그런 사람이 여길 왜 와?!
듣고 있자니 괴담에 가까웠다. 연구의 망령이라도 되는 건가. 야쿠와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옆 자리의 중년 연구원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슬슬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어디에 있는 건지.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해야겠군. 건전한 의도는 아님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었다.
"다 맞는 말입니다."
담백한 어조로 그리 말하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눈앞의 연구원은 흐린 눈동자로 맑은 된장국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하고 되묻는 듯한 행동이다. 실제로 그는 달걀말이를 우물대며 대답했다.
"연구 그 자체에 관심이 있으신 겁니까?"
"뭐...... 그렇다고 할까......"
말하면서도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먹으면서 말하는 게 익숙한가.
"연구에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면 될까요...... 이것저것 잔뜩 손대고는 있지만 중대한 발견 같은 건 안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박사 학위가 수두룩하던데. 경제학이랑 민속학이랑 천문학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지. 그런 직설적인 물음을 내뱉지는 않았다.
"대단하시네요. 저는 이거 하나 연구하기도 벅찬데."
"하나만 팔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잠깐 대화가 끊겼다. 상대가 물컵을 든 탓이다.
"길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나갈 거니까."
"팀원들이 서운해 할 것 같은데요."
"벌써 다음 일정이 잡혀 있어요...... 유감입니다."
"다음 연구는 뭡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인공지능...... 딥 러닝 연구를 해보고 싶어서. 그 쪽으로 가 보려고 합니다."
전파천문 다음은 인공지능인가. 도통 교집합이 보이지 않는 장르다.
"연구 분야는 어떻게 정하십니까?"
"그냥, 적당히...... 재밌어 보이는 걸로 잡습니다."
"허."
차마 숨기지 못한 감탄사가 튀었다. 재밌어 보이니까 연구한다. 연구자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지만, 재능과 재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팀원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구나, 이 사람은 천재인 거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프로필이다. 그렇다면 재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간단하다. 교수직...... 강의 따위로 충당할 테다.
"야채 튀김이 식습니다. 빨리 들어요."
된장국을 마시며 말했다. 제 감탄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던 건가. 점심시간이니 점심에만 집중했던 건가.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어딜 가나 듣는 소립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어요. 누구도 경력에 신경쓰지 않는 직장이 있다면 좋을텐데, 하고."
"그런 직장이 있더라도 희태 씨 같은 경력이면 놀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새삼스럽지만 일본인에게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아무리 혀를 굴려봐도 히태가 최선이었다.
"그런가요......"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이 얼굴을 스쳤다. 알 수록 웃긴 사람이네. 속으로 중얼댔다.
제 앞에 놓인 야채 튀김은 눅눅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잘린 손의 주인을 찾았다.
손톱 밑의 흙으로 농학부 학생 내지 관계자라는 것을 알았고, 마침 농학부 2학년 남학생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름은 하야마 다케시葉山武. 실종 시기와 시신 일부(그러니까, 손.)의 사망추정시각이 정확히 일치했다. 가족의 양해를 얻고 그의 방에서 지문을 채취한 결과 잘린 손의 지문과 동일함이 밝혀졌다.
그럼 발이랑 다리의 주인은 아직 못 찾은 건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샤라쿠에게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발은 아마 노숙자 발 아닐까 싶은데. 발톱이 더러웠거든. 그래서 신원 확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도 몰라. 나름의 추리를 들으니 꽤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짐작가는 곳이 없다고도 했다.
새로운 소문 역시 돌았다. 실종 직전 하야마가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을 봤다, 라든가. 금전 관계에 얽힌 싸움이었다, 라든가. 상대는 남자였다. 아니다, 여자였다. 하여간 한 손으로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소문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왔다. 다들 남에게 관심이 많구나. 실없는 감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별로 쓸모 없어 보이는 소문들 밖에 없는데. 정말로 이런 것까지 말해드리면 되는 건가요?"
"응. 괜찮아. 분명 근거 없는 소문들도 있겠지만...... 보통 잔가지를 쳐내면 사실에 가깝게 세공되는 법이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라고 생각했다. 젠체 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아무튼 고마워. 보수는 나중에 만나서 줄게."
"보수까지 받을 일인가 싶네요."
"싫으니?"
"그건 아니지만."
