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미카] In a perfect world

※허구와 날조 100%, 공식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왕성은 폐허였다. 

한때는 마왕을 주인으로 섬기던 권속 마물들도, 수족처럼 움직이던 고위 마족들도 모두 소멸되거나 살해당한 지 오래였고 이제는 알현실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거대한 왕좌가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로 실내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을 곧게 편 채 그 왕좌에 앉아 있던 마왕이 감고 있던 눈을 조용히 떴다. 

  

"…왜 있지?" 

 

질책도, 화풀이도 아닌 순수한 의문이었다. 

 

"나는 이제 네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애초에 무엇을 해 준 기억도 없다만…." 

"그런 서운한 말 마래이. 내가 있고 싶어가 있는 기다." 

 

왕좌의 발 밑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년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애써 웃는 그 두 눈은 기이하게도 서로 색이 달랐다. 

 

"…너는 인간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야. 이곳에서 나가, 인간들에게 도움을 청하거라. 마왕에게 납치당했다가 겨우 풀려났노라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쳐 나왔다고 하면 그 눈이야 어찌되었든 동정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러니…." 

"무신 말을 그래 하노. 양쪽 눈 색이 다르다고 태어나자마자 인간 마을에서 내다삐린 내를 줍어 준 기 마왕님 아이가. 우예 그래 배은망덕한 짓을 하란 말이고. 암만 마왕님 말이라캐도 내 그 말은 몬 듣는데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주운 것도 아니고, 마왕인 내가 무슨 측은지심이 있어서 선행을 베푼 것도 아니다.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인간들이 꺼려하는 그 두 눈이 내게는 아름다워 보여서였다고 할 수 있겠군." 

 

마왕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너는 여전히 아름답구나. 그 아름다운 얼굴에 상처를 내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너무 멀쩡한 상태로 이곳에서 나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마지막 선물로…." 

"아이다, 안 그래도 된다. 어차피 내는 끝까지 마왕님 곁에 있을 테니께." 

"고집은…." 

 

왕좌 곁 협탁에는 자그마한 소녀 인형이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마왕의 마력이 담겨 있어, 말하고 웃고 울며 때로 마왕의 대변인 노릇도 하던 그 인형도 지금은 잠잠했다. 

 

"응아, 평소 같음 마드 누이가 한 마디 했을 텐데 조용해가 어째 이상하데이." 

"이젠 마드무아젤에게 쏟아 줄 마력도 없다는 것이야…." 

 

힘이란, 권세란 얼마나 보잘것없고 찰나적인가. 

마왕은 눈을 감고 긴 세월을 돌아보았다. 이미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 멸망한 왕국의 유적이 슬프고 스산하여, 그리고 또 아름다워 자신의 손으로 되살리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자리를 잡았더니 어느 샌가 자신은 마왕이라 불리고 있었다. 한때는 마물들뿐만 아니라 인간들조차 자신을 경외하고 떠받들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마왕은 주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름다운 것을 가꾸고 꾸미는 데에만 열중했다. 

그런 마왕이 유일하게 직접 외부에서 성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소년이었다. 

 

"너는 내 마력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니, 다행히 내가 쇠해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제 곧 용사의 검에 멸해질 내 곁에 굳이 남아 있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너까지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이유는 없으니." 

 

마왕이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소년은 오히려 몸을 일으켜 마왕의 무릎 위에 턱을 얹었다. 

 

"마왕님, 내 소원이 하나 있데이." 

"…지금의 내가 이루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함만 꼬옥 안아 주믄 안 되긋나?" 

 

마왕은 허를 찔린 듯 멍해지더니 잠시 소년을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욕심이 없구나." 

"와, 내는 꽤 용기 낸 긴데…." 

 

우물쭈물하는 소년을 보던 마왕은 금세 팔을 뻗어 소년의 마른 몸을 안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직접 몸을 맞대고 밀착한 적은 없었지. 네가 원하던 것이 이토록 사소한 일이었다면, 조금 더 해줄 것을 그랬구나." 

"응아… 내는 지금 최고로 행복하데이. 꼭 마왕님하고 하나가 된 거 같고." 

 

소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내는, 이래 혼자 말짱한 기 싫다. 마왕님 마력이 쪼그라지고 깎여나가삐믄서 마물들이 픽픽 죽어나갈 때 내는 아모렇지도 않은 기 너무 억울한기라, 와 내만 마왕님의 일부가 아이라 이래 개안은기고… 생각하니 속이 상하드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해 이 마왕성 안에는 처음부터 너와 나밖에 없었던 것이야. 성도, 마물도, 마족도, 전부 내게서 태어난 것이니 결국은 이 전부가 나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리 생각하면 너는 내가 아닌 존재였기에 비로소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널 곁에 두었다만, 안타까운 일이야. 그 어떤 말을 다해도 내 마음을 정확히 전달할 수가 없는데, 또 전달할 도구는 늘 불완전한 말뿐이라는 것이." 

"내도 마드 누이처럼 마왕님 마력으로 움직이고, 마왕님이 원하는 말과 행동만 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마왕은 안고 있던 소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당장 이 성에서 나가, 인간 마을로 가거라. 내가 지금 네게 원하는 행동은 그것뿐이라는 것이야." 

"내는 낳아 준 부모한테도 버림받았는데, 인자 마왕님한테도 버림받는 기가?" 

"윽…." 

 

소년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왕은 그 말 앞에서는 언제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운한 표정으로 짐짓 삐죽이는 척하던 소년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 하재이. 어차피 시간도 얼마 없다카이. 이래 소모적으로 투닥거리면서 낭비하기는 내도 싫다." 

"…." 

