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3-2
*소재 주의
누군가는 말했다. 삶은 공평하다고.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지만, 결국 끝인 죽음은 공평하니, 결국 공평한 것이라고. 오오사키 쇼타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삶은 불공평하다. 불공평하니까, 죽음이라도 공평해야 어느 정도의 수지타산에 부합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오사키 가문, 일본 가부키 명문 가문. 자신이 태어났을 때 집안은 말 그대로 경사였단다. 가부키 가문의 대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장손이 태어났으니. 쇼타로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손에 장난감 대신 가부키 소품을 손에 쥐었고, 방엔 아기자기한 인형 대신 가부키 의상이 걸려있었다. 얼굴을 뽀얗게 칠하고 거울을 본 어느 날, 이게 뭐냐고 울음을 터트리니 어머니는 무릎을 꿇은 상태로 앉으며 그런 자신을 끌어안았다. 엄마 눈에는 가장 멋있고, 예쁜 얼굴인데. 그 말에 쇼타로는 울음을 그치고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눈물에 얼룩덜룩 번진 모습이 참으로 엉망이었다.
여동생이 태어났던 날, 쇼타로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다섯 살 어린 여동생. 오오사키 하나코. 뺨을 쿡 찌르면 꺄르르 웃는 내 동생. 엄하신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숨이 막히는 집 내부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구멍이었을지도 모른다.
열 살 이후로 쇼타로는 더 이상 마음 편하게 울지 못했다. 명문가의 장남은 울면 안 된다. 울어도 몰래 울어야 한다. 이런 가문에 태어난 것도 복이다. 이런 시선이 하나 둘 자신에게 꽂혔기 때문이리라. 물론 자애로운 어머니는 쇼타로에게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울면 어머니가 힘이 들 테니까. 눈물 많은 사내를 낳았다고 분명 화살이 어머니의 가슴에 꽂힐 테니까. 어차피 감정적인 건 옳지 못했다. 감정 표현은 결국 버릇이었고, 버릇은 고칠 수 있었다. 쇼타로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웃었다. 오오사키 가문의 장남은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다고, 그리고 어른스럽다고 칭찬의 소문은 바람을 탔다. 아버지는 어깨를 폈고, 어머니는 행복해 보였다.
화목한 가정은 과연 뭘까. 자신 하나가 잘한다고 해서 화목이 유지되는 건 아니었다. 일본 명문 가문이 다 그렇 듯, 부모님의 결혼도 연애 결혼이 아니었으니까. 어느 정도의 가문이 있고, 정숙하고, 그렇게 이어진 계약 같은 결혼. 아버지를 사랑하세요? 어릴 적 쇼타로가 어머니의 품에서 물었던 적 있었다. 어머니는 기모노 소매로 입술을 가리며 웃었다. 그럼. 쇼타로는 팔을 뻗어 어머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도 어머니를 사랑해요. 하지만 나중엔 깨달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버지도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어머니를 사랑했고,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이후로, 사랑한다는 말이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뱉어내려고 해도 나오지 않고, 삼키려고 해도 절대 삼켜지지 않는.
그때부터 쇼타로의 애정은 모두 동생에게 향했다. 걷다가 넘어지면 뛰어가서 무릎을 털어주며 일으켰고,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있어도 울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울고 싶으면 울어. 쇼타로의 다정한 말에 하나코는 으아앙, 큰 목소리로 울었고 쇼타로는 그런 하나코를 끌어안았다. 너라도 큰 소리로 울어.
쇼타로가 열 두살 되던 해, 남동생이 태어났다. 오오사키 켄토. 쇼타로와 하나코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남동생을 함께 바라봤다. 쇼타로의 유년 시절처럼, 켄토의 방에도 장난감 대신 가부키에 사용되는 소품과 옷이 방 안에 가득 채워졌다. 하나코는 쇼타로의 손을 잡고 물어봤다. 왜 나는 저런 장난감을 안 줘? 쇼타로는 고개를 숙여 하나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건 남자만 할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호기심 많은 하나코는 곧장 '왜?' 라고 되물을 것이다. 쇼타로는 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가부키 하고 싶어?"