요사이 천체망원경을 사느라 꽤 빈곤해있던 참이다. 상대가 전화를 끊는 것을 확인하곤, 아토무는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직 네 번째 부위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대대적으로 수사에 들어갔으니 몸을 사리는지도 모른다. 좀 웃기지 않나. 사람을 셋이나 죽였는데 몸을 사린다는 게...... 정확히 어떤 점에서 웃긴지는 아토무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라이덴은 오늘 강의가 없다. 아토무는 오전에만 강의가 있다. 그리고, 막 오전 강의가 끝난 참이다. 할 일도 없는데 카네토 형 집에나 가 볼까. 그라면 과제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일단 저보다 두 학년이나 높으니 뭐라도 아는 게 있지 않을까. 가방을 고쳐 매곤 대학 정문으로 향했다. 그의 집은 대학가 근처 골목에 위치해 있다.
열쇠는 물론 가지고 있지만, 예의 상 초인종을 눌렀다. 단조로운 차임벨이 세 번 정도 울리자 인기척이 들렸다.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라이덴이 부스스한 얼굴로 아토무를 내려다 본다. 아, 카쿠 쨩이구나. 들어와. 살짝 꼬인 발음으로 후배를 맞이했다.
현관에 들어서면 우선 보이는 것은 모델하우스 같은 거실 겸 주방. 오늘도 여전히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눈에 띄는 가구라곤 TV 정도일까. 이불 한 채와 베개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화장실 겸 욕실 옆에는 침대방이 있다. 라이덴은 침대보단 바닥에서 자는 게 편하다고 했다. 그럼 굳이 침대를 놔둘 필요가 없지 않나요. 언젠가 그렇게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라는 것이, 손님용이야, 라고. 그거 농담이죠? 라는 물음에는 웃음으로 답했다.
"오늘 공강이시잖아요? 술이라도 먹을까요."
"냉장고에 맥주 있어...... 꺼내 마셔도 돼."
라이덴은 비틀대며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아직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아토무는 캔맥주의 탭에 손가락을 걸었다. 상쾌한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
"과제도 좀 도와주셨음 좋겠는데."
"나, 아직 자는 중이야."
"어제 늦게 주무셨어요?"
"으응...... 과제."
"그럼 기다릴게요."
팔자 좋은 소리를 하며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오늘은 다른 약속이 없다. 꽤나 평화로운 날에 속할 것이다. 자정까지 과제를 다 끝낸다면 내일 역시 나쁘지 않은 날이 될 것이고. 아토무는 제 옆에서 잠든 라이덴을 내려다 보았다. 내일은 같이 플라네타륨이라도 가자고 할까...... 꽤 멋진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후 세 시가 넘어서 눈을 떴다. 맥주 한 캔과 TV로 시간을 때우던 아토무는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카네토 형도 맥주 한 잔 해요. 아니, 괜찮아. 사실 어제 많이 마셨거든. 웃으면서 그리 말하니 더 권할 수 있을 리 없다.
사실 과제는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걸 구실로 라이덴의 집에 갈 수 있다면 그저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라이덴의 도움을 받으니 두 시간 만에 끝날 과제가 순식간에 끝났다. 역시 3학년은 다르구나. 존경의 눈초리를 보내니 라이덴은 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운 걸까. 모르는 게 있다면 나중에도 물어보러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토무는 밤 열 시 즈음 그의 집을 뒤로 했다. 맥주를 두 캔 더 마시니 슬슬 시야에 아지랑이가 끼기 시작한다. 아토무가 세를 낸 방은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었다. 걷지 못할 정도로 취한 건 아니니 굳이 택시를 잡지는 않아도 될 거라고 여겼다. 애초에 그럴 돈도 없었지만.
이리저리 비틀대며 방문을 여니 분침이 6을 가리키고 있다. 10분이나 늦었네. 침대 매트리스가 턱을 감싸는 걸 느끼며, 아토무는 의식을 잃었다.
"와아, 샤라쿠 탐정. 밥먹듯이 드나들면 눈총이 따갑지 않나?"
"경찰수첩이라면 복제했는데."
코트 안주머니에서 꺼내든 수첩은 경찰의 것과 모양이 똑 닮았다. 아마 실력 좋은 업자에게 맡긴 복제품이겠지. 키타야마 신타로北山真太郎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목 잘린 대학생은 어떻게 됐나?"
"어어, 방금 사법해부가 끝난 참이지. 그 친구가 궁금했어?"
"알면서 왜 물어 봐?"
"퉁명스럽기는. 사회생활이라는 걸 몰라?"
웃는 낯의 부검의는 제 옆에 쌓여있던 서류더미를 뒤적였다. 그의 책상은 복잡하다 못해 난잡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서류에 묻혀 있었다. 과연 저기서 원하는 문서를 찾을 수 있을까. 샤라쿠는 몇 번이고 의문을 가졌지만, 그럴 때마다 키타야마는 목표를 멋지게 찾아내곤 했다.
