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rta, L
입사부터 연애까지
“합격자 명단 봤어? 그거 진짜야?”
“진짜겠지. 미쳤네. 그 ‘엘 아디포라 헤스테레’가 신입이라니.”
갑작스러운 세니카의 죽음. 세니카가 남기고 간 아이, 란 벨르네피아의 수배 전단지. 뭐가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된 거지? 꼭 누군가 조작한 것 같잖아. 얼마 전부터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던 엘은 빠른 걸음으로 명예의 트럼프 본부로 향했다.
“수장님.”
“어서와요, 엘.”
“수장님, 저 퇴사합니다.”
“⋯.”
“여하단에 입단할 거예요. 명트에서 할 수 있는 게 이젠 없거든요.”
“엘은 언제나 파격적이군요.”
“네, 안녕히 개새요.”
엘은 오는 내내 쥐고 있던 사직서를 반 헤 벤젤 앞에 두고 그대로 미련 없이 건물을 빠져나왔다. 란이 수배자가 된 이상 명트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해 봤자 겨우 숨겨 주거나 경로 혼선이 끝이겠지. 나란히 걷는 게 아니라 앞서 나가야 해. 적어도 여하단에 들어가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지. 엘은 명예의 트럼프를 퇴사하기도 전에 먼저 올라왔던 여하단의 공개채용에 지원했었는데 오늘이 바로 합격 통보가 오는 날이었다. 통보 받고 퇴사한다고 할 걸 그랬나? 그냥 백수되면 어쩌지?
[안녕하세요. 여하단입니다. 지원해 주신 엘 아디포라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면접 결과, 합격되었음을 안내⋯⋯.]
됐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여하단에 입단해서 어떤 상황인지 확인하자. 아무리 생각해도 란의 죄명이 너무 수상하단 말이지. 성격이 나쁜 건 맞지만 창조주의 서재에서 뭘 훔치냐고. 절대 기억력을 가진 애가 그 자리에서 보고 기억하지, 왜 훔쳐? 시니즈가 그런 짓을 대체 왜 하겠냐고. 그냥 란이면 몰라도 세니카와 오랜 시간 함께 한 란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어.
엘은 입단 당일까지 자신은 오로지 소중한 친구와 주변인들을 지키기 위한 움직일 거라 굳게 믿었다. 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세니카의 안식을 위해서 행동할 거라 다짐했다. 아니, 했었다. 여하단의 여하단장을 만나기 전까지.
‘뭐지? 머리카락에 가려졌지만 저 미모⋯ 이 세상 외모가 아닌데?’
첫눈에 반한다. 이 문장만큼은 인생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첫눈에’로 시작되는 문장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200년 넘게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간 적이 없었고 눈에 찬 사람도 없었다. 한평생 가장 가까이서 봤던 사랑이 란과 세니카였기에 이런 이벤트 같은 사랑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게 운명이라는 건가?
우습게도 여하단장을 본 순간 엘은 여하단에 들어온 이유를 순식간에 망각했다. 그만큼 여하단장과의 첫만남은 강렬했었노라. 엘은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여하단의 단장이니 업무로 실적을 내면 관심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 설렁설렁 일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고쳐먹었다. 처음과 달리 진심으로 업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시키지도 않은 파일 정리를 하고, 시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냈다. 여하단장을 보기 위해 단장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기도 여러 번. 엘 본인은 모르겠지만 엘의 존재를 여하단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반 헤 벤젤에게 미리 듣기도 하였고, 그 유명한 ‘헤스테레’ 칭호를 받은 사람 아닌가. 주변을 하도 어슬렁거리기에 시선 몇 번 주었더니 단번에 눈빛이 반짝인다. 이런 노골적인 애정을 주는 사람이 얼마만이더라⋯. 그 애정이 부담스러워 멀리하였다. 이 삶도, 사랑도 여하단장에게는 낡고 오래된 것들이었다. 그와 반대로 엘에게는 새로운 것.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말단 신입에서 직급이 올라올수록 엘이 여하단장 곁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늘어갔다. 단장실에 출입하는 횟수 역시 처음에 비하면 상당히 늘었다.
“단장님, 오랜만이에요.”
“오전에 왔었잖아… 뭐가 오랜만이라는 거야.”
“아, 그랬나? 너무 보고 싶길래 오랜만에 보는 건 줄 알았어요.”