"응, 나 하고 싶어."
희망을 심어줘야 할까, 그 희망을 꺾어야 할까. 쇼타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부키 가문의 딸인 경우, 만 16세까지만 가부키 공연의 아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연예인이 될 수도 있었고, 무용계에서 활동을 하거나 아님 일반인으로 살아가는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막상 하나코가 원하는 가부키를 자신은 마음껏 할 수 있는데, 자신은 가부키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분을 찍어 바르고, 연기를 하는 건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니까. 의무적인 행동이었다. 어찌 보면 참, 배부른 생각이었다.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3-2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건, 어떻게 보면 사회적 고립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쇼타로는 이 괴리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가부키보다 공부가 즐거웠다. 얼굴에 분을 바르는 것보다 옆 반에 있는 한국인 학생과, 미국인 학생에게 배우는 외국어가 훨씬 더 즐거웠다. 그들은 쇼타로에게 너 번역가 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었고, 쇼타로는 에이, 내가 무슨... 말을 흐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 말이 가슴 한 부근에 콕 박혀서, 자기 전엔 몰래 한국어, 영어 사전을 보고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기도 했었다. 아마 자신이 이런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언어 쪽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드라마를 본다고 밤을 몇 번 새우니 시차가 뒤틀렸다. 아버지에게 개인 훈련을 받는 동안 영 집중을 하지 못했고, 그게 화근이 될 줄 몰랐으리라. 쇼타로는 한참 동안 망설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가부키보다 공부가 하고 싶어요. 아무리 요즘 시대엔 가부키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해도, 쇼타로의 발언은 집안을 발칵 뒤집었다. 장남이 하지 않는다면 양자를 들이는 경우도 있었고, 오오사키 가문에는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고, 쇼타로는 처음으로 가출을 했다. 새벽에 집을 나가며 엉엉 울었다. 밖에서 우는 건, 그 누구한테도 상처가 되지 않았다. 미용실에 가서 금발로 탈색도 하고, 양키에게 담배를 뻔뻔하게 요구를 하기도 했다.
며칠 뒤 자신을 찾은 건 한국인 친구였다. 금발 잘 어울리네, 가벼운 안부와 함께 부모님이 많이 찾는다는 말이 함께 붙었다. 쇼타로는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매스컴에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으셔서 혹시나 너를 만나면 돌아오라고...."
"안 돌아가고 싶어."
나보고 번역가가 어울린다며. 쇼타로는 울컥, 화를 낸다. 꿈을 심어준 주제에, 이제 돌아가라고? 그러나 한국인 학생의 입에선, 쇼타로가 굴복할 수밖에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동생들이 많이 찾는대.
쇼타로는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욕심으로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이 무게가 다 아직 손가락을 빨고 있는 막내 동생한테 갈 수도 있었다. 엄하신 아버지가 도깨비로 변하는 걸 바라보면서 네 형은 도망쳤으니 너라도 가부키를 이어가라고 압박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강요가 아닌 세상이라고 해도. 혹시나, 혹시나…. 쇼타로는 결국 그날,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뛰어나왔고, 아버지는 왔으니 됐다며 등을 돌렸다. 빌어먹을 가부키 클리셰 (*가부키 가에 태어난 아들이 가부키를 배우는 것을 반대하여 탈선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며 다시 가문으로 복귀하는 것) 였다.
쇼타로는 연애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꿈 꾸는 건 운명적인 사랑이었는데, 집안 특성상 그런 사랑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가족의 반대가 아닌, 가부키 계에서 결혼을 하지 말라는 요청이 들어오는 곳이니. 사랑하지 않으면 결혼을 할 생각도 없었으나, 대를 이어야 하는 일이니 또 부모님을 위해서, 가문을 위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척 하며, 아이를 품에 안을 수도 있었다. 자신과 결혼은 거리가 꽤 멀게 느껴졌으나, 만약 언젠간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녀를 꼭 사랑해야지.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하도록 노력해야지. 쇼타로는 여러 번 마음을 굳게 잡곤 했었다.