"아아, 찾았다. 이름이 라이덴 카네토. 되게 번쩍번쩍한 이름이네."
"그런 사족은 필요없어."
샤라쿠가 서류를 낚아챘다. 라이덴 카네토의 부검 결과서였다.
"이 학생한테 정보 교환을 부탁했었지."
난잡한 책상에 기대선 채 말을 이었다. 눈은 결과서를 빠르게 훑고 있다.
"어쩐지 멍해 보이는 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그래서 자살을 했나."
"약을 놨나?"
"으흠. 테트로도톡신."
"목이 잘렸는데 자살일 리 없지. 독살하고 목을 잘랐다, 이게 답이다. 멍청씨."
"거참, 말씨 한번. 가만 보면 조력자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키타야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머리가 잘린 단면에 생활 반응이 없었다. 부검으로 그의 몸에 테트로도톡신이 주입되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잘린 머리와 남은 몸체에 바늘 자국 따위의 주입 흔적이 없는 사실로 보아, 절단된 부분에 주입 흔적이 남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그의 독살을 감추기 위해 머리를 절단하였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목이 잘린 부자연스러운 사망이라면 필시 형사 사건으로 넘어갈 것이고, 형사 사건은 반드시 부검을 하기 때문에. 부검에서 독살이 밝혀지지 않을 리 없다.
목을 절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간단했다.
라이덴 카네토의 이마에 4가 새겨져 있었다.
절단된 몸체들에 아라비아 숫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경찰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모방범 방지를 위한 대책이었다. 세 번째, 잘린 손의 경우는 목격자가 많았으나, 3이 새겨진 손바닥이 바닥을 짚고 있었기에 정보가 흘러나가는 일은 없었다.
이건 연쇄 토막살인사건의 일부로 생각해도 무방한가. 샤라쿠가 생각했다.
"왜 몸도 머리도 집에 있었을까나. 이전 사건들은 전부 야외에 버려뒀었는데. 흐응, 전시라고 하는 편이 나으려나."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하지만 사실이지. 왜 갑자기 머리통을 잘랐을까~요. 범인 친구, 대범해졌다구."
확실히 범인의 행동에는 규칙성이 없다. 왼발, 오른다리, 오른손, 그리고 머리. 이렇다 할 로직이 보이지 않는다. 오른다리는 발까지 붙어있었으니 오른발이라고 보아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남은 신체는 왼손인데.
내키는 대로 석둑석둑 잘라내는 건가? 그리 생각하니 퍽 불쾌해졌다.
"뭔가 떠오르는 해답이라도 있으신가? 샤라쿠 탐정."
"똑바로 알고 있으라고. 나는 사건을 해결하려고 뛰어든 게 아냐."
"해결하지 않으면 네 자식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헛소리 하지 마. 입을 그냥 닫고 있는 편이 좋겠군."
키타야마가 혀를 빼물었다. 하여간 유치한 인간이다.
"다음에 올 땐 밥이라도 사. 무상으로 정보를 빼돌려주는 게 얼마나 쫄리는 일인 줄 알아?"
"너도 목이 잘리면 밥 정도는 사 주지."
"히야, 식도가 고스란히 보이겠네. 꿀꺽꿀꺽, 장관일 거야."
그는 유능한 부검의다. 그러니 당분간 잘릴 일은 없겠지. 샤라쿠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인사를 남기고, 탐정은 서류에 파묻힌 부검의를 뒤로 했다.
주인을 잃은 집은 싸늘했다. 가을에 난방을 켜지 않았으니 당연한 이치겠으나.
허리를 숙여 자물쇠를 확인하니, 기본적으로 열쇠형 자물쇠지만 문이 닫히면 스스로 잠기는 형태였다. 즉, 열쇠가 없으면 출입하지 못한다. 열쇠는 야쿠와 아토무가 가진 것 하나와 라이덴 카네토가 가진 것 하나. 두 개가 존재했다.
현관문에 쳐 진 경찰 테이프를 가볍게 뛰어넘곤 입실했다.
대학생 한 명이 살기에는 적당히 넓은 집이라는 감상이 우선적으로 들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것이 거실. 가구에는 취미가 없는지 꽤나 살풍경하다. 가로로 긴 수납장 위에 올려진 TV. 그 맞은 편 벽, 즉 현관 쪽 벽에는 잘 개켜진 이불 한 채와 베개가 하나. 거실 왼쪽에는 거실과 구분되지 않은 조그만 부엌이 있다. 부엌이라고 해 봤자 잡다한 요리기구, 테이블과 의자, 냉장고가 끝이다.