의자 등에 깊게 기댄 여하단장은 눈동자만 굴려 엘을 쳐다봤다. 표현의 방식을 바꾼 건지 엘은 이젠 아예 대놓고 ‘나 너 좋아하냐?’를 몸소 실행 중이었다. 차라리 조용히 주변을 맴돌 때가 좋았던 것 같은데. 누군가를 좋아하다는 건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만하라 말할 수도 없었다. 저러다 상처받을 텐데. 여하단장은 허공을 응시했다.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시작은 함께였는데 끝은 혼자였다. 행복했음에도 마지막엔 나의 연인은 괴로웠고 힘들어했었다. 몇 번의 이별 끝에 영원(永遠)은 없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이 불멸과 함께 할 영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 가서 일해.”
“보안팀 일이라면 다 끝냈어요. 부속실로 보고서도 올렸고요. 단장님 보는 일만 남아서 올라온 거예요.”
“그런 업무를 준 적이 없는데.”
“그럼 지금 주세요.”
아예 의자까지 끌고 와 여하단장 앞에 앉는 당돌함에 웃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ዠዐއፗޓ𖤰𐀸ꨍ.”
“지금 욕한 거죠?”
“계속 그러고 있을 거니?”
“지금 업무 중인데요?”
곁을 내주지 않으면서도 멀리 내치지 않는 건 엘의 표현에 익숙해졌다는 것. 함께 있으면 지루하지 않다는 것. 저 뻔뻔함과 당돌함에 아주 잠깐이지만 고뇌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엘 아디포라, 지금 이 거리를 유지해라. 나는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과 여하단장의 사이는 여하단장이 원했던 것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단장님, 현장에서 보안실장님이 폭주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걔는 현장직도 아닌데, 왜?”
“란 벨르네피아 목격 제보를 받고 출동했는데 근처에 있었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대치 중, 실장님 폭주했고, 란 벨르네피아는 도주했다고 해요.”
현재 통제불가로 판단되어 수감실로 강제 이동되었다고 합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는데 그 아이가 폭주를 했다고? 보고가 끝나자 여하단장은 수감실로 이동했다. 검은 오로라를 풍기며 수감실 중앙에 있는 사람. 엔피스테의 폭주로 인해 오른쪽 동공에서도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여즉 이 상태야?”
“지금은 잠잠한 상태지만 언제 달려들지 몰라요, 단장님.”
“고생했다. 위험하니 나가 있어.”
“네.”
단원이 나가자 여하단장은 엘에게 가까이 이동했다. 평소라면 단장님! 하며 달려올 아이가 멍허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
아무런 대답도 미동도 없는 엘을 여하단장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쳐다봤다.
“현장도 폭주도 모두 우연이라 말한다면 우연이 되겠지. 허나 나는 우연 같지가 않다. 네가 무리했을 거라 생각 하지 않아.”
“⋯.”
“나는 오늘 일로 네가 구설수에 오르지 않기를 바라. 란 벨르네피아 그자와 함께 언급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란 벨르네피아. 그 이름이 나오자 엘 주변의 검은 오로라가 빠르게 일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여하단장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엘의 그림자가 여하단장에게 쏘아지는 순간, 여하단장이 손을 뻗자 엘의 그림자가 여하단장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엘의 오른쪽 동공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주변에 남아 있던 그림자들도 점점 옅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정상화가 되자 엘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단, 장님?”
폭주가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주변엔 늘 아무도 없었다. 그랬는데 왜 당신은 내 앞에 있지?
“다행이다.”
“왜 여기, 아.”
마나의 고갈, 엔피스테의 무리로 인한 후유증으로 늘 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볼품없이 갈라지는 목소리에 엘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가다듬을 힘도 없어.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모른 척 넘어갈 것이다. 허나 반복된다면 너에게 물을 수밖에 없겠지.”
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도 엘이 일어나지 않자 여하단장은 엘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단장님 이거 수작이 아니고 진짜 힘이 없는 거예요.”
“의무실에 데려다 줄게. 기대.”
상황이 상황이지만 엘은 마음껏 여하단장의 품에 기댔다. 앞뒤로 아무런 상황, 설명 없이 이렇게 안겨 봤으면 좋겠다.
정신과 몸의 회복이 끝나자마자 엘은 단장실로 향했다. 똑똑.