집안의 연으로 소개 받은 여자는 자신에게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품은 남자가 있었다고 했다. 역시나 집안 문제였다. 그 남자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쇼타로 씨를 사랑하려고 노력할게요. 여자는 불행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단지 서로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네?"
"그 남자한테 돌아갈 수 있으세요?"
쇼타로의 질문에 그녀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돌아간다고 하면 헤어지겠습니다. 불행한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쇼타로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별통보도 자신이 하는 게 더 편했다. 아직 보수적이고 답답한 가부키 계에선, 여자가 이별 통보를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 그렇게 헤어졌다. 손 한 번 잡지 않고. 서로의 마음만 이해하며.
그렇다고 스킨십 한 번 못해본 동정도 아니었다. 반항심에 머리를 탈색하고 양키에게 담배를 뺏었을 때, 자신을 끌어안는 사람에게 입술을 맞대기도 했다. 먼저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다가오는 입술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 연장선으로 가부키 분장을 지우고 있을 때, 자신의 상대 배우가 대기실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입을 맞추기도 했다. 여성의 역할도 남성이 연극을 하는 특성을 지닌 가부키인지라, 암묵적인 동성애가 꽤 만연했으리라. 실제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몰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너, 이러는 거 아버지가 알면 어떡하려고."
"쇼타로, 너는 항상 고고한 척 굴더라."
피하지도 않으면서. 너도 좋은 거잖아. 다시 한번 입술이 닿는다. 하나도 안 좋고, 싫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괜히 그렇게 말했다가 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신만 입을 다물면, 모두 괜찮아지니까. 허벅지 안쪽이 붙잡힌다. 너는 좀, 고고한 척이라도 하는 게 어때. 쇼타로의 말에 상대 배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만 아는 비밀이잖아. 분장을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입이나 맞추고 있는 자신이 역겨웠다. 싫다는 말도 못하는 헤픈 새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쇼타로에게 애정을 갈구했다. 어깨 끌어안아. 명령조에도 쇼타로는 끝내 그를 끌어안지 않았다.
쇼타로와 달리 하나코는 연애를 일찍 시작했다. 스무 살에 무슨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애냐며, 쇼타로는 무작정 반대를 하고 싶었다. 너는 더 다양한 사랑을 하고 살아야지. 스쳐 지나가는 사랑도 해 보고,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사랑도 해야지. 처음 사귄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는, 그녀에게 그 남자가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냐고 묻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 남자는 흠이 없었다. 준수한 외모, 괜찮은 학력, 그리고 나쁘지 않은 집안. 남자는 쇼타로를 보고 감탄했다. 어떤 의미의 감탄일까. 하나코의 오빠라서? 아님 이 가문의 가부키를 이끌어나갈 차기 당주라서? 흠 하나 없는 남자였지만, 쇼타로는 그가 불쾌했다. 그 남자가 가진 불순하고도 진득한 눈빛이.
쇼타로는 무릎을 꿇고, 하나코에게 물었다. 그를 사랑하니? 사랑스러운 여동생은 수줍게 답했다. 그런 거 같아. 확실하지 않은 답이다. 그 사람 아니면 안 돼. 정도의 답은 나왔어야 했다. 쇼타로는 하나코의 손을 붙잡는다. 확신하냐고,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통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코 쇼타로의 손을 붙잡는다.
"오빠, 더 이상 나한테서 무언가를 뺏어가지 마."
내가 뭘 뺏어갔어? 라는 말도 할 수 없다. 하나코는 가부키를 하지 못했고, 자신은 하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의 눈빛이 불순하다고, 쇼타로는 말했어야 했다. 그래, 그때 차라리 이야기 했으면 일이 이렇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쇼타로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성적으로 굴지 못했다. 하나코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미안해.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게 전부였다.