거실과 부엌의 경계 즈음에 방문이 하나 있다. 저곳이 아마 몸체가 누워있던 침대방. 화장실은 침대방 오른쪽에 위치했다. 욕실과 일체형이다. 샤라쿠는 침대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침대방, 이라는 네이밍에 참으로 걸맞은 방이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적당한 크기의 1인용 침대와 그 옆에 딸린 창문 뿐. 크레센트 자물쇠가 달린 창은 성인이 드나들기에도 충분히 커 보였다. 창문 너머로 도보가 보인다. 그의 방은 1층이다. 사건 발생 당시 이 창문은 잠겨있었다고 했다.
침대 시트는 혈액으로 젖어 기이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라이덴의 몸체는 바로 이 위에 놓여있었다.
최초 발견자, 야쿠와 아토무는 사건 전날 밤 열 시까지 피해자와 술을 마셨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열 시 반. 보통 도보로 이십 분이 걸린다고 하니 그의 음주 상태를 고려하면 이상하지 않다.
야쿠와 아토무는 아홉 시 즈음 일어나 라이덴 카네토의 집에 자신의 과제물을 두고 온 것을 깨닫는다. 집을 나선 게 아홉 시 반. 급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 도착까지 십오 분 정도 소요되었다.
수중에 라이덴의 집 열쇠가 있었지만 예의 상 초인종을 먼저 누른다. 하지만 아무리 눌러도 라이덴이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잠이 옅은 편이라 초인종을 한 번만 눌러도 쉽게 깨는 편이라고, 야쿠와 아토무가 증언했다. 의아함을 느낀 야쿠와는 가지고 있던 집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간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라이덴의 잘린 머리와 마주친 야쿠와는 패닉에 빠졌다. 그의 토사물이 현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현실감이 급격히 사라진 야쿠와는 핏자국이 이어져 있는 침대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라이덴의 남은 몸체와 재회했다. 이후 충격으로 기절.
최초 신고자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던 이웃 주민이었다. 열린 문 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기에 들여다 보았더니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다.
라이덴 카네토가 소유한 열쇠는 그가 입고 있던 바지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다.
머리를 거실에 둔 이유는 무엇인가. 샤라쿠가 거실로 발을 돌리며 생각했다. 일련의 토막살인사건은 다들 야외에 전시되어 있지 않았나. 전시라는 단어 선정이 별로긴 하지만, 아무튼 실내에 토막을 내던져두진 않았다.
샤라쿠는 혈흔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몇 분 정도 머리를 굴렸다. 대단히 간단한 이야기이긴 하다...... 제가 제시한 답이 정확하다면.
현재 연쇄토막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부상한 인물은, 유감스럽지만 없다. 경찰이 이리도 무능한 조직이었나. 방법은 알았지만 인물상을 떠올리기 어렵다. 경찰 측에서 뭐라도 실마리를 잡으면 좋을텐데. 키타야마는 꽤 충실한 정보원이니 새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는 즉시 그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기다리는 수 밖에. 샤라쿠는 이미 사건 두 개를 수임했다. 자식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의뢰도 중요한 법이다. 게다가 전자는 간접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에 총력을 기울일 여유는 안타깝지만 없었다.
탐정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경찰 테이프를 뛰어넘었다.
문득 그 사건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터였다.
선배의 잘린 머리는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며 자수한 인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연쇄살인은 네 건으로 추정되던 시점에서 끝이 났다.
나는 라이덴 카네토를 죽이지 않았다. 자수한 범인은 그렇게 주장했다. 죽인 것은 세 명 뿐이다. 그의 주장을 들은 경찰은 곧바로 후속 수사에 착수했다. 살인에 사용된 흉기는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나머지 몸체는 그가 지시한 장소에 묻혀있었다. DNA 검사 결과 피해자들의 시신임이 확인되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주장은 무산되었다. 라이덴의 시신이 발견된 시간, 라이덴의 집 근처에서 목격 증언이 나온 탓이다. 그는 법정에서까지 4번째 사건의 무고함을 외쳤다고 한다.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간이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목 아래가 없는 머리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정신에 착란이 온 것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홀리듯이 침대방으로 향하니 선배의 몸통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목 위로는 아무 것도 없었으나.
분명 자살이었을 테다.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아직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분명 스스로 목을 잘라내었을 테다...... 야쿠와는 그리 굳게 믿고 있었다. 아집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믿음이었다.