“들어와.”
“단장님.”
“그 몰골로 여기까지 온 거니? 가서 더 쉬는 게 좋겠다.”
“무슨 뜻이에요?”
“뭘?”
“모른 척 넘어가준다는 거요.”
여하단장과 엘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단장실의 공기가 한순간에 무거워졌다. 여하단장은 한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입을 열었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단장님.”
“네가 수배범인 란 벨르네피아와 몰래 만났고 있다는 거? 그 아이를 도주시키기 위해 네가 스스로 폭주를 일으켰다는 거? 어떤 걸 말하는 것이냐?”
“⋯.”
“너의 폭주는 한번 시작되면 누군가 막지 않는 이상 멈추지 않는다 들었다. 엘, 너의 고유 마나이니 누구보다 잘 알겠지. 그런 불안정한 능력을 쓸 정도로 그자가 소중했을 것이고.”
역시 눈치 챘구나. 다 알았으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준다는 거였어. 여하단장의 의중을 파악했으면서도 엘은 계속해서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전 그냥 그 현장을 우연히 지나고 있었는데요.”
“⋯.”
“저는, 그러니까. 제 폭주에 대해서 모른 척해 주신다는 걸 물어본 거예요. 아시다피시 관리 대상인지라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엘은 여하단장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언제나 당당한 성격 때문일까? 엘은 거짓말에 약했다. 누구를 속이는 것보다 차라리 들이 박고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설득시키는 게 엘의 방법이었다. 단지 여하단장에게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직감이 말해 주었다. 최선의 방법은 거짓말이라고. 이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고. 여하단장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엘은 난생 처음으로 단장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너는 그저 그 현장을 지나가다 흉악한 수배범을 만난 단원들을 돕다 폭주한 거니까.”
여하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의 이마에 아홉의 식이 빛나기 시작했다.
“네.”
“네가 설명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이 사실을 지울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알게 돼. 허나 그게 지금은 아닌 것 같다.”
“네, 단장님.”
“그리고 너, 저녁마다 수감실로 내려와. 언제까지 폭주라는 이름으로 두기엔 너무 위험하구나.”
“알겠어요.”
“이만 가서 쉬어.”
엘은 그대로 단장실을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문 앞에서 의아함을 느꼈으나 별다른 행동 없이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엘이 나가자 여하단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아, 이게 무슨 감정이지. 그자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는 정성에 감격한 건가. 화가 난 건가. 아니면 부러운 건가. 그 애가 다칠 뻔한 게 속상한 건가. 뭐가 됐든 기분이 좋지는 않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엘은 자신의 방이 아닌 수감실로 향했다. 수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여하단장에게 엘은 다가갔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이 연습 반대예요. 만약 단장님을 다치게 한다면 진짜 속상할 거예요.”
엘의 말에 여하단장은 어이없다는 듯 슬핏 웃었다.
“왜 웃어요?”
“네 걱정이 아니라 내 걱정을 하는 게 미련하다 싶어서.”
“걱정한다고 해서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잖아요. 혹시라도 저 때문에 단장님이 다치게 된다면 제가 책임질 테니까 마음 놓으세요.”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곳은 내가 관리하는 곳이다. 네가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내게 영향이 오지 않아. 여하단장의 확고한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유 마나가 막 발현되었을 땐 그림자가 폭주하더라도 몸이 버티지 못해 그대로 쓰러지기를 반복했었다. 몸의 그릇이 어느 정도 단단해졌을 때는 주변을 초토화 시켰었고, 폭주를 스스로 억제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하다 억제 방법이 아닌 되려 자신이 원할 때 폭주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방법은 단순했다. 빛을 차단하여 엔피스테가 착각하도록 유도하면 되는 것이었다. 감각을 차단하고, 주변 모든 생명이 죽인다. 달의 그림자가 가득하도록, 엔피스테가 속아 그림자의 힘이 나오도록 유도하면 끝이다.
“주도권을 넘겨주지 마. 지금의 너는 통제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아니지 않으냐.”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면. 진즉 했겠지.”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목소리가 갈라졌다. 마나가 소모된다는 느낌은 언제 겪어도 엿같네. 달의 기운이 엘을 장악하기 위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와 달. 하늘 아래 살아 숨쉬는 생명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힘이었다. 차라리 둘 중 하나였다면 카신처럼 제약 조건이 붙더라도 자신의 고유 마나에게 먹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단장님. 더는 안 되겠어요. 엘의 주변 기운이 격하게 일렁이자 여하단장은 그대로 폭주를 잠재우기 시작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으려는 엘을 여하단장은 가볍게 부축했다.