하나코는 결혼 전제로 만남을 가졌고, 쇼타로는 하나코의 연인을 더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비틀린 웃음. 쇼타로는 그 웃음을 모르는 척 넘겼다. 쇼타로의 인지도는 날이 갈 수록 더 높아졌다. 외국어도 능숙하고, 인성도 좋으며, 실력 또한 빼어나니 누가 싫어하겠는가. 단지 아버지는 쇼타로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항상 웃고 있으면 안 된다고 지적했었다. 너무 웃으면 실없어 보인다고. 너는 다 좋은데 입꼬리가 어머니를 닮아서, 만만해 보인다고. 쇼타로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거울을 보곤 했다. 어렸을 땐 울지 않아서,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했으면서. 하나코와 켄토는 아버지의 굳은 입술을 닮았다. 유일하게 자신만 어머니의 부드러운 입술의 호선을 닮은 것이다. 무표정을 연습하려고 해도, 타고난 부드러움을 숨길 순 없었다. 하나코가 남자였으면.... 그녀는 더 완벽했을 텐데. 아니, 가부키가 애초에 남녀와 상관없는 직업이었다면.
말이 여기서 한 번 끊긴다. 성찬의 손이 쇼타로의 뺨을 감싸 쥐었기 때문이다. 듣기 싫어? 쇼타로의 속삭임에 성찬은 고개를 젓고, 손끝으로 입술의 호선을 천천히 따라 그린다. 간지러워.... 쇼타로가 미간을 좁혀도 성찬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예뻐요."
"입술?"
"응."
쇼타로는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새벽 네 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이제 자야지. 성찬은 고개를 젓는다. 오늘이 아니면 듣지 못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성찬은 식당 칸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며 질문을 던진다. 찬영은 어떻게 알았어요? 그 말에 쇼타로가 유연하게 대꾸한다. 일본에 있을 때 가부키 문화에 관심이 있었대.
오오사키 쇼타로라고 인사를 할 때, 찬영은 그 성을 계속 생각했단다. 그리고 자신이 숙취로 곤히 자고 있을 때, 찬영은 식당 칸에서 만난 쇼타로에게 물었다. 오오사키 쇼타로라면, 가부키... 맞죠? 조심스러운 질문. 쇼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찬영은 곧장 악수를 청하며 쇼타로가 했던 공연을 봤다고 했었다. 멋졌다며, 말하는 모습에 쇼타로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뒷이야기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알았으면 서로 불편했을 테니까.
"성찬이 형은 알아요?"
"으응, 몰라."
인터넷도 안 터지는 이 기차 안에선 아마 쭉 모를 것이다. 가부키, 일본에선 유명하지만 외국에선 관심이 있는 자만 아는 것 아니겠는가. 찬영은 일본 여행에 대해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했다. 제가 센다이에도 가고, 시즈오카에도 갔는데... 찬영의 즐거운 여행기가 이어진다. 쇼타로는 이 기차 안에서 정말 자주 웃었다. 운다고 뭐라고 하는 자 없었고, 웃는다고 뭐라고 하는 자도 없었다. 크게 웃어도 되는 이 공간. 곧 머리를 덜 말린 성찬이 식당 칸으로 들어오더니 쇼타로의 곁에 앉았다. 무언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자 쇼타로는 그가 감기에 걸리면 어떡하나, 신경이 쏠렸다. 불안하게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톡, 톡, 톡, 톡... 두드리는 것까지.
"너만 모르는 게 싫었어?“
“… 네.”
정성찬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 표현을 하는 사람이었다. 쇼타로는 그 점이 좋았다. 인간이 가진 아주 강한 장점. 자신은 유년 시절 진즉 죽여버린 것. 멀리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쇼타로는 머리맡에 있는 조명을 껐다. 아마도 차장일 것이다. 괜히 말 걸면 곤란하잖아. 쇼타로는 작게 속삭였다.
어색한 어둠. 성찬은 쇼타로의 입술을 다시 한번 손끝으로 만진다. 항상 웃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이 입술 때문이구나. 어둠에 점점 익숙해지자,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쇼타로와 시선이 마주친다. 점점 더 다가오는 발걸음. 쇼타로는 몸을 반쯤 기댄 상태로 눈을 감는다. 뜬 눈은 동글동글한데, 감은 눈은 또 야릇하다. 아마 속눈썹이 긴 탓일 것이다. 성찬은 고개를 숙였고, 쇼타로는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을 뻗어 어깨를 끌어안는다.
"성찬, 너 따뜻하다."
"계속 안고 있을래요?"