점심 메뉴를 고르기도 귀찮은 날이 있다. 야쿠와는 별 고민 없이 사내 식당을 택했다. 지하에 위치한 터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편이 빠르지만, 점심시간의 승강기는 당연하게도 인산인해였기에 계단으로 발을 돌렸다.
키오스크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몇 있었다. 꽤나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희태 씨?"
"아, 야쿠와 씨."
여전히 멍한 눈이다. 희태 씨 같은 사람도 고민할 때가 있군요.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자 비슬비슬 웃음을 머금었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건 그렇지만요."
몇 분 정도 같이 상의한 결과, 오야코동으로 통일하기로 했다.
테이블 너머의 한국인은 무슨 음식이라도 잘 먹는 듯 보였다. 이제까지 같이 한 점심이 다섯 끼는 넘을텐데. 그가 음식을 꺼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한국...... 매운 음식을 많이 먹는 나라 아닌가. 일차원적인 감상을 떠올렸다.
"오야코동은 너무 직설적인 네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물대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도 발음이 뭉개지는 일은 없었다.
"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딱히 대체할 단어는 생각나지 않네요...... 치킨에그동은 너무 사대주의적이지 않습니까."
"치킨마요동은 있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치킨에그동이 낫지 않을까요?"
점심식사에 걸맞은 시시한 대화가 이어졌다. 적어도 살인사건 이야기보다는 훨씬 걸맞았다.
며칠 간 품고 있었던 미약한 기대. 그런 것을 점심식사 자리에서 털어놓을 수는 없다.
야쿠와는 조각조각 잘린 닭의 몸체를 내려다 보았다.
사내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인산인해였던 탓이다. 이번 주말에는 클라이밍이라도 할까, 생각하던 참에 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동행 중이던 희태였다.
"야쿠와 씨."
"예?"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십니까?"
심장이 요동쳤다. 정곡을 찌르는 물음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면, 잠깐 할 얘기가 있다고 둘러대곤 탕비실로 안내할 예정이었는데. 천재는 다르다는 건가...... 나름 포커페이스라는 소리도 자주 듣는데......
"아...... 예."
"탕비실에는 사람이 별로 없더군요."
"그럼 그 쪽으로 갈까요."
어디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건지. 야쿠와는 마른 침을 삼켰다.
탕비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탕비실이라고 해 봤자, 있는 거라곤 맛없는 원두커피와 싸구려 당분 뿐. 이 근처엔 맛이 괜찮은 카페며 베이커리가 수두룩하다. 굳이 탕비실에서 커피 타임을 가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리 바쁜 시기도 아니니 더욱이 그러하고.
문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착석했다. 싸구려 의자가 끽끽 소리를 냈다.
"희태 씨가 천재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래 보이기도 하고요."
"뭐...... 제 입으로 단언하기는 부끄러운 말이네요."
"그래서, 희태 씨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무슨 도움이요?"
"이십 년 전 살인사건인데요...... 제가 최초 발견자이기도 했었고, 영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서."
"살인사건?"
어조는 높아졌지만 얼굴 근육은 멀쩡했다.
"예. 혹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듣기만 하는 거라면 강아지도 할 수 있지요."
"그럼, 듣고 떠오른 생각을 이야기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별 영양가는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괜찮습니다."
야쿠와는 라이덴의 죽음을 입에 담았다. 마지막으로 그에 대해 이야기 했던 게 언제였더라. 경찰 조사 때였나. 아니면, 조촐한 장례식 때였나.
그의 장례는 삼촌이 맡아 주었다. 부모님은 라이덴이 어렸을 때 사고로 돌아가셨고, 라이덴을 기른 조부모님마저 얼마 전 귀적에 오르셨다고 했다...... 그래, 그는 이상할 정도로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외동이라는 사실만 넌지시 흘리지 않았던가.
그에게 가까운 가족이 남아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가까운 친구로는 부족했던 걸까. 그의 파괴적인 허무 성향은 도대체 어디에 기반했던 걸까. 이미 당사자는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다. 아토무는 견디기 어려운 허무를 짊어졌다. 허무의 전염? 아니, 차라리 상속이라고 부르는 편이 훨씬 어울리는 현상임에 틀림없었다.