“단장님 사실 저랑 이렇게 붙고 싶어서 훈련시키는 거죠?”
“⋯ 놓을까?”
“아니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다.”
“더 하고 싶어도 못해요.”
여하단의 업무 시간이 끝나면 수감실에서 여하단장과의 훈련하는 것이 점점 일상이 되어 갔다. 폭주에게 완전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달의 그림자를 사용하더라도 꽤 오래 버틸 수 있게 되었다. 폭주가 끝나더라도 전처럼 넝마가 아닌, 두 다리로 버틸 수 있는 정도로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진짜 싫어했거든요. 이 능력이. 툭하면 쓰러지고, 아프기 싫은데 아프고. 그래서 스스로 저주라 불렀어요. 프시히한테 가져가라고도 했었거든요. 차라리 마르니로 살겠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미숙했던 건데 그때는 그게 진짜 싫었어요. 뭐든 잘하는 애들 사이에서 나도 잘하고 싶었으니까.”
“⋯.”
“지금은 폭주하면 하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체념하며 살고 있었는데 이걸 또 단장님이 잡아 주시네요. 단장님의 다정함이 좋으면서 싫어요. 온전히 제 것이면 몰라도 그게 아니잖아요.”
“나를 좋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단장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욕심이 나요.”
“⋯.”
“저랑 진짜 만나 볼 생각 없어요? 저 진심이에요.”
갑작스럽게 진지해진 엘의 말에 여하단장의 얼굴에는 곤란함이 묻어 있었다.
“네게 나의 이면을 잘 숨긴 모양이다. 날 좋은 사람이라 칭하는 걸 보면.”
“⋯.”
“내가 좋다는 말을 인사처럼 하는 예쁜 아이가 매일 같이 찾아오는데 어찌 싫겠니. 그럼에도 난 네가 나로 인해 상처받을까 걱정돼.”
“단장님.”
“결국 이 말을 하게 만드는구나. 여러모로 대단하고 피곤한 애야. 너.”
“그거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무형(無形), 무색(無色)이던 감정이 너와 함께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모난 내가 아니라 너를 닮아 어여쁜 모양으로 자리 잡더니 계속 나를 건드려. 관계의 끝이 너를 잃는 것이라면 나는 시작하지 않으려 했다. 시작하지 않으면 잃지 않아도 되니까. 이런 내 두려움마저 너에게는 희망이구나.
“엘 아디포라. 난 네게 많은 기회를 줬다. 그 마음을 접을 수 있는 기회. 떠날 수 있는 순간. 나로 인해 괴로운 순간이 찾아올지도 몰라.”
“⋯.”
“그래도 나와 함께 하겠느냐? 이 손 잡으면 못 물러.”
엘의 눈 앞에 커다란 손이 펼쳐졌다. 이 사람은 어떻게 손까지 완벽하지? 이 손을 잡으려고 몇 년을 노력했더라. 기억이라는 게 최초로 존재한 그 순간부터 괴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당신 손을 잡는 게 괴로운 일이라면 난 기꺼이 괴로울 거야. 엘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여하단장의 손을 잡았다. 처음 맞잡은 손. 엘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여하단장을 쳐다봤다. 애정이 담긴 두 눈을 오래 마주할 자신이 없던 엘은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이 훈련은 계속할 거야.”
“단장님이랑 하는 거면 얼마든지요.”
“가자. 데려다 줄게.”
방에 도착한 엘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스스로 뺨을 때리고 꼬집더니 다시 그대로 뒤로 엎어져 히히거리기 시작했다.
“나 단장님이랑 연애한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같은 마음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엘에게는 꿈 꾸던 행복이었다. 이상한 소리까지 내며 웃던 엘은 휴대전화를 들어 여하단장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단장님 잘 자요.]
[내일 봐요. ♡]
휴대전화를 던지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던 엘은 곧 이어 울리는 진동에 화면을 확인하고는 바로 잘 준비를 시작했다. 단장님 보려면 얼른 자야지.
[응, 내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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