그럴까. 성찬은 쇼타로의 입꼬리에 천천히 입을 맞춘다. 한 명이 누워있어도 빠듯한 침대에서, 남자 두 명이 몸을 겹치고 반쯤 누워있는 꼴을 들키면 꽤 곤란할 것이다. 기차가 크게 덜컹거리자, 성찬은 쇼타로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싸 쥔다. 차장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 다시 멀어진다. 쇼타로와 성찬은 서로 마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봐요.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웃었다. 억지웃음이 아니었다. 자신이 웃으면,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눈에 보였으니까. 그러자 다시 한번 입꼬리에 입술이 닿는다. 조심스럽게, 도장을 누르는 것처럼.
"흑발도 어울릴 거 같은데."
"나중에 찾아봐."
인터넷에 내 이름 치면 나올 걸. 쇼타로는 큭큭, 소리 내며 웃었다. 성찬은 그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가부키를 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람의 이름을 굳이 검색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이름은 가부키에 연관된 오오사키 쇼타로일 테니. 굳이 여기서 답을 해야 한다면, 나중에 직접 보여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느덧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성찬은 조명, 켤까요?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쇼타로는 고개를 젓는다. 이러고 이야기 하자.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불편할 수 있으니까.
오오사키 하나코의 남자친구는 오오사키 쇼타로를 사랑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문장이겠냐, 싶겠지만 결론적으론 그랬다. 하나코가 없는 장소에서 그는 쇼타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원래 남자를 좋아했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코를 사랑했단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쇼타로, 어차피 가부키 하고 싶지 않잖아요. 그는 또렷하게 말했다. 언제나 그렇듯, 어느 정도 머리가 있는 인간들은 남의 속을 영민하게 보는 무례함이 있었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멀리 도망갈 수 있어. "
그깟 가부키, 평생 안 하게 할 수도 있고. 그는 말을 끝내고 쇼타로의 뺨을 움켜쥐고 입을 맞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이 '그깟' 이라고 말하는 게 싫었다. 자신이 사랑한 여동생을 아무렇지 않게 상처 낼 그 불순함이 역했고, 자신이 기꺼이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예상하고 있는 그 무례함이 지겨웠다. 여기서 더 짜증나는 건, 도망이라는 단어에 아주 찰나, 흔들렸던 자신이었다. 쇼타로는 그의 혀를 씹고, 손에 잡히던 꽃병으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악, 소리와 함께 그가 한 번 쓰러지더니,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그저 모든 걸 지키고 싶었다. 사랑하는 동생들, 그리고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명예와 가부키를.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쇼타로는 바닥에 뿌려진 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해결을 해야 할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쇼타로는 창가에 놓인 도자기를 손에 쥐고 자신의 머리를 후려쳤다. 밖에서 주간지에 폭행을 시도했다고 가문을 긁어내려고 하면, 쌍방이라는 어떤 증거가 필요했으니까. 찝찝한 피가 이마를 타고 흐른다. 더럽게 아플 줄 알았는데,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쇼타로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 살아있구나..... 죽은 게 아니었다. 여태껏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는데. 이제 숨을 쉬는 법을 배운 것 같았다.
머리를 꿰맨 쇼타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가족들은 추궁했지만 쇼타로는 그가 가문에 생채기를 내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는 그런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 하나코는 쇼타로의 상태를 보고 사흘 내내 울었다. 쇼타로는 그런 하나코에게 묻고 싶었다.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나한테 키스했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도 네가 울어줄까?
"켄토, 가부키가 하고 싶어?"
"잘 모르겠어."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쇼타로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게 끝이었다. 이 말로 자유를 얻을 수 있길. 켄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부담감은 지니고 있는 듯했다. 형은, 하고 싶었어? 켄토의 질문에 쇼타로는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답했다. 그냥 하는 거지.