일렁이는 연기 너머의 영정. 학생증 사진의 라이덴 카네토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스러질 것만 같은 미소. 그 입가에 손을 올리니, 표정이 변화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샤라쿠 나츠히코 역시 장례식에 얼굴을 비췄다. 검은 정장 차림의 탐정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별로 없군. 중얼거리듯 말하며 쓰게 웃던 그의 얼굴을 기억한다. 아토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정보를 흘려달라고 해서, 라이덴이 범인의 타겟이 되었다...... 따위의 진실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에.
범인이 자수했어.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아니요, 사람은 셋 밖에 죽지 않았어요. 카네토 형은 자살한 거예요...... 탐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게 무슨 소리지? 범인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자살이라는 말은 안 했다만. 아토무는 흐린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카네토 형은 항상 죽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요, 어떻게든 목을 잘라서 자살한 게 아닐까? 그런 거예요. 카네토 형......
탐정은 대단히 쓰린 표정을 지었다. 아토무를 안타까워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검은 정장의 샤라쿠는 그의 손을 잡고, 부디 죽지 말아. 그런 말을 속삭였다.
제 손을 감싸던 실크 장갑의 부드러움. 야쿠와 아토무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점심시간은 아직도 십 분 이상이 남았다. 눈 앞의 천재는 멍한 눈으로 줄곧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희태가 커피를 마시려고 팔을 드는 때면,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라기 일쑤였다.
"라이덴의 죽음은 연쇄토막살인의 일부로 인정된 거죠?"
"완결된 형태만 보면 그렇습니다."
"뭐...... 셋을 죽이든 넷을 죽이든 사형일 테니...... 범인 입장에선 딱히 메리트가 없지요."
"......"
"무슨 답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가... 라이덴 카네토가, 어떻게 자살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 어떻게 목을 잘라서 자살했는지?"
희태는 묘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미지근한 커피를 한 번 입에 대고는, 깊고 검어진 눈동자로 상대를 주시한다.
"혼자서 그런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단언하는 말투였다. 야쿠와는 입꼬리를 떨었다.
"야쿠와 씨의 묘사만 듣자면, 그의 집은 상당히... 텅 비지 않았습니까. 사람의 목은 의외로 튼튼하거든요...... 제법 큰 동력이 필요했을 것인데. 그의 집에는 동력원으로 예상되는 물건이 전혀 보이지 않아."
1층이니 위치에너지를 사용하기도 곤란했을 것이다.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럼, 그는 역시...... 살해당한 것이 맞다?"
"야쿠와 씨의 이야기만으로는 정답을 유추하기 곤란합니다...... 그의 몸에 주사된 테트로도톡신을 그 자신이 구했는지, 범인이 구했는지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선배는......"
손을 들어 야쿠와의 반박을 제지했다. 이런 간단한 행동에도 말문이 막힐 수 있나. 식은땀이 날 것만 같은 감각이다.
"하지만 심증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라이덴 카네토의 머리는 왜 거실에 있었나, 하는 것 말이죠."
"그게 그의 자살을 뒷받침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드릴까요? 그의 집에는 목을 자를 수 있는 도구가 없었습니다... 외부에서 가져온 흔적도 없었고요. 그렇다면 목을 자르고 이동하는 행위는 대단히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겠죠."
어째 퉁명스러움이 묻어나는 대답이었다.
"그럼......"
"그는 독으로 죽은 후 목이 잘렸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 혼자서 자신의 머리를 자르는 행동은 불가능하다...... 이것도 꽤나 설득력 있는 사실이고요. 두 개를 조합하면 자연스럽게 보이는 해답이 있지 않습니까."
"......"
"자살이든 타살이든, 목을 자른 건 범인의 짓이 맞다는 겁니다...... 당신도 여기까진 눈치채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분명 야쿠와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차치해 두었고, 이 따위 것이 해답이 아니길 열망하고 있었다...... 카네토 형이 남에게 죽은 게 아니었으면 했다. 그리고......
"야쿠와 씨의 묘사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시신 발견 당시 그의 집은 밀실이었습니다. "
"서술자를 믿지 못하면 곤란한데요."
"그러니 믿고 있지 않습니까."
해설을 시작할 때 머금고 있었던 묘한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일자로 다문 입. 검고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가 이렇게 뚜렷한 이미지를 품은 사람이었던가.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인식했다.
"열쇠는 당신이 가진 것과 라이덴이 가진 것 두 개 뿐이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라이덴의 집에 들어왔을까요...... 아, 범행 이후에 나가는 건 별 문제가 안 됩니다. 문을 닫으면 알아서 잠기니까요."
"......맞습니다. 문은 분명히... 잠겨있었어요. 제가 열쇠로 문을 땄었으니까......"
