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3-1
입술에 맺히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달리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숨결이 닿는 거리, 성찬은 고개를 다시 한번 숙여 시선을 마주하지만 쇼타로는 그마저도 피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성찬은 쇼타로의 생각이 궁금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그 순하고 다정한 얼굴 뒤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길래 모든 걸 받아주고 있냐고. 모난 마음이 불쑥 튀어오른다. 사랑이라는 감정일지도 모르는 순간에 태연한 얼굴인 그가 밉다. 감히 밉다는 감정을 가져도 되는 걸까? 마음대로 입을 맞춘 것도 모자라서 원망까지 흘리다니. 최악이다.
성찬은 착잡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쇼타로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쥔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머리카락. 술이 깨는 것 같기도, 아님 더 취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차가 크게 흔들릴 때 쇼타로는 작게 속삭였다. 성찬, 너는 나랑 뭘 하고 싶은 거야?
여기서 사랑이라고 대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쇼타로는 성찬의 옷깃을 쥐고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린다. 대답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하지 못할 대답이니. 사랑이라고 해도 지나가는 한 철의 사랑일 수도 있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만난 운명에 바람처럼 흔들리는 잠시의 일탈일 수도 있었다.
"미친 짓은 언제나 환영인데...."
옷깃을 쥐고 있던 쇼타로는, 말을 천천히 이어 나가며 성찬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다. 성찬의 눈은 빠르게 쇼타로의 손끝을 좇는다. 미친 짓 하나만 해도 돼요? 에 대한 대답이 미친 짓은 언제나 환영이라니. 정성찬은 아직 오오사키 쇼타로가 말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도 못했는데. 나는 당신과 뭘 하고 싶은 걸까. 겨우 이틀 만에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대답을 할까. 뜬금없는 답이라며 쾌활하게 웃고 넘어갈 것이다. 아님 부정할 수도 있었다.
성찬은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던 쇼타로의 손목을 급하게 붙잡는다. 다시 한번 마주치는 시선. 급한 자신과 달리 언제나 여유로움을 가지는 그가 벅차다. 원래 미친 짓은 다 반기는 편이에요? 성찬의 질문이 어긋난다. 결국 누구에게나 다 헤프게 구냐는 뜻을 숨기지 못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성찬의 뺨을 때리는 게 좋은 답이었나요? 날카로운 포인트만 콕콕 찌르는 쇼타로의 말투에 성찬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다정함 사이에 칼이 숨겨져 있었다.
"사라지고 싶다고 했죠."
"응."
"여행 아니면 뭐예요?"
"도망."
쇼타로는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힘을 주지만 성찬은 악착같이 손목을 쥐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성찬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신도 훌쩍 떠나고 싶은 이유로 도망친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왜 쇼타로의 도망은 훨씬 더 무거워 보이는 건지. 성찬이 원하는 답은 단순했다. 말하기 싫은 문제라면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하는 것. 자신이 싫다면 싫다고 내색이라도 하는 것. 애매모호하게 행동하지 말고 정확한 표현을 하는 것.
기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린다. 식당 칸은 여전히 요란하지만, 복도는 고요하다. 붙잡는 자와 피하고 싶은 자의 숨결만 섞여 있을 뿐이다.
어두운 머리 색, 새카만 눈동자. 성찬은 눈이 쌓여 있는 이 나라와 참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쇼타로는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피해버린다.
"성찬이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 같아요?"
"...좋은 사람."
어떤 점에서? 쇼타로의 질문이 이어지자 성찬은 대답을 잇지 못한다. 정말 이유를 모르는 걸까? 손을 잡아주고, 다정함이 디폴트로 장착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는 지칭 말고 뭐라고 칭하겠는가. 입을 맞춰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는 사람을 악으로 감히 누가 보겠는가. 성찬은 많고 많은 이유를 한 번에 단축해서 정의한다. 다정하잖아요.