사건은 몇 주 후에 터졌다. 기껏해야 주간지에 폭로나 할 줄 았았는데, 돌아온 건 그의 죽음이었다. 유서엔 쇼타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를 사랑하였고, 그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르나, 결국엔 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상심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코는 눈에 실핏줄이 터질 만큼 분노와 눈물을 쏟았다. '그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르나.' 가 원인이었다. 개자식. 여러 사람을 망치는 것에 도가 트인 인간이었다. 더 이상 자신의 동생은, 자신을 위해 울어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코는 괴성을 내며 분노를 토했고, 쇼타로의 멱살을 잡았다. 왜, 너는 내가 원한 모든 걸 다 뺏어?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쇼타로는 그의 이름을 외우지도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나코는 그 이름을 계속 울부짖으며 자신에게 저주를 쏟아냈다. 용서할 수 없다며. 네가 그를 죽인 거라고.
가장 옳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성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싶어도 모두가 오답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쇼타로는 켄토를 바라보았다. 켄토는 멀리서 배신감에 점철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형이 그럴 수 있냐고. 누나가 가부키를 하고 싶었던 것도 알고, 그를 사랑한 걸 알면서 어떻게 그 따위로 행동할 수 있냐고. 해명을 한다고 해도 자신은 점점 더 허름해질 것이다. 하나코는 결국 개자식이 사랑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죄를 결국 자신이 안고 가는 게 가장 이상적인 정답이었다.
가문의 힘이란, 참으로 무섭고도 강력했다. 그의 죽음은 퍼졌지만 유서의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쇼타로는 무릎을 꿇고 부모님에게 진실을 고했다. 진실을 들은 부모님은 하나코에게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지만 쇼타로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코에겐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원망을 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오빠로서의 마지막 의무였다.
"저는 이 집을 나가려고 합니다."
제가 훼손 시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쇼타로는 결국 도망을 택한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오사키 켄토에게 가부키를 강요하지 말아주세요.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만일, 켄토가 가부키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부디 양자를 들이는 방법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쇼타로는 간곡하게 빌었다. 어머니의 흐느낌과 아버지의 분노한 숨소리. 그냥 자신만 사라지면 모두 끝나는 일이었다. 텅 빈 부재는 곧 상처가 아물 듯, 괜찮아질 것이다. 애초에 화목한 가정이 아니었으니, 어떻게든 돌아갈 것이다.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으나, 부모님은 자식들을 사랑했으므로, 하나코와 켄토에게 무엇 하나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쇼타로의 무례한 부탁이었다. 결국 자신도 그와 다를 것이 없었다. 본질을 알고 이용하는 것.
쇼타로가 집을 나가던 날, 어머니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사라지는 게 아닌, 긴 여행을 하고 오렴. 두툼한 돈 봉투를 쇼타로의 가방 안에 넣어준 후, 목도리를 둘러준다. 너는 이 집 안의 장남이야.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 하나는 변하지 않는단다. 다정한 목소리. 작별 인사를 할 때도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
"하나코와 켄토는 아버지를 닮았는데."
"....."
"전 어머니를 닮았어요."
그래서 좋았어요. 쇼타로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유년 시절 이후, 처음으로 안는 어머니였다. 항상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던 자신이었는데, 이젠 어머니가 자신의 품에 안겨있었다. 잘 지내세요. 건강하고... 하나코와 켄토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렇게 오오사키 쇼타로는 도망쳤다. 그 세계에서 사라졌다. 가문의 입장문엔 몸이 안 좋아서 무기한 휴식을 취한다고 적혀있었다.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부모님의 전언과도 같았다. 열심히 사라진 후, 돌아간다면 뭐가 달라질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지던 도중,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을 했고, 거기서 정성찬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쓸데없이 겁이 많고, 솔직하고, 사랑과 비슷한 감정에 빠진 티를 바보같이 내는. 그리고, 그는 지금 울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뺨에 닿는 눈물이 차가웠다. 자신을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
성찬은 쇼타로의 몫까지 울었다. 울지 못했던 과거부터 현재까지. 아이처럼 우는 모습이 영 눈에 밟혔다. 그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 울어줄까. 너는 예쁜 눈을 가졌으면서, 심성도 착하구나. 쇼타로는 말없이 그의 뺨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축축한 눈물이 손끝에서 번진다.
이름 모를 역에 열차가 다시 한 번 정차한다. 이제 절반 정도 왔을 것이다. 나흘 째,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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