"범인이 열쇠를 복제했다는 상상도 물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공을 들인 것 치곤 뒷마무리가 부실하죠...... 머리를 야외에 전시하지 않았으니까요. 왜 거실이어야 했을까요? 거실에는 창문도 없었습니다. 있는 거라곤...... TV와 수납장 정도인데."
야쿠와는 입을 다물었다. 축축한 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지에 손을 훔친다.
"그러니 머리를 거실에 둔 건...... 범인의 본 의도가 아니었던 겁니다."
"예?"
"범인은 도망치기 위해 머리를 던져놓은 거예요."
"도망......?"
"머리를 가지고 나가려던 와중에 야쿠와 씨가 들어와버렸으니까......"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테이블 너머의 천재는 야쿠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 환청이 들렸다. 텔레파시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버스럭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물론 모두 제 공상에 떠나지 않습니다만......"
검고 둥근 안경을 밀어올렸다. 야쿠와의 것보다 조금 두꺼운 테다.
"왜 머리를 거실에 둘 필요가 있었는가. 거실에 두면 무슨 이득이 있는가...... 현관으로 정직하게 들어오는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있지요. 현관에선 거실이 훤히 보였으니."
"그, 그렇다는 건......"
"보통 사람이라면 잘린 머리를 보고 어떤 행동을 할까요. 그냥 시체도 아니고 잘린 머리입니다...... 놀라서 도망친 다음에 신고를 하거나...... 하겠죠. 그 틈을 타 빠져나가려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저는 침대방으로......"
"범인은 화장실에 숨어있었던 거겠죠... 게다가 당신이 패닉상태였다면, 조그만 소리 정도는 들리지 않을 법도 하고."
결정적으로, 최초 신고자는 열린 문틈을 보고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당황한 범인이 문을 닫는 걸 잊었다고 하면, 혹은, 문 닫는 소리를 의식해 닫지 않았다고 하면, 아귀가 맞아 떨어지죠. 희태는 턱을 괴었다.
"이런 걸 경찰이 생각해내지 못했을 리 없죠...... 심증이 강화되던 와중에 수사망이 좁혀오는 걸 느낀 범인이 제 발로 자수했다.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범인은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앞에서 말한 복제 열쇠라든가...... 뭐, 열쇠를 따고 들어갈 수단은 많습니다. 이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어요."
말을 마친 희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더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나른한 목소리로 그리 묻는다.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결국 알 수 없겠군요."
"그 탐정이라는 사람이라면 판별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그럼 알 수 없지요."
"희태 씨."
"예."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등받이에서 등을 떼었다.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싸늘한 눈빛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그 사람한테 영향을 깊게 받은 모양이군요. 허무주의 신자인가?"
"요즘 들어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없다? 뭐든 허무하게 느껴진다, 라든가."
"잘 아시네요."
니코틴 한 모금이 절실했다. 제정신으로 눈 앞의 상대와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신병원에 가 보라는 권유는 듣지 않겠죠......"
"저는...... 제정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인간의 생에 이유를 붙이는 행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흠. 그렇다면 희태 씨는 뭘 위해 삶을 영위하고 계십니까?"
"뭘 위해?"
새까만 눈에 안광은 비치지 않았다. 빛조차 빨아들이는 검은색. 그래...... 그는 블랙홀과 닮은 눈을 하고 있다. 그 눈이 미소 지었다.
"저는 무언가를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다만, 어쩌다 보니, 몇 억분의 일의 확률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지금 숨을 쉬고 있을 뿐이죠."
무서운 어투였다.
"우리의 삶에는 이유도 목표도 정해진 방향도 없습니다.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진화에 마땅한 방향이 존재합니까? 목표가 존재합니까? 아니요, 진화에 존재하는 것은 외부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뿐입니다. 그 즉각적임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꽤 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희태는 잠깐 숨을 고르더니.
"결국 그런 겁니다. 삶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있다고 한들 정자와 난자의 수정... 겨우 그런 일차원적인 까닭 뿐이죠. 굳이 삶의 이유를 찾고 싶다면 과학보다는 종교 쪽으로 가는 것이...... 마음의 안정에 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그런 것에 열중해있으니 말이죠. 전생에 화를 많이 쌓았다던가...... 윤회라던가...... "
"..........그렇습니까."
야쿠와는 어쩐지 멍한 얼굴로 숨을 내몰았다. 우리의 삶에 이유란 없다? 그렇다면, 카네토 형은 틀리지 않았던 건가. 아니, 그는, 그래도...... 그는......
내가 이유가 될 수는 없었던 건가?