'다정'이라는 단어에 쇼타로는 작게 웃었다. 유감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닌데, 사람 잘못 봤어요. 그러나 쇼타로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다. 왜 그가 사라지고 싶은지 알 수 없었으나, 그 원인을 몰라도 그는 여전히 성찬에겐 좋은 사람이었다. 다정함 속에 칼을 숨겨도, 그 칼로 자신을 찌른다고 해도, 어떠한 연유가 있다고 해도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러니 성찬은 그저, 따라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은 말이라도 생각하며.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웃음이라고 해도, 웃음 하나면 묘한 텐션을 풀기엔 충분했다. 꾹 눌러왔던 취기가 몰려오자 성찬은 몸을 숙여 쇼타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졸리다, 형. 그러자 쇼타로는 성찬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는다. 자러 가자, 이제.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3-1
1월 1일 저녁. 성찬은 숙취에 머리를 붙잡고 몸을 겨우 일으켰다. 분명 쇼타로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졸리다고 중얼거린 이후의 기억이 없다. 그대로 뻗었구나. 아, 미친놈아. 필름이 끊길 것 같아도 두 발로 걸어서 왔어야지. 성찬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쇼타로는 자리에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직 식지 않은 컵 수프와 빵 그리고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을 뿐이다.
[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 마요. ]
필름이 끊긴 후 혹여나 어떤 추태를 부렸을까 걱정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원하는 답이 적혀 있다. 외국인들 눈에는 한글이 그림처럼 보인다고 했다. 그림 같지만 또박또박한 정갈한 글씨. 성찬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곤 쪽지의 향을 몰래 맡는다. 쇼타로의 향이 난다. 마치 종이에 향수를 뿌린 것처럼.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잘 먹겠습니다. 듣는 사람은 없으나 성찬은 괜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본다. 술이 덜 깼는지 여전히 목소리는 볼품없었다. 한동안 술은 적당히 마셔야겠다. 아직 온기가 남은 컵 수프는 부드러웠다. 아, 이제 좀 살겠다. 성찬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오늘은 또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벌써 삼 일째구나. 성찬은 이 지루한 세계가 더 이상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지루한 게 더 좋았을 법도 한데.
"어, 성찬이 형. 잘 잤어요?
"둘이 같이 있었네."
성찬은 대충 샤워를 한 후 식당 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충 말린 머리 덕에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굳이 바싹 말리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말리는 시간도 아까웠고, 그 시간 동안 봐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 어제 못 한 이야기를 마저 끝내고 싶기도 했고.
식당 칸엔 찬영과 쇼타로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있을까. 아하하, 작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좋으면서도 괜히 속이 뒤틀린다. 뒤틀린 표정은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왜냐하면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왜 뒤틀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까.... 성찬은 자연스럽게 쇼타로의 곁에 앉는다. 성찬, 머리 안 말랐어. 쇼타로의 걱정에 성찬은 뭐... 괜찮아요. 웃으며 대꾸한다.
"형, 글쎄 타로 형 일본에서 엄청 대단한 집안......."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아."
신난 표정의 이찬영과 급하게 그의 입을 막으려고 손을 뻗는 오오사키 쇼타로.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쇼타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려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성찬은 고개를 돌려 쇼타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반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이게 싫었던 거다. 속이 뒤틀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우리는 어제 입을 맞췄고, 숨결을 공유했다. 어떠한 관계를 정립하지도 못하고, 그저 미친 행동이라는 통합적인 행위로. 찬영과 쇼타로의 화기애애한 말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성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신경이 곤두선다. 턱을 괸 상태로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톡... 여러 번 두드린다.
톡,톡,톡... 그리고 성찬의 손등 위로 온기가 덮인다. 문득 정신을 차린 성찬이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쇼타로의 손이다. 피곤하면 쉴래요? 여전히 쇼타로의 말은 다정하다. 빈틈없이 다정해서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힘. 자신이 그의 손을 잡지 않으면 그가 자신의 손을 잡는다. 성찬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인다.