 

저 멀리 아래층에서 조금씩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키던 병사들도 모두 소멸되고 오로지 마왕 본인의 마력만으로 버티고 있는 성 1층의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왕이 자신을 자꾸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려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끝까지 나와 함께 있어 주겠느냐?" 

"몇 번을 말해야카나. 내는 이 자리서 한 발짝도 안 움직인데이." 

"알겠다." 

 

마왕은 소년을 향해 숙이고 있던 상체를 펴고, 반듯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가 봐도 마왕답고 누가 봐도 가장 위압적인 풍모로 앉은 그 모습에 소년은 활짝 웃었다. 

 

"응아아, 역시 마왕님이 세상에서 젤루 멋지데이." 

"흥, 당연하다는 것이야." 

 

아래층에서 쿵쿵대던 소리가 조용해졌다. 아마 지금쯤 용사 파티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결계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터였다. 반대로 알현실 안은 그야말로 서 있는 것조차 중력을 거스르는 느낌이 들 만큼 묵직한 압박으로 차올랐다. 마왕이 힘을 끌어모아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부담이 느껴지지 않는지, 대담한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왕좌 옆으로 가서 섰다. 

 

"비록 용사에게 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마왕이라 할지언정 최소한의 양식미는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끝까지 와서 도저히 이길 수 없으리라는 공포감을, 위압감을,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악몽을 선사하는 것이 나의 역할. 최소한 그것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리라." 

"하모, 그래야 마왕님이제." 

 

방해물이 사라지자 용사 일행이 아무 거리낌 없이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소리가 차츰 가까워졌다. 마침내 알현실의 웅장한 문이 활짝 열리고 환한 빛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며―

 

 

 

 

 

 

이츠키 슈는 눈을 떴다. 

 

"…?" 

 

기나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머리가 무겁고 눈이 건조했다. 눈을 꿈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컴컴했고, 자신은 익숙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려 앉아 있었다. 

몸을 일으키니 허리도 뻣뻣하고 다리가 묵직했다.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무언가가 나동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응아아… 머꼬…?" 

"카게히라?" 

 

슈에게 몸을 기댄 채 마찬가지로 웅크려 잠들어 있었던 듯한 미카가 실눈을 뜨고 이쪽을 돌아보더니 싱긋 웃었다. 

 

"일어났구마, 스승님." 

"그것은 내가 할 말이다만… 왜 침대에서 자지 않고 여기 있었던 것이지? 내 방 침대를 써도 좋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응아… 캐도 내 이 만리타향까지 스승님 볼라꼬 어렵게 찾아왔는데 스승님이 마감 치느라 끙끙 앓아뿌는 옆에서 우예 드르렁드르렁 잔다 말이고. 내는 침대가 암만 푹신하다캐도 스승님 옆이 더 좋다." 

 

슈는 아틀리에 바닥에 데구루루 누운 채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미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꿈 속의 소년을 떠올렸다. 끝까지 곁에 있겠다고, 멸망도 파멸도 함께하겠다고 말하던 남청색과 호박색의 두 눈동자. 

 

"그래 작업은 다 끝난기가?" 

"음… 새벽 무렵에 완성했다는 것이야." 

 

작품을 완성한 후의 기억이 불현듯 밀려왔다. 슈는 가위로 실을 잘라 마지막 마무리를 끝내고, 반쯤 몽롱해진 상태로 뒤를 돌아보다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미카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미카가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의 이불을 잡아당겨 함께 덮고, 작은 온기에 몸을 기댔다. 

꿈 속에서 자신은 고독한 마왕이었다. 용사는 자신이 마왕이라는 이유만으로 물리치기 위해 칼을 들고 쳐들어왔고, 곁에는 아무도―

아니, 단 한 명만이 있었다. 

 

"카게히라." 

 

몸을 일으켜 창 쪽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던 미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틀리에 안으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눈부신 미카의 미소가 슈를 향했다. 

 

"응? 와 그라노, 스승님?" 

 

그 순간 슈는 저도 모르게 서둘러 미카에게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 얼굴을 어루만졌다. 뺨을 쓸어내리고, 이마를 문지르고, 콧날을 더듬고― 입술을 거쳐 턱으로 내려가는 감촉을 느낀 순간 미카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꽥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요새 진짜 이상하다! 와 틈만 나믄 만지고 더듬고, 내보고 우짜란기고?!" 

"카게히라, 너는 인간이니까…."

"응아?" 

 

자신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슈는 잘 알았다. 늘 공기처럼 곁에 있어도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저 구색 맞추기용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인형이 어느 순간 자아를 가진 대등한 인간이 되어 자신의 마음속에 이만큼이나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눌러앉았듯이―순수한 눈빛으로 자신을 신으로, 왕으로 섬기던 이 소년이 오로지 변심, 그 하나만으로 언젠가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어딘가 멀리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왜냐하면 카게히라 미카는 이츠키 슈와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자신은 미카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곁에 묶어 놓았던 실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새삼스럽지만, 단장(斷腸)의 마음으로. 

 

"인간이니께, 머고? 일단 인간이니께 내는 지금 윽수로 배가 고프데이. 프랑스에서는 아침에 머 묵나?" 

 

뺨을 붉히며 화를 내던 미카는 금세 표정이 휙 바뀌어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생기발랄하게 말했다. 살짝 열린 창 너머로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기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크루아상을 사러 가자, 카게히라. 오믈렛을 굽고, 카푸치노 한 잔을 곁들여서….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가장 필사적이고 추한 행동을 하는 것이야." 

"하하, 스승님 아직도 뱃속에 머 집어넣는 기 거부감 있나? 캐도 묵으야 살제." 

"그래, 카게히라. 함께 배를 채우자, 최대한 발버둥치면서. 가장 구차하게, 가장 꼴사납게…." 

 

필연적으로 노쇠와 죽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조금이라도 너와 함께 오래 살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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