그 뒤의 행동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뇌에 뿌연 안개가 낀 느낌...... 그럼 다른 이들은 도대체 왜 살아가는 것인가...... 동물처럼 즉각적인 쾌락을 위해? 아니다, 무언가 괜찮은 이유가...... 하지만 천재는 그렇지 않다고 했고......
어딘가의 퓨즈가 내려갔다. 야쿠와는 흐린 눈으로...... 그들에게 묻자고, 그런 다짐을 했다.
"어디부터 들으셨습니까?"
"흐흐,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처음부터 들었다고 할까요? 꽤 재밌는 이야기라 쭉 들어버렸죠."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지 싶은데."
야쿠와가 탕비실을 나간 직후의 일이다. 파란 머리의 남자가 탕비실 문 뒤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목에 감긴 검은색 초커가 눈에 띈다면 띈다. 나이는 마흔을 좀 넘었을까. 나이와는 퍽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다.
신도 쥬조라는 이름을 쓰는 한국인 연구원이었다. 본격적인 연구원이라고 하기엔 부끄럽고, 본사에서 이름 뿐인 연구직을 맡고 있다고. 그래도 가끔은 드론으로 실험이라든가 하니까 연구원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 신도는 처진 눈으로 빙글빙글 웃었다.
연구소에 들러야 하는 출장 업무가 있었는데, 마침 경악스러운 경력의 한국인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 만나러 왔다고 했다.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한국인이 그리워서...... 희태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뭡니까?"
"일부러 숨기신 거예요?"
"일부러...... 그렇게 됩니까."
"자살이라고 말해 주는 편이 정신 건강에 낫지 않았을까요?"
"음."
희태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닌 것 같다. 파란 머리의 중년은 웃는 얼굴을 감췄다.
"어차피 탁상공론이잖아요. 자살인지 타살인지,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를 테면 이런 가능성도 있죠. 라이덴 카네토는 일찍이 범인과 만남을 가졌고, 독을 주사해 자살한 자신의 시신에서 목을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이러면 범인의 주장이 이해가 돼요. 죽이진 않고 자르기만 했으니까. 억울하겠지."
"그런 대답을 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적어도 야쿠와 씨는 편해지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자살이기 때문에."
"물론 그는 라이덴이 자살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쿠와 씨가 당신을 붙잡은 건 SOS 신호였어요. 몰랐다는 말은 하지 마시죠."
"하아."
희태는 신경질적으로 컵홀더를 만지작댔다.
"그는 이십 년 전에 망가지지 않았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잘린 머리를 눈 앞에서 봤습니다. 그의 죽음은 미제 사건과 비슷하게 완결되었고요. 결국,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관성으로만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건 허무주의의 세습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런 것까지 제가 알아야 합니까?"
"네. 말에는 힘이 있으니까요."
신도 쥬조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속눈썹이 긴, 처진 눈. 순해보이는 인상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다...... 희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무어라 반박할 기력도 없었다.
"삶에는 의미가 없다...... 의미를 찾는 건 미친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그게 희태 씨의 지론인가요?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는데요. 당신처럼 학문에 열중하는 사람이 그런 주장을 내걸 리 없어요."
"삶의 길을 찾기 위해 연구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한테는 연구야말로 삶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당신은 야쿠와 씨를 앞에 두고, 고의로 그런 주장을 펼쳤다...... 이게 맞는 얘기겠죠."
"그렇습니까."
"야쿠와 씨가 싫었습니까?"
"그의 사상이 싫었습니다."
"허무주의가 싫었던 겁니까?"
"아니...... 정해진 답을 이야기하라는 압박이 싫었습니다."
그리 말하곤 빙글 웃었다. 이래서야, 자수하는 범죄자 같군...... 모양이 빠지지 않나. 재미없는 생각이었다.
"저는 누군가의 구원자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연구가 누군가의 희망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단지 제 욕구를 위해 살아갈 뿐이죠."
"구원자라."
입 안에서 울리는 아련한 진동. 신도 쥬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야쿠와 씨는...... 제가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끌어올릴 수 없으니 바닥으로 떨어트려 버린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두렵지는 않으십니까?"
"무엇이?"
"당신의 미필적 고의가요."
"야쿠와 씨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대량 살육이라도 벌인다면...... 안타깝긴 하겠군요."
"그래요?"
신도 쥬조는 저를 스쳐지나갔던 야쿠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것은, 이미 광인의 빛을 띄고 있었다.
눈 앞의 학자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모른 척 하는 걸까.
그는 슬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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