곧 열차는 이름 모를 역에 정차한다.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얼마나 많은 역을 정차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역이 남아 있을까. 시차는 한 시간씩 밀리고 있었다. 얼마나 더 과거로 가야 할까. 이곳에 더 있으면 못난 말만 나올 것 같아서, 성찬은 잡힌 손을 놓고 몸을 일으킨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이찬영은 따라오지 않는다. 그저 걱정된다는 눈빛만 보낼 뿐이다.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정성찬을 섭섭하게 만드는 건 따라오지 않고 여전히 이찬영과 마주 보고 있는 오오사키 쇼타로였다.
이십 분의 정차 시간 동안 성찬은 역 근처를 돌아다녔다. 간식과 생필품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과 열차 승객들로 역이 삽시간에 북적거린다. 생각이 좀처럼 비워지지 않는다. 생각을 비우려고 도망왔는데, 꾀를 부리려다가 화를 당한 사람과 뭐가 다르겠는가. 열차가 출발할 때 성찬은 식당 칸으로 가지 않고 8호차로 향했다. 첫날엔 모두 어색한 얼굴이었는데, 삼 일 정도 지났다고 좁은 복도에 익숙한 얼굴이 몇 명 있었다. 이렇게 잠시 익숙해지고, 영원히 헤어지겠지. 성찬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오사키 쇼타로와 자신의 이야기도 이렇게 끝날 것 같아서.
식당 칸에 있을 줄 알았던 쇼타로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문을 열고 시선이 짧게 마주친다. 왔어? 성찬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린다. 말 편하게 해요, 찬영이한테 한 것처럼. 간결하게 답을 하려고 최대한 노력했지만 퉁명스러운 말투를 지울 수 없었다. 하여튼, 미친놈. 이제 삼십 대인데, 하는 꼴은 여전히 애새끼 같다.
"타로."
"응."
"미친 짓이 왜 환영이에요."
남들이 다 당신 예쁘다고 미친 척 입 맞추면 환영이라고 할 거예요? 쏟아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우선 시간의 흐름대로 하나씩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었으니까. 길진 않지만, 짧지도 않은, 그런 상대적인 시간.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쇼타로는 벙찐 표정을 짓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린다. 아, 아하하. 진짜 성찬, 너는.......
나름 진지하게 말을 꺼낸 건데, 그는 눈물이 맺힐 만큼 웃고 있었다. 성찬아, 내가 예쁘니? 끅끅 웃음을 겨우 참으며 쇼타로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예쁘니까 미친 척 입을 한번 맞춘 거 아닌가. 성찬은 참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쇼타로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고마워, 이런 칭찬은 오랜만이라서. 성찬은 그 말에,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계속 만날 수 있다면 예쁘다는 말 따위 평생토록 해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예쁘고, 다정하고, 참 좋은 사람이라고. 혀 안에 칼을 숨겼지만 그 칼에 찔려도 괜찮을 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 칼에 기꺼이 찔리고 싶다고.
"나한테 서운한 거 있지."
"이찬영은 알고...."
"응?"
"나는 모르는 게 많은 거 같아서."
자존심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 자존심을 내세울 시간조차 아까웠다. 더 애타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다. 내 옆에 앉을래? 쇼타로가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자 성찬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서 그의 곁에 앉는다. 가까이 갈 때마다 느껴지는 숨결과 특유의 향. 성찬은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내리기 전에 향수 이름을 물어야겠다. 그리고 하나를 사서, 금발의 이방인이 생각날 때마다 아주 소중히 그 향을 뿌려서 맡아야지. 성찬은 남몰래 불순함 마음을 한 번 더 먹는다.
네가 싫어서 말을 안 한 건 아니고.... 쇼타로는 말끝을 흐린다. 덜컹, 덜컹, 기차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성찬과 쇼타로는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기차가 소등된다. 첫날엔 눈이 쏟아졌고, 어젠 화창했고, 오늘은 또 눈이 질리도록 쏟아진다. 아, 다신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 보드카 몇 잔에 취해서 하루를 쉽게 날려먹은 게, 참 허무하다. 이 납작하게 눌려진, 시간과 공간에서 만난 그가 휘발되는 느낌이다. 그는 여전히 제 곁에 있는데. 내일도 눈이 올까요? 성찬은 질문을 던지고, 쇼타로는 아무 답도 하지 않는다.
의외로 비가 쏟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쇼타로에게 날씨는 아무 상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열렬히 세상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이 시간 동안은 눈이 쏟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눈 속에 갇히는 생각도 한 번쯤 해 볼 수 있을 테니.
"손 잡아도 돼요?"
"무서워?"
"아무래도 옆 칸이...."
아무리 생각해도 저급한 수작이다. 겨우 첫째 날에 생긴 소란이 설마 아직까지 무서울까. 그냥 잡고 싶다고 할걸. 쇼타로는 멍청한 수작도 웃기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성찬의 손등을 한번 보곤 고개를 젓는다. 아직은 안 돼.
갑작스러운 거절에 성찬은 아주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뻔뻔함이냐고 타인이 들으면 비난을 하겠지만, 오오사키 쇼타로라는 인간은 모든 감정을 다 받아줬으니까. '아직'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걸려서 성찬은 그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아니 해야 하는 말이 나올 것이다.
"여행이 아니면 뭐냐고 물었지."
"응."
"나는 도망이라고 답을 했고."
"......."
"나 사실 사람을 죽였어."
그래도 내 손을 잡고 싶어? 쇼타로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구나. 이 금발의 눈부신 인간은 정말 누군가를 죽이고, 도망을 가고 있었구나. 목적지 따위 없을 수도 있었다. 정말 평생을 방황하며 살 수도 있었고, 이 기차에서 내리면 더 이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아니,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이 만남은 한겨울 밤의 꿈처럼, 아주 짧은 꿈처럼 정성찬의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후회 안 해요?"
"안 해."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쇼타로는 작게 속삭인다. 사라지고 싶다는 건, 속죄하고 싶다는 뜻이야. 도망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진 않지만. 쇼타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꼭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슬픔을 말하는 것도, 자신의 죄를 말하는 것도, 감정을 죽인 사람처럼. 덤덤하게. 다정함과 완벽하게 다른 말투로. 어때, 무섭지. 그러니까 나랑 뭘 하고 싶은 마음... 다 없애.
누군가를 죽인 자와 함께 타는 기차 안. 평소였다면 덜덜 떨고도 남을 일이었다. 오오사키 쇼타로가 아니었다면 다음 역에 짐을 다 들고 내려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칠 만큼. 그러나 그는 예외였다. 모든 인간이 한 명씩 두고 산다는 그 예외. 성찬은 그 손을 잡기로 마음먹는다. 다시 한번 마주 잡은 손에 쇼타로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행복한 웃음은 아니었다. 결국 손을 잡는구나. 필연적임에 씁쓸함을 느끼는 웃음.
"내가 성찬, 너를 죽일 수도 있는데."
쇼타로의 입에서 섬뜩한 말이 이어지지만, 성찬은 두려움의 감정을 잠시 잊은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누군가를 죽인 건, 필히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사람을 죽인 자를 왜 사랑했냐고 비난을 한다고 해도. 우선은 현재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타로, 나를 죽이고 싶어요? 이번엔 성찬이 질문한다. 죽이고 싶었으면 손도 잡지 않았을 테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강아지 같은 남자한테 자신의 비밀을 밝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쇼타로는 아니, 평생 살려두고 싶어. 성찬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인다.
고개를 숙일 때, 쇼타로에게서 묵직한 향이 났다. 내가 왜 사라지고 싶냐면....... 한참을 망설이던 쇼타로의 입술이 열린다. 금발을 한 이방인의 과거. 성찬은 그를 끌어안고 싶었다. 웃을 때 가장 아름다운 그가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패배감이 느껴질 정도로 싫었다. 시차가 한 시간 또 한 번 밀린다. 우리는 과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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